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은유와 환유

국어의 시작과 끝 2013. 9. 27. 05:58

은유(隱喩)와 환유(換喩)에 대하여

 

(1) 은유와 환유

비유의 일종인 은유(隱喩)와 환유(換喩)에 대해 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줄 압니다. 대개 국어 시간 중에 시를 배우면서 들어 보았겠죠. 뭐 그리 어려운 개념도 복잡한 개념도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고 나면 이 개념이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개념입니다. 생각보다 어려운 개념이고, 문학 연구는 물론 언어학, 심리학 등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이거든요. 그리고 공무원 국어 특히 7급 시험에서 아주 빈번히 출제되는 내용입니다. 올해도 출제되었습니다. 수험서 집필에 아주 바쁘지만, 굳이 시간을 내서 이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① 은유란 무엇인가?

수험생 여러분도 이미 대부분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먼저 그 기초적인 뜻을 확인해 보도록 하죠.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잖아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은유란 비유(比喩)의 한 형태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비유란 무엇인지부터 따져 봅시다. 간단히 말하자면 비유란 어떤 단어를 그 본래적인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사고 과정을 말합니다.

예컨대 국보급 투수라고 일컬어지는 선동렬(올해 기아 타이거즈는 형편없이 망가지고 있지만)이 구원 등판하는 것을 보고, TV 해설자가 “결국 무등산 폭격기가 떴군요.”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말을 들었을 때 정상적인 국어 사용자라면 ‘폭격기’의 본래적인 의미가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겁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선수가 위력적인 속도와 파괴력을 지닌 강속구 투수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서 ‘폭격기’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는 겁니다. 이러한 경우를 두고 ‘폭격기’란 단어가 비유 그러니까 은유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은유적 사고 과정은 너무 뻔해 보일 겁니다. 왜냐 하면 거의 즉각적으로 두 관념(‘폭격기’라는 본래의 의미와 ‘괴력을 지닌 강속구 투수’라는 비유적 의미)이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 비유를 사용한 사람이 매우 일상적인 비유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은유란 어떤 단어를 일상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비틀어 사용하지만-비유를 뜻하는 희랍어 'trope'는 원래 ‘돌리다turn’, ‘비틀다twist’의 뜻을 지님- 그것이 대개 흔한 일상어의 연상에 가까워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그런 사고 과정이라 말할 수 있는 겁니다.

② 환유란 무엇인가?

그럼 다음으로 환유란 무엇입니까? 환유도 은유와 마찬가지로 비유의 일종입니다. 그러니까 한 단어를 본래적인 의미가 아닌 다른 뜻으로 확장하여 쓴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나 환유적 사고 과정은 은유의 경우와 조금 다릅니다.

아주 흔한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기로 하죠. 퇴근하면서 한 동료가 “오늘 어때 한잔 마시지?”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통상 그것은 한 잔의 차를 마시자는 뜻이거나 한 잔의 술을 마시자는 뜻일 겁니다. 근데 앞의 예문에서의 ‘잔’이라는 단어의 사용에 주목해 보세요. 실제로 마시는 것은 ‘잔’이 아닌데 ‘잔’을 마시자고 말하고 있잖아요. 말할 것도 없이 마시자는 대상은 그 ‘내용물’이겠지요. 듣는 사람도 그렇게 이해했을 거구요.

그러한 사고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잔’과 ‘차’ 혹은 ‘잔’과 ‘술’이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겠죠. 이렇듯 어떤 단어가 그 단어가 지닌 본래의 의미(잔=용기)가 아니라 그것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을 사용될 이를 환유적 사고 과정이라 말합니다.

 

(2) 유사성의 원리와 인접성의 원리

 

쉬운 얘기를 괜히 어렵게 푼 듯합니다만,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좀 유식한 표현으로 은유와 환유를 변별시켜 보면 이렇습니다. “은유는 유사성similarity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환유는 인접성contiguity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고 말입니다. 적잖이 어려운 표현이죠. 그런데 이 점을 이해해야 은유와 환유에 내재된 깊은 뜻을 이해할 수가 있으니 골치 아프더라도 좀 깊이 생각해 봅시다.

