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과 추억

GOD, <어머님께>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7. 27. 06:00
 

GOD, <어머님께>

          

어머니 보고 싶어요.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하는 외식 몇 번 한 적이 없었고, 일터에 나가신 어머니 집에 없으면 언제나 혼자서 끓여먹었던 라면. 그러다 라면이 너무 지겨워서 (맛있는 것 좀 먹자고 대들었었어. 그러자 어머님이 마지못해 꺼내신 숨겨두신 비상금으로 시켜주신 자장면 하나에 너무나 행복했었어. 하지만 어머님은 왠지 드시질 않았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야이 야아아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후회하고 눈물도 흘리고

야 아이 야아아 그렇게 살아가고 너무나 아프고 하지만 다시 웃고(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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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아는 바와 같이 GOD가 불러서 큰 인기를 누렸던 곡인데, 박진영이 만든 것이다. 박진영류라는 말이 허락된다면, 이 곡 역시 빠뜨릴 수 없는 대표곡일 것이다. 엄정화의 <초대>나 박지윤의 <성인식>과 같은 섹시 코드의 가요도 박진영의 작품이다. 썩 내켜하지 않는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도 많은 줄 안다. 하지만 <어머님께>와 같은 곡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박진영의 노래 전체를 취향이 다르다고 그저 내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바로 이런 노래가 박진영의 진면목(眞面目)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맘에 드는 곡이다. 내가 고등학교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이 노래를 소개한 것도, 대입 전국모의고사에 이 노래를 출제한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곡을 떠나 노랫말만으로도 문학적 가치가 여느 시에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돌려 말할 것도 없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하는 부분은 압권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유소년 시절의 추억(追憶)과 어머니 그리고 궁핍(窮乏). 얼른 그리고 깊이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 터이니,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오히려 쑥스럽다. 차라리 이와 비슷한 정서를 아름답게 노래한 시 몇 편을 소개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먼저 박재삼의 <추억에서>. “진주 남강 맑다 해도/오명 가명/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 같이/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생선을 머리에 이고 나가 팔아서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렸던 어머니. 그것을 추억하는 시인의 한(恨)이 절절하다. ‘울엄매’는 ‘우리엄마’라는 뜻인데, 왜 ‘울’에서 ‘울다’라는 동사가 떠올려질까? 달빛 받은 옹기들은 또 어떤가? 말없이 글썽이는 시인의 슬픈 눈이 떠올려지는 것이 마음이 참으로 아프다. 젖은 달빛은 또 얼마나 처량한가? 가슴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칼날 같은 달빛에 가슴이 에이지 않은 이가 누가 있으랴?


다음, 기형도의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금간 창 틈으로 고요한 빗소리/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아주 먼 옛날/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열무를 이고 나가 팔아서 자식을 먹여 살렸던 어머니. 어두워진 빈 방에 혼자 남아 엄마를 기다리며 무서움에 떠는 어린 아이. 그 훌쩍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 어디 시인뿐이겠는가?


마지막으로 함민복의 <눈물은 왜 짠가>.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운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 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국물을 그만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 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며 눈물을 땀인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한편의 아름다운 동화를 연상시킨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땀인양 만들어 놓고 물수건으로 닦는 장면이 슬프다. 어디 진한 것이 설렁탕 국물만이겠는가?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흐르는 애틋한 정이 더 진하면 진했지 덜하지 않다.


‘우리나라 개그맨은 죄다 고시원 출신?’이라는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고시 공부하다 개그맨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궁핍한 처지 때문에, 고시원에 머물고, 조금 나아지면 반지하 셋방으로 좀 나아지면 옥탑방으로 옮겨야 했던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웃음 속에 배어 있는 가난의 추억들이 역설적으로 그들의 개그를 빛나게 한다는 기사였다.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GOD의 <어머님께>도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어둡지 않고 밝으며, 탁하지 않고 맑다. 가난한 삶이 사람을 어둡게 만들기도 하지만, 긍정적인 면에서 본다면 가난은 세상을 맑고 투명한 눈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져다주기도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희정 wizbook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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