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7차 국어(상) 전체 지문

국어의 시작과 끝 2012. 6. 13. 15:17

고등 국어 상

1단원 읽기의 즐거움과 보람

황소개구리와 우리말

최 재 천(崔在天)

세상이 좁아지고 있다. 비행기가 점점 빨라지면서 세상이 차츰 좁아지는가 싶더니, 이젠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로 지구 전체가 아예 한 마을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지구촌이라는 말이 그리 낯설지 않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우려하던 세계화가 바야흐로 우리 눈 앞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다. 세계는 진정 하나의 거대한 문화권으로 묶이고 말 것인가?

요사이 우리 사회는 터진 봇물처럼 마구 흘러드는 외래 문명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다. 세계화가 미국이라는 한 나라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은 얼마 전 영어를 아예 공용어로 채택하는 안을 검토하고 있다. 문화 인류학자들은 이번 세기가 끝나기 전에 대부분의 언어들이 이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예측한다. 언어를 잃는다는 것은 곧 그 언어로 세운 문화도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토록 긍지를 갖고 있는 우리말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20세기가 막 시작될 무렵, 뉴욕 센트럴 파크의 미국 자연사 박물관 앞 계단에서 몇 명의 영국인들이 자못 심각한 토의를 하고 있었다. 미 대륙을 어떻게 하면 제2의 영국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지를 논의한 것이다.

그들은 이미 미국의 동북부를 뉴잉글랜드, 즉 ?새로운 영국?이라 이름지었지만 그보다는 좀더 본질적인 영국화를 꿈꾸었다. 그들이 생각해 낸 계획은 참으로 기발하고도 지극히 영국적인 것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영국의 새들을 몽땅 미국 땅에 가져다 풀어놓자는 계획이었다. 그러면 미국은 자연스레 영국처럼 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래서 그 후 몇 차례에 걸쳐 그들은 영국 본토에서 셰익스피어의 새들을 암수로 쌍쌍이 잡아와 자연사 박물관 계단에서 날려 보내곤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새들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는 모르지만 그 영국계 미국인들은 참으로 몹쓸 짓을 한 것이다. 그 많은 새들은 낯선 땅에서 비참하게 죽어 갔고, 극소수만이 겨우 살아 남았다. 그런데 그들 중 유럽산 찌르레기는 마치 제 세상이라도 만난 듯 퍼져나가 불과 100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참새를 앞지르고 미국에서 가장 흔한 새가 되었다.

우리 나라에도 몇몇 도입종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예전엔 청개구리가 울던 연못에 요즘은 미국에서 건너온 황소개구리가 들어앉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삼키고 있다. 어찌나 먹성이 좋은지 심지어는 우리 토종 개구리들을 먹고 살던 뱀까지 잡아먹는다. 토종 물고기들 역시 미국에서 들여온 블루길에게 물길을 빼앗기고 있다. 이들이 어떻게 자기 나라보다 남의 나라에서 더 잘 살게 된 것일까?

도입종들이 모두 잘 적응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절대 다수는 낯선 땅에 발도 제대로 붙여 보지 못하고 사라진다. 정말 아주 가끔 남의 땅에서 들풀에 붙은 불길처럼 무섭게 번져 나가는 것들이 있어 우리의 주목을 받을 뿐이다. 그렇게 남의 땅에서 의외의 성공을 거두는 종들은 대개 그 땅의 특정 서식지에 마땅히 버티고 있어야 할 종들이 쇠약해진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것들이다. 토종이 제자리를 당당히 지키고 있는 곳에 쉽사리 뿌리내릴 수 있는 외래종은 거의 없다.

제 아무리 대원군이 살아 돌아온다 하더라도 더 이상 타문명의 유입을 막을 길은 없다. 어떤 문명들은 서로 만났을 때 충돌을 면치 못할 것이고, 어떤 것들은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게 될 것이다.

결코 일반화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스스로 아끼지 못한 문명은 외래 문명에 텃밭을 빼앗기고 말 것이라는 예측을 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싶다. 내가 당당해야 남을 수용할 수 있다.

영어만 잘 하면 성공한다는 믿음에 온 나라가 야단법석이다. 배워서 나쁠 것 없고, 영어는 국제 경쟁력을 키우는 차원에서 반드시 배워야 한다. 하지만 영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한글이다. 한술 더 떠 일본을 따라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이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글을 제대로 세우지 않고 영어를 들여오는 일은 우리 개구리들을 돌보지 않은 채 황소개구리를 들여온 우를 또다시 범하는 것이다.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일은 새 시대를 살아가는 필수 조건이다. 하지만 우리 한글을 바로 세우는 일에도 소홀해서는 절대 안 된다. 황소개구리의 황소 울음 같은 소리에 익숙해져 청개구리의 소리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그 여자네 집

박 완 서(朴婉緖)

지난 여름 작가 회의에서 북한 동포 돕기 시 낭송회를 한 적이 있다. 시인들만 참여하는 줄 알았더니 각계 원로들도 자기가 평소 애송하던 시를 낭송하는 순서가 있다고, 나한테도 한 편 낭송해 달라고 했다. 내가 원로 소리를 듣게 된 것이 당혹스러웠지만, 북한 돕기라는 데 핑계를 둘러대고 빠질 만큼 빤질빤질하지는 못 했나 보다.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명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낭송하고 싶은 시가 있었다는 게 아니었을까. 그 무렵 나는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이라는 시에 사로잡혀 있었다. 김용택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일 뿐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라고는 말 못 하겠다. 마찬가지로 ?그 여자네 집?이 그의 많은 시 중 빼어난 시에 속하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그 여자네 집?은 다음과 같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언듯언듯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여하고 싶은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은 집

참새 떼가 지저귀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허리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히,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각.을.하.면……

내가 ?녹색 평론?에서 그 시를 처음 읽고 깜짝 놀란 것은, 이건 바로 우리 고향 마을과 곱단이와 만득이 이야기다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칠순이 훨씬 넘은 장만득 씨는 아직도 문학 청년 기질을 가지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춘 문예 철만 되면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했다. 가슴이 울렁거린 게 아니라 응모도 해 봤으리라고 나는 넘겨짚고 있다. 그 울렁거림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울렁거림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 시가 김용택이라는 유명한 시인의 시가 아니라 처음 들어 보는 시인의 시였다면 나는 장만득 씨가 가명으로 등단을 했으리란 걸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시를 읽고 또 읽었다. 처음에 희미했던 영상이 마치 약물에 담근 인화지처럼 점점 선명해졌다. 숨어 있던 수줍은 아름다움까지 주체할 수가 없어서 혼자서 느릿느릿 포도주 한 병을 비웠다.

곱단이는 범강장달이 같은 아들을 내리 넷이나 둔 집의 막내딸이자 고명딸이었다. 부지런한 농사꾼 아버지와 착실한 아들들은 가을이면 우리 마을에서 제일 먼저 이엉을 이었다. 다섯 장정이 휘딱 해치울 일이건만 제일 먼저 곱단이네 지붕에 올라앉아 부산을 떠는 건 만득이였다. 만득이는 우리 동네의 유일한 읍내 중학생이라 품앗이 일에서는 저절로 제외되곤 했건만 곱단이네가 일손이 모자라는 집도 아닌데 제일 먼저 달려들곤 했다. 곱단이 작은오빠하고 만득이는 친구 사이였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만득이가 곱단이네 집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고 싶어하는 게 친구네 집이라서가 아니라 그 여자, 곱단이네 집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부엌에서 더운 점심을 짓느라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따뜻한 가을날, 곱단이네 지붕에 제일 먼저 뛰어올라 깃발처럼 으스대는 만득이를 보고 동네 노인들은 제 색시가 고우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더니만, 하고 혀를 찼지만 그건 곧 만득이가 곱단이 신랑이 되리라는 걸 온 동네가 다 공공연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둘 사이는 그들보다 어린 우리 또래들 사이에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우리들은 그들 사이를 연애를 건다고 말하면서 야릇하게 마음 설레곤 했다. 40년대의 보수적인 시골 마을에서도 젊은 남녀가 부모 몰래 사랑을 나누는 일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나보다. 누가 누구하고 바람이 났다던가, 눈이 맞았다던가, 심지어는 배가 맞았다는 소문까지 날 적이 있었다. 그건 부모가 얼굴을 못 들고 다닐 만한 스캔들이었고, 그 뒤끝도 거의 다 너절하거나 께적지근한 것이었다.

곱단이하고 만득이가 좋아하는 것을 바람났다고 말하지 않고, 연애 건다고 말한 것은 그런 스캔들과 차별짓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로서는 일종의 애정이요 동경이었다. 남자들은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하고, 여자들은 어깨 너머로 언문을 해독할 수 있을 정도로 까막눈은 면했다 하나 읍에서 이십여 리나 떨어진 이 마을에서 신식 학교 교육은 아지 먼 풍문이었다. 그러나 기회만 닿으면 자식에게만은 시켜 보고 싶은 거였다. 연애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도시에서 배운 사람들이 하는 개화된 풍속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사사건건 트집잡기 좋아하는 노인네들한테까지 그들의 연애는 일찌거니 인정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미처 연정을 느끼기 전부터 둘이 짝이 된다면 얼마나 보기 좋은 한 쌍이 될까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거워한 게 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만득이나 곱단이네나 일 년 계량하기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을 만한 토지를 가진 자작농이었고, 인품이 후하여 어려운 사람 살필 줄 아는 집안이었다. 만득이는 위로 누나들만 있고, 곱단이는 오빠들만 있어서, 기다리던 귀한 아들 딸이었다. 제집에서 귀히 여기는 자식은 남들도 한 번 볼 거 두 번 보면서 덕담을 아끼지 않는 법이다. 그들 또한 그러하였다.

곱단이는 시골 아이답지 않게 살갗이 희고, 맑은 눈에 속눈썹이 길었다. 나는 그녀의 속눈썹이 얼마나 길었는지 표현할 말을 몰랐었는데 김용택의 시 중에서 마침내 가장 알맞은 말을 찾아 냈다. 함박눈이 내려앉아서 쉴 만큼 길었다. 함박눈은 녹아 이슬방울이 되고 촉촉이 젖은 눈썹이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그늘을 드리우면, 목석의 애간장이라도 녹일 듯 애틋한 표정이 되곤 했다. 만득이는 총명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고, 생긴 것 또한 관옥 같았다. 촌구석에서는 드문 인물들이었다. 만득이가 개천에서 난 용이라면 곱단이는 진흙탕에 핀 연꽃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이 장차 신랑 각시가 되면 얼마나 어여쁜 한 쌍이 될까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이구동성으로 두 사람의 천생연분을 점친 것이다. 양가의 처지 또한 서로 기울지도 넘치지도 않았고, 어른들은 소박하고 정직하여 남들이 사윗감 며느릿감으로 점찍어준 이이들을 어려서부터 눈여겨보며 아름답고 늠름하게 자라는 걸 서로 기특해하며 귀여워하였다. 곱단이와 만득이는 우리 마을의 화초요 꿈이었다.

그러나 한두 번이라도 중매를 서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남 보기에 하늘이 정해 준 배필처럼 어울리는 한 쌍이 있어 그들을 맺어 주는 것에 거의 소명 의식 같은 걸 느끼고 중매에 나서지만 본인은 의외로 냉담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남자와 여자가 서로 연정을 느끼는 건 신의 장난질처럼 인간의 계획 밖의 일이다. 만이 나서서 잘 되기를 꾀하거나 도와 주려고 하면 되레 어깃장을 놓은 속성까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만득이와 곱단이는 마을 사람들의 꿈을 배반하지 않았다. 곱단이가 만득이만 보면 유난히 부끄럼을 타기 시작한 게 그 증거였다. 곱단이가 만득이 때문에 방구리를 깨트린 일은 두고두고 동네 사람들의 입초시에 오르내렸다. 윗말 아랫말 합쳐야 이십 여 호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라 우물이 하나밖에 없었다. 물긷는 일은 전적으로 아낙네들 몫이었고, 물동이를 이고도 동이를 손으로 잡는 법 없이 두 손을 자유롭게 놀리며, 고개도 이리저리 돌려 볼 것 다 보고 다닐 수 있어야 비로소 살림에 관록이 붙은 주부였다. 계집애들은 엄마들의 그런 솜씨에 찬탄의 눈길을 보내는 한편, 언젠가는 자기들도 그런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감을 가졌음직하다. 계집애들은 어려서부터 물동이를 이고 싶어했다. 아이들도 능히 일 수 있는 작은 물동이를 방구리라고 했다. 방구리는 실용보다는 딸애들의 놀이 기구에 가까워서 깨트리기도 잘 했다. 계집애를 얕볼 때, 쬐그만 계집애란 말 대신 방구리만한 계집애로 통하는 게 우리 마을이었다.

곱단이는 귀한 딸이고 올케가 둘씩이나 있어서 물동이 같은 거안 이어도 됐건만 자기 몫의 방구리는 가지고 있었고, 동무들이 하는 건 다 해 보고 싶은 나이였다. 그러나 머리에 인 방구리 손잡이를 양손으로 움켜잡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못 때는 초보였다. 그렇게 방구리로 물을 길어 가는데 저만치서 만득이가 오는 게 보였다. 만득이는 방구리를 들어 주려고 급히 달려오고 그걸 본 곱단이는 에구머니나, 흘러내린 치마말기를 치켜올리려고 급히 방구리 손잡이를 놓아버린 것이다. 방구리가 깨진 건 말할 것도 없다. 곱단이가 열너덧 살 가슴이 살구씨만큼 부풀어올랐을 무렵이었다. 저고리를 짧게 입고 치마말기로 가슴을 동일 때라 임질을 할 때면 겨드랑과 가슴이 드러나게 돼 있었다. 그 무렵의 우리 고장의 풍습으로는 젊은 여자들도 거기에 대한 수치감이 별로 없었다. 임을 이고 가는 엄마 뒤에 업힌 아이가 겨드랑 밑으로 엄마의 앞가슴을 더듬거나 끌어당겨 빨기까지 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가슴에 대한 수치심도 일종의 문화 현상이 아닐까. 그 시절엔 엄마의 가슴은 아이들의 밥그릇 정도로 여겼던 반면 배꼽을 드러내는 건 수치스럽게 여겼다. 처녀는 좀 달랐겠지만 그런 풍토에서 방구리를 깨트리면서까지 가슴을 가리고 싶어했던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마을에서 만득이가 제일 먼저 읍내 중학교로 진학하자 곱단이는 아버지를 졸라 십 리 밖에 새로 생긴 소학교 분교에 입학했다. 방구리 사건이 있고나서였다. 분교를 간이 학교라고 불렀고, 입학하는 데는 연령 제한 같은 것도 없었다. 남학생 중에는 아이 아범도 있을 정도였다. 중학교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만득이도 소학교만 나오고 몇 년 집에서 농사를 거들다가 서울로 시집 간 큰누나가 신식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해서 상급 학교에 가게 됐으니 늦공부인 셈이었다.

간이 학교는 우리 마을에서 읍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긴내골이라는 오십 여 호가 넘는, 인근에서는 가장 큰 마을에 있었다. 고개를 두 번 넘고 시냇물을 한 번 건너야 했다. 만득이와 곱단이가 등하교길을 자연스럽게 같이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이 유별나 보이지는 않았다. 늘 곱단이가 한참 뒤져서 걷고 만득이는 휘적휘적 앞서 가다가 기다려주곤 했다. 부부가 같이 외출을 해도 나란히 걷지를 못하고 아내가 한참 뒤에서 걷는 걸 예절처럼 알던 시대였다. 곱단이보다 갈 길이 곱절이 되는 만득이가 갑갑한 곱단이의 걸음걸이를 참지 못하고 휭하니 먼저 가버릴 적도 있었다.

들을 적시는 개울물이 도처에 그물망처럼 퍼져 있는, 물이 흔한 고장이었지만 다리를 통해 건너야 하는 긴내골의 시냇물은 유난히 아름다운 강이었다. 물은 깊지 않았지만 골이 깊어서 길에서 수면까지 비스듬히 가파른 둔덕에는 잗다란 들꽃들이 봄 여름 가을 내쉼없이 피었다 지곤 했고, 흰 자갈과 잔모래와 꽃그림자 사이를 무리지어 유영하는 물고기들과 장난치듯 부서지는 잔물결은 수정처럼 투명했다. 그 시냇물에는 흙다리가 놓여 있었다. 양쪽 둔덕을 두 개의 기둥목으로 가로질러 놓고, 그 사이를 새끼줄이나 칡넝쿨 같은 것으로 엮고는 진흙으로 빤빤하게 싸바른 흙다리는 마치 오솔길의 연속처럼 편안했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오가나 봄의 해토 무렵엔 흙다리 곳곳에 구멍이 뚫리기도 하고 미끌거리기도 했다. 그런 불편은 잠깐, 곧 누군가의 손길로 감쪽같이 보수가 되곤 했지만 문제는 장마중이거나 미처 보수를 하기 전이었다. 특히 계집애들은 구멍난 흙다리를 건너기를 무서워했다. 차라리 둔덕을 내려가 신발 벗고 점벙점벙 강물로 들어가는 게 안심스러웠다. 물이 불어 봤댔자 허리 정도밖에 안 찼지만 그럴 때는 앞서서 작대기로 물의 깊이를 알려 주고 계집애들을 인도하는 게 남학생들의 중요한 사내 구실이었다. 그러나 만득이는 곱단이가 사내 녀석들하고 치마를 배꼽 위까지 걷어올리고 속바지를 적셔 가며 물을 건너는 걸 참을 수 없어했다. 등굣길은 물론 하굣길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맞춰 지키고 있다가 구멍 뚫린 흙다리 위로 건너게 해 주었다. 흙다리를 건너면서 곱단이가 얼마나 무섬을 타고, 앙탈을 하고, 그러면 만득이는 그걸 다 받아 주며 다독거리느라 길지도 않은 흙다리 위에서 둘이 몇 번씩이나 서로 얼싸안는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지곤 했다. 그러나 구닥다리 노인들도 그런 소문을 망신스러워하지 않고 귀엽게 여겼다. 둘은 어차피 혼인할 테고 둘이 서로 좋아하는 것은 아름다운 한 쌍의 새가 부리를 비비는 것처럼 예쁘게만 보였다. 흙다리가 아니라 연애다리라는 소리도 악의라곤 없었다.

중학교 상급반으로 오르면서 만득이는 문학에 눈을 뜨게 된 것같다. 한동안 그는 ?오뇌(懊惱)의 무도(舞蹈)?라는 시집을 책가방에 넣지 않고 옆구리에 끼고 다닌 적이 있는데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학교 문턱에도 못 가 본 이도 남자들은 한문을 다 읽을 줄 알았다. 서당이 마을 사내애들의 의무 교육 기관처럼 돼 있었다. ?오뇌의 무도?라고 붙여서 읽을 수는 있어도 그게 무슨 뜻인지 확 오는 게 아니었다. 글자는 한자건만 그 낱말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이국적이고 하이칼라한 것이었다. 어디서 흘러들어온 말인지 하이칼라란 말이 우리 마을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할 때였다. 어딘지 이국적이고 약간 겉멋 들어 보이는 건 뭐든지 하이칼라라고 했다.

마을 젊은이들 사이에 춘원 바람을 일으킨 것도 만득이었다. ?흙? ?단종애사?, ?무정?같은 춘원의 책이 젊은이들 사이를 돌며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읽혔다. 책은 나달나달해졌지만 거기 한번 맛들인 청년들의 눈빛은 별처럼 빛났다. 그러나 곧 춘원이 창씨개명에 앞장서고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연설을 했다는 말을 퍼트려 청년들을 실의에 빠뜨리고, 헷갈리게 만들 것도 만득이였다. 그가 마을 청년들의 정신의 맥을 쥐었다 폈다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말기에 접어들면서 마을의 형편도 날로 어려워지고 있었지만, 젊은이들의 정신의 기갈은 그보다 더 심각하였기 때문에 먹혀들기도 그만큼 쉬었다. 만득이가 퍼트린 책 때문에 마음이 통하게 된 젊은이들이 모여서 문학 얘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울분을 토로하기도 하는 모임이 자연히 형성됐는데, 거기서도 중심 인물은 물론 만득이었다. 그러나 고작 만학의 중학생이었다. 식민지 청년의 의식 있는 모임이라기보다는 만득이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장이었다. 그는 가끔 자기가 쓴 시를 비장한 어조로 읽어 주곤 했는데 그 중 곱단이가 눈물이 글썽할 정도로 좋아하는 시가 나중에 알고 보는 임화의 시 뒷부분이었다.

오늘도 연기는

구름보다 높고,

누구이고 청년이 몇,

너무나 좁은 하늘을

넓은 희망의 눈동자 속 깊이

호수처럼 담으리라,

벌리는 팔이 아무리 좁아도,

오오! 하늘보다 너른 나의 바다.

이런 시였는데 팔을 벌리고 ?오오! 하늘보다 너른 나의 바다? 할 때는 어찌나 격정적으로 목메어 부르는지 곱단이는 그 때마다 만득이를 더 넓은 세상으로 내놓아야 할 것 같아 가슴이 떨린다고 했다.

곱단이는 나에게 가끔 만득이가 보낸 편지를 보여 줄 적이 있었다. 누가 보여달랜 것도 아닌데 보여 주는 게 계면쩍었던지 혼자 보기 아까워서……라는 말을 덧붙이곤 하였다. 연애 편지를 혼자 보기 아까워한다는 건 실상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건 보여 줘도 무관한 담백한 편지라는 뜻도 되지만, 곱단이 보기에 그럴듯한 문학적 표현을 자랑하고 싶어서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중 아직도 생각나는 것은 곱단이네 울타리 밑의 꽈리나무를 ?꼬마 파수꾼들이 초롱불을 빨갛게 켜들고 서 있는 것 같다?고 표현한 거였다. 당시 우리 동네 집들은 거의 다 개나리로 뒤란 울타리를 치고 살았다. 그리고 뉘 집이나 울타리 밑에서 꽈리가 자생했다. 봄에서 여름에 걸쳐서는 거기에 꽈리나무가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전혀 눈에 안 띄는 잡초나 다름없었다. 꽈리가 거기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건 풀숲이 누렇게 생기를 잃고 난 후였다. 익은 꽈리는 단풍보다 고왔고, 아닌게 아니라 초롱처럼 앙증맞았다. 그러나 그맘때면 붉게 물든 감잎도 더 고운 감한테 자리를 내주고, 들에서는 고추가 다홍빛으로 물들 때였다. 꽈리란 심심한 계집애들이 더러 입 안에서 뽀드득대는 것 외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하찮은 잡초에 불과했다. 우리집 울타리 밑에도 꽈리가 지천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흔해빠진 꽈리 중 곱단이네 꽈리만이 초롱에 불켜든 꼬마 파수꾼이 된 것이다. 만득이는 어쩌면 그리움에 겨워 곱단이네 울타리 밑으로 개구멍을 내려다 말고 발갛게 초롱불을 켜든 꼬마 파수꾼 때문에 이성을 찾은 거나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 흔해빠진 꽈리 중에서 곱단이네 꽈리만을 그렇게 특별한 꽈리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 마을엔 꽈리뿐 아니라 살구나무도 흔했다. 살구나무가 없는 집이 없었다. 여북해야 마을 이름도 행촌리(杏村里)였겠는가. 봄에 살구나무는 개나리와 함께 온 동네 꽃대궐처럼 화려하게 꾸며 주었지만, 열매는 시금털털한 개살구였다. 약에 쓰려고 약간의 씨를 갈무리하는 집이 있긴 해도 열매는 아이들도 잘 안 먹어서 떨어진 자리에서 썩어 갔다.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필 무엽엔 자운영과 오랑캐꽃이 들판과 둔덕을 뒤덮었다. 자운영은 고루 질펀하게 피고, 오랑캐꽃은 소복소복 무리를 지어가며 다문다문 피었다. 살구가 흙에 스며 거름이 될 무렵엔 분분히 지는 찔레꽃이 외진 길을 달밤처럼 숨가쁘고 그윽하게 만들었다.

?그 여자네 집?을 읽으면서 돌이켜 보니 행촌리의 그 흔한 살구나무 중에서도 곱단이네 살구나무는 특별났던 것 같다. 다 같은 초가집 중에서도 만득이에겐 곱단이네 지붕이 유난히 샛노랬던 것처럼, 그 흔해빠진 꽈리나무 중에서 곱단이네 꽈리나무만이 특별났던 것처럼. 곱단이네는 행촌리 윗말 첫 집이었다. 뒷동산에서 흘러내린 개울물이 곱단이네를 휘돌아 아랫말로 흐르면서 만득이네 문전옥답 논배미를 지나게 돼 있었다. 곱단이네 살구나무는 곱단이 아버지가 딸과 딸의 동무들을 위해 튼튼한 그네를 매 줄 정도로 큰 나무였다. 만득이는 아마 개울물이 하얗게하얗게 실어나르는 살구꽃을 연서처럼 울렁거리며 바라보았을 것이다.

