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이별

김학래, <새장 속의 사랑은 싫어>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6. 29. 05:33
 

김학래, <새장 속의 사랑은 싫어>


창가에 얼룩져 흐르는

빗방울 소리 없이,

벽에 기대 서 있는

내 눈 속에 고였구나.

만날 때는 기쁘고

모든 것이 낭만이었지만,

그것은 우리의 이별의 시작이었어.


차디찬 방안에서 우리들의

지난 일을 생각하니

마음 약한 눈물만 자꾸자꾸 쏟아지고.

이제는 잊혀져간 지난날의

약속들을 생각하니

그대의 사랑이란 새장 속의 환상이었어.


그대, 이젠 이별의 시간

변명 속에 떠나야겠지.

내게 향한 그대 시선

답답하기에

새장 속의 사랑은 싫어, 싫어, 싫어.


창가에 얼룩져 흐르는

빗방울 소리 없이

벽에 기대 서 있는

내 눈 속에 고였구나.

만날 때는 기쁘고

모든 것이 낭만이었지만

그것은 우리의 이별의 시작이었어.



고대의 그림에 흔히 등장하는 동물은 새이다.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도 없지 않지만, 대개는 상상이 가미되어 변형된 모양을 하고 있다. 전설적인 새 시무르그도 그렇지만, 그것은 흔히 육상의 동물과 합쳐지면서 신비한 능력을 가진 새로 그려진다. 사자에 날개가 달렸다든지, 뱀과 새가 합쳐지면서 기묘한 모양을 이룬다든지 하는 따위가 그런 예이다. 무엇보다 흔히 확인되는 것은 새가 날개를 가진 영혼의 상징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육체에 깃든 영혼의 상징이 바로 새인 것이다.


특히 무덤 속의 벽화에 그려진 기묘한 모양의 새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마도 거기에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와 날아간다는 믿음이 깔려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새는 육체를 빠져나와 영원불멸하는 영혼의 상징인 경우가 많다. 드라마 <주몽>에 등장하여 잘 알려진 ‘삼족오’도 비슷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하늘과 의사소통하는 존재의 상징인 새와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영웅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현대의 회화에서 새는 그렇게 흔히 등장하는 동물이 아니다.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고대의 그림에서와 같은 심오한 상징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시나 노랫말에서는 어떨까? 비교적 흔히 등장하는데, 특이한 것은 참새와 독수리 등과 같이 구체적인 종을 나타내는 말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흔히 날아다니는 조류를 뭉뚱그려서 아주 막연하게 ‘새’로 등장한다. 따라서 구체적인 묘사는 애초부터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하다. 새를 많이 노래한 천상병의 시에서도 그냥 ‘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래의 경우에도 변진섭의 ‘새들처럼’에서와 같이 그냥 ‘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새’가 노래에 등장하는 것은 구체적인 상황을 구성하는 하나의 배경 요소가 아니라, 하나의 상징으로 제시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새’는 자유 또는 자유롭고 순수한 영혼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김학래의 <새장 속의 사랑은 싫어>의 경우는 ‘새’가 아닌 ‘새장’이 등장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제목처럼 ‘새장 속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새’를 직접 노래하고 있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현대인에게 있어서 ‘새’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더 잘 확인할 수 있지는 않을까?


우선 그는 ‘만날 때는 기쁘고 모든 것이 낭만이었’다고 노래한다. 창공을 나는 새의 자유로운 비상(飛上), 만약 사랑의 기쁨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그런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사랑, 그것이 순수한 두 영혼의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서로가 합쳐지면서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꿈꾸는 것이 낭만(浪漫)이다. 하지만 꿈은 꿈인 뿐이고, 낭만은 낭만일 뿐이다.

 

현실 속에서 낭만적인 사랑은 무참히 상처받기 십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적인 장애가 사랑을 망가뜨리는 근본 원인은 아니라는 점이다. 솔직히 장애의 문턱이 높으면 높을수록 사랑은 강해지면 강해지지 약해지지 않는 법 아닌가? 오히려 사랑의 진정한 장애물은 내적인 데에 있는 것이 보통 아닌가? 사랑을 통해 영혼이 자유로워지기보다 갑갑함을 느끼게 되는 것 말이다. 뭐라 딱 잘라 말하기 어렵지만, 사랑이 짙어갈 수록 새가 새장에 갇힌 것 같은 답답함이 더해만 가는 상황 말이다. 이를 두고 김학래는 새장 속에서 볼 때 새장 밖에만 나가면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그것은 환상이었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김학래는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너무 일찍 알아버린 것이다. 사랑이 환상이라는 것을. 하지만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가 없다. 겉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가슴 깊이 넘쳐나는 슬픔의 눈물을 가눌 길이 없다. 죽지 않고서는 영혼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현실 속의 사랑을 통해서 영혼의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환상이었음을 알고, 가슴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또 이를 어쩌랴! 그것이 인간의 한계인 것을.


하희정 wizbook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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