먼저 다음 시를 통해 은유 즉 유사성의 원리에 대해 좀 자세히 살펴보죠.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 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김동명, 「내 마음은」 중에서-

 

이 작품에서 ‘낙엽’은 그 본래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은유metaphor입니다. 말하자면 ‘낙엽’을 통해 실제로 전달되는 내용은 사랑의 애달픔이지요. 그러니까 이 시의 첫 행을 산문적으로 옮기면, “내 마음은 낙엽처럼 외롭소(애달퍼요)” 혹은 “내 마음은 외롭소(애달퍼요)”가 될 겁니다.

자 그런데 왜 이러한 비유의 과정에 유사성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고 하는지 살펴봅시다. 첫 시행은 “내 마음은 ( )이요”라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네모 안에 올 수 있는 것은 그 나름의 제약이 따르죠. ‘낙엽’, ‘나그네’, ‘나목’ 등 외로운 마음 상태를 환기시킬만한 대상이 되는 것들만 올 수가 있어요. 그것은 “나는 아침에 급히 ( )를(을) 먹었다”라는 문장에서 네모 안에 올 수 있는 낱말들에 일종의 제약이 따르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말하자면 은유란 유사성을 지닌 어떤 단어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외롭다’는 것과 ‘낙엽’의 관념이 일종의 비유 관계를 형성하는 원리도 같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은유는 유사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다음 문장을 통해 인접성의 원리 즉 환유에 대해 살펴보죠.

지금 백악관은 미국의 미래를 좌우할 결단을 내릴 것을 고려 중에 있다.

 

이 문장에서 결단을 내리는 주체는 분명 백악관이라는 건물이 아니고 그 주인인 대통령이겠죠. 그런데 대통령 대신에 ‘백악관’이라고 하고 있어요. 문장 구조상 ‘백악관’ 자리에 어떤 단어는 올 수 있고, 어떤 단어는 부적절한데, 그것을 제한하는 것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전후 문맥의 단어들이지요. 예컨대 ‘우리 조상님은’이라는 말이 심히 부적절한 것은 앞뒤에 오는 어구에 호응이 잘 안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선택의 사고 과정을 두고 인접성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냐 하면 거기에는 원래 와야 하는 단어 대신에 그와 인접성을 지닌 단어가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환유는 인접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런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문장에는 유사성의 원리와 인접성의 원리가 작용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그럼 우리의 모든 언어가 모두 비유라는 말입니까. 좀 심한 말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할 독자가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진 않겠지만 사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이 늘 다른 것을 지칭함에 의해서 의미를 띠게 된다는 원리를 감안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내용이 어려워지네요. 일단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은 접어 두고, “나는 국화를 보면 누나를 생각한다.”와 같은 매우 간단한 문장을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서 모든 단어는 먼저 수직적인(유사한 의미를 지닌 단어들 사이의 선택의 축)인 차원의 제약을 받는 동시에, 동시에 수평적인(앞뒤에 배열된 단어들의 배열 관계에 따른 제약)를 받습니다. 예컨대, ‘국화’라는 단어는 ‘진달래’, ‘개나리’, ‘동백꽃’ 등 유사성을 지닌 단어군에서 선택되어진 것들이고, 또 그것은 그 문장의 앞 뒤에 사용되어 문맥을 이루고 있는 ‘나’, ‘누나’, ‘생각한다’라는 인접하는 단어의 제약 속에서 선택되어진 것들이다라는 말입니다. 그 수직축과 수평축의 사고 과정이 하나의 구조를 이룸으로써 문장(인간의 사고)이 성립되는 것이죠.

 

(3) 은유와 환유 그리고 꿈의 분석

그런데 하나의 문장이 성립된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가 성립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문장이란 하나의 사고 단위이라 말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우리의 언어가 유사성의 원리와 인접성의 원리라는 두 축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사고 역시 그 두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꽤나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건축물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사고 과정을 하나의 건축물이 어떤 하나의 구조를 이루게 되는 과정과 같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나의 건축물이 성립하려면 수직적인 선과 수평적인 선이 적절한 구조로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겠죠.

 

언어의 구조 혹은 사고의 구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사한 단어군에서 어떤 단어를 ‘선택’(은유,유사성의 원리)하는 과정과 그것을 앞 뒤 관계를 고려하여 적절히 ‘배열’(환유, 인접성의 원리)하는 과정이 올바르게 이루어져야 하나의 사고가 가능한 것입니다. 비단 언어만이 아닙니다. 일상 생활이 바로 그러한 구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겁니다. 의상을 하나의 예로 들어 설명해 볼까요. 우리가 옷을 입는 것에도 두 가지 사고 과정이 결합되어 있어요. 모자를 어떤 모자를 쓸 것이냐 또는 어떤 잠바를 입을 것이야 하는 것이 선택의 과정이라면, 모자와 잠바 등을 어울리도록 배려하는 것은 결합의 과정인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비유의 이론이 심리학에서도 자주 원용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무의식도 이런 비유의 원리에 따라 설명될 수가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동일화’와 ‘치환’의 원리가 바로 그렇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자는 은유에 후자는 환유의 과정에 각각 대응됩니다.