1945년 봄에도 행촌리에 살구꽃 피고, 꽈리꽃, 오랑캐꽃, 자운영이 피었을까. 그럴 리 없건만 괜히 안 피고 말았을 거 같다. 그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만득이와 곱단이의 연애도 끝나고 말았을까. 만학이었던 만득이는 읍내의 사 년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징병으로 끌려나갔다. 며칠간의 여유는 있었고, 양가에서는 그 사이에 혼사를 치르려고 했다. 연애 못 걸어 본 총각도 씨라도 남기려고 서둘러 혼처를 구해 혼사를 치르는 일이 흔할 때였다. 더군다나 만득이는 외아들이었고, 사주단자는 건네지 않았어도 서로 연애 건다는 걸 온 동네가 다 아는 각싯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혼사 치르기를 거부했다. 그건 그의 사랑법이었을 것이다. 남들이 다 안 알아 줘도 곱단이한테만은 그의 사랑법을 이해시키려고, 잔설이 아직 남아 있는 이른 봄의 으스름 달밤을 새벽닭이 울 때까지 곱단이를 끌고 다녔다고 한다. 곱단이가 그의 제안에 마음으로부터 승복했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끌려 다니지를 않고 어디 방앗간 같은 데서 밤을 지냈다고 해도 만득이의 손길이 곱단이의 젖가슴도 범하질 못하였으리라는 걸 곱단이의 부모도, 마을 사람들도 믿었다. 그런 시대였다. 순결한 시대였는지, 바보 같은 시대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때 우리가 존중한 법도라는 건 그런 거였다.

만득이네 대문에 일본 깃대와 출정 군인의 집이라는 깃발이 만장처럼 처량히 휘날리고, 그 집 사랑에서 며칠씩 술판이 벌어져도 밀주 단속에도 안 걸리고 …… 그렇게 그까짓 열흘 눈 깜박할 새가 지나가 만득이는 마침내 입영을 하게 됐다. 만득이가 꼭 살아 돌아올 테니 기다리라고 곱단이를 설득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곱단이가 딴데 시집 갈 아이도 아니거니와 식구들 역시 딴데 시집 보낼 엄두라도 낼 사람들이 아니었으므로, 설득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그럴 것이면 왜 혼사를 치르고 나서 떠나면 안 되냐는 곱단이의 지당한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곱단이는 이름처럼 마음씨도 비단결 같은 처녀였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걸 굽힐 만큼 호락호락하진 않았으니까. 사위스러워서 아무도 입에 올리진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만득이가 사지(死地)로 가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곱단이를 과부 안 만들려는 그의 깊은 마음을 내심 여간 대견히 여기는 게 아니었다. 만득이와 곱단이는 요샛말로 하면 마을의 마스코트라고나 할까. 둘 다 행복해지지 않으면 재앙이라도 내릴 것처럼 지켜 주고 싶어했고, 만득이의 처사는 그런 소박한 인심에도 거슬리지 않는 최선의 것이었다.

만득이가 떠난 후에도 마을 청년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가 마을에 남자라고는 중늙은이 이상만 남게 되었다. 곱단이 오빠들도 도시로 나가 공장에 취직한 셋째오빠와 부모님을 모시는 큰 오빠 빼고 두 오빠가 징용으로 나가 아들 부잣집이 허룩해졌다. 장정만 데려가는 게 아니라 양식 공출도 극악해져 그 풍요하던 마을도 앞으로 넘길 보릿고개 걱정이 태산 같았다. 궂은 날 부침질만 해도 서로 나누느라 한 채반은 부쳐야 했던 인심도 스스로 금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아주 나쁜 소식이 염병보다 더 흉흉하고 걷잡을 수 없이 온 동네를 휩쓸었다. 전에도 여자 정신대에 대해서 아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 본토나 남양군도에 가서 일하고 싶은 처녀들은 지원하면 보내 주고 나중에 집에 송금도 할 수 있다는 면사무소의 공문이 한바탕 돈 후였지만 그럴 생각이 있는 집은 한 집도 없었고, 설마 돈벌이를 강제로 보내리라고는 아무도 짐작을 못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문은 그게 아니어서 몇 사람씩 배당을 받은 면사무소 노무과 서기들과 순사들이 과년한 딸 가진 집을 위협도 하고 다짜고짜 끌어가는 일까지 있다고 했다. 설마설마 하는 사이에 더 나쁜 일이 생겼다. 그건 같은 면 내에서 생긴 일이기 때문에 소문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동구 밖에서 감춰 놓은 곡식을 뒤지려고 나타난 면서기와 순사를 보고 정신대를 뽑으러 오는 줄 지레짐작을 한 부모가 딸애를 헛간 짚더미 속에 숨겼다고 했다. 공출 독려반들은 날카로운 창이 달린 장대로 곡식을 숨겨 두었음직한 곳이면 닥치는 대로 찔러보는 게 상례였다. 헛간에 짚가리로 창을 들이대는 것과 그 부모네들이 안 된다고 비명을 지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창 끝에 처녀의 살점이 묻어나왔다고도 하고, 꿰진 창자가 묻어 나왔다고도 하고, 처녀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도 하고, 피를 많이 흘리면서 달구지로 읍내 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고도 했다. 아무튼 그 소문의 파문은 온 면내의 딸 가진 집을 주야로 가위눌리게 했다. 끔찍한 일이었다.

도시에서 군수 공장에 다니는 곱단이 오빠가 종아리에 각반을 차고 징 달린 구두를 신은 중년 남자를 데리고 내려왔다. 신의주에 있는 중요한 공사판에서 측량 기사로 있는, 한 번 장가 갔던 남자라고 했다. 곱단이 부모로부터 그 흉흉한 소문을 듣고 급하게 구해 온 곱단이 신랑감이었다. 첫장가 든 부인이 십 년이 가깝도록 아이를 못 낳아 내치고, 새장가를 든다는 그는 곱단이의 그 고운 얼굴보다는 별로 크지 않은 엉덩이만 유심히 보면서, 글쎄, 아이를 잘 낳을 수 있을까? 연방 고개를 갸우뚱, 그닥 탐탁치 않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워낙 총각이 씨가 마른 시대였다. 게다가 지금 그 늙은 신랑감이 하고 있는 일은 군사적인 중요한 일이라 징용은 절로 면제된다고 한다. 곱단이네는 그 고운 딸을 번갯불에 콩 궈 먹듯이 그 재취 자리로 보내 버렸다.

곱단이가 어떤 심정으로 그 혼사에 응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피를 보면 멀쩡한 사람도 정신이 회까닥해진다고 하지 않는가. 피 묻은 소문도 마찬가지였다. 곱단이네 식구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이성을 잃고 말았다. 만득이와 곱단이의 연애를 어여삐 여기고, 스스로 증인이 된 마을 어른들도 이제 곱단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일본군한테 내주지 않는 일뿐이었다. 더군다나 곱단이 어머니는 피가 무서워 닭모가지 하나 못 비트는 착하디착한 위인이었다. 그 피 묻은 소문에 살이 떨려 우두망찰했을 것이다. 곱단이는 만득이와의 언약을 저버리고 딴데로 시집을 가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도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을 만큼 모질지는 못했다.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넋을 놓아 버리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곱단이네서 혼사를 치르고 사흘 만에 신랑을 따라 집을 떠나는 곱단이는 사자(死者)를 분단장해 놓은 것처럼 섬뜩하니 표정이라곤 없었다.

멀고 먼 신의주로 시집 가 첫 근친도 오기 전에 해방이 되었다. 그녀는 열아홉에 떠난 지붕 노란 집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 고장은 아슬아슬하게 38 이남이 되어 북조선의 신의주와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만득이는 살아서 돌아왔다. 그 이듬 해 봄 만득이는 같은 행촌리 처녀인 순애와 혼사를 치렀다. 순애는 투덕투덕 복 있게 생긴 처녀였지만 곱단이에겐 댈 것도 아니었다. 혼삿날 마을 풍속대로 신랑을 달았는데 군대나 징용 갔다가 심성이 거칠 대로 거칠어져 돌아온 청년들이 어찌나 호되게 신랑 발바닥을 때렸던지 만득이가 엉엉 울었다고 한다. 만득이 또한 군대 가서 고초를 겪을 만큼 겪었는데 그까짓 장난삼아 치는 매를 못 견디어 울었을까? 울고 싶어, 실컷 울고 싶었을 것 같다. 이렇게 만득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곱단이와 연관지어 생각하고 싶은 게 아직도 두 사람의 어여쁜 사랑을 못 잊어 하는 마을 사람들의 심정이었으니 그리로 시집 간 순애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마을 사람들이 금실을 확인해 볼 겨를도 없이 곧 서울로 세간을 냈다. 외아들이었지만 서울 누나가 동생의 일자리를 구해놓고 데려갔다.

6․25동란 후 38선 대신 그어진 휴전선은 행촌리를 휴전선 이북 땅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동안 서로 만나지는 못했어도 귀향길에 만득이가 순애하고 곧잘 산다는 소식 정도는 들을 수 있었는데 그나마 못 듣게 되었다. 6․25 때 죽지 않았으면 같은 서울 하늘 밑 어디메 살아 있겠거니, 문득문득 생각이 나던 것도 잠시 만득이는 내 기억 속에서 아주 사라져 버렸다. 서울살이라는 게 촌수 닿는 친척도 결혼 청첩장이나 부고나 받아야 마지못해 챙길 정도로, 이해 관계가 닿지 않는 인간 관계는 지딱지딱 잊게 돼 있었다.

만득이를 서울에서 다시 만난 지는 채 십 년도 안 된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 때까지는 생존해 계시던 삼촌이 우리 고향 군민회에 가 보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간 자리에서였다. 실향민들이 마음을 달래려는 자리가 흔히 그렇듯이 노인네들 천지였다. 매년 열리는 군민회라지만 삼촌처럼 처음 간 분은 서로 알아보는 데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알아보는 걸 도와 주려는 주최측의 배려로 면 단위로 나눠서 자리를 잡았고, 우리끼리 다시 리 단위로 무리를 만들었다. 행촌리는 나하고 삼촌하고 낯 모르는 노부부 네 사람밖에 없었다. 그 이듬 해 돌아가신 삼촌은 그 때도 이미 여든 가까운 연세셔서 고향의 흙냄새 대신 고향 사람 체취라도 맡고 싶은 마음에 느닷없이 군민회 나들이를 하고 싶어한 것 같다. 죽을 날이 가까우면 안 하던 짓을 하게 되는 걸 자손들은 가벼운 망령 정도로 취급했다. 오죽해야 조카가 모시고 가게 됐을까. 행촌리 노신사도 삼촌을 알아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냥 어른 대접으로 행촌리 살던 아무개라고 공손하게 인사를 했지만 나는 별로 귀담아듣지 않아 못 알아들었다. 나중에 그가 나에게 명함을 주며 인사를 청하지 않았으면 아마 끝까지 못 알아보았을 것이다. 무슨 전업사 대표 장만득으로 돼 있는 명함을 보고 나서야 뭔가 이상해서 다시 한 번 쳐다보니, 젊은 날의 그가 어디 숨어 있다가 고개를 내밀듯이 분명하게 떠올랐다. 몸집도 별로 불지 않고 얼굴도 잘 늙지 않는 동안이었다. 나하고 그는 그닥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는 곱단이 것이었으므로 당시의 우리 또래들은 다들 그를 소 닭 보듯 하는 걸 예절로 알았다. 그건 장만득 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워낙 마을에서 유명했지만, 유명 인사가 팬을 알아보란 법은 없다. 나는 그에게 하나도 안 변했다고 말하고 나서 쑥스럽게 웃었다. 한참 동안 못 알아본 주제에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순애를 떠올리는 건 더욱 불가능했다. 이 유복하고 금실 좋아 보이는 노부부 중 한쪽이 순애인지도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순애 쪽에서 나에게 아는 척을 하며 하나도 안 변했다고 해 줘서 순애려니 했다. 나는 학교 다닌답시고 학교도 안 다니는 집에서 바느질이나 배우는 나보다 나이 많은 애들하고 동무한 적이 없었다. 만득이하고 순애는 보기 좋은 부부였다. 그냥 헤어지기는 섭섭하여 서로 전화 번호를 교환했는데 뜻밖에도 순애가 자주 전화를 해서 점심도 같이 하고 쇼핑도 같이 하는 교분이 이어졌다. 그 여자는 장만득 씨가 아직도 곱단이를 못 잊고 있다는 얘기를 하소연했다.

아우님, 다들 나더러 팔자 좋다고 하지만 나 같은 빛 좋은 개살구도 없다우. 아우님이니까 얘기야. 딴 사람들하테 아무리 얘기해봤 댔자 나만 이상한 사람 되지 누가 내 속을 알겠수. 돈 잘 벌고 생전 외도라곤 모르고, 애들한테 잘 하고, 나한테도 죄지은 것 없이 죽는 시늉도 하라면 하는 남편이 어디 있냐고들 하지만, 아마 나처럼 지독한 시앗을 보고 사는 년도 없을 거유. 곱단이년이 내 남편한테 찰싹 붙어 있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머리채를 잡을 수가 있나, 망신을 줄 수가 있나, 미칠 노릇이라우. 그래도 내가 아우님을 만났게 망정이지, 그렇게 않았으면 이 억울한 사정을 누구한테 말이라도 할 수가 있겠수. 그 영감 지금도 글쎄 그년한테 연애 편지를 쓴다니까요. 설마라고? 나도 처음엔 설마했지. 지도 쑥스러운지 시를 쓴다고 합디다. 내가 몰래 훔쳐 봤더니 뭐 ?그대 어깨에 살구꽃 내리네? 아니면 ?살구꽃은 해마다 피는데, 우리 임은 왜 한 번 가고 다시 아니 오시나.? 이따위가 연애 편지지 그래 시란 말이유. 그뿐인 줄 알아요? 우리가 작년 중국 여행을 갔을 적에도 얼마나 내 오장을 뒤집었다구요. 속 모르고 따라간 나도 배알 빠진 년이지만. 백두산 구경하고 나서, 단동인가 어디서 배 타고 북한 땅 가까이까지 가 보는 압록강 유람선 관광이라는 걸 했는데, 정말 저쪽 북한 땅 강가에 놀이 나온 아이들까지 보이게 배가 가까이 가니까 나도 마음이 좀 이상해집디다. 그냥 뱃놀이를 편하게 즐기는 건 다 중국 사람들이고,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지는 건 다들 남한 사람들이더라구요. 그 정도는 당연한 거지. 근데 우리 영감은 별안간 뱃전에다 고개를 떨구고 소리내어 엉엉 울지를 않겠수. 머리가 허연 늙은이가 온몸을 들먹이면서. 분단의 슬픔이라구? 아이구, 그게 아니라 거기서 보이는 땅이 신의주였어요. 곱단이년 사는 데가 닿을 듯 닿을 듯, 닿지는 않으니까 미치겠는 거지 뭐. 당장 강으로 밀어 처넣고 싶더라구요. 헤엄쳐서 어서 그년한테 가라구요. 그뿐인 줄 알아요. 여기서 돈 잘 벌고 사업 잘 하다가 느닷없이 아이들은 여기서 키우고 싶지 않다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잔 적이 다 있었다니까요. 지나 내나 영어 한 마디 못 하는 주제에 이민을 가자는 속셈이 뭐였겠수? 뻔하지. 미국 시민권을 얻으면 북한을 마음대로 드나든다면서요. 내가 그 꼬임에 넘어갈 성싶어요. 가려면 혼자 가라구, 가서 그년 데려다 잘 살아 보라고 했더니 나를 정신 병자 취급하면서 주저앉습디다. 아이들한테는 끔찍한 양반이니까요. 실상 그거 하나 믿고 여지껏 서러운 세상 견딘 거죠.

간추리면 대강 그런 얘기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얘기는 곱단이와 만득이가 연애 걸던 시절을 아는 사람 아니면 도저히 먹혀들 것 같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여자 레퍼토리는 그 몇 가지의 에피소드에 국한돼 있었다. 아직도 만득이가 곱단이 생각만 한다는 증거를 더는 대지 못했고, 나도 비슷한 얘기를 하도 여러 번 반복해 들으니까 넌더리가 나면서 그 여자보다는 장만득 씨가 불쌍해질 무렵 그 여자의 부음을 듣게 됐다. 장만득 씨가 상처를 한 것이다. 고혈압으로 몇 년째 약을 복용하고 있었는데, 돌연 쓰러진 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사흘 만에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문상을 가서 그 여자의 영정 사진을 보고 섬뜩했다. 이십대 후반으로밖에 안 보이는 사진이었다. 요샌 영정 사진도 너무 늙은 건 보기 싫다고, 아주 늙기 전에 찍어 놓는다고는 하지만 칠순의 남편이 눈물을 떨구고 있는 앞에 이십대의 사진은 너무했다 싶었다. 자식들이 문상객들의 그런 눈치를 채고, 어머니는 평소에도 나 죽거든 늙어 빠진 영정 쓰지 말라고 부탁하시더니, 돌아가신 후 보니까 손수 마련해 놓으신 영정 사진이 있더라고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여자의 젊었을 적과 곱단이의 젊었을 적을 머릿속으로 비교하고 있었다. 댈 것도 아니었다. 내 상상 속에서 곱단이는 더욱 요요해지고, 그 여자는 젊다는 것 외엔 흔한 얼굴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제야 그 여자가 불쌍해졌다. 아아, 저 여자는 일생 얼마나 지독한 연적(戀敵)과 더불어 산 것일까. 생전 늙지도, 금도 가지 않는 연적이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적이었을까.

그 여자가 죽고 나서 만득이를 따로 만날 일이 있을 리 없었다.

그를 우연히 만난 것은 그가 상처하고나서도 이삼 년 후 엉뚱하게 정신대 할머니를 돕기 위한 모임에서였다. 뜻밖이었지만, 생전의 그의 아내로부터 귀에 못이 박이게 주입된 선입관이 있는지라 그가 그 모임에 나타난 것도 곱단이하고 연결지어서 생각되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모임이 끝난 후 그가 보이지 않자 나는 마치 범인을 뒤쫓듯이 허겁지겁 행사장을 빠져나와 저만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어가는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다짜고짜 따지듯이 재취 장가를 들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말하고 나서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다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덧붙이는 것이었다.

왜요? 곱단이를 못 잊어서요? 여긴 왜 왔어요? 정신대에 그렇게 한이 맺혔어요? 고작 한 여자 때문에. 정신대만 아니었으면 둘이서 혼인했을 텐데 하구요? 참 대단하십니다.

내 퍼붓는 말에 그는 대답 대신 앞장서서 근처 찻집으로 갔다. 그 나이에 아직도 싱그러움이 남아 있는 노인을 나는 마치 순애의 넋이 씐 것처럼 꼬부장한 마음으로 바라다보았다. 그가 나직나직 말했다.

내가 곱단이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는 건 순전히 우리 집 사람이 지어 낸 생각이에요. 난 지금 곱단이 얼굴도 생각이 안 나요. 우리집 사람이 줄기차게 이르집어 주지 않았으면 아마 이름도 잊어버렸을 거예요. 내가 곱단이를 그리워했다면 그건 아마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젊은 날에 대한 아련한 향수였겠지요. 아름다운 내 고향에서 보낸 젊은 날을 문득문득 그리워하는 것도 죄가 되나요. 내가 유람선상에서 운 것도 저게 정말 북한 땅일까? 남의 나라에서 바라보니 이렇게 지척인데 내 나라에선 왜 그렇게 멀었을까? 그게 서럽고 부끄러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복받친 거지, 거기가 신의주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오늘 여기 오게 된 것도, 글쎄요, 내가 한 짓도 내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지만 …… 아마 얼마 전 우연히 일본 잡지에서 정신대 문제를 애써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려는 일본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분통이 터진 것과 관계가 있겠죠. 강제였다는 증거가 있느냐? 수적으로 한국에서 너무 부풀려 말한다. 뭐 이런 투였어요. 범죄 의식이 전혀 없더군요. 그걸 참을 수가 없었어요. 비록 곱단이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지만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어요. 곱단이가 딴데로 시집가면서 느꼈을, 분하고 억울하고 절망적인 심정을요. 나는 정신대 할머니처럼 직접 당한 사람들의 원한에다 그걸 면한 사람들의 한까지 보태고 싶었어요. 당한 사람이나 면한 사람이나 똑같이 그 제국주의적 폭력의 희생자였다고 생각해요. 면하긴 했지만 면하기 위해 어떻게들 했나요? 강도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얼떨결에 십 층에서 뛰어내려 죽었다고 강도는 죄가 없고 자살이 되나요? 삼천 리 강산 방방곡곡에서 사랑의 기쁨, 그 향기로운 숨결을 모조리 질식시켜 버리니 그 천인공노할 범죄를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사람도 아니죠. 당한 자의 한에다가 면한 자의 분노까지 보태고 싶은 내 마음 알겠어요?

장만득 씨의 눈에 눈물이 그렁해졌다.

2단원 짜임새 있는 말과 글

용소와 며느리 바위

용소는 장연읍에서 한 이십 리 되는 거리에 있는데, 장연읍에서 그 서도 민요로 유명한 몽금포타령이 있는 데거든. 그 몽금포 가는 길 옆에 그 용소라는 것이 있는데 그 전설이 어떻게 됐냐 할 꺼 같으면, 그렇게 옛날 옛적 얘기지. 옛날에 그 지금 용소 있는 자리가 장재 첨지네 집터자리라 그래. 장재 첨지네 집터자린데, 거게서 그 영감이 수천 석 하는 부자루 아주 잘 살구 거기다 좋은 집을 짓구서 있었는데, 그 영감이 아주 깍쟁이가 돼서, 뭐 다른 사람 도무지 뭐 도와두 주지 않구, 돈만 모으던 그런 유명한 영감이래서 거기 사람들이 말하자면, ?돼지, 돼지? 하는 그런 영감이라네.

그래서 구걸하는 사람이 구걸을 와두 당최 주질 않구, 또 대개 중들이 인지 그 시주를 하러 와두 도무지 주지를 않구, 그런 아주 소문이 나쁘게 나 있는 영갬인데, 어느 여름철에 거기서 인지 그 용소 있는 데서 한 이십 리 가면 불타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불타산은 절이 많기 때문에 불타산이라는 그런 절이 있는데, 거게서 그 도승이, 그 영감이 아주 나쁘다는 소리를 듣구서, 우정 인지 그 집을 찾어가서 목탁을 치면서 시주를 해달라고, 그러니까 이 영감이 뛰어나가면서,

?이놈, 너이 중놈들이란 것은 불농불사하구, 댕기면서 얻어만 먹구 그러는데 우리 집에서는 절대루 인지 쌀 한 톨이라도 줄 수가 없으니까 가라구.?

소리를 질러두 그대루 그 중이 이제 가지를 않구섬날 독경을 하구 있으니까, 이 영감이 성이 나서 지금은 대개 삽이라는 게 있지마는 옛날에는 저 그것을 뭐이라구 하나, 부삽이라구 하나, 그거 있는데 그걸루 두엄더미에서 쇠똥을 퍼가 주구서는,

?우리 집에 쌀은 줄 꺼 없으니까 이거나 가져가라.?

하구서는 바랑에다가 쇠똥을 옇단 말야.

그래두 그 중은 조금두 낯색두 변하지 않구서, 거저 ?나무아미타불?만 부르다가 그 쇠똥을 걸머진 채 바깥으루 나오는데, 그 마당 옆에 우물이 있었는데 우물가에서 그 장재 첨지의 며느리가 인제 쌀을 씻구 있다가, 그 광경을 보구서, 그 중 보구서는 얘기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 천생이 고약해서 그런 일이 있으니까. 조금두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구.?

그러면서 쌀, 씻든 쌀을 바가지에다 한 바가지 퍼섬낭, 그 바랑에다 여줬단 말야. 그러니께 그 중이 며느리 보고 하는 말이,

?당신 집에 인제 조금 있다가 큰 재앙이 내릴 테니까, 당신 빨리 집으루 들어가서, 평소에 제일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어 있는지, 두세 가지만 가지구서 빨리 나와서는, 저 불타산을 향해서 빨리 도망질하라구.?

