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이별

이선희, <J에게>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4. 5. 18:26

이선희, <j에게>

 

 

J 스치는 바람에 /J 그대 모습 보이면 /난 오늘도 조용히 /그대를 그리워하네 
J 지난밤 꿈속에 /J 만났던 모습은 /내 가슴속 깊이 /여울져 남아 있네 
J 아름다운 여름날이 /멀리 사라졌다 해도 /J 나의 사랑은 /아직도 변함없는데 
J 난 너를 못잊어 /J 난 너를 사랑해 

J 우리가 걸었던 /J 추억의 그길을 /난 이밤도 쓸쓸히 /쓸쓸히 걷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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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가요제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수는 역시 이선희와 그녀의 데뷔곡 ‘J에게’이다. 폭발적인 가창력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노랫말에 크게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영문 이니셜을 제목으로 하고 있음이 인상적인 정도이다. 노랫말은 의외로 단순하다는 생각을 할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인상 특히 첫인상은 본질을 꿰뚫을 때가 많지만, 이 경우는 아니다. 단순해 보이는 노랫말에 고도의 문학성이 내재되어 있다. 상징성 높은 시어들이 단정한 연쇄 구조를 이루는데, ‘바람-꿈-길’이 그것이다.

바람이란 무엇인가? 어떤 경우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는 그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나뭇잎의 흔들림 따위로. 한편 손에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것이 또한 바람이다. 스치는 바람에 그대 모습이 보인다고 하고 있질 않은가? 바람은 부재를 노래하는 가장 적절한 상징이었던 것. 김춘수 시인의 ‘부재’ 역시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울타리는/슬픈 소리로 울었다”고 노래한 바 있다. 부재의 상징으로서 바람이라는 설정은 같은 맥락인 셈이다. 바람을 통해 부재를 보는 힘은 관조, 즉 조용히 봄밖에 없는 것도 같은 이치이고.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보았다는 말인가? 영혼(靈魂)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임은 임이로되 육체가 없는 임은 영혼 말고는 없는 것이다. 노래가 그 환영을 ‘지난밤 꿈 속’에서 보았다고 이어가고 있음은 그래서 일견 자연스러운 것.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시적 거짓 즉 연출일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시적 화자는 낮꿈을 꾸고 있기 때문. 깨어있으면서 꿈꾸는 것을 표현할 적절한 말이 없어 그렇게 처리한 것일 뿐. 물론 이것은 작사가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말의 한계에 속한다. ‘백일몽’ ‘공상’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안 어울린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고.

그래서 노래는 수완 좋게 보조 어휘를 끌어들이는데, ‘가슴 속 깊이 여울져’가 그것. 사실 ‘여울이 지다’에서 왔을 ‘여울지다’는 꽤나 낯선 표현이다. 그렇지만 가슴 속에 눈물의 샘이 계곡의 여울 모양을 연상케 하니 이 또한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 우리말이 모국어가 아닌 사람이라면 이 말의 맛을 결코 느낄 수 없다.

요컨대 시적 화자는 낮꿈을 꾸면서 가슴 속 여울에 어른거리는 임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을 터인데, ‘못 잊어’ ‘사랑해’는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토해내는 몸부림의 일종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영혼이 자신의 몸속에 쳐들어와 앉아 있을 때, 무속인(巫俗人)이 그러한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주문에 가까운 것. 그것을 가수 이선희는 열창이라는 이름으로 변형시켜 보여준 것. 노래를 부른다기보다 터져 나오는 것 같은 그녀의 가창력의 본질은 바로 이것인 셈이다.

그러나 노래는 귀신들의 세계인 밤의 세계로 결코 가지 않는다. 혼을 불러들이되, 어스름한 저녁이나 어두운 밤이 아닌 낮에 조용히 만나는 일로 일관한다. 추억의 길을 걷기가 그것이다. 즉 산보의 시학, 몽상의 시학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노래가 흐느낌이 아닌 맑음을 유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의 이선희는 변신을 도모하고 있지 않나 싶다. ‘인연’이 그 증거. 혼의 영역으로 곧바로 뛰어들고 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희정 <문학평론가|wizbook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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