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지 않은 불편함
어색함. 왠지 불편함. 그것은 대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곳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 편안하지 않은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일 때가 많다. 요즘 밤이면 유난히 크게 들리는 도둑고양이(흔히 길고양이라고 하는)의 발정을 내는 소리가 그렇다. 도시라는 공간이 인간을 제외한 다른 야생 동물들에게는 참으로 불편한 거처일 것이다. 그런 초대받지 않은 삶의 터전에서 본능적인 욕구를 해결해야 하는 고양이의 처지가 참 딱하다.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공간에서 발정기의 욕구를 해결해야 하는 고양이, 그 궁핍하고 불편한 삶에 연민의 감정을 갖게 된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그 무모함이 부럽다.
엊저녁 나는 아마 한 20여 년 만에 한 고향 선배를 만났다.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에 걸쳐 쓴, 한 권 분량의 시 원고를 받아 왔다. 한동네 선후배인지라 나도 선배를 잘 알고, 선배 역시 나를 잘 안다. 이건 좀 반칙이지 않나 싶다. 대개 시집을 읽으며 나는 시인의 내면세계를 나 나름대로 구성해 보게 되는데, 시집을 읽기 전에 이미 나는 시인의 정신세계, 그 밑바닥까지 알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아는 선배의 정체가 선배의 진면목인지 아닌지는 별개로 하고 말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이전까지의 시집 읽기와는 다른 패턴이니 좀 어색하다.
선배의 원고를 읽다가 한 달 전쯤에 접하게 된 시집도 같이 읽게 되었다. 이 시집 역시 사적으로 꽤나 잘 아는 시인의 시집이다. 우아하다는 표현에 딱 걸맞은 시 작품이 많은 시집이지만, 시를 읽으면서 역시 좀 불편하다. 내가 알고 있는 시인의 모습과 자꾸 오버랩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그녀와 시집을 읽으며 그려지는 시인의 모습 중, 어느 쪽이 본 모습일까? 둘은 닮기도 했지만, 다르기도 해서 그렇다. 차라리 사적인 인연이 없는 시인의 시가 더 읽기 편한 면이 있다.
아무튼 두 시집(한 쪽은 아직 시집의 꼴을 갖추지 않았지만)을 읽으면서 떠올린 단어가 ‘어색함’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현대시는 어색함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자아와 세계가 왠지 행복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 그 불편함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동시(童詩)나 찬송가류의 시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눈에 띈 시가 ‘킹벤자민’이고, ‘장미’이다.
킹벤자민 1
하봉채
모양 잡는다고 만진 가지마다
말라 죽고도 부족해 사납게 뒤틀린다
아파트 18층은 온실에서 너무 먼 걸까
머지않아 통째로 죽을 것 같아
베란다 구석에 슬그머니 내어놓은 지 몇 날
후한 장례나 치러주자고 살펴보니
비쩍 마른 가지 여기저기 두런두런
노란 열매가 달려있다
몇 년 키워도 보기 힘들다는 벤자민 열매가
꽃 피는 새도 모르게 열려있다
애써 모른 척 외면하였더니
서러움 먹고 살았나보다
억세게 살고 싶었나보다
시인은 아파트 18층에 거주하고 있다. 그가 애정을 쏟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대상은 발코니(balcony)에 내팽개쳐진 ‘킹벤자민’이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화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층 아파트라는 공간은 무척이나 건조한 법이며, 그러한 환경은 킹벤자민에게 고통스러운 공간이었을 것이다. 잠시만 관심을 덜 기울여도 말라 죽기 딱 좋은 공간이다. 나 역시 이런저런 관엽 식물을 말려 죽인 일이 적잖다. 시인은 그 킹벤자민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말라서 뒤틀린 모습은 시인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의 처량한 초상이었을 터이고, 노란 열매를 맺은 모습은 열심히 살아가면서 뭔가를 이루려고 애썼던 시인의 초상이었을 터이다.
시인은 왜 킹벤자민의 모습에서 자신의 초상을 보게 되었을까? 답은 시의 종반부 두 줄에 있다. ‘서러움을 먹고 살았다는 것’, ‘억세게 살아 왔다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 교과서적인 해설을 덧붙이자면, 시인은 자신의 가년스러웠던 유년 시절, 팍팍하기만 했던 청년 시절, 그리고 겉보기에는 화려해 보였을 수도 있지만(실제로 내가 아는 이 시인은 수천 명의 부하 직원을 거느리는 회사 임원이다) 내면적으로는 고달팠던 중년의 삶을 킹벤자민에 투영하고 있는 셈이다. 애써 모르는 척 외면했다고 썼지만, 그것은 일종의 포즈일 뿐이다. 자신을 닮은 킹벤자민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외면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대상으로부터 눈은 뗐지만, 마음마저 떼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다. ‘노란 열매’가 그것이다. 자신의 삶이 그저 허무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위로하고 싶은 것이다. 메마른 가지에 연 열매는 시인이 이제까지 서럽게 억세게 피워낸 꽃인 것이다.