그랬단 말야. 그러니까 그 며느리가 급히 자기 집으루 들어가서, 방 안에 자기 아들을, 뉘어서 재우든, 아이를 들쳐업구, 또 그 여자가 인지 명지를 짜던 그 명지 도토마리를 끊어서 이구 나오다가, 그 또 자기네 집에서 개를, 귀엽게 기르던 개를 불러 가지구서 나와서는, 그 불타산을 향해서 달음박질루 가는데, 어린애를 업구 명주 도토마리를 이구, 개를 불러 가지구 그 불타산을 향해서 얼마쯤 가는데, 그 때까지 아주 명랑하던 하늘이 갑자기 흐리면서 뇌성벽력을 하더니 말야. 근데 그 중이 먼저 무슨 주의를 시켰나면,

?당신, 가다가서 뒤에서 아무런 소리가 나두 절대루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는 거를 부탁을 했는데, 이 여인이 가는데 갑자기 뇌성벽력을 하면서 그 벼락 치는 소리가 나니까, 깜짝 놀래서 뒤를 돌아봤단 말야.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그만 화석이 됐어. 그 사람이 그만 화석이 되구 말았다는 게야. 개두 그렇게 화석이 돼서 그 자리에 서 있다고 하는데, 그 지금두 불타산 아래서 얼마 내려오다가서 그 비슥하니 거기 사람들은 이것이 며느리가 화석된 게라고 하는 바위가 있는데, 역시 사람 모양하고, 뭐 머리에 뭐 인 거 같은 거 하고, 그 아래 개 모양 겉은, 그런 화석이 아직도 있단 말야. 한데 그때 그 이 벼락을 치면서 장재 첨지네 그 집이 전부 없어지면서 그만 거기에 몇백 길이 되는지 모르는 이제 큰 소가 됐단 말야. 한데 그 소가 어느 만침 넓으냐 하면, 여기 어린이 놀이터보담두 더 넓은데, 이거 고만 두 배쯤 되는 품인데 그 소에서 물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물 나오는 소리가 쿵쿵쿵쿵쿵쿵 하면서 그 곁에 가면 이제 지반이 울린단 말야. 이리 이리 너무 물이 많이 나와서 그 물을 가지구서 몇만 석 되는, 이제 말할 것 같으면 수천 정보에 그 평야에, 논에 물을 소에서 나오는 물 가지구서 대는데, 그 물은 아무리 비가 와두 느는 벱이 없구, 아무리 가물어두 주는 벱이 없는데, 사람들이 그게 얼마나 깊으나 볼라구 명지실을 갖다가, 돌을 넣어서는 재니까 명지실 몇을 넣어도 도무지 끝을 몰른다는, 그만침 깊은 소가 됐단 말야.

나의 소원

김 구(金九)

네 소원(所願)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大韓獨立)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自主獨立)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同胞)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칠십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하여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達)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칠십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 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 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거니와, 그것은 우리 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의 가장 미천(微賤)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貧賤)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富貴)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朴堤上)이,

?내 차라리 계림(鷄林)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제상은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을 물리치고 달게 죽음을 받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함이었다.

근래에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 나라를 어느 큰 이웃 나라의 연방(聯邦)에 편입(編入)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 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 정신을 잃은 미친 놈이라고밖에 볼 길이 없다.

나는 공자(孔子), 석가(釋迦), 예수의 도(道)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聖人)으로 숭배(崇拜)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天堂), 극락(極樂)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댄,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歷史)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는 없는 것이,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 어려움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하나는 위에 있어 명령(命令)하고, 하나는 밑에 있어서 복종(服從)하는 것이 근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 소위 좌익(左翼)의 무리는, 혈통(血統)의 조국(祖國)을 부인(否認)하고 소위 사상(思想)의 조국을 운운(云云)하며,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國際的) 계급(階級)을 주장하여, 민족주의(民族主義)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眞理圈)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哲學)도 변하고 정치(政治), 경제(經濟)의 학설(學說)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 내에서나 혹은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하여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에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左右翼)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風波)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信仰)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흥망성쇠(興亡盛衰)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사는[生]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오 내오 없이 한 집이 되어 사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인 희망(希望)이요 이상(理想)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먼 장래에 바랄 것이요, 현실의 일은 아니다. 사해 동포(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最善)의 국가(國家)를 이루고 최선의 문화(文化)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民主主義)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任務)는, 첫째로, 남의 절제(節制)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依賴)도 아니 하는,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精神力)을 자유로 발휘(發揮)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平和)와 복락(福樂)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 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인류의 문화가 불완전함을 안다. 나라마다 안으로는 정치상, 경제상, 사회상으로 불평등, 불합리가 있고, 밖으로 국제적으로는 나라와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 시기(猜忌), 알력(軋轢), 침략(侵略), 그리고 그 침략에 대한 보복(報復)으로 작고 큰 전쟁이 끊일 사이가 없어서 많은 생명과 재물을 희생하고도, 좋은 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심(人心)의 불안(不安)과 도덕(道德)의 타락(墮落)은 갈수록 더하니, 이래 가지고는 전쟁이 끊일 날이 없어, 인류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 원리(生活原理)의 발견(發見)과 실천(實踐)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天職)이라고 믿는다.

이러하므로, 우리 민족의 독립이란 결코 삼천 리 삼천만만의 일이 아니라, 진실로 세계의 전체의 운명에 관한 일이요,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곧 인류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自屈之心)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 하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侮辱)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序曲)이었다. 우리가 주연 배우(主演俳優)로 세계 역사의 무대(舞臺)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武力)으로 정복(征服)하거나 경제력(經濟力)으로 지배(支配)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으니 그것은 공상(空想)이라고 하지 마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기에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 나라의 청년 남녀(靑年男女)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使命)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樂)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댄, 30년이 못 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確信)하는 바이다.

3단원 다양한 표현과 이해

봄봄

김 유 정(金裕貞)

<읽기 전 내용 상상하기>

다음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에 대한 설명이다. 설명을 잘 읽고 인물의 성격이 잘 드러나도록 빈 칸에 그림을 그려 보자.

장인

이름은 ?봉필?이지만 욕을 잘 해서 ?욕필이?로 불림. 혼인을 핑계로 ?나?를 일만 시키는 의뭉한 사람. 첫째 딸이 열 살 때부터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데릴사위 열 사람을 갈아치웠음.

나(26세)

작중 화자. 우직하고 순박함. 점순이와 혼인시켜 준다는 말만 믿고 3년 7개월 동안 돈 한 푼 받지 않고 머슴살이를 하고 있음.

점순이(16세)

키가 매우 작고 모로만 자란다. 야무지고 당돌한 성격. ?나?를 배후에서 조종하기도 하지만, 장인과 ?나?의 싸움에서는 엉뚱하게 장인 편을 듦.

?장인님! 인젠 저…….?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이가 찼으니 성례를 시켜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대답이 늘,

?이 자식아! 성례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

하고 만다.

이 자라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해가 될 점순이의 키 말이다.

내가 여기에 와서 돈 한 푼 안 받고 일하기를 삼 년하고 꼬박이 일곱 달 동안을 했다. 그런데도 미처 못 자랐다니까 이 키는 언제야 자라는 겐지 짜장 영문 모른다. 일을 좀더 잘 해야 한다든지, 혹은 밥을 많이 먹는다고 노상 걱정이니까 좀 덜 먹어야 한다든지 하면 나도 얼마든지 할 말이 많다. 허지만 점순이가 안직 어리니까 더 자라야 한다는 여기에는 어째 볼 수 없이 고만 빙빙하고 만다.

이래서 나는 애최 계약이 잘못된 걸 알았다. 이태면 이태, 삼년이면 삼 년, 기한을 딱 작정하고 일을 해야 원할 것이다. 덮어놓고 딸이 자라는 대로 성례를 시켜 주마 했으니, 누가 늘 지키고 섰는 것도 아니고, 그 키가 언제 자라는지 알 수 있는가. 그리고 난 사람의 키가 무럭무럭 자라는 줄만 알았지 붙배기 키에 모로만 벌어지는 몸도 있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때가 되면 장인님이 어련하랴 싶어서 군소리 없이 꾸벅꾸벅 일만 해 왔다. 그럼 말이다, 장인님이 제가 다 알아채려서, ?어 참, 너 일 많이 했다. 고만 장가들어라.? 하고 살림도 내주고 해야 나도 좋을 것이 아니냐.

시치미를 딱 떼고 도리어 그런 소리가 나올까 봐서 지레 펄펄 뛰고 이 야단이다. 명색이 좋아 데릴사위지 일하기에 싱겁기도 할 뿐더러 이건 참 아무것도 아니다. 숙맥이 그걸 모르고 점순이의 키 자라기만 까맣게 기다리지 않았나.

언젠가는 하도 갑갑해서 자를 가지고 덤벼들어서 그 키를 한번 재 볼까 했다. 마는 우리는 장인님이 내외를 해야 한다고 해서 마주 서 이야기도 한 마디 하는 법 없다. 우물길에서 언제나 마주칠 적이면 겨우 눈어림으로 재 보고 하는 것인데 그럴 적마다 나는 저만침 가서

?제에미 키두!?

하고 논둑에다 침을 퉤, 뱉는다. 아무리 잘 봐야 내 겨드랑 (다른 사람보다 좀 크긴 하지만) 밑에서 넘을락말락 밤낮 요 모양이다.

개, 돼지는 푹푹 크는데 왜 이리도 사람은 안 크는지, 한동안 머리가 아프도록 궁리도 해 보았다. 아하, 물동이를 자꾸 이니까 뼉다귀가 움츠라 드나 보다, 하고 내가 넌튯넌즈시 그 물을 대신 길어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를 하러 가면 서낭당에 돌을 올려놓고 ?점순이의 키 좀 크게 해 줍소사. 그러면 담엔 떡 갖다 놓고 고사드립죠니까.? 하고 치성도 한두 번 드린 것이 아니다. 어떻게 돼 먹은 킨지 이래도 막무가내니…….

그래 내 어저께 싸운 것이지 결코 장인님이 밉다든가 해서가 아니다. 모를 붓다가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까 또 싱겁다. 이 벼가 자라서 점순이가 먹고 좀 큰다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못한 걸 내 심어서 뭘 하는 거냐, 해마다 앞으로 축 거불지는 장인님의 아랫배(가 너무 먹는 걸 모르고 냇병이라나, 그 배)를 불리기 위하여 심곤 조금도 싶지 않다.

?아이구 배야!?

난 몰 붓다 말고 배를 쓰다듬으면서 그대루 논둑으로 기어올랐다. 그리고 겨드랑에 꼈던 벼 담긴 키를 그냥 땅바닥에 털썩 떨어치며 나도 털썩 주저앉았다. 일이 암만 바빠도 나 배 아프면 고만이니까. 아픈 사람이 누가 일을 하느냐. 파릇파릇 돋아오른 풀 한 숲을 뜯어 들고 다리의 거머리를 쑥쑥 문대며 장인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논 가운데서 장인님도 이상한 눈을 해 가지고 한참 날 노려보더니,

?넌 이 자식, 왜 또 이래 응??

?배가 좀 아파서유!?

하고 풀 위에 슬며시 쓰러지니까 장인님은 약이 올랐다. 저도 논에서 철벙철벙 둑으로 올라오더니 잡은 참 내 멱살을 웅켜잡고 뺨을 치는 것이 아닌가.

?이 자식, 일허다 말면 누굴 망해 놀 속셈이냐. 이 대가릴 까놀 자식??

우리 장인님은 약이 오르면 이렇게 손버릇이 아주 못됐다. 또 사위에게 ?이 자식 저 자식? 하는 이놈의 장인님은 어디 있느냐. 오죽해야 우리 동리에서 누굴 물론하고 그에게 욕을 안 먹는 사람은 명이 짜르다 한다. 조그만 아이들까지도 그를 돌아 세놓고 ?욕필이(본 이름이 봉필이니까), 욕필이? 하고 손가락질을 할 만치 두루 인심을 잃었다. 허나 인심을 정말 잃었다면 욕보다 읍의 배 참봉 댁 마름으로 더 잃었다. 번이 마름이란 욕 잘 하고, 사람 잘 치고, 그리고 생김 생기길 호박개 같애야 쓰는 거지만 장인님은 외양이 똑 됐다. 장인에게 닭마리나 좀 보내지 않는다든가 애벌논 때 품을 좀 안 준다든가 하면 그 해 가을에는 영락없이 땅이 뚝뚝 떨어진다. 그러면 미리부터 돈도 먹고 술도 먹이고 안달재신으로 돌아 치던 놈이 그 땅을 슬쩍 돌라 안는다. 이 바람에 장인님 집 외양간에는 눈깔 커다란 황소 한 놈이 절로 엉금엉금 기어들고, 동리 사람들은 그 욕을 다 먹어 가면서도 그래도 굽실굽실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내겐 장인님이 감히 큰 소리할 계제가 못 된다. 뒷생각은 못 하고 뺨 한 개를 딱 때려 놓고는 장인님은 무색해서 덤덤히 쓴 침만 삼킨다. 난 그 속을 퍽 잘 안다. 조금 있으면 갈도 꺾어야 하고 모도 내야 하고, 한참 바쁜 때인데 나 일 안 하고 우리 집으로 그냥 가면 고만이니까. 작년 이맘때도 트집을 좀 하니까 늦잠 잔다고 돌멩이를 집어던져서 자는 놈의 발목을 삐게 해 놨다. 사날씩이나 건숭 끙끙, 앓았더니 종당에는 거반 울상이 되지 않았는가.

?얘, 그만 일어나 일 좀 해라. 그래야 올 갈에 벼 잘 되면 너 장가들지 않니.?

그래 귀가 번쩍 뜨여서 그 날로 일어나서 남이 이틀 품 들일 논을 혼자 삶아 놓으니까 장인님도 눈깔이 커다랗게 놀랐다. 그럼 정말로 가을에 와서 혼인을 시켜 줘야 온 경우가 옳지 않겠나. 볏섬을 척척 들여 쌓아도 다른 소리는 없고 물동이를 이고 들어오는 점순이를 담배통으로 가리키며,

?이 자식아, 미처 커야지. 조걸 무슨 혼인을 한다구 그러니 원!?

하고 남 낯짝만 붉혀 주고 고만이다.

골김에 그저 이놈의 장인님, 하고 댓돌에다 메꼰코 우리 고향으로 내뺄까 하다가 꾹꾹 참고 말았다. 참말이지 난 이 꼴 하고는 집으로 차마 못 간다. 장가를 들러갔다가 오죽 못났어야 그대로 쫓겨 왔느냐고 손가락질을 받을 테니까.

논둑에서 벌떡 일어나 한풀 죽은 장인님 앞으로 다가서며,

?난 갈 테야유. 그 동안 사경 쳐 내슈.?

?너, 사위로 왔지 어디 머슴 살러 왔니??

?그러면 얼찐 성례를 해 줘야 안 하지유. 밤낮 부려만 먹구 해 준다, 해 준다…….?

?글쎄, 내가 안 하는 거냐, 그년이 안 크니까…….?

하고 어름어름 담배만 담으면서 늘 하는 소리를 또 늘어 놓는다.

이렇게 따져 나가면 언제든지 늘 나만 밑지고 만다. 이번엔 안 된다, 하고 대뜸 구장님한테로 판단 가자고 소맷자락을 내끌었다.

?아, 이 자식이 왜 이래 어른을.?

안 간다구 뻗디디고 이렇게 호령은 제맘대로 하지만 장인님 제가 내 기운은 못 당한다. 막 부려 먹고 딸은 안 주고, 게다 땅땅 치는 건 다 뭐야.

그러나 내 사실 참 장인님이 미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전날, 왜 내가 새고개 맞은 봉우리 화전 밭을 혼자 갈고 있지 않았느냐. 밭가생이로 돌 적마다 야릇한 꽃내가 물컥물컥 코를 찌르고 머리 위에서 벌들은 가끔 붕, 붕, 소리를 친다. 바위틈에서 샘물 소리밖에 안 들리는 산골짜기니까 맑은 하늘의 봄볕은 이불 속같이 따스하고 꼭 꿈꾸는 것 같다. 나는 몸이 나른하고 몸살(몸살을 아직 모르지만)이 날려구 그러는지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이랬다.

?어러이! 말이! 맘 마 마…….?

이렇게 노래를 하며 소를 부리면 여느 때 같으면 어깨가 으쓱으쓱한다. 웬일인지 밭을 반도 갈지 않아서 온몸의 맥이 풀리고 대구 짜증만 난다. 공연히 소만 들입다 두들기며

?안야! 안야! 이 망할 자식의 소(장인님의 소니까) 대가리를 꺾어 들라.?

그러나 내 속은 정말 안야 때문이 아니라 점심을 이고 온 점순이의 키를 보고 울화가 났던 것이다.

점순이는 뭐, 그리 썩 예쁜 계집애는 못 된다. 그렇다구 또 개떡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꼭 내 아내가 돼야 할 만치 그저 툽툽하게 생긴 얼굴이다. 나보다 십년이 아래니까, 올해 열여섯인데 몸은 남보다 두 살이나 덜 자랐다. 남은 잘도 훤칠히들 크건만 이건 위아래가 뭉툭한 것이 내 눈에는 헐없이 감참외 같다. 참외 중에는 감참외가 제일 맛좋고 예쁘니까 말이다. 둥글고 커단 눈은 서글서글하니 좋고, 좀 지쳐 찢어졌지만 입은 밥술이나 톡톡히 먹음직하니 좋다. 아따, 밥만 많이 먹게 되면 팔자는 고만 아니냐. 헌데 한 가지 파가 있다면 가끔 가다 몸이(장인님이 이걸 채신이 없이 들까분다고 하지만) 너무 빨리빨리 논다. 그래서 밥을 나르다가 때없이 풀밭에서 깨빡을 쳐서 흙투성이 밥을 곧잘 먹인다. 안 먹으면 무안해 할까 봐서 이걸 씹고 앉았노라면 으적으적 소리만 나고 돌을 먹는 겐지 밥을 먹는 겐지……. 그러나 이 날은 웬일인지 성한 밥채로 밭머리에 곱게 내려 놓았다. 그리고 또 내외를 해야 하니까 저만큼 떨어져 이 쪽으로 등을 향하고 웅크리고 앉아서 그릇 나기를 기다린다.

내가 다 먹고 물러섰을 때, 그릇을 와서 챙기는데 난 깜짝 놀라지 않았느냐. 고개를 푹 숙이고 밥 함지에 그릇을 포개면서 날더러 들으라는지 혹은 제 소린지,

?밤낮 일만 하다 말 텐가!?

하고 혼자서 쫑알거린다. 고대 잘 내외하다가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난 정신이 얼떨떨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무슨 좋은 수나 없는가 싶어서 나도 공중을 대고 혼잣말로,

?그럼 어떡해??

하니까,

?성례시켜 달라지 뭘 어떡해.?

하고 되알지게 쏘아붙이고 얼굴이 빨개져서 산으로 그저 도망질친다.

나는 잠시 동안 어떻게 되는 심판인지 맥을 몰라서 그 뒷모양만 덤덤히 바라보았다. 봄이 되면 온갖 초목이 물이 오르고 싹이 트고 한다. 사람도 아마 그런가 보다, 하고 며칠 내에 부쩍(속으로) 자란 듯 싶은 점순이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이런 걸 멀쩡하게 안직 어리다구 하니까…….

우리가 구장님을 찾아갔을 때 그는 싸리문 밖에 있는 돼지우리에서 죽을 퍼 주고 있었다. 서울엘 좀 갔다오더니 사람은 점잖아야 한다구 웃쇰이(얼른 보면 지붕 위에 앉은 제비 꼬랑지 같다.) 양쪽으로 뾰죽히 삐치고 그걸 에헴 하고, 늘 쓰담는 손버릇이 있다.

우리를 멀뚱히 쳐다보고 미리 알아챘는지,

?왜 일들 허다 말구 그래??

하더니 손을 올려서 그 에헴을 한 번 후딱 했다.

?구장님, 우리 장인님과 츰에 계약하기를…….?

먼저 덤비는 장인님을 뒤로 떠다밀고 내가 허둥지둥 달려들다가 가만히 생각하고,

?아니 우리 빙장님과 츰에…….?

하고 첫 번부터 다시 말을 고쳤다. 장인님은 빙장님, 해야 좋아하고 밖에 나와서 장인님, 하면 괜스리 골을 내려고 든다. 뱀두 뱀이래야 좋으냐구, 창피스러우니 남 듣는 데는 제발 빙장님, 빙모님 하라고 일상 당조짐을 받아 오면서 난 그것도 자꾸 잊는다.

당장두 ?장인님? 하다 옆에서 내 발등을 꾹 밟고 곁눈질을 흘기는 바람에야 겨우 알았지만…….

구장님도 내 이야기를 자세히 듣더니 퍽 딱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구장님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다 그럴 게다. 길게 길러 둔 새끼손톱으로 코를 후벼서 저리 탁 튀기며,

?그럼, 봉필씨! 얼른 성례를 시켜 주구려, 그렇게까지 제가 하구 싶다는 걸…….?

하고 내 짐작대로 말했다. 그러나 이 말에 장인님이 삿대질로 눈을 부라리고,

?아, 성례구 뭐구 계집애년이 미처 자라야 할 게 아닌가??

하니까 고만 멀쑤룩해서 입맛만 쩍쩍 다실 뿐이 아닌가.

?그것두 그래!?

?그래, 거진 사년 동안에도 안 자랐다니 그 킨 은제 자라지유? 다 그만두구 사경 내슈…….?

?글쎄, 이 자식아! 내가 크질 말라구 그랬니, 왜 날 보구 떼냐??

?빙모님은 참새만한 것이 그럼 어떻게 앨 낳지유?(사실 장모님은 점순이보다도 귓배기가 작다.)?

장인님은 이 말을 듣고 껄껄 웃더니(그러나 암만 해두 돌 씹은 상이다.) 코를 푸는 척하고 날 은근히 곯리려고 팔꿈치로 옆 갈비께를 퍽 치는 것이다. 더럽다. 나두 종아리의 파리를 쫓는 척하고 허리를 구부리며 그 궁둥이를 콱 떼밀었다. 장인님은 앞으로 우찔근하고 싸리문께로 쓰러질 듯하다 몸을 바로 고치더니 눈총을 몹시 쏘았다. 이런 쌍년의 자식, 하곤 싶으나 남의 앞이라니 차마 못 하고 섰는 그 꼴이 보기에 퍽 쟁그러웠다.

그러나 이 밖에는 별반 신통한 귀정을 얻지 못하고 도로 논으로 돌아와서 모를 부었다. 왜냐면 장인님이 뭐라구 귓속말로 수군수군하고 간 뒤다. 구장님이 날 위해서 조용히 데리고 아래와 같이 일러 주었기 때문이다.(뭉태의 말은 구장님이 장인님에게 땅 두 마지기 얻어 부치니까 그래 꾀였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않는다.)

?자네 말두 하기야 옳지. 암, 나이 찼으니 아들이 급하다는 게 잘못된 말은 아니야. 허지만 농사가 한창 바쁜 때 일을 안 한다든가 집으로 달아난다든가 하면 손해죄루, 그것두 징역을 가거든!(여기에 그만 정신이 번쩍 났다.) 왜 요전에 삼포 말서 산에 불 좀 놓았다구 징역 간 거 못 봤나. 제 산에 불을 놓아도 징역을 가는 이 땐데 남의 농사를 버려 두니 죄가 얼마나 더 중한가. 그리고 자넨 정장을(사경 받으러 정장 가겠다 했다.) 간대지만 그러면 괜시리 죄를 들쓰고 들어가는 걸세. 또 결혼두 그렇지. 법률에 성년이란 게 있는데 스물하나가 돼야지 비로소 결혼을 할 수가 있는 걸세. 자넨 물론 아들이 늦을 걸 염려하지만 점순이루 말하면 이제 겨우 열여섯이 아닌가. 그렇지만 아까 빙장님의 말씀이 올 갈에는 열 일을 제치고라두 성례를 시켜 주겠다 하시니 좀 고마운 겐가. 빨리 가서 모 붓든 거나 마저 붓게, 군소리 말구 어서 가.?

그래서 오늘 아침까지 끽 소리 없이 왔다.

장인님과 내가 싸운 것은 지금 생각하면 전혀 뜻밖의 일이라 안 할 수 없다. 장인님으로 말하면 요즈막 작인들에게 행세를 좀 하고 싶다고 해서,

?돈 있으면 양반이지 별 게 있느냐!?

