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이별

전유나, <너를 사랑하고도>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7. 25. 06:15
 

전유나, <너를 사랑하고도>



너를 사랑하고도 늘 외로운 나는,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메이고,

어두운 방구석에 꼬마 인형처럼,

멍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만 보네.


너를 처음 보았던 그 느낌 그대로

내 가슴 속에 머물길 원했었지만,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었었기에

난 너의 마음 가까이 갈 수 없었네.


저 산 하늘 노을은 항상 나의 창에

붉은 입술을 부딪쳐서 검게 멍들고,

멀어지는 그대와 나의 슬픈 사랑을

초라한 모습 감추며 돌아서는데.


이젠 더 이상 슬픔은 없어.

너의 마음을 이젠 알아.

사랑했다는 그 말 난 싫어.

마지막까지 웃음을 보여줘.


저 산 하늘 노을은 항상 나의 창에

붉은 입술을 부딪쳐서 검게 멍들고,

멀어지는 그대와 나의 슬픈 사랑을

초라한 모습 감추며 돌아서는데.


이젠 더 이상 슬픔은 없어.

너의 마음을 이젠 알아.

사랑했다는 그 말 난 싫어.

마지막까지 웃음을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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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역사가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인류가 발견한 중요한 문화 활동 중의 하나인 여행에는 어느새 하나의 전형이 생겨버렸다. 자연의 승경을 제외하면, 한 결 같이 사람들은 신전, 사찰, 궁궐, 전적지 등을 돌아보는 것으로 여행을 채운다. 역사도 비슷하다. 작은 것들은 생략하고 큰 것들만 기록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내밀함이 결여되어 있다. 인간적인 체취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인형의 경우는 어떤가? 미술사를 보더라도 인형은 흔히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 또한 국왕과 함께 순장된 병사 정도일 뿐이다. 혹 비교적 근세의 유물인 인형을 보더라도 우리는 그 예술성에만 집중할 뿐, 그 인형과 인형의 주인이 나누었을 내밀한 대화는 잘 떠올리지 않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뒤로 미루고 껍데기만을 감상한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영혼의 떨림이 동반되는 내밀한 독백, 그것의 상대자 역할을 했을 인형인데도 말이다.


아마도 그 내면의 독백은 역사가 다뤄야할 공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고, 철저히 사적인 것이라는 편견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문학의 경우는 사적인 감정을 상대적으로 자세히 다룬다. 그러나 그 마저도 어느 정도 공적인 체에 걸러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마도 대중가요가 갖는 힘은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철저히 사적인 감정의 영역을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한 장르로 보이기 때문이다.


전유나의 <너를 사랑하고도>는 전적으로 사적인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우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관계의 정서이기 때문에, 많은 부분 사적이라 할지라도, 또 한편으로는 공적이다. 그렇지만, 사랑을 하지만 왜 그런지 외롭고, 가눌 수 없는 슬픔을 느끼는 것은 철저히 혼자만의 내밀한 감정이 아닐 수 없다. 어둑어둑 해질 무렵 창밖으로 어스름한 빛이 새어들고, 그녀의 방에는 꼬마 인형이 쓰러져 있다. 멍한 눈을 들어 창밖을 보는 표정으로. 그녀 역시 바로 그런 표정과 심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노래하는 감정의 결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인형이 내면적 대화의 훌륭한 상대자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은 검게 멍들어 있다. 저녁노을이 창에 와서 붉은 입술을 부딪쳐서 검게 멍든 것처럼. 멍든 사랑의 상처를 이렇게 아름답게 노래한 경우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한 답은 서로 다른 사랑을 꿈꾸었기 때문이란다. 이 부분은 차라리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너무 설명적이고 논리적이어서 사적인 감정의 영역을 벗어나 공적인 영역으로 나가버리려는 위태로움 때문이다. 감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진실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구절도 그러한 한계를 보이는 것일까? 일견 그래 보인다. 이제 더 이상 슬픔은 없다든가, 너의 마음을 이제는 안다든가, 사랑했다는 말은 싫으니 마지막까지 웃음을 보여주라는 것이 그렇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이제 더 이상 슬픔은 없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슬퍼하고 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 너의 마음을 이젠 안다고 했지만, 사실은 끝내 알지 못하겠다고 노래하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마지막까지 웃음을 보이며, 사랑했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하고 있지만, 사랑했다는 말이라도 해 달라고 애원하는 듯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노래의 진실은 행간에 감추어져 있고, 그로 인해 이 노래는 여백의 미학이 살아 있다. 살아있는 여백 속에 진실이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전유나의 떨리는 목소리가 사실은 그 진실의 울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랑의 경우는 항상, 아니 내면의 독백의 경우는 항상 떨림을 동반할 때, 가장 진실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하희정 wizbooks@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