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철, <사랑의 이름표>
이름표를 붙혀 내 가슴에 확실한 사랑의 도장을 찍어
이세상 끝까지 나만 사랑한다면 확실하게 붙잡아
놓치면 깨어지는 유리알같은 사랑은 아픔인거야
정주고 마음주고 사랑도주고 이제는 더이상
남남일수 없자나 너만 사랑하는 내 가슴에
이름표를 붙혀줘
이름표를 붙혀 내 가슴에 확실한 사랑의 도장을 찍어
이세상 끝까지 함께갈수 있다면 확실하게 붙잡아
놓치고 후회하는 어리석음은 쓰라린 눈물인거야
정주고 마음주고 사랑도주고 이제는더 이상
남남일수 없자나
너만 사랑하는 내 가슴에 이름표를 붙혀줘
<전국노래자랑>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일요일 정오. 편하게 늦잠을 자다, 점심으로 아침밥을 대신하려고 할 무렵, 습관적으로 텔레비전 리모컨을 누른다. 그런데 딱히 매력적인 프로그램이 없다. 케이블 채널을 이리 저리 돌리다가, 결국 <전국노래자랑>에 채널을 고정하게 된다. 쏟아지는 햇살도 부담스러운 일요일 정오, 그만큼 맘 편히 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흔하지 않다. 기성가수 못잖은, 동네 노래방에 가면 한 주름 잡을 성 싶은 실력파도 없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은 출연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옆집 아저씨, 옆집 아줌마 같은 출연자들인데, 그냥 즐겁다.
현철, 자칭인지 세간의 평이 그런지 모르지만 ‘트로트계의 황제’라는 현철은 아마도 전국노래장의 초대가수로 제격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 말이 현철의 노래가 촌스럽다든가, 지방 관객에나 어울린다는 평가는 절대 아니다. 10년을 넘게 대중의 인기를 끌고,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그를 두고 그런 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절대로 온당한 것이 아니다. 대중의 눈은 의외로 까다롭고, 의외로 수준이 높다. 그만한 인기를 누렸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세대가 다른 까닭에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더라도, 하나의 스타일을 만든 가수는 그 자체만으로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맞아, 현철의 노래는 신세대하고는 잘 안 어울려. 중년 내지는 장년 취향이야 라고.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현철과 <전국노래자랑>이 썩 잘 어울린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유랑 극단적 체질. 바로 그것이다. 사실 전국노래자랑은 유랑 극단과 매우 흡사하다. 그것은 현대적이기보다 근대적이며, 오늘날 근대적인 무대가 그 나름의 인기를 누린다면, 그것은 아련한 추억을 상품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철의 노래는 트로트이기 이전에, 개화기에 태동하여 해방 이후까지 인기를 끌었던 근대적인 가요 무대를 보여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에 발표한 노래에도 그런 흔적이 꽤 남아 있다. ‘사랑의 이름표를 붙여 달라’고 한다든지, ‘내 가슴에 확실한 도장을 찍어 달라’고 하는 발상부터가 그렇다. 이러한 비유는 죽은 은유(dead metaphor)라고 한다. 듣는 사람이 곧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일상화하여 신선함이나 생명력을 잃어버린 은유 말이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비유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비유가 등장하지 않는 가사에서는 더하면 덜지 덜하지 않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떠오르는 당신 모습 피할 길이 없어라.’를 보라, 어떤가? 참신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지 않은가? 상투적인 비유나 표현은 아무리 적절해 보일지라도, 듣는 사람에게서 어떤 감정의 움직임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예술가가 상투적인 발상과 표현을 꺼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렇다면 현철은 왜 그런 상투적인 비유를 곧잘 쓰는 것일까? 각도를 달리해서 생각해 보라. 유랑극단 무대와 같은 다소 어수선한 무대에서 고도의 참신한 비유가 먹힐 수가 있겠는가? 동동주 한잔 걸치고 어깨춤을 추는 그런 분위기에서 말이다. 얼토당토 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언제 들어본 것 같은 쉬운 비유라야 한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쉽게 공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랄 수 있는 인상적인 모멘트가 필요하다. 현철 역시 그 점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노래에는 한 큐에 상투성을 진정성으로 상승시키는 질적 변환에 해당하는 대목이 첨가되어 있다. 그의 노래의 설득력과 매력이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 그의 노래가 근대적인 듯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현대적일 수 있는 특질도 바로 거기에서 온다.
예컨대 그는 ‘놓치면 깨어지는 유리알 같은 사랑’이라는 표현을 통해, 공감을 마음의 영역으로까지 심화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사랑은 나비라고 하지 않고, ‘얄미운’ 나비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나아가 <봉선화 연정>에서 그는 손대면 터질 것만 같은 그대가 아닌 ‘톡’하고 터질 것 같다고 노래한다. 다만 <사랑의 이름표>는 그 감각적인 표현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르긴 모르겠으되, 그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속으로는 ‘놓치면 툭 깨어지는’, ‘사랑의 도장을 꽝 찍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 감각을 살리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이 ‘톡’, ‘툭’, ‘꽝’은 그가 개척한 고유의 영역이라고 해도 될 것이며, 그의 후배 가수들 중에도 이를 따라하려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아직까지 현철만큼 그것을 감각적으로 잘 살려 부른 가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희정 wizbook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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