하고 일부러 아랫배를 쑥 내밀고 걸음도 뒤틀리게 걷고 하는 이판이다. 이까진 나쯤 두들기다 남의 땅을 가지고 모처럼 닦아 놓았던 가문을 망친다든가 할 어른이 아니다. 또 나로 논지면 아무쪼록 잘 뵈서 점순이에게 얼른 장가를 들어야 하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자면 결국 어젯밤 뭉태네 집에 마슬 간 것이 썩 나빴다. 낮에 구장님 앞에서 장인님과 내가 싸운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대구 빈정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 맞구두 그걸 가만 둬??

?그럼 어떡허니??

?임마, 봉필일 모판에다 거꾸로 박아 놓지 뭘 어떡해??

하고 괜히 내 대신 화를 내가지고 주먹질을 하다 등잔까지 쳤다. 놈이 번히 괄괄은 하지만 그래 놓고 날더러 석유값을 물라고 막 찌다우를 붙는다. 난 어안이 벙벙해서 잠자코 앉았으니까 저만 연신 지껄이는 소리가,

?밤낮 일만 해 주구 있을 테냐??

?영득이는 1년을 살구두 장갈 들었는데 넌 사년이나 살구두 더 살아야 해? 네가 세 번째 사윈줄이나 아니, 세 번째 사위. 남의 일이라두 분하다. 이 자식, 우물에 가 빠져 죽어.?

나중에는 겨우 손톱으로 목을 따라고까지 하고, 제 아들같이 함부로 훅닥이었다. 별의별 소리를 다 해서 그대로 옮길 수는 없으나 그 줄거리는 이렇다.

우리 장인님 딸이 셋이 있는데 맏딸은 재작년 가을에 시집을 갔다. 정말은 시집을 간 것이 아니라 그 딸도 데릴사위를 해 가지고 있다가 내보냈다. 그런데 딸이 열 살 때부터 열아홉 즉 십 년 동안에 데릴사위를 갈아들이기를, 동리에선 사위 부자라고 이름이 났지마는 열 놈이란 참 너무 많다.

장인님이 아들은 없고 딸만 있는 고로 그 담 딸을 데릴사위를 해 올 때까지는 부려먹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머슴을 두면 좋지만 그건 돈이 드니까, 일 잘 하는 놈을 고르느라고 연방 바꿔 들였다. 또 한편 놈들이 욕만 줄창 퍼붓고 심히도 부려먹으니까 밸이 상해서 달아나기도 했겠지. 점순이는 둘째 딸인데, 내가 일테면 그 세 번째 데릴사위로 들어온 셈이다. 내 담으로 네 번째 놈이 들어올 것을 내가 일도 잘 하고, 그리고 사람이 좀 어수룩하니까 장인님이 잔뜩 붙들고 놓질 않는다. 셋째 딸이 인제 여섯 살, 적어도 열 살은 돼야 데릴사위를 할 테므로 그 동안은 죽도록 부려먹어야 된다. 그러니 인제는 속 좀 채리고 장가를 들여달라고 떼를 쓰고 나자빠져라, 이것이다.

나는 겉으로 엉, 엉 하며 귓등으로 들었다. 뭉태는 땅을 얻어 붙이다가 떨어진 뒤로는 장인님만 보면 공연히 못 먹어서 으릉거린다. 그것도 장인님이 저 달라고 할 적에 제 집에서 위한다는 그 감투(예전에 원님이 쓰던 것이라나, 옆구리에 뽕뽕 좀먹은 걸레)를 선뜻 주었더면 그럴 리도 없었던 걸…….

그러나 나는 뭉태란 놈의 말을 전수히 곧이 듣지 않았다. 꼭 곧이 들었다면 간밤에 와서 장인님과 싸웠지 무사히 있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 딸에게까지 인심을 잃은 장인님이 혼자 나빴다.

실토이지 나는 점순이가 아침상을 가지고 나올 때까지는 오늘은 또 얼마나 밥을 담았나, 하고 이것만 생각했다. 상에는 된장찌개하고 간장 한 종지, 조밥 한 그릇, 그리고 밥보다 더 수부룩하게 담은 산나물이 한 대접, 이렇다. 나물은 점순이가 틈틈이 해 오니까 두 대접이고 네 대접이고 멋대로 먹어도 좋으나 밥은 장인님이 한 사발 외엔 더 주지 말라고 해서 안 된다. 그런데 점순이가 그 상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제말로 지껄이는 소리가,

?구장님한테 갔다 그냥 온담 그래!?

하고 엊그제 산에서와 같이 되우 쫑알거린다. 딴은 내가 더 단단히 덤비지 않고 만 것이 좀 어리석었다, 속으로 그랬다.

나도 저 쪽 벽을 향하여 외면하면서 내 말로,

?안 된다는 걸 그럼 어떡헌담!?

하니까,

?쇰을 잡아채지 그냥 둬, 이 바보야!?

하고 또 얼굴이 빨개지면서 성을 내며 안으로 샐죽하니 튀들어가지 않느냐. 이 때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게 망정이지 보았다면 내 얼굴이 에미 잃은 황새 새끼처럼 가여웁다 했을 것이다.

사실 이 때만치 슬펐던 일이 또 있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은 암만 못생겼다 해두 괜찮지만 내 아내 될 점순이가 병신으로 본다면 참 신세는 따분하다. 밥을 먹은 뒤 지게를 지고 일터로 갈려 하다 도로 벗어 던지고 바깥마당 공석 위에 드러누워서, 나는 차라리 죽느니만 같지 못하다 생각했다. 내가 일 안 하면 장인님 저는 나이가 먹어 못 하고 결국 농사 못 짓고 만다. 뒷짐으로 트림을 꿀꺽 하고 대문 밖으로 나오다 날 보고서,

?이 자식, 왜 또 이러니.?

?관격이 났어유, 어이구 배야!?

?기껀 밥 처먹구 나서 무슨 관격이야, 남의 농사 버려 주면 이 자식 징역 간다 봐라!?

?가두 좋아유, 어이구 배야!?

참말 난 일 안 해서 징역 가도 좋다 생각했다. 일후 아들을 낳아도 그 앞에서 바보, 바보, 이렇게 별명을 들을 테니까 오늘은 열 쪽이 난대도 결정을 내고 싶었다.

장인님이 일어나라고 해도 내가 안 일어나니까 눈에 독이 올라서 저 편으로 힝하게 가더니 지게막대기를 들고 왔다. 그리고 그걸로 내 허리를 마치 들떠 넘기듯이 쿡 찍어서 넘기고 넘기고 했다. 밥을 잔뜩 먹어 딱딱한 배가 그럴 적마다 퉁겨지면서 밸창이 꼿꼿한 것이 여간 켕기지 않았다. 그래도 안 일어나니까 이번에는 배를 지게막대기로 위에서 쿡쿡 찌르고 발길로 옆구리를 차고 했다. 장인님은 원체 심청이 궂어서 그러지만 나도 저만 못 하지 않게 배를 채었다. 아픈 것을 눈을 꽉 감고 넌 해라 난 재밌단 듯이 있었으나 볼기짝을 후려갈길 적에는 나도 모르는 결에 벌떡 일어나서 그 수염을 잡아챘다. 마는 내 골이 난 것이 아니라 정말은 아까부터 벽 뒤 울타리 구멍으로 점순이가 우리들의 꼴을 몰래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말 한 마디 톡톡히 못 한다고 바라보는데 매까지 잠자코 맞는 걸 보면 짜장 바보로 알 게 아닌가. 또 점순이도 미워하는 이까짓 놈의 장인님하곤 아무것도 안 되니까 막 때려도 좋지만 사정 보아서 수염만 채고(제 원대로 했으니까 이 때 점순이는 퍽 기뻤겠지.) 저기까지 잘 들리도록

?이걸 까셀라부다!?

하고 소리를 쳤다.

장인님은 더 약이 바짝 올라서 잡은 참 지게막대기로 내 어깨를 그냥 내려갈겼다. 정신이 다 아찔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때엔 나도 온몸에 약이 올랐다. 이 녀석의 장인님을, 하고 눈에서 불이 퍽 나서 그 아래 밭 있는 넝 알로 그대로 떠밀어 굴려 버렸다.

?부려만 먹구 왜 성례 안 하지유!?

나는 이렇게 호령했다. 허지만 장인님이 선뜻 오냐 낼이라두 성례시켜 주마, 했으면 나도 성가신 걸 그만두었을지 모른다. 나야 이러면 때린 건 아니니까 나중에 장인 쳤다는 누명도 안 들을 터이고 얼마든지 해도 좋다.

한번은 장인님이 헐떡헐떡 기어서 올라오더니 내 바짓가랭이를 요렇게 노리고서 단박 웅켜잡고 매달렸다. 악, 소리를 치고 나는 그만 세상이 다 팽그르 도는 것이,

?빙장님! 빙장님! 빙장님!?

?이 자식! 잡아먹어라, 잡아먹어!?

?아! 아! 할아버지! 살려 줍쇼, 할아버지!?

하고 두 팔을 허둥지둥 내절 적에는 이마에 진땀이 쭉 내솟고 인젠 참으로 죽나 보다 했다. 그래두 장인님은 놓질 않더니 내가 기어이 땅바닥에 쓰러져서 거진 까무러치게 되니까 놓는다. 더럽다, 더럽다. 이게 장인님인가? 나는 한참을 못 일어나고 쩔쩔맸다. 그러나 얼굴을 드니(눈엔 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지가 부르르 떨리면서 나도 엉금엉금 기어가 장인님의 바짓가랭이를 꽉 움키고 잡아 나꿨다.

내가 머리가 터지도록 매를 얻어맞은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가 또한 우리 장인님이 유달리 착한 곳이다. 여느 사람이면 사경을 주어서라도 당장 내쫓았지, 터진 머리를 불솜으로 손수 지져 주고, 호주머니에 희연 한 봉을 넣어 주고 그리고,

?올 갈엔 꼭 성례를 시켜 주마. 암말 말구 가서 뒷골의 콩밭이나 얼른 갈아라.?

하고 등을 뚜덕여 줄 사람이 누구냐. 나는 장인님이 너무나 고마워서 어느덧 눈물까지 났다.

점순이를 남기고 인젠 내쫓기려니 하다 뜻밖의 말을 듣고,

?빙장님! 인제 다시는 안 그러겠어유!?

이렇게 맹세를 하며 부랴사랴 지게를 지고 일터로 갔다. 그러나 이 때는 그걸 모르고 장인님을 원수로만 여겨서 잔뜩 잡아당겼다.

?아! 아! 이놈아! 놔라, 놔.?

장인님은 헷손질을 하며 솔개미에 챈 닭의 소리를 연해 질렀다. 놓긴 왜, 이왕이면 호되게 혼을 내주리라 생각하고 짓궂이 더 댕겼다. 마는 장인님이 땅에 쓰러져서 눈에 눈물이 피잉 도는 것을 알고 좀 겁도 났다.

?할아버지! 놔라, 놔, 놔, 놔, 놔.?

그래도 안 되니까,

?얘, 점순아! 점순아!?

이 악장에 안에 있었던 장모님과 점순이가 헐레벌떡하고 단숨에 뛰어나왔다. 나의 생각에 장모님은 제 남편이니까 역성을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점순이는 내 편을 들어서 속으로 고수해서 하겠지……, 대체 이게 웬 속인지(지금까지도 난 영문을 모른다.) 아버질 혼내 주기는 제가 내래 놓고 이제 와서는 달겨들며,

?에그머니! 이 망할 게 아버지 죽이네!?

하고, 귀를 뒤로 잡아댕기며 마냥 우는 것이 아니냐. 그만 여기에 기운이 탁 꺾이어 나는 얼빠진 등신이 되고 말았다. 장모님도 덤벼들어 한쪽 귀마저 뒤로 잡아채면서 또 우는 것이다.

이렇게 꼼짝도 못 하게 해 놓고 장인님은 지게막대기를 들어서 사뭇 내려 조겼다. 그러나 나는 구태여 피하려지도 않고 암만 해도 그 속 알 수 없는 점순이의 얼굴만 멀거니 들여다보았다.

?이 자식!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가 나오도록 해??

봉산 탈춤

김진옥(金辰玉)․민천식(閔千植) 구술(口述)

이두현(李杜鉉) 채록(採錄)

읽기 전 내용 상상하기

다음은 ?봉산 탈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탈이다. 탈을 보며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빈 칸에 자유롭게 적어 보자. 그리고 탈에 적절한 별명을 붙여 보고, 왜 그렇게 정했는지 말해 보자.

제 6 과장 양반춤

말뚝이:(벙거지를 쓰고 채찍을 들었다.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양반 삼 형제를 인도하여 등장)

양반 삼 형제:[말뚝이 뒤를 따라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점잔을 피우나, 어색하게 춤을 추며 등장. 양반 3형제 맏이는 샌님[生員], 둘째는 서방님[書房], 끝은 도련님[道令]이다. 샌님과 서방님은 흰 창옷에 관을 썼다. 도련님은 남색 쾌자에 복건을 썼다. 샌님과 서방님은 언청이이며(샌님은 언청이 두 줄, 서방님은 한 줄이다.), 부채와 장죽을 가지고 있고, 도련님은 입이 삐뚤어졌고, 부채만 가졌다. 도련님은 일절 대사는 없으며, 형들과 동작을 같이하면서 형들의 면상을 부채로 때리며 방정맞게 군다.]

말뚝이:(가운데쯤에 나와서) 쉬이. (음악과 춤 멈춘다.) 양반 나오신다아! 양반이라고 하니까 노론(老論), 소론(少論), 호조(戶曹), 병조(兵曹), 옥당(玉堂)을 다 지내고 삼 정승(三政丞), 육 판서(六判書)를 다 지낸 퇴로 재상(退老宰相)으로 계신 양반인 줄 아지 마시오. 개잘량이라는 ?양?자에 개다리 소반이라는 ?반?자 쓰는 양반이 나오신단 말이오.

양반들:야아, 이놈, 뭐야아!

말뚝이:아, 이 양반들, 어찌 듣는지 모르갔소. 노론, 소론, 호조, 병조, 옥당을 다 지내고 삼 정승, 육 판서 다 지내고 퇴로 재상으로 계신 이 생원네 삼 형제분이 나오신다고 그리 하였소.

양반들:(합창) 이 생원이라네. (굿거리 장단으로 모두 춤을 춘다. 도령은 때때로 형들의 면상을 치며 논다. 끝까지 그런 행동을 한다.)

말뚝이:쉬이. (반주 그친다.) 여보, 구경하시는 양반들, 말씀 좀 들어 보시오. 짤따란 곰방대로 잡숫지 말고 저 연죽전(煙竹廛)으로 가서 돈이 없으면 내게 기별이래도 해서 양칠간죽(洋漆竿竹), 자문죽(自紋竹)을 한 발 가옷씩 되는 것을 사다가 육모깍지 희자죽(喜子竹), 오동수복(梧桐壽福) 연변죽을 이리저리 맞추어 가지고 저 재령(載寧) 나무리 거이 낚시 걸듯 죽 걸어 놓고 잡수시오.

양반들:뭐야아!

말뚝이:아,이 양반들, 어찌 듣소. 양반 나오시는데 담배와 훤화(喧譁)를 금하라고 그리 하였소.

양반들:(합창) 훤화를 금하였다네. (굿거리 장단으로 모두 춤을 춘다.)

말뚝이:쉬이. (춤과 반주 그친다.) 여보, 악공들 말씀 들으시오. 오음 육률(五音六律) 다 버리고 저 버드나무 홀뚜기 뽑아다 불고 바가지 장단 좀 쳐 주오.

양반들:야아, 이놈, 뭐야!

말뚝이:아, 이 양반들, 어찌 듣소. 용두 해금(奚琴), 북, 장고, 피리, 젓대 한 가락도 뽑지 말고 건건드러지게 치라고 그리 하였소.

양반들:(합창) 건건드러지게 치라네. (굿거리 장단으로 춤을 춘다.)

생 원:쉬이. (춤과 장단 그친다.) 말뚝아.

말뚝이:예에.

생 원:이놈, 너도 양반을 모시지 않고 어디로 그리 다니느냐?

말뚝이:예에. 양반을 찾으려고 찬밥 국 말어 일조식(日早食)하고, 마굿간에 들어가 노새 원님을 끌어다가 등에 솔질을 솰솰하여 말뚝이님 내가 타고 서양(西洋) 영미(英美), 법덕(法德), 동양 3국 무른 메주 밟듯 하고, 동은 여울이요, 서는 구월이라, 동여울 서구월 남드리 북향산 방방곡곡(坊坊曲曲) 면면촌촌(面面村村)이, 바위 틈틈이 모래 쨈쨈이, 참나무 결결이 다 찾아다녀도 샌님 비뚝한 놈도 없습디다.

<중략>

생 원:네 이놈, 양반을 모시고 나왔으면 새처를 정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로 이리 돌아다니느냐?

말뚝이:(채찍을 가지고 원을 그으며 한 바퀴 돌면서) 예에, 이마만큼 터를 잡고 참나무 울장을 드문드문 꽂고, 깃을 푸근푸근히 두고, 문을 하늘로 낸 새처를 잡아 놨습니다.

생 원:이놈, 뭐야 !

말뚝이:아, 이 양반, 어찌 듣소. 자좌오향(子坐午向)에 터를 잡고, 난간 팔자(八字)로 오련각(五聯閣)과 입구(口)자로 집을 짓되, 호박 주초(琥珀柱礎)에 산호(珊瑚) 기둥에 비취 연목(翡翠椽木)에 금파(金波) 도리를 걸고 입구(口)자로 풀어 짓고, 쳐다보니 천판자(天板子)요, 내려다보니 장판방(壯版房)이라. 화문석(花紋席) 칫다 펴고 부벽서(付壁書)를 바라보니 동편에 붙은 것이 담박녕정(澹泊寧靜) 네 글자가 분명하고, 서편을 바라보니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가 완연히 붙어 있고, 남편을 바라보니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북편을 바라보니 효제충신(孝悌忠信)이 분명하니, 이는 가위 양반의 새처방이 될 만하고, 문방 제구(文房諸具) 볼작시면 용장봉장, 궤(櫃) 두지, 자개 함롱(函籠), 반닫이, 샛별 같은 놋요강, 놋대야 받쳐 요기 놓고, 양칠간죽, 자문죽을 이리저리 맞춰 놓고, 삼털 같은 칼담배를 저 평양 동푸루 선창에 돼지 똥물에다 축축 축여 놨습니다.

생 원:이놈, 뭐야 !

말뚝이:아, 이 양반, 어찌 듣소. 쇠털 같은 담배를 꿀물에다 축여 놨다 그리 하였소.

양반들:(합창) 꿀물에다 축여 놨다네. (굿거리 장단에 맞춰 일제히 춤춘다. 한참 추다가 춤과 음악이 끝나고 새처방으로 들어간 양을 한다.)

양반들:(새처 안에 앉는다.)

< 중 략 >

생 원:쉬이. (음악과 춤을 멈춘다.) 여보게, 동생. 우리가 본시 양반이라, 이런 데 가만히 있자니 갑갑도 하네. 우리 시조(時調) 한 수씩 불러 보세.

서 방:형님, 그거 좋은 말씀입니다.

양반들:(시조를 읊는다.) ?……반 남아 늙었으니 다시 젊지는 못하리라…….? 하하. (하고 웃는다. 양반 시조 다음에 말뚝이가 자청하여 소리를 한다.)

말뚝이:?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에…….?

생 원:다음은 글이나 한 수씩 지어 보세.

서 방:그럼 형님이 먼저 지어 보시오.

생 원:그러면 동생이 운자(韻字)를 내게.

서 방:네, 제가 한 번 내 드리겠습니다. ?산?자, ?영?잡니다.

생 원:아, 그것 어렵다. 여보게, 동생. 되고 안 되고 내가 부를 터이니 들어 보게. [영시조(詠時調)로] ?울룩줄룩 작대산(作大山)하니, 황천풍산(黃川?山)에 동선령(洞仙嶺)이라.?

서 방:하하. (형제, 같이 웃는다.) 거 형님, 잘 지었습니다.

생 원:동생 한 귀 지어 보세.

서 방:그럼 형님이 운자를 하나 내십시오.

생 원:?총?자, ?못?잘세.

서 방:아, 그 운자 벽자(僻字)로군. (한참 낑낑거리다가) 형님, 한 마디 들어 보십시오. (영시조로) ?짚세기 앞총은 헝겊총하니, 나막신 뒤축에 거멀못이라.?

< 중 략 >

생 원:그러면 이번엔 파자(破字)나 하여 보자. 주둥이는 하얗고 몸뚱이는 알락달락한 자가 무슨 자냐?

서 방:(한참 생각하다가) 네에, 거 운고옥편(韻考玉篇)에도 없는 자인데, 그것 참 어렵습니다. 그 피마자(?麻子)라고 하는 자가 아닙니까?

생 원:아, 거 동생 참 용할세.

서 방:형님, 내가 그럼 한 자 부르라우?

생 원:부르게.

서 방:논두렁에 살피 짚고 섰는 자가 무슨 잡니까?

생 원:(한참 생각하다가) 아, 그것 참 어려운 잘세. 그것은 논 임자가 아닌가?

서 방:하하, 그것 형님 잘 맞췄습니다. (이러는 동안에 취바리 살짝 들어와 한편 구석에 서 있다.)

생 원:이놈, 말뚝아.

말뚝이:예에.

생 원:나랏돈 노랑돈 칠 푼 잘라먹은 놈, 상통이 무르익은 대초빛 같고, 울룩줄룩 배미 잔등 같은 놈을 잡아들여라.

말뚝이:그놈이 힘이 무량대각(無量大角)이요, 날램이 비호(飛虎) 같은데, 샌님의 전령(傳令)이나 있으면 잡아 올는지 거저는 잡아 올 수 없습니다.

생 원:오오, 그리 하여라. 옜다. 여기 전령 가지고 가거라. (종이에 무엇을 써서 준다.)

말뚝이:(종이를 받아들고 취발이한테로 가서) 당신 잡히었소.

취발이:어데, 전령 보자.

말뚝이:(종이를 취발이에게 보인다.)

취발이:(종이를 보더니 말뚝이에게 끌려 양반의 앞에 온다.)

말뚝이:(취발이 엉덩이를 양반 코 앞에 내밀게 하며) 그놈 잡아들였소.

생 원:아, 이놈 말뚝아. 이게 무슨 냄새냐?

말뚝이:예, 이놈이 피신(避身)을 하여 다니기 때문에, 양치를 못 하여서 그렇게 냄새가 나는 모양이외다.

생 원:그러면 이놈의 모가지를 뽑아서 밑구녕에다 갖다 박아라.

< 중 략 >

말뚝이:샌님, 말씀 들으시오. 시대가 금전이면 그만인데, 하필 이놈을 잡아다 죽이면 뭣 하오? 돈이나 몇백 냥 내라고 하야 우리끼리 노나 쓰도록 하면, 샌님도 좋고 나도 돈냥이나 벌어 쓰지 않겠소. 그러니 샌님은 못 본 체하고 가만히 계시면 내 다 잘 처리하고 갈 것이니, 그리 알고 계시오.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일제히 어울려서 한바탕 춤추다가 전원 퇴장한다.)

── 제 6 과장 끝 ──

4단원 바른 말 좋은 말

1 말을 다듬는 태도 갖추기

다음 말을 다듬어 고쳐 보자.

?너, 선생님이 빨리 오래.?

?리보솜과 리소좀은 서로 틀린 거야.?

?내가 친구 한 명 소개시켜 줄께.?

?주례 선생님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

?아버님, 올해도 건강하세요.?

?보세요, 잘 날라가지 않습니까??

?동작이 매우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2 바른 문장

문법적 직관 키우기

이 글에서 어색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문장을 모두 찾아보자.

인체 입체 공간 움직임……

여러 개의 선을 그어 몸을 나누어 보고 다시 잇대어 연장시키기도 하면서 적절한 인체의 형과 선을 찾으며 생각해 보는 단어들이다.

우리 자신인 인체는 오랜 습관으로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라기보다는 시각적 구조물로서 간주되어지고 있다.

큰 키, 작은 눈, 멋진 다리 등 어떤 무엇인가의 시대 정신에 따르는 미의 기준으로 인한 비교 평가는 자연의 창조물인 인체 위에 본능적으로 인고의 창조자인 사람은 때로는 지나친 과장으로, 때로는 가슴을 졸이게 하는 최소한의 덧붙임으로 아슬아슬한 멋을, 즐거움을 좇기도 한다.

