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과 추억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8. 9. 07:47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이 다시 못 올 곳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11306


계몽주의, 상징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리얼리즘(경향문학), 모더니즘(주지주의), 민족주의, 계급주의, 행동주의, 심리주의 등등. 개화기 이후 한국 현대 문학사는 서구 문예 사조의 부침의 역사였다. 불과 20-30년 사이에 온갖 서구 문예 사조가 도입되고, 확산되다가, 쇠퇴했다는 식의 설명. 현대 문학 논의에도 각종 문예 사조에서 연유한 개념이 난무했다. 지금 생각하면 꽤나 어처구니없지만, 문학예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기성세대 중에는 그렇게 배운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중 가장 까다로운 것은 낭만주의와 리얼리즘이 아니었나 싶다. 낭만주의가 더 심했다. 꽤나 전문적인 낭만주의 이론서를 섭렵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오리무중(五里霧中)일수밖에 없었다. 각 이론가가 저마다의 낭만주의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낭만주의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무모하고 우매할 일일 뿐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이론적 탐색 끝에 결과적으로 얻은 것은 낭만주의가 계몽주의의 반동으로 생겨난 개념이라는 것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세계를 경험으로 파악하고 합리성을 중시하는 것이 계몽주의라면, 낭만주의는 이성보다는 감성이 우월하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낭만주의의 핵심적 특질은 뭘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짧은 소견으로는 감성우월주의와 동경(憧憬)이 아닌가 싶다. 감성우월주의란 경험적인 세계 인식보다는 직관적인 세계 인식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말한다. 또 동경이란 시간적인 의미에서는 복고적인 취향을, 공간적인 의미에서는 이국취향, 내면적으로는 사랑에의 동경을 말한다. 아무래도 소설과 달리 서정시는 리얼리즘보다는 낭만주의에 가깝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는 제목도 그렇거니와, 대중가요에 있어 낭만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복고주의(復古主義)이다. 노래는 시작하자마자 곧장 듣는 이를 궂은 비 내리는 날 색소폰 연주를 들으며 도라지 위스키를 마시던 옛날 다방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그 다방에는 새빨간 립스틱으로 제 나름대로는 잔뜩 멋을 부린 마담이 있다. 60-70년대 다방 문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노랫말이거니와, 경험을 공유하는 세대라면 쉽게 공감하고 짙은 향수에 젖게 될 것이다. 특히 궂은비라는 배경은 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실마리 역할을 한다. 청자나 거북선 담배를 피운다는 설정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공중파 방송을 타야한다는 부담감에 자기 검열을 하지 않았나 싶다.


이제 중년의 나이에 들었을 공감 세대에게는 어떻게 보면 칙칙해 보이기도 하는 다방 풍경은 소중한 옛 추억이 아닐 수 없다. 그들에게는 그 우중충하고 낡은 다방에서의 추억도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다방에서의 추억과 첫사랑 그 소녀와의 추억이 등가(等價)로 기억될 정도이다. 또 그것은 공간을 넓혀서 연락선이 오가던 선창가의 추억과도 맞먹는다. 합리적인 이성, 상식에 따를 때, 어떻게 첫사랑의 추억과 실없는 농담이나 던지던 다방 마담의 추억이 등가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감성의 차원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도 또한 진실이 아니겠는가?


다음으로 이 노래가 이국취향(exoticism)인가는 다소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물론 테이크 아웃(=요리나 음식물을 사가지고 돌아가는 방식)형 커피전문점이 성업 중인 요즘의 세태에 비추어본다면야, 이 노래의 다방은 시골 다방 아니 그것보다도 훨씬 구식이다. 하지만 당시의 감각으로 보면 어떨까? 이 노래의 등장하는 ‘위스키, 색소폰, 립스틱, 마담’ 등을 이국적 소재로 볼 수는 없을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느 정도 그런 측면도 없지 않다는 생각이다. 궂은비 내리는 날 호박전 붙여먹는 것과 다방에 들러 도라지 위스키를 마시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 노래에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색소폰이 김치켓의 <검은 상처의 블루스> 정도를 연주하고 있었다면, 그럴싸하지 않은가? 다방 분위기는 어느 정도 이국적일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면적 동경으로서의 사랑의 문제. 가장 예민한 문제이다. ‘첫사랑 그 소녀’ 때문이 아니다. ‘실연의 달콤함’이라는 표현 때문이다. 실연의 추억도 달콤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다. 가슴 설레는 첫사랑도 있었고, 연락선 선창가에서 누군가를 기다려도 보았다. 하지만 이 모두가 다 가버린 세월이고, 그 소녀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늙어가고 있다. 다방, 선창가, 그 소녀.  이 모두가 잃어버린 것이고, 다시 못 올 것일 뿐인 것이다. 이를 두고 최백호는 낭만이라고 했다. 낭만(浪漫).


 

하희정 wizbook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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