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이별

전영록, <저녁놀>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4. 3. 20:33

전영록, <저녁놀>

 

 


이 어둠이 오기전에/나를 데려가주오/장미빛 그을린 저곳으로 /나를 데려가주오/깊은 밤이 오기전에/나를 머물게 해주오/그녀의 하얀볼이/빨갛게 보이니까요/이 세상 모든 행복이/나의 마음속에서/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영원하니까/깊은 밤이 오기전에/나를 머물게 해주오그녀의 하얀볼이/빨갛게 보이니까요/이 세상 모든 행복이/나의 마음속에서/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영원하니까/깊은 밤이 오기전에/나를 머물게 해주오/그녀의 하얀볼이/빨갛게 보이니까요/빨갛게 보이니까요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알 수 없어요) 만해 한용운은 저녁놀을 시에 비유한 바 있다. 일차적으로 아름다움의 공유가 비유의 계기였을 터인데, 이 이상의 본질적 계기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장엄한 일출 이상으로 낙조가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그 속뜻을 설명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일출과 달리 낙조는 해 그 자체보다 주변을 장식하는 노을의 아름다움이 우선이라는 점이 분명한 정도 아닐까?

아니다. 저녁놀은 아름답다기보다 곱다고 해야 옳다. 아름다움과 고움의 미적 자질은 분명히 다르며 이를 혼용해서는 안 된다. 일출은 피어나는 꽃 또는 타오르는 불에 비유해야 제격이고, 낙조는 곱게 늙음 또는 잦아드는 불씨에 비유해야 제격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만해 한용운의 시에서 멋진 비유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아름다움이 아닌 고움의 공유였던 것이다.

연인을 화사한 꽃에, 연정을 타오르는 불꽃에 비유한 대중가요는 많다. 이에 반해 고운 얼굴, 고운 마음을 노래한 대중가요는 그리 많지 않은 것도 다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영원한 젊은 오빠’라 불리는 전영록의 노래가 고움의 미학을 중심에 두고 있다면 조금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히트곡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나 ‘불티’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 고운 두 눈에 눈물이 고여요. 그 무슨 슬픔이 있었길래 울고 있나요.’(내 사랑 울보) 겉으로는 고운 두 눈에 눈물이 고였고 무슨 슬픔이 있었기에 우는 것이냐고 노래하고 있지만, 실은 눈에 눈물이 고였기 때문에 고운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한 발 나아가면 사랑하는 연인이 상처를 입는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내면의 상처를 안고 있는 여인이기에 사랑하는 마음이 이는 것이라고 해도 될 터이다. 내면의 상처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마음이 곱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녁놀’은 그래서 전영록 가요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이 어둠이 오기 전에 나를 데려가주오. 장밋빛 그을린 저곳으로 나를 데려가주오. 깊은 밤이 오기 전에 나를 머물게 해주오. 그녀의 하얀 볼이 빨갛게 보이니까요.(저녁놀) 장밋빛 노을에 그을린 연인의 하얀 볼은 전영록에게 있어 고움의 결정체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내면의 상처가 진홍색 장미로 피어오르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이때 넘쳐흐르는 고운 눈물은 뜨거운 피 그 자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전영록의 가요가 보여주는 사랑은 이처럼 비극적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흥겨운 리듬과는 전혀 다르게 말이다.

한동안 나는 전영록의 데뷔곡 ‘애심’이 ‘애심(愛心)’일까, ‘애심(哀心)’일까를 두고 고민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후자라고 확신한다. 아니다. 전영록이 진정으로 노래하고 싶었던 것은 ‘애심(哀心)=진정한 사랑’이라는 사랑의 비극적인 공식이었을 것이다. 시인 기형도는 이렇게 노래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고. 전영록이라면 ‘사랑을 잃고 나는 노래하네’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희정 <문학평론가/wizbook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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