나의 작업들은 이러한 의복을 통한 인간의 사고 속에 내재되어 있을 꿈, 희망, 즐거움, 이상 등을 나의 디자인으로 만들어 보기도 하며 발빠른 현재의 패션 산업 속에서 때로는 멈춰서 과거의 복식을 통하여 발견, 표현해 보고 공유하려 하는 것이다.

문장 성분 갖추기

다음 문장에서 빠진 성분을 찾아보자.

필요한 성분은 다 갖추고 있는가?

● 문학은 다양한 삶의 체험을 보여 주는 예술의 장르로서 문학을 즐길 예술적 본능을 지닌다.

● 인간은 환경을 지배하기도 하고, 때로는 순응하면서 산다.

● 본격적인 공사가 언제 시작되고, 언제 개통될지 모른다.

불필요한 성분은 없는가?

다음 문장에서 불필요한 성분을 찾아보자.

● 그 선수의 장점은 경기 흐름을 잘 읽고 다른 선수들에게 공을 잘 보내 준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 방학 기간 동안 축구를 실컷 찼다.

● 요즘 같은 때에는 공기를 자주 환기시켜야 감기에 안 걸리는 거야.

성분끼리 자연스럽게 어울리는가?

다음 문장을 성분이 자연스럽게 호응되도록 고쳐 보자.

●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먼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만일 여러분이 주변 환경을 탓하고 있다면 그런 생각은 버리시길 바랍니다.

● 현재의 복지 정책은 앞으로 손질이 불가피할 전망입니다.

● 심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심장 마비까지 일으켜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 동아리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직접 손으로 쓴 작품을 제출해야 한다.

● 한결같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관형화․명사화 구성을 바르게

관형화 구성

다음 두 문장의 공통적인 문제점을 찾아 말해 보자.

유구한 빛나는 전통 문화를 단절시킬 가능성이 큰 융통성 없는 문화 정책은 재고해야 한다.

이 수술은 후유증이 없는 안전한 고도의 정밀한 수술로 비용도 저렴한 파격적인 저비용이다.

명사화 구성

다음 문장을 다듬어 고쳐 보자.

● 그가 그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다.

● 여름이 되면 수해 방지 대책 마련에 철저를 기해야 한다.

● 은주는 권장 도서 목록 선정이 너무 주관적이라며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다음 각 문장의 의미가 정확하지 못한 이유를 밝혀 쓰고, 정확하게 의미를 알 수 있도록 고쳐 써 보자.

● 용감한 그의 아버지는 적군을 향해 돌진했다.

이유:

고친 문장

● 남편은 나보다 비디오를 더 좋아한다.

이유:

고친 문장

의미를 정확하게 하자.

● 어머니께서 사과와 귤 두 개를 주셨다.

이유:

고친 문장

● 그가 걸음을 걷는 것이 이상하다.

이유:

고친 문장

● 나는 택시를 안 탔다.

이유:

고친 문장

외래 어법

다음 문장에서 외래 어법에 해당하는 부분을 찾아 올바르게 고쳐 쓰시오.

● 이 괴물은 몸통이 큰 뱀과 같이 생겼고, 머리는 말머리 형태를 하고 있으며, 커다란 검은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 그의 작품은 이러한 주목에 값한다.

● 우리 모두 내일 오전 10시에 회의를 갖도록 하자.

● 불조심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 나는 학생들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 학생회의에 있어 진지하게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춘향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배 침몰과 함께 사망했습니다.

다음 글 두 편을 읽은 뒤, 느끼고 생각한 바를 한 편의 글로 써 보자.

아버지의 손

아버지의 손은 유별나게 투박하고 힘이 셌다. 맨손으로 과일 나무를 전지(剪枝)하고, 아무리 고집센 당나귀도 아버지 손에 잡히면 안장을 써야만 했다. 자[尺]도 없이 판자 위에 정확한 사각형을 그렸다든지, 맨손으로 문에서 쇠 돌쩌귀를 뜯어 냈다는 등 아버지의 손에 얽힌 얘기가 많았다. < 중 략 >

아버지는 글을 몰랐다. 문맹자가 거의 없는 오늘날 아버지가 겪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중 략 >

아버지의 건강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심장병 때문에 여러 차례 입원도 했다. 늙은 의사 그린 씨가 매주 진찰을 하고 약을 주었다. 그 가운데는 심장 마비가 올 것 같은 예감이 들면 얼른 삼키라는 니트로글리셀린 알약도 있었다. < 중 략 >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았다. 예의 그 심장마비 때문이라고 했다.

장례식엔 나 혼자 돌아와 참석했다. 의사 그린 씨가 유감을 표했다. 그는 좀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날도 그가 처방을 써 줘서 아버지가 약국에 가 약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지껏 그 약병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 니트로글리셀린 약만 있었다면 아버지는 도움을 청할 때까지 버틸 수 있어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장례식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 나는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마당가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슬픔이 북받쳐올라 나는 아버지가 숨을 거두신 그 땅을 손바닥으로 훑어 보았다. 내 손가락에 딱딱한 게 닿았다. 반쯤 묻힌 벽돌이었다. 나는 무심코 그 벽돌을 들어 팽개쳤다. 그랬더니 그 아래 부드러운 땅 속에 콱 박혀 있는 약병이 보였다. 뚜껑이 꼭 잠긴 채 알약이 가득 들어 있는 플라스틱 병이었다. 약병을 집어드는 내 눈엔 아버지가 뚜껑을 열려고 애를 쓰다 못해 필사적으로 벽돌로 약병을 깨려고 했을 장면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크고 따뜻한 손이 죽음과의 싸움에선 그토록 맥없이 패배한 까닭을 알고 나니 분통이 터져 미칠 지경이었다. 약병 뚜껑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던 것이다.

― 어린이 손이 닿지 않게 되어 있는 안전 뚜껑.

눌러서 돌리셔야 열립니다.

나중에 듣고 보니, 약사는 바로 그 날부터 새로운 안전병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리석은 짓인 줄 알면서도 시내로 나가 제일 좋은, 가죽 표지의 사전과 순금 펜 세트를 샀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복을 빌면서, 따뜻하고 충실했던 손, 그러나 글자를 못 썼던 그 손에 그것을 쥐어 드렸다.

- 오천석(편), ?사랑은 아름다워라?에서

육십에 배운 한글

안녕하세요? 저는 육십이 넘은 할머니 김덕례라고 합니다. 뒤늦게 ?동부 밑거름 학교?에서 한글을 배우고 있는 나무반 학생이지요. 한글을 배운 지 2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어려운 받침이 있는 글자는 다 틀리니 이 노릇을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연배들은 세상이 어려울 때 태어나서 못 배우기도 했지만 내가 어렸을 때에는 여자애들이 글자를 배우면 팔자가 세진다고 아버님이 절대 못 배우게 했어요. 그것이 두고두고 내 평생에 한이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우리 집 양반도 이제껏 아무 불편 없이 잘 살았으면서 왜 새삼스럽게 그런 걸 배우려고 하냐며 제가 한글 공부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 설움은 아무도 몰라요(진짜, 며느리도 몰라요). 혹시나 누가 글씨라도 쓰라고 할까 봐 사람 많이 모인 데는 가지 않았고 은행에 가서 돈 한 번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눈 뜬 장님이었지요. 어떤 아줌마가 은행에 갈 때마다 일부러 손에 붕대를 감고 가서 다쳐서 글씨를 못 쓰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글씨 부탁을 했다는 피눈물 나는 그 얘기는 바로 제 심정과 똑같았지요. 그러나 지금 전 세상 사는 게 재미있고 행복합니다. 이제 거리를 다녀도 제가 아는 글자들이 많이 있으니 겁날 것이 없고 은행 가서 돈도 척척 찾습니다. 글을 안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습니다.

사실 그 동안 우리 집 양반한테랑 딸아이한테 ?기역, 니은…….? 정도는 배웠는데 하도 구박을 하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바람에 그만두고 말았지요. 그러다가 딸아이가 전봇대에 붙어 있던 한글 배울 학생 모집 포스터를 보고 적어 왔다며 전화 번호 하나를 제게 주더군요. 그게 바로 ?동부 밑거름 학교?였어요. 당장에 적힌 대로 전화해서 등록하고는 때때로 손자를 데리고 다니면서도 하루도 결석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아침부터 와서 월급 한 푼 안 받고 일자무식인 우리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는 선생님들이 고마워서라도 포기하지 않으렵니다. 열심히 해서 여든이 되든 아흔이 되든 검정 고시를 볼 생각입니다. 이제 다른 세상을 알게 되었고, 옆에서 도와 주는 고마운 분들이 계시는데 못 할 것 없지요. ?배우는 고통은 잠깐이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글을 모르고 사는 아주머니, 할머니들! 망설이지 말고 이 참에 용기내서 한글을 배워 보세요. 이 늙은이도 배우는데 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새롭게 인생을 사십시다.

- 김덕례, ?육십에 배운 한글?

다음은 앞 글을 읽고 쓴 학생글이다. 이 글을 읽고, 다음 물음에 답해 보자.

나는 글 쓰는 일을 별로 즐겨 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도 작문 시간에 항상 졸기만 하고, 남의 것을 베껴 내기까지도 하는 정도다. 작문 시간이 너무 싫다. 그러나 글을 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이나 만화를 보는 것은 나의 취미이다. 그러나 오늘 ?아버지의 손?과 ?육십에 배운 한글?을 읽으면서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고 글자나 글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첫째로, 말을 하는 것과 글을 아는 것이 이처럼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손?에 나오는 아버지와 ?육십에 배운 한글?의 할머니를 보면,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글을 몰랐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불편함을 겪었다. ?아버지의 손?의 아버지는 글자를 몰라서 죽음에까지 이르렀다. 글 속의 아버지는 유난히 투박하고 힘센 손을 가지고 있었지만 약병 하나를 열 수 없었다. 그것은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약병을 여는 안내문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육십에 배운 한글?의 할머니도 글자를 몰라 온갖 설움과 고통을 받았다.

둘째로, 글자를 아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자를 알면 약병의 설명서, 반가운 편지, 거리의 간판을 읽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할머니처럼 감명 깊은 글을 쓸 수는 없다. 나는 글자를 잘 알지만 외할머니께 편지 한 장을 쓰는 일조차 잘 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그 때 굉장히 멋진 글을 써서 외할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이 뒤섞여 갈피를 잡지 못한 듯하다. 할머니의 글을 읽어 보면, 이제까지 겪은 설움과 기쁨을 우리 앞에서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것은 할머니의 생각이 뚜렷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두 편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글자 때문에 아버지를 여읜 아들의 슬픔과 눈 뜬 장님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오신 할머니의 설움에 마음이 아팠고, 뒤늦게나마 글을 깨쳐 자유로운 세상을 만난 할머니의 인간 승리에 손뼉을 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일의 소중함과 뚜렷한 생각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5단원 능동적인 의사 소통

1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 약 용(丁若鏞)

박석무 옮김긿긿긿‘

과일․채소․약초를 재배하도록

시골에 살면서 과원(果園)이나 남새밭을 가꾸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버림받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지난번 국상(國喪)이 난 바쁜 가운데도 넝쿨소나무 열 그루와 향나무 한두 그루를 심어 둔 적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집에 있었다면 뽕나무는 수백 주가 됐을 거고 배도 몇 나무, 옮겨 심은 능금나무 몇 주와 감나무들이 지금쯤 밭에 가득 찼을 것이다. 옻나무도 남의 담장을 넘을 정도로 뻗어 나갔을 것이고, 석류도 여러 나무, 포도도 많이 가꾸었을 거고 파초도 대여섯 주는 심었을 거고, 유산(酉山)의 소나무도 이미 여러 자쯤 자랐을 거다. 너희는 이런 일을 하나라도 했는지 모르겠구나. 너희들이 국화를 심었다고 들었는데 국화 한 이랑은 가난한 선비에게 몇 달 동안의 식량을 지탱해 주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니 한낱 꽃구경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생지황, 저무릇, 천궁(川芎)과 같은 것이라든지 쪽나무나 꼭두서니 등에도 모두 마음을 기울여 잘 가꾸어 보도록 하여라.

남새밭 가꾸는 일에는 땅을 반반하게 고르는 일과 규격을 바르게 하는 일이 중요하고, 흙덩이는 모래처럼 가늘게 부셔야 하고, 식물을 심을 때에는 아주 깊이 땅을 파는 일과 거친 흙을 분가루처럼 부드럽게 해야 하며, 씨는 항상 고르게 뿌려야 하며, 모종은 아주 성기게 해야 한다. 아욱 한 이랑, 배추 한 이랑, 무 한 이랑씩 심어 두고 가지나 고추 등속도 마땅히 따로따로 구별하여 심어 놓고 마늘이나 파 심는 일에도 힘을 쓸 것이며, 미나리도 심을 만한 채소다. 또, 한여름 농사로서는 참외만한 것도 없느니라.

절약하고 본농사에 힘쓰면서 아름다운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이 남새밭 가꾸는 일이다.

근(勤)과 검(儉)을 유산으로

내가 벼슬살이를 못 하여 밭뙈기 얼마만큼도 너희들에게 물려주지 못했으니, 오늘은 오직 글자 두 자를 정신적인 부적으로 마음에 지니어 잘 살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도록 너희들에게 물려주겠다. 너희들은 너무 야박하다고 하지 마라.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쓰고도 다 쓰지 못할 거다. 부지런함(勤)이란 무얼 뜻하겠는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때 할 일은 저녁때 하기로 미루지 않으며, 밝은 날에 해야 할 일을 비 오는 날까지 끌지 말도록 하고, 비 오는 날 해야 할 일도 맑은 날까지 천연시키지 말아야 한다. 늙은이는 앉아서 감독하고, 어린 사람들은 직접 행동으로 어른의 감독을 실천에 옮기고, 젊은이는 힘드는 일을 하고, 병이 든 사람은 집을 지키고, 부인들은 길쌈을 하기 위해 밤중[四更]이 넘도록 잠을 자지 않아야 한다. 요컨대 집 안의 상하 남녀 간에 단 한 사람도 놀고 먹는 사람이 없게 하고, 또 잠깐이라도 한가롭게 보여서는 안 된다. 이런 걸 부지런함이라 한다.

검(儉)이란 무얼까? 의복이란 몸을 가리기만 하는 것인데 고운 비단으로 된 옷이야 조금이라도 해지기만 하면 세상에서 볼품없는 것으로 되어 버리지만, 텁텁하고 값싼 옷감으로 된 옷은 약간 해진다 해도 볼품이 없어지진 않는다. 하나의 옷을 만들 때마다 앞으로 계속 오래 입을 수 있을까 여부를 생각해서 만들어야지, 곱고 아름답게만 만들어 빨리 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옷을 만들게 되면, 당연히 곱고 아름다운 옷을 만들지 않고 투박하고 질긴 것을 고르지 않을 사람이 없게 된다.

음식이란 생명만 연장시키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생선이라도 입술 안으로만 들어가면 이미 더러운 물건이 되어 버린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귀하다고 함은 참됨 때문이니, 전혀 속임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늘을 속이면 제일 나쁜 일이고, 임금이나 어버이를 속이거나 농부가 동료를 속이고 상인이 동업자를 속이면 모두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단 한 가지 속일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건 자기의 입과 입술이다.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생각하여 입과 입술을 속여서 잠깐 동안만 지내고 보면 배고픔은 가셔서 주림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이러해야만 가난을 이기는 방법이 된다.

금년 여름에 내가 다산에서 지내며 상추로 밥을 싸서 주먹덩이를 삼키고 있을 때 옆 사람이 구경하고는 ?상추로 싸 먹는 것과 김치 담아 먹는 것은 차이가 있는 겁니까??라고 묻기에, 내가 말하길 ?그건 사람이 자기 입을 속여 먹는 법입니다.?라고 말하여, 적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어떤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이러한 생각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맛있고 기름진 음식만을 먹으려고 애써서는 결국 변소에 가서 대변 보는 일에 정력을 소비할 뿐이다. 그러한 생각은 당장의 어려운 생활 처지를 극복하는 방편만이 아니라 귀하고 부한 사람 및 복이 많은 사람이나 선비들의 집안을 다스리고 몸을 유지해 가는 방법도 된다. 근과 검, 이 두 자 아니고는 손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니 너희들은 절대로 명심하도록 하라.

2 구운몽

【15`장까지의 구운몽 줄거리】

중국 당나라 때 인도에서 온 육관대사가 남악 형산 연화봉에서 불법을 베푼다. 동정 용왕이 설법 자리에 늘 참석하자 대사는 제자 성진을 보내 사례하는데, 성진(性眞)은 용왕의 술대접을 받고 돌아오던 중 석교에서 남악 위부인의 시녀 여덟 명을 만나 복숭아꽃으로 구슬을 만들어 준다. 성진은 팔선녀의 아름다움과 세속의 부귀공명으로 번뇌하다가 육관대사의 명으로 팔선녀와 함께 인간 세상으로 추방된다.

성진은 회남 수주현 양 처사의 아들 양소유(楊小游)로 태어난다. 10세에 그 부친이 신선의 세계로 떠나간 뒤 어머니를 모시고 지내다가 15세에 과거를 보러 떠난다. 화주 화음현의 진채봉은 양소유의 풍채를 보고 혼약을 정하나 반란이 일어나 양소유는 남전산으로 피란을 가고 진채봉은 그 부친의 죄로 궁녀로 잡혀간다. 양소유는 남전산에서 도인에게 음악을 배우고 귀가했다가 이듬해 다시 과거 길에 오른다. 낙양에서 기생 계섬월과 인연을 맺고, 장안에서는 여자로 변장하여 거문고 연주를 하면서 당대 최고의 규수인 정경패의 미모를 몰래 살펴본다. 양소유는 장원급제한 뒤 한림학사가 되어 정경패와 정식으로 혼약을 하고, 정경패는 가춘운을 양소유의 첩으로 보내면서 함께 계교를 써서 전날 양소유에게 속은 부끄러움을 씻는다. 연나라 왕이 배반하자 양소유는 사신으로 가 항복을 받고 귀로에 자신을 따라온 적경홍과 인연을 맺는다. 예부상서가 된 양소유는 퉁소 연주가 계기로 난양공주와 혼인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으나 정경패와의 온약을 들어 거부하다가 투옥된다.

토번이 침략하자 황제는 양소유로 하여금 대적케 한다. 연전연승하던 중 토번왕이 보낸 자객 심요연과 인연을 맺고, 꿈속에 맥룡담에 들어가 동정 용왕의 딸 백능파와 인연을 맺고는 그녀를 위해 남해 용왕의 아들을 제압한다. 한편 난양공주는 정경패를 찾아가 그 인품에 감복하고, 태후는 정경패를 영양공주에 봉한다. 개선한 양소유는 승상이 되고, 태후는 두 공주와 진채봉을 양소유와 결혼하게 한다. 양소유는 고향의 모친을 모시고 와 잔치를 열고, 황제의 동생 월왕과 낙유원에서 사냥 시합을 하는 등 처첩들과 더불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처첩들은 관음보살 앞에서 형제의 의를 맺는다. 세월이 흐른 뒤 양소유는 은퇴를 거듭 청하고, 황제는 마지 못하여 취미궁을 하사하여 살게 한다.

[제`16`장] 양승상등고망원(楊丞相登高望遠)

진상인반본환원(眞上人返本還元)

승상(丞相)이 성은(聖恩)을 감격하여 고두사은(叩頭謝恩)하고 거가(擧家)하여 취미궁(翠媚宮)으로 옮아가니, 이 집이 종남산 가운데 있으되, 누대의 장려(壯麗)함과 경개(景槪)의 기절(奇絶)함이 완연(宛然)히 봉래 선경(仙境)이니, 왕 학사의 시에 가로되,

?신선의 집이 별로 이에서 낫지 못할 것이니, 무슨 일 퉁소를 불고 푸른 하늘로 향하리오? ?

하니, 이 한 글귀로 가히 경개를 알리러라.

승상이 정전(正殿)을 비워 조서(詔書)와 어제(御製) 시문(詩文)을 봉안(奉安)하고 그 남은 누각대사(樓閣臺?)에는 제 낭자가 나눠 들고, 날마다 승상을 모셔 물을 임(臨)하며 매화(梅花)를 찾고 시를 지어 구름 끼인 바위에 쓰며 거문고를 타 솔바람을 화답(和答)하니, 청한(淸閑)한 복(福)이 더욱 사람을 부뤄할 배러라.

승상이 한가한 곳에 나아간 지 또한 여러 해 지났더니, 팔월(八月) 염간(念間)은 승상 생일이라. 모든 자녀 다 모다 십 일을 연(連)하여 설연(設宴)하니 번화성만(繁華盛滿)함이 예도 듣지 못할러라. 잔치를 파(破)하고 제자(諸子)가 각각 흩어진 후 문득 구추가절(九秋佳節)이 다다르니, 국화(菊花) 봉오리 누르고 수유 열매가 붉었으니 정히 등고(登高)할 때라. 취미궁 서녘에 높은 대(臺) 있으니, 그 위에 오르면 팔백 리(里) 진천(秦川)을 손바닥 금 보듯이 하여 가린 것이 없으니, 승상이 가장 사랑하는 땅이러라.

이 날, 양 부인과 육 낭자를 데리고 대에 올라 머리에 국화를 꽂고 추경(秋景)을 희롱할새 입에 팔진(八珍)이 염오(厭惡)하고 귀에 관현(管絃)이 슬민지라. 다만 춘운으로 하여금 과합(果盒)을 붙들고 섬월로 옥호(玉壺)를 이끌며 국화주를 가득 부어 처첩(妻妾)이 차례로 헌수(獻壽)하더니, 이윽고 비낀 날이 곤명지(昆明池)에 돌아지고 구름 그림자 진천(秦川)에 떨어지니, 눈을 들어 한 번 보니 가을빛이 창망(滄茫)하더라. 승상이 스스로 옥소(玉簫)를 잡아 두어 소리를 부니 오오열열(嗚嗚咽咽)하여 원(怨)하는 듯하고, 우는 듯하고, 고할 듯하고, 형경(荊卿)이 역수(易水)를 건널 적 점리(漸離)를 이별하는 듯, 패왕(覇王)이 장중(帳中)에 우희(虞姬)를 돌아보는 듯하니, 모든 미인이 처연(凄然)하여 슬픈 빛이 많더라. 양 부인이 옷깃을 여미고 물어 가로되,

?승상이 공을 이미 이루고 부귀 극(極)하여 만인(萬人)이 부뤄하고 천고(千古)에 듣지 못한 배라. 가신(佳辰)을 당하여 풍경을 희롱(戱弄)하며 꽃다운 술은 잔에 가득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 이 또한 인생(人生)의 즐거운 일이어늘, 퉁소 소리 이러하니 오늘 퉁소는 옛날 퉁소가 아니로소이다.?

승상이 옥소를 던지고 부인 낭자를 불러 난단(欄端)을 의지하고 손을 들어 두루 가리키며 가로되,

?북(北)으로 바라보니 평(平)한 들과 무너진 언덕에 석양이 쇠한 풀에 비치었는 곳은 진 시황의 아방궁(阿房宮)이요, 서(西)로 바라보니 슬픈 바람이 찬 수풀에 불고 저문 구름이 빈 뫼에 덮은 데는 한 무제의 무릉(茂陵)이요, 동(東)으로 바라보니 분칠(粉漆)한 성(城)이 청산(靑山)을 둘렀고 붉은 박공이 반공(半空)에 숨었는데, 명월은 오락가락하되 옥난간을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 이는 현종 황제가 태진비(太眞妃)로 더불어 노시던 화청궁(華淸宮)이라. 이 세 임금은 천고 영웅(英雄)이라. 사해(四海)로 집을 삼고 억조(億兆)로 신첩(臣妾)을 삼아 호화 부귀 백 년을 짧게 여기더니 이제 다 어디 있나뇨?

소유는 본디 하남 땅 베옷 입은 선비라. 성천자(聖天子) 은혜를 입어 벼슬이 장상(將相)에 이르고, 제 낭자 서로 좇아 은정(恩情)이 백 년이 하루 같으니, 만일 전생 숙연(宿緣)으로 모두 인연(因緣)이 진(盡)하면 각각 돌아감은 천지에 떳떳한 일이라. 우리 백 년 후 높은 대 무너지고, 굽은 못이 이미 메워지고, 가무(歌舞)하던 땅이 이미 변하여 거친 뫼와 쇠(衰)한 풀이 되었는데, 초부(樵夫)와 목동(牧童)이 오르내리며 탄식하여 가로되, `?이것이 양 승상의 제 낭자로 더불어 놀던 곳이라. 승상의 부귀 풍류와 제 낭자의 옥용 화태(玉容花態) 이제 어디 갔나뇨.? 하리니 어이 인생이 덧없지 아니리요?

