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과 추억

노사연, <돌고 돌아가는 길>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5. 3. 01:27

 노사연, <돌고 돌아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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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넘어넘어 돌고돌아
   그 뫼에 오르려니
          
   그 뫼는 어드메뇨
    내발만 돌고도네
          
 강 건너건너 흘러흘러
   그 물에 적시려니
          
   그 물은 어드메뇨
    내몸만 흘러흘러@
          
  발만 돌아 발밑에는
   동그라미 수북하고
          
  몸 흘러도 이내몸은
   그 안에서 흘렀네
          
   동그라미 돌더라도
    아니가면 어이해
          
  그물 좋고 그뫼 좋아
   어이해도 가야겠네@
          
   산 넘어 넘어 넘어
  돌고 돌아가는 길에
          
   뱅글뱅글 돌더라도
   어이 아니 돌소냐
          
   흘러흘러 세월가듯
  내 푸름도 한때인걸
          
   돌더라도 가야겠네
   내꿈 찾아가야겠네@
          
 산 넘어넘어 돌고돌아
   그 뫼에 오르려니
          
   그 뫼는 어드메뇨
    내발만 돌고도네
          
 강 건너건너 흘러흘러
   그 물에 적시려니
          
   그 물은 어드메뇨
    내몸만 흘러흘러

 

민요적인 리듬에 한국적인 정서를 얹은 시를 민요조 서정시라 한다. 김소월과 박목월의 시가 대표적이다. 리듬과 소재가 전통적이라고 해서 정서마저 그런 것은 아니다. 정서는 오히려 근대적인 고독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 모던하기까지 하다. 전통적인 호흡이기에 읽기 편하고, 근대적인 고독의 정서를 다뤄 현대인에게도 공감을 얻는 것이다.

 

두 시인의 시는 방랑을 모티브로 한 것이 많으며, 구체적으로 말하면 길이라는 대상과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결합한 것이 많다. 노사연의 ‘돌고 돌아가는 길’(1978 MBC 대학가요제 금상)에서는 소월과 목월이라는 두 거장의 숨결이 느껴진다. 그것은 ‘길, 방랑, 그리움, 민요조인 리듬’ 등 여러 면에서 확인된다. 리듬의 측면에서 전통에 바탕을 두되, 정서의 측면에서는 현대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의도 역시 그렇다. 시의 상상력과 대중가요의 상상력이 행복하게 결합된 예임에 분명하다.

 

물론 전통을 수용하되, 섬세하게 차별화하는 전략이 작동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핵심은 소월과 목월이 공유하는 ‘길’의 시학을 ‘돌다’의 시학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노랫말에 사용된 ‘돌다’는 원래 반드시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타동사이다. 그런데 ‘돌다’는 타동사로 쓰여도 자동사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라는 점이 중요하다. ‘돌고 돌아’에서 ‘돌고’는 타동사이지만, ‘돌아’는 어쩐지 자동사처럼 느껴진다. ‘내 발만 돌고 도네’까지 이르면 그 인상은 한층 강화된다.

 

타동사로서의 ‘돌다’와 자동사로서의 ‘돌다’는 겉모양은 비슷할지 몰라도, 그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크다. 앞의 것은 의지의 영역에, 뒤의 것은 운명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분서주하는 삶은 의지의 영역이고, 방랑은 운명의 영역이 아니겠는가? 동분서주하는 삶이건 방랑하는 삶이건 고달프지만, 방랑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생각하기에 따라 담담하게 수용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돌다’의 발전된 형태가 ‘구르다’이다. 생각해 보건대, 앞의 것은 발의 영역이고, 뒤의 것은 몸의 영역이다. ‘발만 돌아’가 발전하여 ‘몸 굴러도’로 발전되고 있음이 그 증거이며, 동시에 그것은 방랑이 확실하게 운명의 영역으로 귀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생(生)은 방랑 그 자체임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체념의 세계관을 노래한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성급한 것이다. 운명의 수용을 체념이 아닌 신명으로 발전시키는 힘, 그것이 진정한 동양적 세계관의 의의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만 유독 덧없는 것이라면, 운명의 수용은 체념으로 발전되기 쉽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라. 인간의 삶만 유독 덧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세상 만물의 이치가 그런 것이다. 이백(李白)이 ‘춘야원도리원서’에서 노래한 바와 같이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 세월은 영원한 나그네인 것이다.

 

‘돌고 돌아가는 길’은 처음에는 유장하게 시작된다. 그러나 중반에 이르면 흥겨운 리듬으로 바뀐다. 노사연은 방랑이 체념이 아닌 신명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느릿하게 돌고 돌다가 아예 ‘뱅글뱅글’ 돌아버리는 것이다.

 

하희정/문학평론가〉-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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