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과 추억

이미자, <동백 아가씨>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7. 26. 03:25
 

이미자, <동백 아가씨>


헤일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동백꽃잎에 새겨진사연

말못할 그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아가씨

가신님은 그언제 그어느날에

외로운 동백꽃 찾아오려나

 

10926



퀴즈 하나. ‘동백 아가씨’를 두 글자로 줄이면? 춘희(椿姬) 정도 아닐까? 뒤마의 소설이자 베르디 오페라인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가 바로 ‘춘희’로 번역되는데, 일본식 한자어라는 느낌이 강하다. 쉬운 우리말로 풀면 동백 아가씨쯤이 될 것이다. 그런데 ‘춘희’는 썩 좋은 뉘앙스를 주는 번역어가 아니다. 웃음을 파는 일을 하는 여자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아가씨’도 좀 그렇다. 역시 술집 여자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요즘 젊은 여자들은 ‘아가씨’라는 호칭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가씨’가 ‘미망인(未亡人)-아직 죽지 않은 여자’와 같이 성불평등을 조장하는 단어라는 주장은 근거가 미약하다. 어원을 따지면 ‘아기의 씨를 가진 여자’라는 뜻이 아니냐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어원이 그렇다면 수긍할 여지도 없지 않다. 하지만, ‘아기(어린아이)+씨(氏)’라는 어원 설명도 있고 한 것을 보면, 성불평등 운운하는 것은 좀 지나친 것이 아닌가 싶다. 양성 평등은 중요한 문제지만, 막무가내식의 억지 논리는 안 된다.


왜, 갑자기 성불평등 운운하는 이야기를 꺼내는지 궁금한 이도 많겠다. 정말 노파심이겠지만, ‘아가씨’라는 노래 제목 때문에 방송 불가와 같은 규제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사실 <동백 아가씨>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던 적이 있다. 군부가 집권하던 시절이라 ‘붉은’이 공산주의를 연상시켜서 금지곡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하지만 뚜렷한 근거는 없어 보인다. 엄청난 인기를 누린 탓에 경쟁 음반사에서 방해 공작을 한 결과라고도 하지만, 이 역시 뚜렷한 증거는 없다. 아무튼 어처구니없이 험한 꼴 당했던 사연이 있는 이 노래가 또 다시 남녀 차별이라는 애먼 누명을 쓰는 일은 없어야겠다.


이 노래가 많은 수난을 겪고도 국민가요로 남게 된 것에는 무엇보다 국민가수 이미자의 가창력이 한 몫 한다. 하지만, 동백꽃이라는 소재도 역시 한 몫 했을 터. 그 부분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동백꽃은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꽃이 아니다. 동백꽃 군락으로 유명한 선운사가 있는 고창이나 그 아래 지방인 남해안 근처(섬지방의 동백나무 군락이 특히 아름답다)로 가야 볼 수 있다. 또 한 겨울 눈 속에서 피는 것도 인상적인데, 한번 보면 그 매력에 푹 빠져버린다.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시심(詩心)이 이는데, 실제로 많은 시인이 동백꽃을 노래한 바 있다.


‘동백(冬柏)’이라는 이름으로 동인 활동을 한 시인 정훈(丁薰)은 ‘차가울수록 사모치는 정화(情火)’라고 노래하였다. 차갑고 흰 눈속에 피는 붉은 동백의 아름다움에 주목한 것이겠다. 미당 서정주는 '선운사 동구'에서 동백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라고 노래한 바 있다. 동백꽃에 얽힌 추억을 노래한 것이겠으되, ‘목이 쉬어’라는 구절이 왠지 눈이 간다. 아마도 멍이 든 것 같기도 하고, 시든 것 같기도 한 동백꽃에서 구성진 육자배기를 떠올린 것이 아닌가 싶다.


동백꽃과 사랑을 관련시켜 노래한 것도 적지 않은데, 최영미의 <선운사에서>가 최근 것으로는 백미(白眉)이다. 그녀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 <서른, 잔치는 끝났다>도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선운사에서>의 오른편에 설 작품은 아닌 성 싶다. 길지 않으니 전문을 인용하면 이렇다. “꽃이/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아주 잠깐이더군.//그대가 처음/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잊는 것 또한 그렇게/순간이면 좋겠네.//멀리서 웃는 그대여/산 넘어가는 그대여//꽃이/지는 건 쉬어도/잊는 건 한참이더군./영영 한참이더군.”


동백나무숲에 가 본 사람이면, 최영미 시인이 무엇에서 발상을 얻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동백꽃을 보면 눈 속에서도 붉음을 잃지 않아, 쉽게 시들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수북이 떨어져 있는 꽃을 보면 생각이 바뀐다. 전혀 시들지 않은 채, 누가 와서 꺾어버린 것처럼 목이 툭 부러진 모양으로 떨어져 버린다. 그 장면은 아름다운 슬픔이라는 말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처연하기 그지없다. 혹시 동백나무의 꿀과 열매를 먹고 사는 동박새의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짓거리(동백나무가 동박새 덕에 수분을 하니 전혀 근거 없는 말이지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피는 것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은 바로 이 장면을 묘사한 것이어서, 공감을 얻지 않나 싶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에도 바로 이러한 동백꽃의 처연한 이미지가 훌륭하게 살아 있다. ‘빨갛게 멍이 들었다’는 구절이 떨어진 동백꽃의 형상을 염두에 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동백꽃은 어떻게 졌을까?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졌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보면 정훈, 서정주, 최영미로 이어지는 시적 발상과 정서가 이 짧은 구절 속에 잘도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움’은 ‘정화(情火)’의 다른 표현이며, ‘지쳐서’는 ‘목이 쉬었다’와 유사한 발상이며, ‘멍’은 ‘아주 잠깐 만에’ 떨어진 결과로 인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내 가슴 도려낸다’는 표현도 조매화인 동백꽃의 생리를 잘 반영한 것이 아닌가 싶다. 가슴살처럼 쑥 내신 샛노란 수술을 파먹는 동박새를 연상하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평범해 보이는 노랫말이지만, 이래저래 절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래임에 분명하다.


하희정 wizbook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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