내 생각하니 천하에 유도(儒道)와 선도(仙道)와 불도(佛道)가 유(類)에 높으니 이 이론 삼교라. 유도는 생전(生前) 사업과 신후 유명(身後留名)할 뿐이요, 신선(神仙)은 예부터 구하여 얻은 자가 드무니 진 시황, 한 무제, 현종제를 볼 것이라. 내 치사(致仕)한 후로부터 밤에 잠 곧 들면 매양 포단(蒲團) 위에서 참선하여 뵈니 이 필연 불가로 더불어 인연이 있는지라. 내 장차 장자방(張子房)의 적송자(赤松子) 좇음을 효칙(效則)하여 집을 버리고 스승을 구하여 남해를 건너 관음(觀音)을 찾고, 오대(五臺)에 올라 문수(文殊)께 예를 하여 불생 불멸(不生不滅)할 도를 얻어 진세(塵世) 고락(苦樂)을 뛰어나려 하되, 제 낭자로 더불어 반생을 좇았다가 일조(一朝)에 이별하려 하니 슬픈 마음이 자연 곡조(曲調)에 나타남이로소이다.?

제 낭자는 다 전생에 근본이 있는 사람이라. 또한 세속 인연이 지낼 때니 이 말을 듣고 자연 감동하여 이르되,

?부귀 번화 중 이렇듯 청정(淸淨)한 마음을 내시니 장자방을 어이 족히 이르리요? 첩 등 자매 팔 인이 당당히 심규(深閨) 중에서 분향(焚香) 예불하여 상공 돌아오시기를 기다릴 것이니, 상공이 이번 행하시매 벅벅이 밝은 스승과 어진 벗을 만나 큰 도를 얻으리니 득도(得道)한 후에 부디 첩 등을 먼저 제도(濟度)하소서.?

승상이 대희(大喜) 왈,

?우리 구 인이 뜻이 같으니 쾌사(快事)라. 내 명일(明日)로 당당히 행할 것이니 금일(今日)은 제 낭자로 더불어 진취(盡醉)하리라.?

하더라, 제 낭자 왈,

?첩 등이 각각이 일배를 받들어 상공을 전송하리이다.?

잔을 씻어 다시 부으려 하니 홀연(忽然) 석양(夕陽)에 막대 던지는 소리가 나거늘, 고이히 여겨 생각하되 어떤 사람이 올라오는고 하더니, 한 호승(胡僧)이 눈썹이 길고 눈이 맑고 얼굴이 고이하더라. 엄연(儼然)히 좌상(座上)에 이르러 승상을 보고 예하여 왈,

?산야(山野) 사람이 대승상께 뵈나이다.?

승상이 이인(異人)인 줄 알고 황망(慌忙)히 답례 왈,

?사부(師傅)는 어디로서 오신고??

호승이 소 왈(笑曰)

?평생 고인(故人)을 몰라 보시니 귀인(貴人)이 잊음 헐탄 말이 옳도소이다.?

승상이 다시 보니 과연 낯이 익은 듯하거늘, 홀연 깨쳐 능파 낭자를 돌아보며 왈,

?소유, 전일 토번을 정벌할 제 꿈에 동정 용궁에 가 잔치하고 돌아올 길에 남악에 가 보니, 한 화상(和尙)이 법좌(法座)에 앉아서 경(經)을 강론(講論)하더니 노부가 노화상(老和尙)이냐? ?

호승이 박장대소(拍掌大笑)하고 가로되,

?옳다, 옳다. 비록 옳으나 몽중(夢中)에 잠깐 만나 본 일은 생각하고 십 년을 동처(同處)하던 일을 알지 못하니 뉘 양 장원을 총명타 하더뇨??

승상이 망연(茫然)하여 가로되,

?소유, 십오륙 세 전은 부모 좌하(座下)를 떠나지 아녔고, 십육에 급제하여 연하여 직명이 있으니, 동으로 연국(燕國)에 봉사하고 서로 토번을 정벌한 밖은 일찍 경사를 떠나지 아녔으니, 언제 사부로 더불어 십 년을 상종(相從)하였으리요??

호승이 소 왈,

?상공이 오히려 춘몽(春夢)을 깨지 못하였도소이다.?

승상 왈,

?사부, 어쩌면 소유로 하여금 춘몽을 깨게 하리오? ?

?이는 어렵지 아니하니이다.?

하고, 손 가운데 석장을 들어 석난간을 두어 번 두드리니, 홀연 네 녘 뫼골에서 구름이 일어나 대상에 끼이어 지척(咫尺)을 분별치 못하니, 승상이 정신이 아득하여 마치 취몽 중에 있는 듯하더니 오래게야 소리질러 가로되,

?사부가 어이 정도(正道)로 소유를 인도(引導)치 아니하고 환술(幻術)로 서로 희롱하나뇨??

말을 마치지 못하여서 구름이 걷히니 호승이 간 곳이 없고, 좌우를 돌아보니 팔 낭자가 또한 간 곳이 없는지라 정히 경황(驚惶)하여 하더니, 그런 높은 대와 많은 집이 일시에 없어지고 제 몸이 한 작은 암자 중의 한 포단 위에 앉았으되, 향로(香爐)에 불이 이미 사라지고, 지는 달이 창에 이미 비치었더라.

스스로 제 몸을 보니 일백여덟 낱 염주(念珠)가 손목에 걸렸고, 머리를 만지니 갓 깎은 머리털이 가칠가칠하였으니 완연히 소화상의 몸이요, 다시 대승상의 위의(威儀) 아니니, 정신이 황홀하여 오랜 후에 비로소 제 몸이 연화 도량(道場) 성진(性眞) 행자인 줄 알고 생각하니, 처음에 스승에게 수책(受責)하여 풍도(?都)로 가고, 인세에 환도하여 양가의 아들 되어 장원 급제 한림학사 하고, 출장 입상(出將入相)하여 공명 신퇴(功名身退)하고, 양 공주와 육 낭자로 더불어 즐기던 것이 다 하룻밤 꿈이라. 마음에 이 필연(必然) 사부가 나의 염려(念慮)를 그릇함을 알고, 나로 하여금 이 꿈을 꾸어 인간 부귀(富貴)와 남녀 정욕(情欲)이 다 허사(虛事)인 줄 알게 함이로다.

급히 세수(洗手)하고 의관(衣冠)을 정제하며 방장(方丈)에 나아가니 다른 제자들이 이미 다 모였더라. 대사, 소리하여 묻되,

?성진아, 인간 부귀를 지내니 과연 어떠하더뇨??

성진이 고두하며 눈물을 흘려 가로되,

?성진이 이미 깨달았나이다. 제자 불초(不肖)하여 염려를 그릇 먹어 죄를 지으니 마땅히 인세에 윤회(輪廻)할 것이어늘, 사부 자비하사 하룻밤 꿈으로 제자를 마음 깨닫게 하시니, 사부의 은혜를 천만 겁(劫)이라도 갚기 어렵도소이다.?

대사 가로되,

?네, 승흥(乘興)하여 갔다가 흥진(興盡)하여 돌아왔으니 내 무슨 간예(干預)함이 있으리요? 네 또 이르되 인세에 윤회할 것을 꿈을 꾸다 하니, 이는 인세와 꿈을 다르다 함이니, 네 오히려 꿈을 채 깨지 못하였도다.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 되었다가 나비가 장주 되니? 어니 거짓 것이요 어니 진짓 것인 줄 분변치 못하나니, 어제 성진과 소유가 어니는 진짓 꿈이요 어니는 꿈이 아니뇨??

성진이 가로되,

?제자, 아득하여 꿈과 진짓 것을 알지 못하니, 사부는 설법하사 제자를 위하여 자비하사 깨닫게 하소서.?

대사 가로되,

?이제 금강경(金剛經) 큰 법을 일러 너의 마음을 깨닫게 하려니와, 당당히 새로 오는 제자 있을 것이니 잠깐 기다릴 것이라.?

하더니 문 지친 도인이 들어와,

?어제 왔던 위부인 좌하 선녀 팔 인이 또 와 사부께 뵈아지이다 하나이다.?

대사, 들어오라 하니, 팔 선녀, 대사의 앞에 나아와 합장 고두하고 가로되,

?제자 등이 비록 위부인을 모셨으나 실로 배운 일이 없어 세속 정욕을 잊지 못하더니, 대사, 자비하심을 입어 하룻밤 꿈에 크게 깨달았으니, 제자 등이 이미 위부인께 하직하고 불문(佛門)에 돌아왔으니 사부는 나종내 가르침을 바라나이다.?

대사 왈,

?여선의 뜻이 비롯 아름다우나 불법이 깊고 머니, 큰 역량과 큰 발원(發願)이 아니면 능히 이르지 못하나니, 선녀는 모로미 스스로 헤아려 하라.?

팔 선녀가 물러가 낯 위에 연지분(?脂粉)을 씻어 버리고 각각 소매로서 금전도(金?刀)를 내어 흑운(黑雲) 같은 머리를 깎고 들어와 사뢰되,

?제자 등이 이미 얼굴을 변하였으니 맹서(盟誓)하여 사부 교령(敎令)을 태만(怠慢)치 아니하리이다.?

대사 가로되,

?선재, 선재(善哉)라. 너희 팔 인이 능히 이렇듯 하니 진실로 좋은 일이로다.?

드디어 법좌에 올라 경문을 강론하니, 백호(白毫) 빛이 세계에 쏘이고 하늘 꽃이 비같이 내리더라.

설법함을 장차 마치매 네 귀 진언(眞言)을 송(誦)하여 가로되,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이라 이르니, 성진과 여덟 이고(尼姑)가 일시에 깨달아 불생 불멸(不生不滅)할 정과(正果)를 얻으니, 대사 성진의 계행(戒行)이 높고 순숙(純熟)함을 보고, 이에 대중을 모으고 가로되,

?내 본디 전도(傳道)함을 위하여 중국에 들어왔더니, 이제 정법을 전할 곳이 있으니 나는 돌아가노라.?

하고 염주와 바리와 정병(淨甁)과 석장과 금강경 일 권을 성진을 주고 서천(西天)으로 가니라.

이후에 성진이 연화 도량 대중을 거느려 크게 교화(敎化)를 베푸니, 신선과 용신과 사람과 귀신이 한 가지로 존숭(尊崇)함을 육관대사와 같이하고 여덟 이고가 인하여 성진을 스승으로 섬겨 깊이 보살 대도를 얻어 아홉 사람이 한 가지로 극락(極樂) 세계로 가니라.

6단원 아름다운 노래

1 청산 별곡

작자 미상

살어리 살어리랏다 틟산(靑山)애 살어리랏다.

멀위랑 쾓래랑 먹고 틟산(靑山)애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로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잉 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이링공 뎌링공 퍛야 나즈란 디내와손뎌,

오리도 가리도 업슨 바므란 쿜 엇디 호리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킄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퀦래 살어리랏다.

콉큖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퀦래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에졍지 가다가 드로라.

사턢미 튽대예 올아셔 퍥금(奚琴)을 혀거를 드로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다니 ?브른 도긔 설진 강수를 비조라.

조롱곳 누로기 큟와 잡턢와니 내 엇디 퍛리잇고.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 ?악장가사(樂章歌詞)?

2 어부사시사

윤 선 도(尹善道)

春詞 4

우콋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숩가

이어라 이어라

漁村(어촌) 두어 집이 퐴 속의 나락들락.

至?悤(지국총) 至?悤(지국총) 於思臥(어턢와)

말가퍝 기픈 소희 온갇 고기 퓁노콉다.

夏詞 2

년닙히 밥 싸 두고 반찬으란 장만 마라

닫 드러라 닫 드러라

靑蒻笠(청약립)은 써 잇노라, 綠蓑依(녹사의) 가져오냐.

至?悤(지국총) 至?悤(지국총) 於思臥(어턢와)

무심퍝 白鷗(백구)콋 내 좃콋가 제 좃콋가.

秋詞 1

物外(물외)예 조퍝 일이 漁夫生涯(어부 생애) 아니러냐.

? 쿆라 ? 쿆라

漁翁(어옹)을 툫디마라, 그림마다 그렷더라.

至?悤(지국총) 至?悤(지국총) 於思臥(어턢와)

四時興(사시 흥)이 퍝 가지나 추강(秋江)이 z듬이라.

冬詞 4

간 밤의 눈 갠 後(후)의 景物(경물)이 달"고야.

이어라 이어라

압희콋 萬頃琉璃(만경유리) 뒤희콋 千疊玉山(천첩옥산),

至?悤(지국총) 至?悤(지국총) 於思臥(어턢와)

仙界(선계)ㄴ가 佛界(불계)ㄴ가 人間(인간)이 아니로다.

3 진달래꽃

김 소 월(金素月)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4 유리창 1

정 지 용(鄭芝溶)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寶石)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닥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새처럼 날러갔구나!

5 광야

이 육 사(李陸史)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에도

차마 이 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7단원(생각하는 힘)

1 장마

윤 흥 길(尹興吉)

【앞부분의 줄거리】

?나(동만)?의 외가 식구들은 6․25 사변으로 ?나?의 집으로 피난 와 친가 식구들과 함께 살게 된다.

사돈 댁에서 신세를 지는 처지에 있는 외할머니와 베푸는 입장인 친할머니는 삼촌이 빨치산, 외삼촌이 국군 소위라는 거북한 상황 속에서도 말다툼 없이 의좋게 지냈다. 그러다가 내가 낯선 사람의 꾐에 빠져 빨치산인 삼촌이 밤에 몰래 집에 왔다고 실토한 일로 ?나?의 아버지가 읍내에 잡혀가 고초를 겪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할머니는 ?나?를 ?과자 한 조각에 삼촌을 팔아 먹은 천하의 무지막지한 사람 백정?으로 여기는 데 반해 외할머니는 은근히 나를 감싸면서 두 분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외삼촌의 전사 소식이 날아들자, 상심한 외할머니는 장마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빨갱이를 다 쓸어가 버리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빨치산으로 나간 삼촌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할머니는 이것을 자기 아들더러 죽으라는 말로 받아들여 외할머니와 한바탕 큰 싸움을 벌이게 된다.

빨치산이 되어 산으로 숨은 삼촌이 몰래 집에 왔던 그 날 밤,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고모의 설득에 자수를 결심하려던 삼촌은 문 밖의 발소리에 놀라 다시 산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나?는 그 발소리가 외할머니의 기척이었음을 눈치챈다. 그 뒤로 빨치산과 국군의 전투가 벌어지고, 빨치산들의 처참한 주검들이 읍내에 전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나?의 가족들은 삼촌이 죽었거나, 곧 죽을 것이라는 체념에 빠진다. 그러나 할머니만은 소경 점쟁이에게서 삼촌이 ?아무 날 아무 시?에 살아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그 예언을 신앙처럼 믿으면서 삼촌을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고 잠도 끼니도 거른 채 몇날 며칠 동안 가족들을 들볶는다. 그 ?아무 날 아무 시?가 하루 앞으로 다가오자 할머니는 밤새도록 등을 환하게 밝혀 놓으라고 명하는데, 그 날 밤 ?나?는 구렁이 우는 소리를 듣고 두려움에 식은땀을 흘린다.

할머니가 대문간에 서서 호통을 치는 바람에 혼곤한 잠에서 깨었다. 날은 부옇게 밝았으나 아직도 꼭두새벽이었다. 가뜩이나 짧은 여름밤인데 그런 정도는 자나마나였다. 잠을 설친 탓으로 머릿속이 띠잉 울리고 눈꺼풀은 슬슬 감겼다. 그러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편이었다. 여러 날 겹치는 피로와 긴장 때문에 얼굴 모양들이 모두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부황이 든 사람처럼 얼굴이 누렇게 떠 부석부석했고, 어머니는 숫제 강마른 대꼬챙이였다. 외가 식구들이라 해서 특별히 나은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만이 홀로 청청해 가지고 첫새벽부터 기진맥진한 사람들을 게으른 소 잡도리하듯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문간에 나란히 불러 놓고 무섭게 닦아세우는 중이었다. 장명등이 꺼져 있었다. 기름이 아직 반나마 들어 있는데도 어느 바람이 언제 끄고 갔는지 유리 갓에 물기가 촉촉했다. 장명등 일로 할머니는 몹시 심정이 상해 버렸다. 하느님이 간밤에 몰래 들어와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정성을 시험하고 간 증거로 삼아 버렸다.

할머니의 노여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 한 가지만으로도 하나밖에 없는 동생 시동생을 끝까지 돌봐 줄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다면서 정성의 기미가 보일 때까지 광과 장롱의 열쇠를 당신이 직접 맡아 관리하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경사시런 날 아적부텀 예펜네가 집 안에서 큰 소리를 하면 될 일도 안 되는 벱이니께 이만침 혀 두고 참는다만, 후사는 느덜이 알어서들 혀라. 나는 손구락 한나 깐닥 않고 뒷전에서 귀경만 허고 있을란다.?

말을 마치고 돌아서면서 할머니는 거듭 혀를 찼다.

?큰자석이라고 있다는 것이 저 모양이니 원, 쯧쯧.?

할머니는 양쪽 팔을 홰홰 내저으며 부리나케 안채로 향했다.

?지지리 복도 못 타고난 년이지. 나만침 아덜 메누리복이 없는 년도 드물 것이여.?

사랑채 앞을 지나면서 또 혼잣말을 했다. 말이 혼잣말이지 실상은 이웃에까지 들릴 고함에 가까운 소리였다.

할머니는 정말로 손가락 한 개도 까닥하지 않았다. 방문을 꽝 닫고 들어앉은 후로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죽이 끓든 밥이 끓든 일절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 대신 봉창에 달린 작은 유리 너머로 늘 마당을 감시하면서 일일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는 수대로 하나씩 빗자루나 연장 같은 걸 들고 나와 감시의 눈초리를 뒤통수에 느껴 가면서 마당도 쓸고 마루도 닦고 집 안팎의 거미줄도 걷었다. 고모도 나오고 이모까지 합세하여 모두들 바삐 움직인 보람이 있어 장마로 어지럽혀진 집 안이 말끔히 청소되었다. 이모와 고모는 어머니를 도우러 부엌으로 들어가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대문에서 마당에 이르는 소롯길과 텃밭 사이에 깊은 도랑을 내어 물기를 빼느라고 식전부터 구슬땀을 흘렸다.

하늘은 아직도 흐렸다. 오랜만에 햇빛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했던 날씨가 아무래도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서녘 하늘 한 구퉁이가 배꼼히 열려 있었고, 구름을 몰아가는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다시 비가 내릴 기미 같은 건 어디에도 안 보였다. 그것만도 우리에겐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러했다.

이른 아침부터 우리 집에 찾아오는 동네 사람들이 내미는 첫 마디가 한결같이 날씨에 관한 얘기였다. 그리고 그 다음 차례가 삼촌 얘기였다. 그들은 날씨부터 시작해 가지고 아주 자연스럽게 아버지한테 접근했으며 아낙네들은 부엌을 무시로 드나들었다.

우리 집은 완전히 잔칫집답게 동네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저마다 연줄을 찾아 말을 걸어 보려는 사람들 때문에 식구들은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우리 식구들이 어느 정도 미신을 믿고 있는가였다. 물론 그들은 미신이란 말은 입 밖에 비치지도 않았다. 점쟁이의 말 한 마디가 이만큼 일을 크게 벌여 놓을 수 있었던 데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면서도 속셈이 빤히 보일 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이야기 끝에 그들은, 가족들 정성에 끌려서라도 삼촌이 틀림없이 돌아올 거라는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런 말을 하는 몇 사람의 태도에서 아버지는 그들이 우리 일을 가지고 자기네 나름으로 한창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눈치챘을 것이다. 마치 죽어 가는 환자 앞에서 금방 나을 병이니 아무 염려 말라고 위로하는 의사와 흡사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진시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사람이 늘어 우리 집은 더욱 더 붐볐다. 마을 안에서 성한 발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안 빠지고 다 모인 성싶었다. 혼자 진구네 집 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낯선 사내의 모습도 보였다. 장터처럼 북적거리는 속에서 우리는 아직 아침밥도 먹지 못했다. 삼촌이 오면 같이 먹는다고 할머니가 상을 못 차리게 했던 것이다. 아주 굶는 건 아니니까 진득이 참는 도리밖에 없지만, 그러자니 배가 굉장히 고팠다.

마침내 진시였다. 진시가 시작되는 여덟 시였다. 모두들 흥분에 싸여 초조하게 기다리는 가운데 자꾸만 시간이 흘렀다. 아홉 시가 지나고 어느덧 열 시가 다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 집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죄다 흩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점심이나 다름없는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구장어른과 진구네 식구들만이 나중까지 남아 실의에 잠긴 우리 일가의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안방에 혼자 남은 할머니를 제외하고 모두들 침통한 표정으로 건넌방에 차려진 상머리에 둘러앉았다. 뜨적뜨적 수저를 놀리는 심란한 얼굴들에 비해 반찬만은 명절날만큼이나 걸었다. 기왕 해놓은 밥이니까 먼저들 들라고 말하면서도 할머니 자신은 한사코 조반상을 거부해 버렸다. 진시가 벌써 지났는데도 할머니는 여전히 태평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애당초 말이 났을 때부터 자기는 시간 같은 건 그리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무 날?이지 그까짓 ?아무 시? 따위는 별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늘이 주관하는 일에도 간혹 실수가 있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이 하는 일이야 따져 무얼 하겠냐는 것이었다. 아무리 점쟁이가 용하다고는 해도 시간만큼은 이 쪽에서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된다는 주장이었다. 할머니한테는 아직도 그 날 하루가 창창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느 때 와도 기필코 올 사람이니까 그 때까지 더 두고 기다렸다가 모처럼 한번 모자 겸상을 받겠다면서 할머니는 추호도 지친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마루 위에 발돋움을 하고 자꾸만 입맛을 다시면서 근천을 떨던 워리란 놈이 갑자기 토방으로 내려섰다. 우리는 워리가 대문 쪽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이내 함성을 들었다.

수저질을 하던 아버지의 손이 허공에서 정지하는 걸 계기로 우리는 일시에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아이들이 일제히 올리는 함성이 매우 빠른 속도로 가까이 오는 중이었다. 숟가락을 아무 데나 팽개치면서 나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우리 집 대문간이 왁자 지껄하는 소리로 금방 소란해졌다. 마당 한복판에서 나는 다시 기세를 올리는 아이들의 아우성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우선 눈에 뜨이는 것이 저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한 떼의 조무래기패였다. 그들의 손엔 돌멩이 아니면 기다란 나뭇개비 같은 것들이 골고루 들려 있었다. 우리 집 대문 안으로 짓쳐 들어오는 걸 잠시 망설이는 동안 아이들은 무기를 든 손을 흔들면서 거푸 기세만 올렸다. 그 중의 한 아이가 힘껏 돌팔매질을 했다. 돌멩이가 날아와 푹 꽂히는 땅바닥에서 나는 끝내 못 볼 것을 보고야 말았다. 꿈틀꿈틀 기어오는 기다란 것이 거기에 있었다. 눈어림으로만도 사람 키보다 훨씬 큰 한 마리의 구렁이였다. 꿈틀거림에 따라 누런 비늘가죽이 이리저리 번들거리는 그 끔찍스런 몸뚱어리를 보는 순간, 그것의 울음 소리를 듣던 간밤의 기억이 얼핏 되살아나면서 오금쟁이가 대번에 뻣뻣이 굳어져 버렸다.

그러나 나는 별수없는 어린애였다. 말한 순간의 공포를 견디고 나서 나는 고함을 지르며 돌팔매질을 해대는 패거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어린애로 재빨리 되돌아왔다. 모든 꿈틀거리는 것들에 대해서 소년들이 거의 본능적으로 품는 적의와 파괴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잽싸게 헛간으로 달려갔다. 지겟작대기를 양손으로 힘껏 거머쥐었다. 내 쪽으로 가까이 오기만 하면 단매에 요절을 낼 요량으로 작대기를 쥔 한쪽 팔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억센 힘으로 내 팔을 움켜잡는 누군가의 손이 있었다.

돌아다보니 외할머니였다. 동시에 째지는 듯한 비명이 등 뒤에서 들렸다.

?아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마치 헌 옷가지가 구겨져 흘러내리듯 그렇게 마루 위로 고꾸라지는 할머니의 모습을 나는 목격했다. 외할머니가 내 손에서 작대기를 빼앗아 버렸다. 말은 없어도 외할머니의 부릅뜬 두 눈이 나한테 엄한 꾸지람을 던지고 있었다.