십분 공감한다. 이 시인의 삶이 곧 나의 삶이고, 이 시인의 내면이 곧 나의 내면인 까닭이다. 아니다. 나이 오십 줄에 오른 사람치고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저마다의 처지가 좀 다르긴 하지만, 온갖 욕구를 절제하면서, 온갖 굴욕을 감수하면서 버텨온 것이 우리들 중년의 삶이 아닌가 말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참 허무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크게 내세울 것도 없지만, 크게 부끄럽지도 않은 삶이라고는 할 수 있지 않는가 말이다.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음의 시도 바로 그런 풍경을, 아주 예쁜 언어로 보여 준다.
장미
이순희
새벽 아파트 베란다
한 송이의 장미가 피어나고 있다
사시사철 싱싱한 잎을 달고 있는
실내목들의 당당한 어깨 아래
한쪽 귀퉁이 외진 곳에서
이름도 잊혀진 채 흉한 몰골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것이
오늘 이른 새벽
붉은 심장 한 덩이를 피우고 있다
언제 뽑힐지 모르는
굴욕의 세월을 삼키며
그는 밤마다 자신을 비추는 먼별을 바라보며
지난 하루 무사히 건너게 해주어 감사하다고
기도라도 한 것일까
오래 기다린 가지 끝에 꿈이 돌아오듯이
드디어 여린 줄기 끝에서
피를 토하듯 피어나는 한 송이
오욕도 오래 삭여 견디면 저렇게 찬란하게 열리는 걸까
그러나 난 여전히 좀 불편하다. 위에서 ‘교과서적인 해설’이라고 미리 한 자락 깔아 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좀 잔인하지만 과연 그 ‘노란 열매’, 그것을 보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위안을 받았는지 묻고 싶다. 그 노란 열매의 실체가 재산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사회적 지위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겠다. 아니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어떤 형이상학적 가치일 수도 있다. 물론 나는 이들이 가지는 가치의 경중을 따질 생각이 애초에 없다. 그런 것은 아직 철들지 않은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나는 그 어느 것이든 하나라도 진정으로 위로가 되는가, 바로 이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데에도 불구하고, ‘노란 열매’를 표 나게 내세웠다면, 그것은 시적 포즈의 일종일 뿐이겠기에 하는 말이다.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해 답답하고 허무하고 불편하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 아닌가 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건대 시의 언어는 개시이면서 동시에 은폐다. 우선 시인에게 있어 킹벤자민 그리고 ‘노란 열매’는 삶의 속내를 오롯이 보여주는 오브제이다. 그것은 농본적인 삶의 환경에서 자랐지만 도시적인 환경에 거쳐하는 시인, 유기체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환경에서 자랐지만 무기물로 이루어진 구조의 일부처럼 살아가는 시인, 그 불편한 속내를 보여주는 오브제이다. 이런 면에서 이 시는 정직하다. 말라서 비틀어지면서 열매를 애써 맺는 킹벤자민이 개시해 주는 존재의 의미를 이 시는 보여준다. 이러한 시적 진실이 이 시의 주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설픈 위안, 공허한 교훈주의로 이어지기 쉽고, 그럴 때 그것은 삶의 속내를 가리는(=은폐하는) 오브제로 전락하고 만다. 이 둘의 경계 지점에서 이 시는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이 시인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이다. 그러나 아, 어쩌랴. 시의 언어가 본질적으로 갖게 되는 운명이 그러한 것을.
그렇다고 해서 도시라는 문명 사회의 불청객, 도시의 골목에서 대책 없이 발정기의 울음을 내뱉는 도둑고양이가 되어 보라고 다그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시는 넋두리가 되어 버리거나 푸념이 되어 버리고 마는 까닭이다. 그래도 난 시인에게 바란다. 맘껏 한 번은 그렇게 해 보이시라고. 그래야 좀 더 나이 들어서, 이제는 삶을 얽매는 이런저런 여줄가리들에 초연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젊었지! 아직 인생을 잘 몰랐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나이였지! 그래 분명히 조금 아니 많이 무모했어. 그렇지만, 내 사그라드는 삶을 지탱하는 것은 그 시절이라고, 그 시절의 무모한 열정이라고 말입니다.
이 글을 끝내고 저는 노래를 한 곡 들을 생각입니다. 체리필터의 ‘낭만 고양이’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가서 늦은 저녁을 같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짧게 쓰려던 글이 길어지면서, 저녁 밥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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