 

만약 우리가 꿈속에서 어떤 사람과 서로 떨어져서 멀어져 가는 장면을 보았다고 합시다. 그것은 일종의 상실이나 헤어짐의 형태라는 점에서 슬픔의 은유적 형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말하자면 슬픔이라는 의미가 그것과 유사한 다른 것에 의해 비유적으로 제시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환언하면 떨어져가는 장면과 슬픔의 동일화가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영안실 앞에서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는 모습을 꿈에서 보았다고 합시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볼 때 장례식과 연관되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환유적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 모든 장면들은 우리가 직접 대면하기에 두려운 죽음이 치환된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비유란 단순한 기법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정신분석의 비유에 관한 분석에서 보았듯, 비유의 사고 과정은 인간의 정신생활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것이죠. 말하자면 언어가 곧 비유의 과정이고, 사고가 곧 비유의 과정이며, 심지어 무의식 역시 비유의 과정인 것입니다.

 

(4) 비유 언어 : 웅변과 광고의 경우

 

하지만 비유는 일종의 거짓말입니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잘 알려진 은유 형식을 생각해 보세요. 심하게 말하면 사기잖아요. 내 마음은 내 마음일 뿐이지 왜 그것이 호수입니까? 또 “금테가 짚신을 깔본다.”(금테-신사, 짚신-시골뜨기)라는 환유를 생각해 보세요. 금테가 어떻게 짚신을 깔 볼 수 있어요. 말이 안되잖아요. 마찬가지로 거짓말이거나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니고 뭡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비유를 사용하는 것일까요. 또 수사학이란 이름으로 고대 희랍시대 이래로 비유 언어에 대해 그토록 많은 관심을 쏟아 온 것일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비유가 꽤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비유 등의 수사학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웅변술의 일종으로서지요. 물론 비유가 웅변의 논리성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좀 곤란합니다. 왜냐 하면 비유는 비합리적인 직관의 사고 과정에 의존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유는 잘 사용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웅변이 청중을 의도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큰 호소력을 가질 수가 있는 겁니다.

그 힘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그것은 비유를 통해 진술을 자명한 것으로 만들어서 청자에게 깊은 안도감을 줄 수 있음에서 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안도감은 어디서 오는가? 비유는 흔히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는 유추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개혁을 선전하면서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려면 무엇보다도 썩은 살을 도려내야 한다.”라는 비유를 사용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기서 썩은 살은 물론 그 본래적 의미가 아니라 은유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 비유를 산문적으로 풀어 바꿔 쓰면 “정의 사회를 구현하려면 부정부패를 일삼는 세력들(=썩은 살)을 이 사회로부터 몰아내야 한다.”가 될 것입니다. 청자의 입장에서 볼 때 후자보다는 전자가 훨씬 더 자명해 보이고, 안도감을 줍니다. 마치 썩은 살을 도려내야 하는 것이 자명한 것처럼 부정부패를 일삼는 세력들을 몰아내는 일이 지당하게 느껴지는 것이죠. 생살을 잘라내는 것이 아니고 썩은 살을 도려내는 것이니 결코 불안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죠. 요컨대, 이 비유가 듣는 이에게 그 진실성을 확신시켜 힘을 발휘하는 까닭은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는 유추의 힘을 빌리고 있기 때문인 겁니다.

웅변에서 진실성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은유를 사용하는 경우를 살펴보았습니다. 현대 문화에서도 이러한 예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컨대, 영화에서 좀 야한 장면이 펼쳐지다가 그 클라이막스를 갑자기 파도가 치는 장면, 혹은 촛불이 바람에 꺼지는 장면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들도 일종의 비유의 과정이라 할 수 있겠죠. 그 엉뚱한 장면이 어떤 것을 대신하고 있는지는 누구나 연상할 수 있는 것이겠죠.