난데없는 구렁이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우리 집은 삽시에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무엇보다 큰 걱정이 할머니의 졸도였다. 식구들이 모두 안방에만 매달려 수족을 주무르고 얼굴에 찬물을 뿜어 대는 등 야단법석을 떨어가며 할머니가 어서 깨어나기를 빌었다.

그 바람에 일단 물러갔던 동네 사람들이 재차 모여들기 시작했고, 제멋대로 떼뭉쳐 서서 떠들어 대는 소리 때문에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모두가 제 정신이 아닌 그 북새 속에서도 끝까지 냉정을 잃지 않는 사람은 애오라지 외할머니 혼자뿐이었다. 미리서 정해 놓은 순서라도 밟듯 외할머니는 놀라우리만큼 침착한 태도로 하나씩 하나씩 혼란을 수습해 나갔다. 맨 먼저 사람들을 몰아 내는 일부터 서둘러 했다. 외할머니는 구장어른과 진구네 아버지 등의 도움을 받아 집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모조리 밖으로 내쫓은 다음 대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대문 밖에 내쫓긴 아이들과 어른들이 감나무가 있는 울바자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고비에 다다른 혼란의 사이를 틈탄 구렁이는 아욱과 상추가 자라고 있는 텃밭 이랑을 지나 어느새 감나무에 올라앉아 있었다. 감나무 가지에 누런 몸뚱이를 둘둘 감고서는 철사처럼 가늘고 긴 혓바닥을 대고 날름거렸다. 무엇에 되알지게 얻어맞아 꼬리 부분이 거지반 동강날 정도로 상해서 몸뚱이의 움직임과는 각 놀고 있었다. 아이들의 극성이 감나무에까지 따라와 아직도 돌멩이나 나뭇개비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돌멩이를 땡기는 게 어떤 놈이냐!?

외할머니의 고함은 서릿발 같았다. 팔매질이 뚝 멎었다. 그러자 외할머니는 천천히 감나무 아래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외할머니의 몸이 구렁이가 친친 감긴 늙은 감나무 바로 밑에 똑바로 서 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그 때까지 숨을 죽여 가며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바로 머리 위에서 불티처럼 박힌 앙증스런 눈깔을 요모조모로 빛내면서 자꾸 대가리를 숙여 꺼뜩꺼뜩 위협을 주는 커다란 구렁이를 보고도 외할머니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두 손을 천천히 가슴 앞으로 모아 합장했다.

?에구 이 사람아, 집안일이 못 잊어서 이렇게 먼 질을 찾어왔능가??

꼭 울어 보채는 아이한테 자장가라도 불러 주는 투로 조용히 속삭이는 그 말을 듣고 누군가 큰 소리로 웃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자 외할머니의 눈이 단박에 세모꼴로 변했다.

?어떤 창사구 빠진 잡놈이 그렇게 히득거리고 섰냐. 누구냐, 어서 이리 썩 나오니라. 주리댈 놈!?

외할머니의 대갈 호령에 사람들은 쥐죽은 소리도 못 했다. 외할머니는 몸을 돌려 다시 구렁이를 상대로 했다.

?자네 보다시피 노친께서는 기력이 여전허시고 따른 식구덜도 모다덜 잘 지내고 있네. 그러니께 집안일일랑 아모 염려 말고 어서어서 자네 가야 헐 디로 가소.?

구렁이는 움쩍도 하지 않았다. 철사 토막 같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면서 대가리만 두어 번 들었다 놓았다 했다.

?가야 헐 디가 보통 먼 질이 아닌디 여그서 이러고 충그리고만 있어서야 되겄능가. 자꼬 이러면은 못쓰네, 못써. 자네 심정은 내 짐작을 허겄네만 집안 식구덜 생각도 혀야지. 자네 노친 양반께서 자네가 이러고 있는 꼴을 보면 얼매나 가슴이 미여지겄능가.?

외할머니는 꼭 산 사람을 대하듯 위를 올려다보면서 조용조용히 말을 건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간곡한 말씨로 거듭 타일러 봐도 구렁이는 좀처럼 움직일 기척을 안 보였다. 이 때 울바자 너머에서 어떤 아낙네가 뱀을 쫓는 묘방을 일러 주었다. 모습은 안 보이고 목소리만 들리는 그 여자는 머리카락을 태워 냄새를 피우면 된다고 소리쳤다.

외할머니의 지시에 따라 나는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얻으러 안방으로 달려갔다.

할머니는 거의 시체나 다름이 없는 뻣뻣한 자세로 자리에 누워 있었다. 숨은 겨우 쉬고 있다 해도 아직도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였다. 할머니의 주변을 둘러싸고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사색이 다 되어 그저 의원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식구들을 향해 나는 다급한 소리로 용건을 말했다. 누구에게랄 것 없이 아무한테나 던진 내 말이 무척 엉뚱한 소리로 들렸던 모양이다. 할머니의 머리카락이 이런 때 도대체 어디에 소용될 것인지를 이해가 가도록 설명하기엔 꽤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고모가 인사불성이 된 할머니의 머리를 참빗으로 빗기는 덴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빗질을 여러 차례 거듭해서 얻어진 한 줌의 흰 머리카락이 내 손에 주어졌다. 언제 그렇게 준비를 해 왔는지 외할머니는 도래 소반 위에다 간단한 음식 몇 가지를 차리는 중이었다. 호박전과 고사리나물이 보이고 대접에 그득 담긴 냉수도 있었다. 내가 건네 주는 머리카락을 받아 땅에 내려놓은 다음 외할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늙은 감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자네 오면 줄라고 노친께서 여러 날 들어 장만헌 것일세. 먹지는 못헐망정 눈요구라도 허고 가소. 다아 자네 노친 정성 아닌가. 내가 자네를 쫓을라고 이러는 건 아니네. 그것만은 자네도 알어야 되네. 남새가 나드라도 너무 섭섭타 생각 말고, 집안일일랑 아모 걱정 말고 머언 걸음 부데 펜안히 가소.?

이야기를 다 마치고 외할머니는 불씨가 담긴 그릇을 헤집었다. 그 위에 할머니의 흰 머리를 올려놓자 지글지글 끓는 소리를 내면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단백질을 태우는 노린내가 멀리까지 진동했다. 그러자 눈 앞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희한한 광경에 놀라 사람들은 저마다 탄성을 올렸다. 외할머니가 아무리 타일러도 그 때까지 움쩍도 하지 않고 그토록 오랜 시간을 버티던 그것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감나무 가지를 친친 감았던 몸뚱이가 스르르 풀리면서 구렁이는 땅바닥으로 툭 떨러졌다. 떨어진 자리에서 잠시 머뭇거린 다음 구렁이는 꿈틀꿈틀 기어 외할머니 앞으로 다가왔다. 외할머니가 한쪽으로 비켜 서면서 길을 터 주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대로 뒤를 따라가며 외할머니는 연신 소리를 질렀다. 새막에서 참새 떼를 쫓을 때처럼

?숴이! 숴이!?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손뼉까지 쳤다. 누런 비늘가죽을 번들번들 뒤틀면서 그것은 소리 없이 땅바닥을 기었다. 안방에 있던 식구들도 마루로 몰려나와 마당 한복판을 가로질러 오는 기다란 그것을 모두 질린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꼬리를 잔뜩 사려 가랑이 사이에 감춘 워리란 놈이 그래도 꼴값을 하느라고 마루 밑에서 다 죽어 가는 소리로 짖어 대고 있었다. 몸뚱이의 움직임과는 여전히 따로 노는 꼬리 부분을 왼쪽으로 삐딱하게 흔들거리면서 그것은 방향을 바꾸어 헛간과 부엌 사이 공지를 천천히 지나갔다.

?숴이! 숴어이!?

외할머니의 쉰 목청을 뒤로 받으며 그것은 우물 곁을 거쳐 넓은 뒤란을 어느덧 완전히 통과했다. 다음은 숲이 우거진 대밭이었다.

?고맙네, 이 사람! 집안일은 죄다 성님한티 뜳璲í 자네 혼자 몸띵이나 지발 성혀서 먼 걸음 펜안히 가소. 뒷일은 아모 염려 말고 그저 펜안히 가소. 증말 고맙네, 이 사람아.?

장마철에 무성히 돋아난 죽순과 대나무 사이로 모습을 완전히 감추기까지 외할머니는 우물 곁에 서서 마지막 당부의 말로 구렁이를 배웅하고 있었다.

이웃 마을 용상리까지 가서 진구네 아버지가 의원을 모시고 왔다. 졸도한 지 서너 시간 만에야 겨우 할머니는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서너 시간이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서너 달에 해당되는 먼 여행이었던 듯 할머니는 방 안을 휘이 둘러보면서 정말 오래간만에 집에 돌아온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갔냐??

이것이 맑은 정신을 되찾고 나서 맨 처음 할머니가 꺼낸 말이었다. 고모가 말뜻을 재빨리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인제는 안심했다는 듯이 할머니는 눈을 지그시 내리깔았다. 할머니가 까무러친 후에 일어났던 일들을 고모가 조용히 설명해 주었다. 외할머니가 사람들을 내쫓고 감나무 밑에 가서 타이른 이야기,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태워 감나무에서 내려오게 한 이야기, 대밭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시종일관 행동을 같이 하면서 바래다 준 이야기……, 간혹가다 한 대목씩 빠지거나 약간 모자란다 싶은 이야기는 어머니가 옆에서 상세히 설명을 보충해 놓았다. 할머니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두 눈에서 하염없이 솟는 눈물방울이 훌쭉한 볼고랑을 타고 베갯잇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할머니는 사돈을 큰방으로 모셔 오도록 아버지한테 분부했다. 사랑채에서 쉬고 있던 외할머니가 아버지 뒤를 따라 큰방으로 건너왔다. 외할머니로서는 벌써 오래 전에 할머니하고 한 다래끼 단단히 벌인 이후로 처음 있는 큰방 출입이었다.

?고맙소.?

정기가 꺼진 우묵한 눈을 치켜 간신히 외할머니를 올려다보면서 할머니는 목이 꽉 메었다.

?사분도 별시런 말씀을 다…….?

외할머니도 말끝을 마무르지 못했다.

?야한티서 이얘기는 다 들었소. 내가 당혀야 헐 일을 사분이 대신 맡었구랴. 그 험헌 일을 다 치르노라고 얼매나 수고시렀으꼬.?

?인자는 다 지나간 일이닝게 그런 말씀 고만두시고 어서어서 ダ犬ª 잘 추시리기라우.?

?고맙소, 참말로 고맙구랴.?

할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외할머니가 그 손을 잡았다. 손을 맞잡은 채 두 할머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할머니 쪽에서 먼저 입을 열어 아직도 남아 있는 근심을 털어놓았다.

?탈없이 잘 가기나 혔는지 몰라라우.?

?염려 마시랑게요. 지금쯤 어디 가서 펜안히 거처험시나 사분 댁 터주 노릇을 利이 하고 있을 것이요.?

그만한 이야기를 나누는 데도 대번에 기운이 까라져 할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까스로 할머니가 잠들기를 기다려 구완을 맡은 고모만을 남기고 모두들 큰방을 물러나왔다.

그 날 저녁에 할머니는 또 까무러쳤다. 의식이 없는 중에도 댓 숟갈 흘려 넣은 미음과 탕약을 입 밖으로 죄다 토해 버렸다. 그리고 이튿날부터는 마치 육체의 운동장에서 정신이란 이름의 장난꾸러기가 들어왔다 나갔다 숨바꼭질하기를 수없이 되풀이하는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의 연속이었다. 대소변을 일일이 받아 내는 고역을 치러 가면서 할머니는 꼬박 한 주일을 더 버티었다. 안에 있는 아들보다 밖에 있는 아들을 언제나 더 생각했던 할머니는 마지막 날 밤에 다 타버린 촛불이 스러지듯 그렇게 눈을 감았다. 할머니의 긴 일생 가운데서, 어떻게 생각하면,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고 그러고도 놀라운 기력으로 며칠 동안이나 식구들을 들볶아 대면서, 삼촌을 기다리던 그 짤막한 기간이 사실은 꺼지기 직전에 마지막 한순간을 확 타오르는 촛불의 찬란함과 맞먹는, 할머니에겐 가장 자랑스럽고 행복에 넘치던 시간이었었나 보다. 임종의 자리에서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내 지난날을 모두 용서해 주었다. 나도 마음 속으로 할머니의 모든 걸 용서했다.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

⑵ 기미 독립 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

宣言書(선언서)

민족 대표 33인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 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 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 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 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현대어 풀이]

이희승(李熙昇) 역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半萬年(반만 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 여일)한 自由發展(자유 발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 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 개조)의 大機運(대기운)에 順應幷進(순응 병진)하기 爲(위)하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ㅣ 天(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ㅣ며, 全人類(전 인류) 共存同生權(공존 동생권)의 正當(정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 하물)이던지 此(차)를 沮止抑制(저지 억제)치 못할지니라.

5천 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두루 펴서 밝힘이며, 영원히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회와 시운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 문제를 내세워 일으킴이니, 이는 하늘의 지시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전 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천하의 어떤 힘이라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舊時代(구시대)의 遺物(유물)인 侵略主義(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의 犧牲(희생)을 作(작)하야 有史以來(유사 이래) 累千年(누천 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의 痛苦(통고)를 嘗(상)한지 今(금)에 十年(십 년)을 過(과)한지라, 我(아) 生存權(생존권)의 剝喪(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心靈上(심령상) 發展(발전)의 障?(장애)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의 毁損(훼손)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新銳(신예)와 獨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 문화)의 大潮流(대조류)에 寄與補裨(기여 보비)할 機緣(기연)을 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ㅣ뇨.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역사가 있은 지 몇천 년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괴로움을 당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으니, 그 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예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나 될 것이냐?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擺脫(파탈)하려 하면, 將來(장래)의 脅威(협위)를 芟除(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 소잔)을 興奮伸張(흥분 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인격(人格)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 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 급무)가 民族的(민족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 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하고, 人類通性(인류 통성)과 時代良心(시대 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슬프다! 오래 전부터의 억울을 떨쳐 펴려면, 눈앞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협을 없애려면, 눌러 오그라들고 사그라져 잦아진 민족의 장대한 마음과 국가의 체모와 도리를 떨치고 뻗치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아들 딸들에게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에게 영구하고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끌어 대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만의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어 굳게 결심하고, 인류 공통의 옳은 성품과 이 시대를 지배하는 양심이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라는 무기로써 도와 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취하매 어느 강자를 꺾지 못하며,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丙子修好條規(병자수호조규) 以來(이래) 時時種種(시시종종)의 金石盟約(금석 맹약)을 食(식)하얏다 하야 日本(일본)의 無信(무신)을 罪(죄)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학자)는 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서, 我(아) 祖宗世業(조종 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 아(我) 文化民族(문화 민족)을 土昧人遇(토매인우)하야, 한갓 征服者(정복자)의 快(쾌)를 貪(탐)할 탼이오, 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礎(사회 기초)와 卓?(탁락)한 民族心理(민족 심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소의)함을 責(책)하려 안이 하노라. 自己(자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무)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宿昔(숙석)의 懲辨(징변)을 暇(가)치 못하노라.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유)할 탼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 하도다. 嚴肅(엄숙)한 良心(양심)의 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의 新運命(신운명)을 開拓(개척)함이오, 決(결)코 舊怨(구원)과 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他(타)를 嫉逐排斥(질축 배척)함이 안이로다.

병자수호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닦아 물려 온 업적을 식민지의 것으로 보고, 문화 민족인 우리를 야만족같이 대우하며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다. 현 사태를 수습하여 아물리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 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그것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기의 새 운명을 개척함일 뿐이요,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남을 시새워 쫓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羈?(기미)된 日本(일본) 爲政家(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 상태)를 改善匡正(개선 광정)하야, 自然(자연), 又(우) 合理(합리)한 正經大原(정경 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當初(당초)에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出(출)치 안이한 兩國倂合(양국 병합)의 結果(결과)가, 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과 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과 統計數字上(통계 숫자상) 虛飾(허식)의 下(하)에서 利害相反(이해 상반)한 兩(양) 民族間(민족간)에 永遠(영원)히 和同(화동)할 수 업는 怨溝(원구)를 去益深造(거익 심조)하는 今來實績(금래 실적)을 觀(관)하라. 勇明果敢(용명 과감)으로써 舊誤(구오)를 廓正(확정)하고, 眞正(진정)한 理解(이해)와 同情(동정)에 基本(기본)한 友好的(우호적) 新局面(신국면)을 打開(타개)함이 彼此間(피차간) 遠禍召福(원화 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지)할 것 안인가.

낡은 사상과 묵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에 희생된, 불합리하고 부자연에 빠진 이 어그러진 상태를 바로잡아 고쳐서, 자연스럽고 합리로운, 올바르고 떳떳한,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던 두 나라 합방이었으므로, 그 결과가 필경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함께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오늘의 실정을 보라! 날래고 밝은 과단성으로 묵은 잘못을 고치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그 기초를 둔 우호적인 새로운 판국을 타개하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빠른 길인 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 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 한설)에 呼吸(호흡)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 일시)의 勢(세)ㅣ라 하면, 和風暖陽(화풍 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 일시)의 勢(세)ㅣ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오인)은 아모 躊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 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아! 새로운 세계가 눈 앞에 펼쳐졌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과거 한 세기 내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적 정신이 이제 막 새 문명의 밝아 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였도다. 새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 혹심한 추위가 사람의 숨을 막아 꼼짝 못 하게 한 것이 저 지난 한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 한때의 형세이니, 천지의 돌아온 운수에 접하고 세계의 새로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 온 권리를 지켜 온전히 하여 생명의 왕성한 번영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 문화를 맺게 할 것이로다.

吾等(오등)이 玆(자)에 奮起(분기)하도다. 良心(양심)이 我(아)와 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가 我(아)와 幷進(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녀노소) 업시 陰鬱(음울)한 古巢(고소)로서 活潑(활발)히 起來(기래)하야 萬彙群象(만휘 군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한 復活(부활)을 成遂(성수)하게 되도다. 千百世(천백 세) 祖靈(조령)이 吾等(오등)을 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세계) 氣運(기운)이 吾等(오등)을 外護(외호)하나니, 着手(착수)가 곳 成功(성공)이라. 다만, 前頭(전두)의 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쾏름인뎌.

우리는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 내게 되도다. 먼 조상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로다.

公約三章(공약 삼 장)

一.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 生存(생존), 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ㅣ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一. 最後(최후)의 一人(일인)캨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캨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히 發表(발표)하라.

一.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야금 어대캨지던지 光明正大(광명 정대)하게 하라.

[현대어 풀이]

공약 3장

一. 오늘 우리의 이번 거사는 정의, 인도와 생존과 영광을 갈망하는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

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하게 발표하라.

一.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며,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8단원(언어와 세계)

⑴ 동국신속 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참의고경명은 광횷사퀬이니임진왜난의의병을슈챵퍛야금산도적글티다가패퍛여아큚인후와막하사퀬뉴X노안영으로퍝가지로죽다쾸퉢죵휘원슈갑퍈려군을닐와다진횷가죽다처엄의경명의주검을거두워금산묏가온대가만이무덧더니마퇳날밧긔처엄으로념습퍛니콖비치산큜퍛더라영장호매긴므지게무뎀녑?셔니러나비치슈샹퍛니사퀬이니로쾬튱분의감동퍝배라퍛더라 쇼경대황이명퍛샤졍녀퍛시고광횷다가졔퍞집을셰시고집일흠을포륭이라퍛시고관원보내샤졔퍛시고 증좌찬셩퍛시니라

니보콋뇽안현사퀬이니그아비팕방이상나온병을어더거의죽게되니구퍛여도효험이업서일야의우더니켆메?이고퍛여닐오쾬산사퀬의탖퀪머그면가히됴퍛리라뵈즉시놀라컇쾓라손가락을버혀약글큧캱라텕받퉢오니?병이즉시됴퍛니라

냥녀최금이콋옥괘현사퀬이니턢로걱진의겨집이라뎡유왜난의그지아비퀪ㅈ차두아드콍거콉리고도적을욋가온대피퍛더니도적이블퇽예니퀦러그자아비콍몬져주기고쿜두아쾗콍주겨콍최금이돌퍞가지고겨퀳내쾓라퍝도적을저기니도적이주기다금 샹됴애졍문퍝시니라

⑵ 삼대(三代)

염 상 섭(廉想涉)

【줄거리】

?삼대?는 3`대에 걸친 가계의 전개를 중심으로 한 소설이다. 대지주이며 재산가인 할아버지 조의관, 이중 인격적 생활에 빠져 있는 과도기적 인물인 조상훈, 그리고 지식 청년인 조덕기가 ?삼대?의 주요 인물이다. 이 외에도 조의관의 주변 인물인 수원댁, 조창훈, 지주사, 조상훈의 주변 인물들인 매당, 김의경, 조덕기의 주변 인물인 김병화, 홍경애, 필순네, 장훈, 피혁 등이 등장한다.

?삼대?는 우선 조의관 댁의 갈등에서부터 시작된다. 가문을 빛내기 위해 대동보소를 만들려 하는 조의관과 이에 반대하는 조상훈의 갈등(교과서 수록 부분), 수원집, 덕기 모, 덕기 처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갈등, 홍경애의 문제로 인한 상훈과 덕기 사이의 갈등이 차례로 드러난다. 이러한 갈등은 마침내 할아버지의 죽음이 임박하면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조의관은 죽음이 임박해지자 유학 중이던 덕기의 귀국을 서두르게 된다. 덕기의 조기 귀국을 원치 않던 조창훈과 수원집 등에 의해 귀국을 원하는 전보는 묵살된다. 그러나 덕기는 동생 덕희가 친 전보를 받고 서울로 귀국하여 창훈, 최 참봉, 수원집 등의 음모의 소용돌이에서 의젓한 태도를 보여 준다.

조의관은 덕기에게 열쇠꾸러미를 넘겨 주면서 조씨 집안의 열쇠를 맡아야 하며, 그 열쇠에 덕기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말을 한다. 그 뒤 조의관은 입원을 하고, 열쇠꾸러미를 넘겨받은 덕기는 금고를 둘러싼 암투를 어렴풋이 짐작하며 조의관의 약 시중에 관한 의문을 가진다.

조의관이 죽은 뒤 비소 중독의 의문이 있었으나 덕기는 그 이상의 추궁을 않는다. 덕기는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열쇠꾸러미로 가문과 재산을 지키려 하나, 서조모인 수원댁, 창훈․상훈을 비롯한 가족들의 재산 분배를 둘러싼 암투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 와중에 덕기는 할아버지의 독살에 대한 혐의와 병화가 관련된 운동 자금에 대한 혐의로 검거된다. 상훈은 조의관이 죽고 난 뒤 재산을 탕진해 가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덕기가 검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짜 형사 사건을 꾸며 금고의 열쇠꾸러미를 훔쳐 낸다.

한편, 가난한 기독교인의 아들인 병화는 사회주의자로서 덕기와는 절친한 사이나 사상과 행동에서는 정반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다. 또, 홍경애는 독립 운동가의 딸이나 상훈에게 희생된 인물이다. 한편, 홍경애는 공산당원인 피혁과 사상적 관련을 맺고 있다. 이를 통해 김병화와 더불어 사회주의 운동에 간접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한다.

병화는 피혁이 전해 준 기밀비로 경애와 함께 식료품점을 열고 필순네 식구들과 함께 후배 양성을 꾀한다. 이 기밀비 때문에 병화와 필순의 아비, 홍경애는 장훈을 비롯한 7`명의 주의자들에게 납치되어 폭행을 당한다. 이는 장훈이 기밀비의 출처를 알고 장훈 자신의 사업을 보호하고, 병화를 반성시키며, 병화에 대한 형사들의 의혹을 엷게 하고자 꾸민 일이다. 그러나 결국 병화와 필순네 식구들, 장훈 등은 기밀비로 인해 검거된다.

장훈은 모든 혐의를 혼자 뒤집어쓰고 감옥에서 자살한다. 이로 인해 덕기는 모든 혐의를 벗고 풀려나게 되며, 조상훈의 치졸한 음모 역시 밝혀진다. 풀려난 덕기는 아직까지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쓴다. 이 와중에 필순 아버지는 죽으면서 남은 유가족을 돌봐 달라는 부탁을 덕기에게 한다. 덕기는 이를 의무나 책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기간은 20여 일이 걸렸으며, 조의관이 죽은 지 두 달 뒤에 해당된다.

