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근, <솔아 솔아 푸른 솔아-백제․6>
부르네 물억새 마다 엉키던
아우의 피들 무심히 씻겨간
빈 나루터, 물이 풀려도
찢어진 무명베 곁에서 봄은 멀고
기다림은 철없이 꽃으로 피는지
주저앉아 우는 누이들
옷고름 풀고 이름을 부르네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어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부르네. 장마비 울다 가는
삼년 묵정밭 드리는 호밋날마다
아우의 얼굴 끌려 나오고
늦바람이나 머물다 갔는지
수수가 익어도 서럽던 가을, 에미야
시월비 어두운 산허리 따라
넘치는 그리움으로 강물 저어가네.
만나겠네. 엉겅퀴 몹쓸 땅에
살아서 가다가 가다가
허기들면 솔닢 씹다가
쌓이는 들잠 죽창으로 찌르다가
네가 묶인 곳, 아우야
창살 아래 또 한 세상이 묶여도
가겠네, 다시
만나겠네.
<83,6>
노동 문학의 시대. 현대문학사에서 1980년대는 그렇게 기억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80년대는 노동시의 시대이며, 거기에는 순수 서정을 노래한 시들과는 다른 노동 현장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그러나 아무리 거친 노동 현장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해도, 서정시는 서정시이고, 시인은 시인인 법이다. 박영근 시의 내면에는 순정한 열정이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이 작품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이 시는 안치환(‘노찾사’의 멤버였음)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와 그것을 리메이크한 MC 스나이퍼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떠올리게 한다. 노래가 더 잘 알려진 까닭에 선후 관계를 착각하기 쉽고, 이 노래가 안치환의 작사 작곡으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님의 눈물이/가슴속에 사무쳐 우는 갈라진 이 세상에/민중의 넋이 주인되는 참 세상 자유 위하여/ⓐ시퍼렇게 쑥물 들어도 강물 저어 가리라/ⓑ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창살아래 내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안치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우선 위의 노래 중 ⓑ는 이 시의 제2연을 그대로 옮긴 것이고, ⓒ는 제4연의 표현을 약간 변형한 것이다. ⓐ의 경우는 다소 복잡한데, 우선 ‘강물 저어가리라’는 이 시의 제3연 마지막 행의 표현을 따 온 것이 분명하다. ‘시퍼렇게 쑥물 들어도’는 ‘어머니의 눈물’과 묶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은 박영근의 이 시집에 실린 다른 작품인 <고향의 말․4>의 “네 어미, 옷고름마다 끊는 눈물로/시퍼런 쑥물을 들이고”와 발상과 표현면에서 거의 유사하다. 요컨대 가수 안치환이 박영근의 시를 창의적으로 변용하여 만든 노래가 민중가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인 것이다.
이 시의 시적 상황 설정은 두 장면을 적절히 오버랩하여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먼저 백제 연작은 갑오농민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던 전라도 고부[현재의 부안, 정읍 일원] 들녘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렇다면 이 시에 등장하는 강은 동진강일 가능성이 높다. 이 지역을 시적 배경으로 삼은 것은 시인의 고향이 부안이라는 점도 고려되었겠지만, 1980년대의 노동 운동과 감오농민전쟁의 이념이 반외세 민중주의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의 시적 상황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갑오농민전쟁의 상황으로 읽기보다는 그 혁명 정신이 살아 숨쉬는 땅에서 살아가는 1980년대 민중의 삶을 노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즉 이 시에는 이 두 장면이 복합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제1연은 죽은 아우를 그리워하며 슬피 우는 누이들이 모습을 강가에 핀 꽃에 비유하고 있다. 아마도 시인은 강가의 들녘에서 밭을 매는 누이들의 모습에서, 갑오농민전쟁에서 형제를 잃고 슬퍼했을 누이의 모습을, 또 노동운동을 하다가 잡혀가 매운 고문을 당하고 있는 아우를 그리워하는 누이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봄이 오고 물이 풀리는 빈 나루터에 핀 꽃이 마치 그 그리움 끝에 핀 것인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혁명의 세월을 지나 유유히 흐르는 강물도 무심하지만, 시대의 아픔이 절망하다시피 한 누이의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강가에 핀 꽃들도 무심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서 빈 나루터와 이별 또는 사별로 인한 슬픔의 정서를 결합시킨 것은 강 나루터가 지니는 전통적인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2연의 노래는 그 누이의 마음을 상상하여 노래한 것이기도 하고, 그 누이들을 보고 난 시적 화자의 마음을 노래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솔’은 어떤 시대적 아픔에도 굴하지 않는 민중의 의지를 표상하며, ‘샛바람’은 외세, 지배 세력, 지배 계급에 의한 억압을 상징한다. 뒤에 덧붙여진 전라도 민요 농부가의 후렴구는 건강한 민중의 생명력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이 없는 후렴구이지만, 그 내용은 앞선 두 행의 내용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제3연의 ‘부르네’는 제2연의 농부를 이어받는 표현이다. 이렇게 연을 바꿔 다음 연의 모두(冒頭)에 제시한 것은 의도적으로 보인다. 제3연에서 누이는 호미질을 하고 있는데, 장마에 질퍽해진 묵정밭을 일굴 때마다, 아우의 모습이 떠올라 서럽기 그지없다. 노동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수수 열매가 익은 것을 보아도 서럽기는 마찬가지다. 그 그리움과 서러움의 눈물이 시월비가 되고, 강물이 되어 흐르는 것이다. 서러움 속에서도 노동을 하는 누이가 마치 속으로 노동요를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음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시어 배치인 것이다.
제4연은 현실 극복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죽은 이도 결국은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는 것처럼, 지금은 창살에 묶인 이도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됨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의 ‘만남’은 단순히 아우와 누이의 만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아가는 세상, 그런 세상의 도래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그런 세상을 앞당겨야 한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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