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이별

김혜림, <어쩌면 좋아>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7. 28. 04:18
 

김혜림,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나를 나를 어쩌면 좋아.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이러면은 안 된다는 걸.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이런 기분 처음이에요

보고 싶어요. 듣고 싶어요.

자꾸 자꾸 흔들리네요.


그저 후회 없이 가슴속에 묻힌 추억이

마음 줄까말까 사랑될 줄, 나도 몰랐죠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나를 나를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이젠 정말 어쩌면 좋아.

잊을 만하면 생각이 나요.

자꾸 자꾸 눈물이 나요.


그저 후회 없이 가슴속에 묻힌 추억이

마음 줄까말까 사랑될 줄, 나도 몰랐죠

나의 사랑아, 나의 사랑아,

그 약속만 기억할래요.

나의 사랑아 나의 사랑아

그 약속만 기억할래요.

사랑 사랑 나의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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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어쩌면 좋다는 말인가? , <ddd>, <이젠 떠나가 볼까>를 기억하는가? 서구적인 세련된 이미지의 가수 김혜림을 기억하는가? ddd가 뭔가? 장거리 직통 전화 아닌가? 바야흐로 정보 통신 시대 아닌가? 그녀의 감각은 시대를 앞서는 것이었다. 80-90년대 댄스 가요의 한 쪽에 김완선이 있었다면, 또 한편에는 김혜림이 있지 않았던가? 김완선이 마돈나 풍의 섹시한 음악과 춤으로 어필했다면, 김혜림은 세련된 도시 이미지로 어필하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그녀는 가요계 원로인 나애심, <세월이 가면>, <백치 아다다> 등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나애심의 무남독녀가 아닌가? 그녀가 변했다.


나이가 들면서 많은 가수들이 트로트로 전향한 바 있다. 백두산의 멤버였던 유현상이 그랬다. 유현상이 수영 선수 최윤희와 결혼하고 <여자야>를 들고 나왔을 때 충격이었다. 하지만 김혜림의 경우는 좀 다른 충격이다. 여전히 라틴 댄스풍의 리듬이 살아 있는 세미 트로트이긴 하지만, 그녀가 트로트로 전향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러다가 <보랏빛 향기>의 강수지도 세미 트로트를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 아닌 걱정마저 든다. 다만 마음이 놓이는 것은 그녀가 시쳇말로 ‘성인가요가 돈이 된다.’는 풍조에 영합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젠 떠나가 볼까? 그녀의 변신 속으로. 그녀의 변신을 추적해 보는 일은 어쩌면 싱거운 결론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소득은 기대해도 괜찮지 않을까? 시대를 앞서가던 모던 걸(mordern girl)이 어떻게 중년(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싱그러운 미모도 여전한  그녀에게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다. 너그럽게 용서하시라.)의 문턱을 넘는가에 대한 것 말이다. 뭐, 대단한 탐구라고까지야 할 건 없지만, 그럭저럭 재미가 쏠쏠하지 않겠는가?


발견 하나. 반복이 많다. ‘어쩌면 좋아’와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의 차이는 단순히 한번 반복했다는 것뿐일 수 없다. ‘어쩌면 좋아’가 언제 쓰는 말인가? 감정을 겉잡기 어려운 상황에서 토해내는 말이 아닌가? 그것은 말이 아니라 신음에 가까울 때, 진정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그것을 반복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세상의 말을 채집한 것에 가깝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감탄사와 같은 말을 채집해 오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점에서 장윤정의 ‘어머나’나 ‘이따 이따요’와 근본 성격이 같다.


주관적 감정의 표현에서 감정의 채집으로 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이가 들면서 세상 물정에 눈을 떴다는 뜻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기 노래가 아닌 대중의 노래를 하겠다는 자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 감정의 표현이 아닌, 대중의 감정을 대변하는 노래를 부르겠다는 자세 말이다. 성인 가요의 일반적인 경향과 부합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발견 둘. 직설적이다. 돌려 말하지 않고, 곧바로 노래한다. “길고 길었던 많은 날들/나른했던 겨울잠 속의 꿈은/햇살 가득한 거리에서/누군가 만나는 꿈들”(<이젠 떠나가 볼까?>). 매력적인 노랫말이지만, 살만큼 살고 나면 이런 복잡한 가사는 즐겨하지 않는다. ‘사랑이 뭔지, 인생이 뭔지, 너도 알만큼 알고, 나도 알만큼 알지 않느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보고 싶어요. 듣고 싶어요./자꾸 자꾸 흔들리네요.” 이 얼마나 간명하고, 분명한가? 그녀는 이제 돌려 노래하지 않는다. 할 말이 있으면, 서론은 물론 본론도 과감히 빼버리고 결론으로 직행한다. 이 역시 성인 가요의 일반적인 경향과 부합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성인 가요를 지향하면서도 대중을 살짝 긴장하게 만든다. 진짜 말하고 싶은 사연을 살짝 감추는 부분이 있다. “그저 후회 없이 가슴속에 묻힌 추억이/마음 줄까 말까 사랑될 줄, 나도 몰랐죠.”가 그것.  대부분의 성인 가요에서 ‘몰랐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실제로는 모르지 않았으면서도 몰랐다고 노래하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반어법의 일종이라는 것을 노래를 하는 사람도 알고, 노래를 듣는 사람도 알기 때문에, 진짜 거짓말이 아님은 물론이다.


하지만, 김혜림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다. 정말 몰랐던 것 같다. ‘후회 없이 가슴 속에 묻힌 추억’은 그저 항간(巷間)에서 채집해온 말이 아니라,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녀가 아직 젊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좀더 냉정하게 말하면 그녀는 중년(불혹의 나이에 가깝다는 뜻에서)에 접어든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몸이나 마음이나 아직 젊은 것이다. 90년대 그녀의 노래에 매혹을 느꼈던 30-40대가 그녀의 변신에 뜨거운 관심을 갖는 이유 중의 하나도 이것과 관련되지 않을까? 나는 가끔 그렇게 생각한다.


하희정, wizbooks@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