그러나 비유의 힘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영역은 역시 광고라 할 수 있습니다. 신문이나 TV 광고가 그렇습니다. 물론 해당 광고에 쓰인 언어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광고 언어에도 비유가 많이 사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각적으로 제시되는 장면들 사이에 비유와 동일한 정신적 과정이 가미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연결되는 두 개 이상의 영상에 하나의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전이시키는 비유적 사고 과정이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 제 앞에는 영국계 광고 대행사인 사치 앤 사치(Satch & Satch)의 브라질 법인이 제작한 여성의류 「줌프」의 잡지 광고가 있습니다. 아마존 정글 한복판에 할리데이 비슨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고 그 위엔 젊은 여자가 앉아 있습니다. 그녀 뒤편에는 청개구리가 흉측스러운 앞발로 여자 어깨를 쓰다듬듯 만지고 있고, 그녀는 마치 연인의 사랑스런 애무에 취한 듯한 야릇한 표정입니다. 얼핏 보면 매우 황당하고 난해한 장면이고, 어찌 보면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이 장면이 내의 판매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추측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를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먼저 습지가 많은 남아존의 남미인들에게 친숙한 개구리와 그 동화를 연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구리로 변해 버린 왕자’ 이야기에서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왕자는 아름다운 여인과 입을 맞추기 전에는 평생 개구리의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저주받은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이다음 장면을 광고는 보여 주지 않습니다만, 해피엔딩의 결과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광고 장면에서 젊은 여성이 입은 옷이 광고의 대상입니다. 그 옷이 입는 사람을 매혹적이게 만든다는 것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의 중심 내용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심 내용인 그 ‘매혹’을 돋보이게 하는 원리는 무엇입니까? 여성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 먼저 개구리를 들 수 있습니다. 그 개구리는 말 그대로 개구리가 아니라, 왕자 그러니까 그 젊은 여성을 간절히 바라는 남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일종의 비유인 셈입니다. 우리로서는 이 비유가 생소한 것일 수 있지만 남미 사람들한테는 그렇지 않을 것이겠지요. 광고 언어(시각적인 차원의)가 일종의 비유 언어를 사용하는 한 해당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의 상상력의 패턴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한편 여성은 무엇을 타고 있습니까? 힘이 넘치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오토바이를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토바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유 혹은 해방 그리고 야성의 상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원래 오토바이는 산업 사회의 산물입니다만, 좀 특이한 것입니다. 자동차와 같이 사람을 사나운 바깥바람으로부터 차단하여 안방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말하자면 사람을 여성화하는 그런 교통수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시의 거리를 질주하는 야생마 같은 존재입니다. 도시인이 그것을 타고 질주하고 싶은 욕망을 갖는 것-요즘 폭주족 때문에 여간 골치가 아니지만-은 그런 위축된 남성 즉 야성을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겠지요. 젊은 여자는 다름 아닌 바로 그 오토바이를 타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야성 곧 남성을 타고 있는 겁니다.

 

더구나 그녀가 달리고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밀림(密林)입니다. 밀림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야성의 본거지입니다. 거기를 가냘픈 다리(어떤 의미에서 밀림을 달리기에는 너무 ‘허술한’ 신발을 보세요)로 헤쳐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지요. 그녀가 거침없이 헤쳐 나가고 있는 밀림이 거칠기는커녕 참으로 아늑하다는 느낌을 주잖아요. 속옷만 입은 여인에게 잘 어울리게도 말입니다. 맞습니다. 여인은 거친 밀림을 아니 거친 야성의 숲(흉측한 개구리가 우글거리는)을 헤쳐 나가고 있지만 행복한 겁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남성의 숲이기 때문입니다. 왜 여인이 타고 있는 것이 오토바이인지 그리고 왜 행복감에 젖어 있는지 이해했을 겁니다. 여러 문맥에서 그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지요. 인접한 대상들을 고려하면은 말입니다. 이렇듯 광고에서는 유사성과 인접성의 원리를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그 효과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지요. 엉터리 광고는 물론 그런 수준에 못 미치지만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은유와 환유 매우 간단한 개념 같은데 그 원리를 여러 곳에 적용해보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요. 아하! 하고 깨닫게 되는 내용도 많고요. 이렇게 공부를 해야 하는 겁니다. 옛말에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전하는 바는 무조건 누구나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를 듣고 그것을 통해 열을 알도록 노력해야만 그 결과가 그렇게 될 뿐이지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하나를 듣고 그것을 통해 열을 알려는 노력을 해야만 그 하나라도 진정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요. 은유와 환유의 경우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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