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옥분, <재회>
잊었단 말인가 나를 타오르던 눈동자를
잊었단 말인가 그때 일을 아름다운 기억을
사랑을 하면서도 우리 만나지도 못하고
서로 헤어진 채로 우리 이렇게 살아왔건만
싸늘히 식은 찻잔 무표정한 그대 얼굴
보고파 지샌 밤이 나 얼마나 많았는데
헤어져야 하는가 다시 아픔은 접어 둔 채로
떠나가야 하는가 다시 나만 홀로 남겨두고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는 가수이자 시인이다. 시집을 낸 가수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가 작사한 노랫말은 곧바로 서정시라서 하는 말이다. 양희은의 ‘한계령’이 그렇고, 남궁옥분의 ‘재회’가 그렇다. ‘한계령’이 수준 높은 한편의 서정시라는 데는 크게 이견이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재회’는 어떤가? 많은 사람이 ‘한계령’이 더 시적이라고 하겠지만, ‘재회’ 역시 그에 못지않다.
사실 ‘한계령’처럼 자연을 소재로 하여, 시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자연의 섭리와 인간사를 대비시키는 것만으로도 시적 상상력이 자연스럽게 발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사, 그중에서도 만남과 이별을 노래한 노랫말로 수준 높은 서정성을 획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연인의 만남과 이별에 문학적인 수사(修辭)를 가미하여, 문학성을 더하려는 노력은 많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문학성이 아니다. 그것은 질 낮은 비유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재회’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예컨대, “사랑을 하면서도 우린/만나지도 못하고/서로 헤어진 채로 우린/이렇게 살아왔건만”에는 어떤 수사적 표현도 없다. 다만 사실을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을 뿐이다. 문장을 독해하는 수준에서만 말한다면, 운문이 아니라 산문이다. 하지만 남궁옥분의 목소리로 직접 들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사적 표현이 가미된 부분을 찾는다면, ‘타오르던 눈동자’나 ‘싸늘히 식은 찻잔/무표정한 그대 얼굴’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상투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평범한 표현이다. 그런데도 이 노랫말이 심금을 울리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단순히 그것을 성숙한 창법을 구사하는 가수 남궁옥분의 무르익은 가창력 때문이라고만 하면 성이 차지 않는다.
이런 것도 한 이유가 아닐까? 근본적으로 이 노래는 감정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호흡에서 매력이 발산된다. 열정으로 타오르던 사랑의 시기를 지나, 그 불씨만을 겨우 가슴속에 묻어 두고 관조하는 재회의 시기에 불리는 노래다. 그 담담한 감정의 흐름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는 데 매력이 있는 것이다.
담담하다고 하지만, 가라앉는 흐름만이 있을 수 없다. 가볍게 달궈졌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거듭한다. ‘재회’의 심리가 그러한 것이다. 작사가는 우선 가라앉는 심리상태를 젖은 듯한 음상을 지닌 음절로 처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달궈지는 심리상태는 꺼풀이 이는 듯한 음상 또는 딱딱한 음상을 지닌 음절로 처리하고 있다.
제1연의 ‘잊었단 말인가’에 대응되는 ‘타오르던’이 그렇고, ‘나를’에 대응되는 ‘그때 일을’이 그렇다. 또 제2연의 ‘사랑을 하면서도’에 대응되는 ‘서로 헤어진 채로’가 그렇고, 제4연의 ‘헤어져야 하는가’에 대응되는 ‘아픔은 접어둔 채로’가 그렇다. 앞의 것들은 가라앉는 심리를 반영하고, 뒤의 것들은 조용히 일어나는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 두 심리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면서, 잔잔하게 일렁이는 파도와도 같은 감정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만 제3연은 이와 다른 흐름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기-승-전-결의 ‘전(轉)’에 해당하는 까닭에 변화를 준 것으로 보인다. “싸늘히 식은 찻잔/무표정한 그대 얼굴/보고파 지샌 밤이/나 얼마나 많았는데”에서 ‘싸늘히’와 ‘무표정한’ 그리고 ‘보고파 지샌’과 ‘얼마나 많았는데’는 다 같이 메마르게 일어나는 심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하희정 <문학평론가|wizbook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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