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수다

이승철, <하얀새>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8. 9. 02:41
 

이승철, <하얀새>


사랑한만큼 이별이 슬퍼서

시간에 기대인채 널 그리워하지

오늘도 너를 잊으러 찾아간

저 넓은 하늘에 잠시 널 부탁해

꿈이었을까 널 닮은 하얀새

작은목소리로 내게 노랠하지

라라랄랄라 라라라 라라

다시 만나는 날엔 이 노랠 불러줘


널 사랑하는 날 너를 사랑하던 날

아름다운 시간들 너무 보고싶은데

사랑했던 날들보다 더 널사랑하고 있어

널 볼수 없는 날 사랑할 수 없는 날

아름다웠던 날들 다시 보고싶은데

이젠 난 너와 같은 날 같은 하루를 보고 싶어


오늘만큼은 바람이 불어와

넌 내게 기댄채 하루를 지내줘

꿈이었나봐 널 닮은 하얀새

다시 보고싶어도 어디론가 사라져


저멀리보이는 언덕너머 하늘로

날아가는 너에게 부탁해 워어어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던 날들

그날처럼 널 사랑한다고


널 사랑하는 날 너를 사랑하던 날

아름다운 시간들 너무 보고싶은데

사랑했던 날들보다 더 널 사랑하고 있어

널 볼수 없는 날 사랑할 수 없는 날

아름다웠던 날들 다시 보고싶은데

이제 난 너와 같은 날 같은 하루를 보고싶어~~


11305



이집트 벽화 중에는 미라와 그 위를 나는 새를 그린 그림이 많다. 이 때 새는 영혼의 현현(顯現)을 의미한다. 죽은 자의 영혼이 새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단지 고대인들의 상상 세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혈족이나 연인의 무덤을 갔을 때,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한 마리 새는 이상하게도 사별한 이의 영혼을 연상하게 한다.


김종삼의 <한 마리의 새>도 어머니와 아우의 무덤에서의 같은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새 한 마린 날마다 그맘때/한 나무에서만 지저귀고 있었다.” 그의 시에는 더 이상의 군더더기가 없다. 새를 매개로한 영혼과의 교감이 갖는 경건함을 전하는 데에는 그 단정함이 공감을 이끌어 내는데 차라리 효과적이지 않나 싶다.


이승철의 <하얀새>가 전하는 메시지 역시 비슷하다. 만약 이 노래의 뮤직 비디오가 전하는 사연이, 가수가 전하는 메시지와 근접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뮤직 비디오의 주인공이 안고 서 있는 영정은 이 세상을 떠난 이의 사진이 아닌 고층빌딩 폭파 사고 장면 사진이다. 배경도 기독교 교회 또는 천주교 성당이다. 그리고 얼핏 아랍민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분노하는 장면이 스쳐지나간다. 종교적 대립 또는 민족 분쟁으로 야기된 폭파 사고로 희생된 연인의 죽음을 염두에 둔 것일 터이다. 요컨대, 반전(反戰)의 메시지(“I hope, We believe, No war")를 담고 있음에 분명하다.


같은 발상이되, 시와 가요는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먼저 김종삼의 반전(反戰) 시를 감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는 가수가 아니고 시인인 까닭에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을 여백에 숨겨서 형상화한다. <민간인>이 그 대표적인 예. 전문(全文)을 인용하면 이렇다. “1947년 봄/심야(深夜)/황해도 해주(海州)의 바다/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 용당포(浦)//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짧지만, 거기에 담긴 사연은 단편소설 한편의 분량을 넘어선다. 야음을 틈타 월남하는 배를 탔다가, 경비병에게 발각될 위기에 처해, 결국은 울음을 터뜨린 영아를 깊은 바다에 빠뜨려야만 했던 슬픈 역사가 시의 여백에 깊이 배어 있다. 수심(水深)이 깊은 것이 어디 바다뿐이었겠는가? 스무 해를 지나도록 부모의 가슴 속에 쌓였을 수심(愁心)의 깊이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시인은 그 한을 직접 노래하지 않는다. 다만 심연(深淵), 저 깊은 침묵의 바다, 그 어둠과 같은 여백 속에 그것을 담아낼 뿐이다.


대중가요는 시와 처지가 다르다. 침묵할 수가 없다. 뭔가 소리 내어 노래해야 한다. 서정적 자아는 “오늘도 너를 잊으러 찾아간”다. 그리고 “저 넓은 하늘에 잠시 널 부탁”한다. 그리고 한 마리 새를 본다. “널 닮은 하얀새”를 본다. 그리고 그 하얀새가 작은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 뭘까? 그게 “라라라-랄라 라-라라라-랄라-”이다. 그리고 부탁한다. “다시 만나는 날엔 이 노랠 불러” 달라고.


“라라라-랄라 라-라라라-랄라-”라가 도대체 뭐냐고? 그 뜻이 뭐냐고? 나도 모르고 당신도 모르고 그도 모른다. ‘얄리 얄리 얄라셩’도 그렇지만, 일종의 조흥구는 뜻이 없음이 원칙이 아닌가? 그것을 설명하려고 들면 자꾸 이상한 곳으로 가게 된다. 설득력이 있을 턱이 없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가능하지 않을까? 뭐라고 노래를 하긴 해야 하겠는데, 뭐라고 해야 할 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 그 노래 속에 너와 함께 했던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던 날들을, 그리고 너를 보내고 난 다음의 한없이 슬펐던 날들을, 아니 공기의 정령이 되어 새의 형상으로 나를 찾아온 너를 다시 만난 지금의 황홀함을 담고 싶었을 것이라고. 허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던 지난 날의 기억이 눈물이 되어 앞을 가렸을 텐데-. 김종삼 시인이 무덤가의 가시덤불에도 눈이 부셨던 것처럼.

 

어제처럼

세 개의 가시덤불이 찬연하다.

하나는

어머니의 무덤

하나는

아우의 무덤

 

새 한 마린 날마다 그맘때

한 나무에서만 지저귀고 있었다.

                                                         - (김종삼, <한 마리의 새> 중에서)  


하희정 wizbook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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