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과 추억

조용필, <단발머리>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7. 21. 04:15
 

조용필, <단발머리>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 주던 그 소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그 소녀가 보고 싶을까


비에 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

반짝이던 눈망울이

내 마음에 되살아나네.

 

내 마음 외로워 질 때면

그 날을 생각하고

그 날이 그리워 질 때면

꿈길을 헤매는데

우~ 못 잊을 그리움 남기고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10773


70-80년대 대중가요의 서정성을 이야기할 때, 작사가 박건호를 빼 놓고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박인희의 <모닥불>, 이용의 <잊혀진 계절>, 나미의 <슬픈 인연>을 언급하는 정도로도 충분할 성 싶다. 조용필의 <단발머리>도 역시 그의 작품. 그는 원래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인데, 시도 시(詩)지만, 그가 쓴 노랫말이 말 그대로 시 작품이다. 어지간한 시보다 서정성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시를 정의하는 일은 어렵지만, 근본적으로 주관성의 예술, 순간성의 예술, 기억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이 셋의 연결점 어디인가에 존재하는 예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주관적으로 기억되는 순간적 감각을 리듬이 있는 언어로 표현한 것이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인상적인 기억이 현재의 순간적인 감각으로 아름답고 향기롭게 되살아날 때, 시가 생성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시가 전하는 진실은 지극히 심미적인 것이다.

 

<단발머리>에서 기억의 중심 대상은 ‘그 소녀’이다. ‘그 소녀’는 물론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단발머리를 곱게 빗었다.’는 정도를 빼면, 어디도 그 소녀에 대한 구체적 사실을 확인할 구석이 없다. 한편 인상과 관련된 것은 더 세밀하게 제시된다. 곱게 빗은 머리는 비에 젖은 풀잎과 같았고, 눈망울은 반짝였으니 말이다. 아마도 작사가 아니 시인은 비에 젖은 풀잎을 보면, 아니 외로울 때면, 문득 ‘그 소녀’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어쩌면 아니 분명히 꿈길에서도 그 소녀를 만났을 것이다.

 

아름답고 향기롭다. 그 소녀가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이 아니다. 그 소녀를 떠올리는 마음이 아름답고 향기롭다. 실제의 소녀가 객관적으로 그러했는지 아닌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내 마음 속에 되살아나는 단발머리를 곱게 빗은 그 소녀가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이다. 그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이 되살아날 때마다, 시인은 세월이 밉다. 그 소녀를 데려간 세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건대 세월이 데려간 것이 그 소녀뿐이겠는가, 시인의 젊음을 빼앗아간 것도 사실은 세월이다.

 

하지만 세월이 밉기만 한 것일까? 과거의 기억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만든 것도 세월이 아닌가 말이다. 과거가 아름다운 것은 과거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못 잊을 그리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너무나 매정한 것일까? 어느 날 보석상 앞을 지나다가 백제금동대향로를 본 적이 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 한 참 동안이나 들여다보았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하나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마음을 접었다. 화려하긴 했지만, 천년의 시간이 거기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금동향로만 그렇겠는가? ‘그 소녀’가, ‘그 소녀’의 단발머리가 비에 젖은 풀잎처럼 아름다운 것은 많은 세월이 흘러 내 마음 속에서 되살아나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희정 wizbook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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