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이별

강진 <화장을 고치는 여자>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4. 16. 07:30
 

강진 <화장을 지우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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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속에 사라진 그 사랑을 못 잊어

오늘도 거울앞에 서 있는 여인

행여 만날 그 사람이 몰라 볼까봐

가슴이 두근 거리네


**핑크빛 입술을 그리다가

뜨거웠던 추억에

젖어 버렸나

곱게그린 두 눈가에

이슬 맺히네

사랑을 잃어버린 그녀

하얀티슈에 묻어나는 추억

화장을 지우는 여자**


바람처럼 사라진 그 사랑을 못잊어

오늘도 거울앞에 서 있는 여인

행여 만날 그 사람이 몰라 볼까봐

가슴이 두근 거리네


왁스 <화장을 고치고>


우연히 날 찾아와 사랑만 남기고 간 너

하루가 지나 몇 해가 흘러도 아무 소식도 없는데

세월에 변해버린 날 보면 실망할까봐

오늘도 나는 설레이는 맘으로

화장을 고치곤 해


아무것도 난 해준 게 없어 받기만 했을 뿐

그래서 미안해

나 같은 여자를 왜 사랑했는지

왜 떠나야 했는지

어떻게든 우린 다시 사랑해야해

살다가 널 만나면 모질게 따지고 싶어

힘든 세상에 나 홀로 남겨두고

왜 연락 한번 없었느냐고


아무것도 난 해준 게 없어 받기만 했을 뿐

그래서 미안해

나 같은 여자를 왜 사랑했는지 왜 떠나야 했는지

어떻게든 우린 다시 사랑해야해

그 땐 너무 어려서 몰랐던 사랑을 이제야 알겠어

보잘것 없지만

널 위해 남겨둔 내 사랑을 받아 줘

어떻게든 우린 다시 사랑해야 해

 

 

화장(化粧). 아름답고 싶은 끝없는 욕망에 남자와 여자가 다를 것이 있겠는가? 옛사람과 현대인에게 차이가 있겠는가? 동서양의 차이가 있겠는가? 수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화장술의 역사가 그것을 넉넉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러니 화장은 여성의 전유물도 아니고, 서구화된 현대인의 특성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젊은 여성에게 화장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보다 젊어 보이고 싶어 하는 여성들에게 화장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화장은 넓게 보면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고, 좀 더 좁혀 말하면 젊어 보이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라는 말이다.

 

여성에게  있어 상대 남성에게 젊어 보이고 싶은 욕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젊은 여성에게 달리 말하자면 아직도 생식 능력을 갖고 있는 여성에게 더 끌리는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겠는가? 화장은 아직도 젊어서 왕성한 생식 능력이 있음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단순화일까? 단순화인 것은 맞지만, 분명히 그런 측면이 있음을 또한 부인하기 힘들지 않겠는가?

 

따라서 화장은 10-20대 여성보다는 30-40대의 여성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 대중가요에서도 화장은 30-40대의 여성의 내면 풍경을 염두엔 둔 경우에 등장하는 소재이다. 강진의 <화장을 지우는 여자>가 그렇고,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가 그렇고,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가 그렇다. 이들 모두가 30대 후반 또는 40대  여성을 떠올리게 하는데 반해,  강애리자의 <분홍립스틱> 정도만 20대 후반 또는 30대 초반 여성을 떠올리게 한다. 앞의 것들이 한결같이 얇은 화장이 아닌 짙은 화장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외적인 아름다움과 관계가 깊은 화장이 왜 하필이면 여성의 내면 풍경을 그리는 소재로 빈번히 등장하는가? 그것은 화장과 거울의 친한 관계 때문일 것이다. 화장을 한다는 것은 거울 앞에 서 있다는 것과 보통 같은 말이 아닌가? 그래서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에 등장하는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과 화장을 지우거나 고치는 여성은 같은 맥락으로 읽힐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내면적인 성찰을 할 수 있는 성숙한 나이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와 강진의 <화장을 지우는 여자>는 약간 다르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먼저 <화장을 고치고>에 등장하는 여인이 <화장을 지우는 여자>에 등장하는 여자보다 좀 젊다. 앞의 것은 아직도 사랑의 열정을 못다 지운 아니 지울 수 없는 30대 초반의 여인이다. “어떻게든 우린 다시 사랑해야해/살다가 널 만나면 모질게 따지고 싶어/힘든 세상에 나 홀로 남겨두고/왜 연락 한번 없었느냐고”가 그 증거이다. 모질게 따질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사랑의 열정은 전혀 식지 않았다고 해도 될 듯하다.

 

이와 달리 뒤의 것은 “노을 속에 사라진 그 사랑을 못 잊어/오늘도 거울 앞에 서 있는 여인”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비록 뒤이어서 “행여 만날 그 사람이 몰라 볼까봐./가슴 두근거리네.”라고 노래하고 있지만, ‘노을’이라는 단어가 이미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음을 환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40대 초반 정도는 되어 보이며, 물론 이것은 각 노래를 부른 왁스와 강진의 연배 차이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를 두고 단순히 각 노래가 염두에 두고 있는 여성의 나이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두 노래 사이에는 좀 더 중요한 차이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시선의 문제이다. 앞의 것은 여성의 시선, 뒤의 것은 남성의 시선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화장을 지우는 여자>는 얼핏 보면 여성의 내면 풍경을 노래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은 그런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내면 풍경에 가깝다. 그래서 그럴까? 이 노래의 나타난 여자의 내면 풍경은 사실 매우 단조롭다. ‘가슴 두근거리네’에서 설렘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이것은 이 노래의 장점이기도 하다. 왜? 불혹의 나이, 40대에게 들끓는 정념의 덩어리는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좀 더 가벼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화장을 지우는 여자>라는 제목이 <화장을 지우고>로 바뀔 수 없는 이유이다. 그렇게 되면 행위의 주체가 여성으로 바뀌어야 하고, 또 여성의 내면을 곧바로 드러내 노래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화장을 고치고>는 여성의 내면을 여성이 곧바로 노래하는 형식이다. 그래서 훨씬 더 현실적이고, 노래되어지는 내면도 훨씬 복합적이다. 이것이 이 노래의 장점이지만, 강진의 노래보다 부담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때 부담스럽다는 말은 물론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내적인 번민이 훨씬 강하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왁스의 경우도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쳤을 터인데, 거울 이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거울 앞에서 선다는 설정을 하게 되면, 마음이 차분히 내려앉아버리는 것을 감안한 것이 아닐까? 당연한 것일 터이다. 왁스가 노래하고자 한 것은 차분히 내려앉는 성찰이 아니라, 아직도 여전한 마음속의 들끓음일 터이니 말이다.


하희정 문학평론가 wizbook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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