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과 추억

양희은, <하얀목련>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4. 27. 14:04

양희은, <하얀목련>

 

 

하얀 목련이 필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봄비내린 거리마다 슬픈 그대 뒷모습

 

하얀 눈이 내리던 어느날 우리 따스한 기억들
언제까지 내 사랑이어라 내사랑이어라


거리엔 다정한 연인들 혼자서 걷는 외로운 나
아름다운 사랑얘기를 잊을수 있을까


그대 떠난 봄처럼 다시 목련은 피어나고
아픈가슴 빈자리엔 하얀 목련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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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은 봄의 전령사다. 하얀 목련이 피면, 사람들은 완연한 봄기운을 느낀다. 양희은의 ‘하얀 목련’은 초봄의 정감을 섬세하게 살린 노래다. 노랫말이 하얀 목련만큼이나 산뜻하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단정(端整)의 시학’이라고 할만하다.

생각해 보건대, 단정함은 단순함과는 다른 것이다. 속으로는 넘치는 감정의 분출이 있으되, 겉으로는 자제된 모습이 진정한 단정함이다. 속과 겉이 모두 가지런한 것은 단순함일 뿐이다. 이 점에서 단정의 시학은 감정 절제의 시학과 근본이 통하는 것이다.

이 노래가 감정을 노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감정을 노래하되, 직접적으로 노래하지 않고, 응결시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노래를 듣는 사람과 노래하는 사람은 감정이 응결된 구체적 대상을 통해 감정을 간접적으로 공유한다. 감정의 직접적인 표현과는 다른 방식이며, 이 노래의 세련됨의 8할은 바로 이 수사적 전략으로부터 온다.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봄비 내린 거리마다 슬픈 그대 뒷모습”이 원래의 노랫말이다. 이를 “하얀 목련이 필 때면 그 사람 생각이 나고/봄비 내린 거리에선 그대 모습 슬프구나.” 정도로 바꿔보자. 내용의 차이는 별것이 아니다. 쉽게 말하면, 봄이면 임이 생각나고 그리움에 젖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느낌은 전혀 다르다. 앞의 것에서는 감정을 절제하는 세련됨이 느껴지지만, 뒤의 것에서는 하소연에 가까운 감정의 표출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그것은 감정 표현에 해당하는 서술어를 수식어로 처리하여 대상 속에 스며들게 하였는가, 아니면 직접 표현하였는가의 차이다.

또 하나는 현재와 과거(기억)를 교차시키는 내용 구조도 중요하다. ‘하얀 목련이 필 때’는 현재(엄밀히 말하면 계절은 순환하는 것이니 그것은 ‘지속’에 해당한다)이고, ‘슬픈 그대 뒷모습’은 기억(지금도 마음속에 남아있다는 것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지속’의 반대인 ‘단절’이다)이다. 현재와 기억의 대응 구조는 ‘하얀 눈이 내리던 어느 날’과 ‘언제까지 내 사랑’에서도 반복된다. 현장의 감정을 노래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재의 대상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과거의 기억이라는 형태로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감정의 간접화를 통한 절제된 표출이라는 전략의 일종일 것이다.

대립적 상황 제시를 통한 감정의 표출 방식은 간과할 수 없는 이점이 있다. 그것은 감정 표현이 자연스럽게 균형 감각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거리엔 다정한 연인들, 혼자서 걷는 외로운 맘”에서 ‘다정’과 ‘외로움’이 대응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직설적으로 외로움을 토로하는 것보다 얼마나 안정감이 드는가?

이런 방식은 예로부터 시적인 감정 표현의 상용 수단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두보의 ‘절구’는 이렇게 시작된다. “강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산이 푸르니 꽃빛이 불타는 듯하다.” 푸른색과 흰색, 푸른색과 붉은색의 대응이 선명하다. 이러한 대응 구조가 시적인 안정감을 가져오는 것이며, 그것은 ‘하얀 목련’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희정 <문학평론가|wizbook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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