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과 추억

배호, <꿈꾸는 백마강>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5. 3. 01:18

배호의 ‘꿈꾸는 백마강’

 

 
물새가 우는 금강의 달밤을 노래한 가요시(歌謠詩) ‘꿈꾸는 백마강’은 세 개의 서글픈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낙화암에 얽힌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이야기가 그 첫째이다. 둘째 이야기는 이 노래가 발표될 당시의 시대 상황과 관련된다. 이 노래가 발표된 것은 1940년, 일제의 군국주의가 극에 달했던 때이다. 이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백제의 멸망을 떠올리게 하는 가사의 내용이 일제하에서 신음하는 우리 민족의 암울한 현실과 잘 어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금지곡으로 묶이고 만다.

 

그러나 어인 일인가? 해방 이후 이 노래에 또 하나의 서글픈 이야기가 보태진다. ‘알뜰한 당신’ ‘바다의 교향시’ ‘세상은 요지경’ ‘무정천리’ ‘목포는 항구다’ ‘선창’ 등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노래이다. 그런데 이 노래의 작사가가 조명암이라는 사실은 최근에야 알려지게 되었다. 시인 조명암은 1928년 금강산 건봉사에서 출가하여 만해 한용운의 가르침을 받았고, 1930년대부터 시와 극작 활동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1948년 월북하여 남한에서는 금기의 인물이 되고만 것이다.

 

특히 조명암은 북한에서 교육문화성 부상(副相), 평양가무단 단장을 역임하는 등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시점에서 이루어진 월북 문인들에 대한 해금 조치에서도 제외된다. 그래서 10여년 전까지도 그의 이름은 거론하기 거북한 대상이었고, 그의 노래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작사가로 등재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최근에야 남한에 남은 시인의 유일한 혈육인 딸이 저작자를 바로잡고 권리를 회복하기에 이른 것이다. 민족 분단으로 인해 한동안 자신의 작품에 이름도 내걸지 못했던 슬픈 사연이 있는 작품인 것이다.

 

노랫말을 살펴보면 일반적인 서정시와 달리 가요시라서 가지게 되는 몇 가지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시적 화자의 정서를 자연물에 의탁하여 표현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서정시와는 달리 시적 정서를 간접적으로 환기하는 상황 묘사는 최소화하여 제시되고 있다. 즉 일반적인 서정시라면 물새가 우는 백마강 달밤의 정경이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었음직하다. 그러나 이 가요시에서는 그것이 직접 언급되고 있을 뿐, 시적 정황에 대한 묘사는 최소화해 제시된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여기서 물새가 우는 것은 객관적인 상황 묘사로 볼 수도 있지만, 물새가 마치 잊어버린 옛날을 애달퍼하면 운다는 것은 순전히 시적 화자의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시적 화자는 낙화암을 보면서 백제가 멸망할 때 스스로 죽음을 택한 아리따운 궁녀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고 애달픈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그리고 백마강의 뱃사공에게 배를 저으라고 재촉한다. 갑자기 뱃사공을 제시하는 것은 일종의 시상 전환에 해당하며, 시상은 낙화암 그늘에서 울고 싶은 마음으로 귀결된다.

 

제2절은 제1절의 정서를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지만, 표현상으로는 약간의 변주가 가미되어 있다. 제5행의 경우는 제1절의 첫행이 그러한 것처럼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애절함의 정서를 환기한다. 낙화암 절벽에 매달리듯 세워진 고란사의 종소리는 제1행에서 제시한 백마강 달밤의 물새우는 소리를 좀 더 심화시켜서 애절함을 환기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시적 화자는 마음 속 깊이 애달픈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 것이다. 제7행에서는 제3행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시상 전환이 이루어진다. 시적 화자의 내부로만 향하던 애절함이, ‘누구라 알리요’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외부의 대상을 향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말 그대로 아무도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 겉으로는 그리 표현되었지만, 낙화암에서의 애절함이 시적 화자 자신만의 정서는 아닐 것임을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마지막 행의 ‘깨어진 달빛’은 그 함축적 의미가 깊고 울림이 만만치 않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낙화암에서 애달퍼하는 시적 화자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시적 표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망국의 현실에 처한 민족의 심정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희정|문학평론가 wizbook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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