나는 가수다

강수지, <시간 속의 향기>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8. 9. 15:28
 

강수지, <시간 속의 향기>


다시는 또 다른 슬픔이란 없는 걸

그대 곁에 있으면

우리 사랑은 영원할 뿐이야


그대 두 눈 바라보면

포근함을 느낄 수 있지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에 할 말을 잃었나봐

그대 미소 나의 마음엔

작은 꿈을 안겨 주었지

이제는 잊을 수 있을 거야.

지나왔던 시간들


그대는 어느 새 내게 살며시 다가와 주었고

나도 모르게 사랑을 느꼈어


예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행복한 건 없겠지

우리 때로는 힘이 들고 외롭지만

다시는 또 다른 슬픔이란 없는 걸

그대 곁에 있으면

우리 사랑은 영원할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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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냘픈 몸매와 인형 같은 외모. 여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바가 아닐까? <보랏빛 향기>, <흩어진 나날들>의 강수지를 대중은 그렇게 기억한다. 남성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여성에게는 시샘의 대상이 되는 이유이다. 물론 이것이 그녀의 가창력에 대한 폄하로 읽혀서는 안 된다. 그녀의 노래는 외모만큼이나 수준 있고 세련된 것들이 많으니까. 그러니 많은 남성에게 그녀가 최고의 신부감으로 가슴을 설레게 한 것은 당연하다. 세련된 음악을 하는 인형 같은 외모의 신부, 생각만 해도 근사하지 않은가? 가냘픈 몸매로 남성의 보호 본능까지 자극하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살다보면 가끔 <시간 속의 향기>의 “예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행복한 건 없겠지”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때가 있다. 곱게 치장을 한 신부가 “예쁘게 잘 살게요”라고 인사말을 건넬 때이다. ‘잘 산다’는 말이 전하는 메시지는 비교적 뚜렷하다. 경제적인 의미이기도 하고, 사회적인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에 비해 “예쁘게 잘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느낌이 참 좋은 말인데, 그 구체적인 속내가 궁금하기도 하다. 강수지의 <시간 속의 향기>를 통해 그 내포적 의미를 간추려내 볼 수 있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상당히 주관적인 설명에 그칠 공산이 크지만, 한번 생각해 볼만하지 않은가?


우선 이 노래에서 그녀가 사랑에 빠진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에 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아름답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아답다’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 때 ‘아’는 ‘사(私)’의 뜻을 지닌다. 즉 ‘나답다’의 뜻인 것이다. 얼른 이해가 안 된다면, “고슴도치도 제 새끼 함함하다”라고 하는 속담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겠다. 누구에게나 제 새끼는 아름답고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말이 다. 사랑을 하면 닮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대 속에 있는 ‘나다움’을 발견하면 얼마나 편안하고 포근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친숙하게 느끼게 되고, 그 친숙함이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겠는가?


<시간 속의 향기>는 그러한 사랑의 생성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대 두 눈을 바라보면,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늘 함께 하는 그이의 눈에 ‘나’가 들어 있지 않겠는가? 이 세상의 누군가가 나와 같이 생각하고, 나와 같이 느끼고, 나와 같은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 행복감의 원천이 되는데 충분할 터이다. 마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인생의 동반자를 얻은 셈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남자 안에 있는 그녀 때문에 든든하고 행복하다. 또 그 남자는 그녀 안에 있는 그 때문에 마음이 놓이고 행복하다. 부모가 제 아이를 보고, 아이 안에 들어 있는 제 모습을 보고 흐뭇해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예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대개 일치하는데, ‘어엿브다’ 즉 ‘불쌍하다’에서 온 말이라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상대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상대가 예쁘게 보인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결국 예쁘게 살아간다는 뜻은 서로가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고 아끼며 살아간다는 뜻이 된다. 서로를 너그럽게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부부로써 아름다운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말이 되는 셈이다. 각기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진 부부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어진 마음이며, 그것의 출발은 상대를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인 것이다. 맹자가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지단야(仁之端也)라고 한 까닭도 비슷하지 않겠는가?


너무 단순화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아름답다’와 ‘예쁘다’의 차이는 이런 것이 아닐까? 상대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나르시시즘(Narcissism)적이다. 자기 자신의 모습에 애착을 갖는 일의 일종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부터 연유한 사랑과 행복은 깨지기 쉽다. 상대가 영원히 내 편이라는 믿음이 깨지면 그 사랑도 흩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자신의 피를 나눠 가진 자식도 자라면, 항상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하물며 부부라면 더 그렇지 않겠는가? 연애 시절에 보여주었던 ‘오직 너뿐’이라는 감정과 태도를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의 열의가 낮아지고 다른 이성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 아니다. ‘너를 위한 나’가 아닌 ‘나를 위한 나’도 있음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한편 ‘예쁘다’는 것은 좀 다르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애착을 갖는 것’처럼, ‘네가 너에게 애착을 갖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나와는 생각이 다르지만, 너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너그러운 마음이 전제가 되는 것이다. 아니 거기에서 나아가서 ‘네가 그럴 수밖에 없음’을 애틋하게 생각하고 감싸주려는 마음이 ‘예쁜 마음’이 아니겠는가? 사실 이런 너그러움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야 체득할 수 있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많은 이들은 큰 사랑의 상처를 입고 난 후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아름다움에 기반을 둔 사랑의 감정을 최대한 유지하려고 노력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그러움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부단한 인격도야를 통해 어진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는 수밖에는. 그래야만 서로를 바라보며 지낸 시간들이 먼 훗날 향기로운 기억으로 남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희정 wizbooks@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