?조가의 집이 번창하려고? …… 하지만 꾸어 온 조상은 자기네 자손부터 돕는답디다.?

상훈이는 불끈하여 소리를 높여서 또 무슨 말을 이으려다가 마루 끝에서 영감님의 기침 소리가 나는 바람에 좌우 방 안은 괴괴하여졌다.

?왜들 떠드니??

화를 참는 못마땅한 강강한 목소리와 함께 건넌방 문이 활짝 열렸다. 방 안의 젊은 애들은 우중우중 일어서며 아랫목에 앉았던 상훈이는 윗목으로 내려섰다.

방 안에서는 더운 김이 서린 담배 연기가 뭉긋뭉긋 흘러나온다.

?이게 굴뚝 속이지, 젊은것들이 무슨 담배를 이렇게 피우며 주책없는 소리들만 씨부렁대는 거냐??

영감은 방 안을 들어서며 우선 나무래 놓고 아랫목으로 가서 앉으며 자기의 발끈한 성미를 속으로 간정시키려는 듯이 목소리를 가라앉혀서,

?어서들 앉아라.?

하고 무슨 잔소리를 꺼내려는지 판을 차린다. 영감은 제청을 다아 배설해 놓고 시간을 기다리느라고 사랑으로 나오다가 종형제간의 말다툼을 가만히 듣고 섰다가 참을 수 없어 뛰어든 것이다.

?너 어째 왔니? 오늘은 예배당에 안 가는 날이냐??

영감은 얼굴이 발끈 취해 올라오며, 윗목에 숙이고 섰는 아들을 쏘아본다.

?어서 가거라! 여기는 너 올 데가 아니야! 이 자식아, 나이 오십 줄에 든 놈이 젊은것들을 앞에 놓고 철딱서니 없이 무엇이 어째고 어째? 조상을 꾸어 왔어? 꾸어 온 조상은 자기네 자손만 도와? 배지 못한 자식……!?

영감은 금시로 숨이 넘어가려는 사람처럼 헐떡거리며 벌건 목에 푸른 힘줄이 벌렁거린다. 상훈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한 구석에 섰다.

?너두 내가 낳아 놓은 자식이면야 사람이겠구나? 부모의 혈육을 타고났으면 조상은 알겠구나? 가사 젊은애들이 주책없는 소리를 하더라도 꾸짖고 가르쳐야 할 것이 되려 철부지만도 못 한 소리를 텅텅 하니 이게 집안이 되려고 이러는 거란 말이냐, 안 되려고 이러는 거란 말이냐??

여기서 영감은 한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목청을 돋는다.

?이 집안에서 나만 눈을 감아 보아라! 집안 꼴이 무에 되나? 가거라! 썩, 썩 나가거라! 조상을 꾸어 왔다니 너는 네 아비도 꾸어 왔겠구나? 꾸어 온 아비면야 조금도 네게는 도울 게 없을 게다! 다시는 내 눈 앞에 띠일 생각도 말아라!?

오른손에 든 장죽을 격검대 모양으로 들었다 놓았다 내밀었다 들이켰다 하며 펄펄 뛴다.

사천 원 돈이나 드는 줄 모르게 들인 것을 속으로 앓고 또 앞으로 돈 쓸 걱정을 하는 판에 앨 써 해 놓은 일에 대하여 자식부터라도 그 따위 소리를 하는 것이 귀에 들어오니 이래저래 화는 더 나는 것이다. 게다가 원래 못마땅한 자식이요, 또 오늘은 친기라 제사 반대군을 보니 가만 있어도 무슨 야단이든지 날 줄은 누구나 짐작했지만 마침 거리가 좋아서 야단이 호되게 된 것이다.

?아니에요, 그런 말씀이 아니에요. 아저씨께서 잘못 들으셨나 보외다.?

창훈이는 속으로는 시원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인사치레로 한 마디 하였다.

?잘못 듣다니 ? 내가 이롱증이 있단 말인가??

?그만 해 두세요. 상훈 군도 달래 그렇겠습니까? 이 전황한 통에 꿈쩍하면 돈이니까 그것을 걱정해서 그러는 것이지요.?

창훈이는 이렇게도 변명해 주었다. 그러나 상훈이로서는 때리는 사람보다 말리는 사람이 더 미웠다.

?누가 돈 쓰는 것을 아랑곳하랬나? 누가 저더러 돈을 쓰라니 걱정인가? 내 돈 가지고 내가 어떻게 쓰든지…….?

?아버님께서 하시는 일에…….?

조금 뜸하여지며 부친이 쌈지를 풀어서 담배를 담는 동안에 상훈이는 나직이 말을 꺼냈다.

?……돈 쓰신다고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마는 어쨌든 공연한 일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첫째 잘못이란 말씀입니다.?

?무에 어째 공연한 일이란 말이냐? ?

부친의 어기는 좀 낮추어졌다.

?대동보소만 하더라도 족보 한 길에 오십 원씩으로 매었다 하니 그 오십 원씩을 꼭꼭 수봉하면 무엇 하자고 삼, 사천 원이 가외로 들겠습니까??

?삼, 사천 원은 누가 삼, 사천 원 썼다던??

영감은 아들의 말이 옳다고는 생각하였으나 실상 그 삼, 사천 원이란 돈이 족보 박는 데에 직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쫛`쫛 조씨로 무후(無後)한 집의 계통을 이어서 일문일족에 끼려 한즉 군식구가 늘면 양반의 진국이 묽어질까 보아 반대를 하는 축들이 많으니까 그 입들을 씻기기 위하여 쓴 것이다. 하기 때문에 난봉 자식이 난봉핀 돈 액수를 줄이듯이 이 영감도 실상은 한 천 원 썼다고 하는 것이다. 중간의 협잡배는 이런 약점을 노리고 우려 쓰는 것이지만 이 영감으로서는 성한 돈 가지고 이런 병신 구실 해 보기는 처음이다.

?그야 얼마를 쓰셨던지요, 그런 돈은 좀 유리하게 쓰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재하자 유구무언?의 시대는 지났다 하더라도 노친 앞이라 말은 공손했으나 속은 달았다.

?어떻게 유리하게 쓰란 말이냐? 너같이 오, 륙천 원씩 학교에 디밀고 제 손으로 가르친 남의 딸자식 유인하는 것이 유리하게 쓰는 방법이냐??

아까부터 상훈이의 말이 화롯가에 앉아서 폭발탄을 만지작거리는 것 같아서 위태위태하더라니 겨우 간정되려던 영감의 감정에 또 불을 붙여 놓고 말았다.

상훈이는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벌게진다.

부친의 소실 수원집과 경애 모녀와는 공교히도 한 고향이다.

처음에는 감쪽같이 속여 왔으나 수원집만은 연줄연줄이 닿아서 경애 모녀의 코빼기라도 못 보았건마는 소문을 뻔히 알고 따라서 아이를 낳은 뒤에는 집안에서 다 알게 되었던 것이다. 덕기 자신부터 수원집의 입에서 대강 들어 안 것이다. 그러나 상훈이 내외끼리 몇 번 싸움질이 있은 외에는 노 영감님도 이때껏 눈감아 버린 것이요, 경애가 들어 있는 북미창정 그 집에 대하여도 부친이 채근한 일은 없는 것이라서 지금 조인광좌중(稠人廣座中)에서 아들에게 대하여 학교에 돈 쓰고 제 손으로 가르친 남의 딸 유인하였다는 말을 터놓고 하는 것을 들으니 아무리 부친이 홧김에 한 말이라 하여도 듣기에 괴란쩍고 부자간이라도 너무 야속하였다.

?아버님께서는 너무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마는 어쨌든 세상에 좀 할 일이 많습니까. 교육 사업, 도서관 사업, 그 외 지금 조선어 자전 편찬하는 데…….?

상훈이는 조심도 하려니와 기를 눅이어서 차근차근히 이왕지사 말이 나왔으니 할 말은 다 하겠다는 듯이 말을 이어 나가려니까 또 벼락이 내린다.

?듣기 싫다! 누가 네게 그 따위 설교를 듣자든? 어서 가거라.?

?하여간에 말씀입니다. 지난 일은 어쨌든, 지금 이 판에 별안간 치산이란 당한 일입니까. 치산만 한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서원을 짓고 유생들을 몰아다 놓으시렵니까? 돈도 돈이거니와 지금 시대에 당한 일입니까? ?

상훈이는 아까보다 좀 어기를 높여서 반대를 하였다.

?잔소리 말아! 그놈 나가라니까 점점 더하고 섰고나. 내가 무얼 하든 네가 총찰이란 말이냐. 내가 죽으면 동전 한 닢이라도 너를 남겨 줄 테니 걱정이란 말이냐. 너는 이후로는 아무리 굶어 죽는다 하여도 한 푼 막무가내다. 너는 없는 셈만 칠 것이니까……, 너희들도 다 들어 두어라.?

하고 좌중을 돌려다보며 말을 잇는다.

?내 재산이라야 얼마 있는 게 아니다마는 반은 덕기에게 물려 줄 것이요, 그 나머지로는 내가 쓰고 싶은 데 쓰다 남으면 공평히 나누어 주고 갈 테다. 공증인을 세우든 변호사를 불러 대든 하여 뒤를 깡그러뜨려 놀 것이니까 너는 이제는 남 된 셈만 쳐라. 내가 죽으면 네가 머리를 풀 테냐, 거상을 입을 테냐??

영감은 사실 땅문서도 차츰차츰 덕기의 명의로 바꾸어 놓아 가는 판이요 반은 자기가 쓰다가 남겨서 막내딸의 명의로 물려줄 생각이다. 만일에 십오 년 더 사는 동안에 아들 하나를 더 본다면, 물론 그 아들을 위하여 물려줄 요량도 하고 있는 터이다.

이 때까지 술이 취하면 주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기도 많이 하였지만, 오늘은 친기라 하여 술 한 잔 안한 자신이 영감이 맑은 정신으로 여러 젊은 애들 앞에서 이런 말을 떠들어 놓는 것은 처음이다. 그래야 이 방중은 고사하고 이 집안 속에서 자기 편을 들어 줄 사람이라고는 하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상훈이는 새삼스러이 고독을 느끼고 모든 사람이 야속하였다.

?애비, 에미도 모르고 계집, 자식도 모르는 너 같은 놈은 고생을 좀 해 봐야 한다. 내가 돈이 있으니까 네가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들여다보는 것이지 내가 아무것도 없어 보아라. 돌아다보기는커녕 고려장이라도 족히 지낼 놈이 아니냐. 어서 나가거라. 이 자식, 조상을 꾸어 왔다는 자식은 조가가 아니다.?

하고 노인은 별안간 벌떡 일어나서 아들을 떼밀어 내쫓으려는 듯이 덤벼든다. 젊은 사람들은 와아 달려들어서 가로막는다.

?상훈이 어서 나가게. 흥분이 되셔서 그러시니까…….?

창훈이는 상훈이를 끌고 마루로 나왔다.

부친이 망령이 나느라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젊은 사람들이나 자식 보는 데 창피도스러웠다. 상훈이는 안방으로 들어가는 수도 없고 아랫방에도 덕기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있으니 그리 들어갈 수도 없다. 하는 수 없이 모자를 집어 쓰고 축대로 내려오니까 덕기가 아랫방에서 나와서 뜰로 내려온다.

?아랫방으로 들어가시지요.?

덕기는 민망한 듯이 이렇게 부친에게 말을 걸었으나, 부친은 잠자코 나가 버렸다.

고둥 국어(하)

1단원 국어의 뿌리와 줄기

국어는 아득한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한반도와 그 일대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 시작한 때에 형성되었다. 그러나 고대의 언어 생활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국어의 뿌리는 무엇이며, 어떤 모습으로 변모해 왔는지 분명하게 알기 어렵다. 이런 점에 유념하면서 우리 조상들의 언어가 어떠했을지 그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자.

종합적인 표기 체계 - 향찰(鄕札)

서동요(薯童謠)

善化公主主隱 선화 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남 몰래 결혼하고

薯童房乙 맛둥서방을

夜矣卯乙抱遣去如 밤에 몰래 안고 가다.

€ 세종 어제 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

世․솅 宗튓 御․툍 製․튌 訓․훈民민正․졍音?

나․랏:말턲․미 中쿶國․귁․에 달․아, 文문字․퉯․와 ․로 서르 턢큜․디 아․니 퍞․텈, ․이런 젼․틍․로 어 ․린 百․?姓․셩․이 니르․고․져 ․퍴 ․배 이․셔․도, 큖 ․틐:내 제 ․퀈․들 시․러 펴․디 :? 퍠 ․노․미 하 ․니․라. ․내 ․이․퀪 爲․윙․퍛․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쿿 字․퉯․퀪 큨․캱노․니, :사퀬:마 ․다 :퍥․툙 :수․턚 니․겨 ․날․로 ․텿․메 便탌安퇮․팂 퍛․고․져 퍠 ?퀦․미니․라.

- ?월인석보본 훈민정음(月印釋譜本訓民正音)?, 세조(世祖) 5년(1459)

- ?삼국유사? 권 제2

  소학 언해(小學諺解)

孔․공子․퉳 曾튮子․퉢쾓․려 닐․러 캵퇲․샤․쾬, ․몸 ․이며 얼굴․이며 머․리털․이․며 ․턥․퍝 父․부母:모 ․켹 받퉢․온 거․시․라, 敢:감․히 헐․워 샹퍥․오․디 아 ․니 :홈․이 :효․도퇽 비․르․소미․오, ․몸․을 셰․워 道 :도․를 行․퍪․퍛․야 일:홈․을 後:후世:셰․예 :베퍼 ․텕 父․부母:모퀪 :현․뎌케 :홈․이 :효․도․퇽 큖․틐․이니 ․라

孔子謂曾子曰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 ?소학 언해(小學諺解)?, 선조(宣祖) 20년 (1587) 2권 29쪽

:유․익퍝 ․이 :세 가 ․짓 :벋․이오, :해․로온 ․이 :세가 ․짓 :벋․이니, 直․딕퍝 ․이․퀪 :벋퍛․며, :신․실퍝 ․이․퀪 :벋퍛․며, 들:온 ․것 한 ․이․퀪 :벋퍛․면 :유 ․익퍛․고, :거․동․만 니․근 ․이․퀪 :벋퍛․며, 아:당퍛․기 잘 ․퍛․콋․이․퀪 :벋퍛․며, :말턪․만 니․근 ․이․퀪 :벋퍛․면 해․로․온 이․라.

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 友便? 友善柔 友便? 損矣˚

- ?소학 언해(小學諺解)?, 선조(宣祖) 20년 (1587) 2권 67쪽

⑶ 근대 국어(近代國語)

€ 동명일긔

의 유 당(意幽堂)

홍?이 거룩퍛야 턀은 긔운이 하콍을 퓁노던니 이랑이 소퓘퀪 놉히퍛야 나를 불러 져긔 믈밋틏 보라 웨거콍 급히 눈을 드러 보니 믈밋 홍운을 헤앗고 큰 실오리 ?퍝 줄이 턀기 더옥 긔이퍛며 긔운이 진홍 ?한 것이 틍틍 나 손바닥 너? ?퍝 것이 그믐밤의 보는 숫불빗 ?더라. 틍틍 나오더니 그 우흐로 튃은 회오리밤 ?한 것이 턀기 호박구턥 ?고 큛고 통낭퍛기콋 호박도곤 더 곱더라.

그 턀은 우흐로 흘흘 움퉣여 도콋쾬 처엄 낫던 턀은 긔운이 ?지 반쟝 너?만치 반쾓시 비최며 밤 ?던 긔운이 퍥되야 틍틍 커가며 큰 퉶반만 퍛여 턀웃턀웃 번듯번듯 퓁놀며 튃?이 왼 바다희 콃치며 몬져 턀은 기운이 틍틍 가턾며 퍥 흔들며 퓁놀기 더욱 퉢로 퍛며 항 ?고 독 ?퍝것이 좌우로 퓁놀며 황홀이 번득여 냥목이 어즐퍛며 턀은 긔운이 명낭퍛야 첫 홍?을 혜앗고 텬쿶의 퉶반 ?퍝 것이 수레박희 ?퍛야 믈속으로셔 치미러 밧치쾓시 올나 븟흐며 항독 ?퍝 긔운이 스러디고 처엄 턀어 것틏 빗최던 거턣 모혀 소혀텨로 드리워 믈속의 풍덩 킙디콋듯 시브더라 일?이 됴요퍛며 믈결의 턀은 긔운이 틍틍 가턾며 일광이 틟낭하니 만고 텬하의 그런 장관은 쾬두할쾬 업슬쾠퍛더라

- ?의유당관북유람일기(意幽堂關北遊覽日記)?, 영조 48년(1722)

홍색(紅色)이 거룩하여 붉은 기운이 하늘을 뛰노더니, 이랑이 소래를 높이 하여 나를 불러,

?저기 물 밑을 보라.?

외거늘, 급히 눈을 들어 보니, 물 밑 홍운(紅雲)을 헤앗고 큰 실오리 같은 줄기 붉기 더욱 기이하며, 기운이 진홍(眞紅) 같은 것이 차차 나 손바닥 넓이 같은 것이 그믐밤에 보는 숯불 빛 같더라. 차차 나오더니, 그 우흐로 적은 회오리밤 같은 것이 붉기 호박(琥珀) 구슬 같고, 맑고 통랑(通朗)하기는 호박도곤 더 곱더라.

그 붉은 우흐로 훌훌 움직여 도는데, 처음 났던 붉은 기운이 백지(白紙) 반 장 넓이만치 반듯이 비치며, 밤 같던 기운이 해 되어 차차 커 가며, 큰 쟁반만 하여 불긋불긋 번듯번듯 뛰놀며, 적색(赤色)이 온 바다에 끼치며, 몬저 붉은 기운이 차차 가새며, 해 흔들며 뛰놀기 더욱 자로 하며, 항 같고 독 같은 것이 좌우로 뛰놀며, 황홀(恍惚)히 번득여 양목(兩目)이 어즐하며, 붉은 기운이 명랑하여 첫 홍색을 헤앗고, 천중(天中)에 쟁반 같은 것이 수렛바퀴 같하야 물 속으로서 치밀어 받치듯이 올라붙으며, 항, 독 같은 기운이 스러지고, 처음 붉어 겉을 비추던 것은 모여 소 혀처로 드리워 물 속에 풍덩 빠지는 듯싶으더라. 일색(日色)이 조요(照耀)하며 물결에 붉은 기운이 차차 가새며, 일광(日光)이 청랑(晴朗)하니, 만고천하(萬古天下)에 그런 장관은 대두(對頭)할 데 없을 듯하더라.

  독립 신문 창간사

우리신문이 한문은 아니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콋거슨 샹하귀쳔이 다보게 홈이라 쿜 국문을 이러케 귀졀을 ?여 쓴즉 아모라도 이신문 보기가 쉽고 신문속에 잇콋말을 자세이 알어 보게 퍡이라 각국에셔콋 사퀬들이 남녀 무론퍛고 본국 국문을 몬저 ?화 능통퍝 후에야 외국 글을 ?오콋 법인쾬 죠션셔콋 죠션 국문은 아니 ?오드퀳도 한문만 공부 퍛콋 캨쾘에 국문을 잘아콋 사퀬이 드물미라 죠션 국문퍛고 한문퍛고 비교퍛여 보면 죠션국문이 한문 보다 얼마가 나흔거시 무어신고퍛니 첫퉳콋 ?호기가 쉬흔이 됴흔 글이요 둘퉳콋 이글이 죠션글이니 죠션 인민 들이 알어셔 ?턢을 한문쾬신 국문으로 써야 샹하 귀쳔이 모도보고 알어보기가 쉬흘터이라 한문만 늘써 버릇퍛고 국문은 폐퍝 캨쾘에 국문만쓴 글을 죠선 인민이 도로혀 잘 아러보지못퍛고 한문을 잘알아보니 그게 엇지 한심치 아니퍛리요 쿜 국문을 알아보기가 어려운건 다름이 아니라 틞퉳콋 말마쾬을 ?이지 아니퍛고 그져 줄줄콝려 쓰콋 캨쾘에 글퉢가 우희 부터콋지 아퀳 부터콋지 몰나셔 몃번 일거 본후에야 글퉢가 어쾬 부터콋지 비로소 알고 일그니 국문으로 쓴편지 퍝쟝을 보자퍛면 한문으로 쓴것보다 더듸 보고 쿜 그나마 국문을 자조 아니 쓴콋 고로 셔툴어셔 잘못봄이라 그런고로 졍부에셔 콝리콋 명녕과 국가 문튃을 한문으로만 쓴즉 한문못퍛콋 인민은 나모 말만 듯고 무턪 명녕인줄 알고 이편이 친이 그글을 못 보니 그사퀬은 무단이 병신이 됨이라 한문 못 퍝다고 그사퀬이 무식퍝사퀬이 아니라 국문만 잘퍛고 다른 물졍과 학문이 잇스면 그사퀬은 한문만퍛고 다른 물졍과 학문이 업콋 사퀬 보다 유식퍛고 놉흔 사퀬이 되콋 법이라 죠션 부인네도 국문을 잘퍛고 각? 물졍과 학문을 ?화 소견이 놉고 퍩실이 졍직퍛면 무론 빈부 귀쳔 간에 그부인이 한문은 잘퍛고도 다른것 몰으콋 귀죡 남퉢 보다 놉흔 사퀬이 되콋 법이라 우리 신문은 빈부 귀쳔을 다름업시 이신문을 보고 외국 물졍과 콝지 턢졍을 알게 퍛랴콋 퀐시니 남녀 노소 샹하 귀쳔 간에 우리 신문을 퍛로 걸너 몃쾗간 보면 새지각과 새학문이 텆길걸 미리 아노라.

- ?독립신문(1896)?

2 단원

⑴ 다매체 시대의 정보 양식

◆ 본문을 읽기 전에 아래 글을 읽고, 다음 활동을 해 보자.

정보들은 홍수가 났다고 할 만큼 많이 유통되지만, 정작 쓸 만한 정보는 드물고 필요한 것들을 찾기도 무척 힘들다. 인터넷을 제대로 쓰는 방법에 대한 안내서가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책으로 나왔다는 사실은 반어적일뿐만 아니라 시사적이다.

무엇이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정보가 많아질수록 의미는 적어진다?는 말도 나온다. 정보의 물신화(物神化)를 우려한 언명(言明)이다. 정보의 물신화란 정보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실과 신뢰를 배제한 채 마치 상품처럼 유통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여기서 정보 자체는 도구와 조작의 대상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며, 진실과 신뢰는 더욱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정보의 물신화에 맞서 진실과 신로의 가치를 지키는 일 바로 이것이 신매체(new media)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주요한 과제 중 하나로 설정되어야만 하리라.

- 김성기, ?뉴미디어 시대의 슬픈 민주주의?에서

1. ?정보의 물신화?가 의미하는 정보화 시대의 부정적 현상을 예로 들어 이야기해 보자

2. 각종 매체가 쏟아 내는 정보 중에서, 의미 있는 정보의 선택과 재구성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와 전략은 무엇일지 이야기해 보자.

?김치는 과학이다!?

부엌만이 아니라 생물 실험실에서도 김치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김치 과학자도 부쩍 늘었다. 덕분에 김치는 이제 일본 ?기무치?를 누르고, 국제 식품 규격에도 채택된 국제 식품이 됐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실험실의 김치 연구가 거듭되면, 배추․무․오이 김치들의 작은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미생물들의 ?작지만 큰 생태계?도 점차 밝혀지고 있다. 20여 년째 김치를 연구해 오며 지난 해 토종 젖산균(유산균) ?류코노스톡 김치아이?를 발견해 세계 학계에서 새로운 종으로 인정받은 인하대 한홍의(61) 미생물학과 교수는 ?일반 세균과 젖산균, 효모로 이어지는 김치 생태계의 순환은 우리 생태계의 축소판?이라고 말했다.

흔히 ?김치 참 잘 익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김치 과학자라면 매콤새콤하고, 시원한 김치 맛을 보면 이렇게 말할 법하다. ?젖산균들이 한창 물이 올랐군.? 하지만 젖산균이 물이 오르기 전까지 갓 담근 김치에선 배추․무나 고춧가루 등에 살던 일반 세균들이 한때나마 왕성하게 번식한다. 소금에 절인 배추․무는 포도당 등 영양분을 주는 좋은 먹이 터전인 것이다.

?김치 초기에 일반 세균은 최대 10배까지 급속히 늘어나다가 다시 급속히 사멸해 버립니다. 제 입에 맞는 먹잇감이 줄어드는데다 자신이 만들어 내는 이산화탄소가 포화 상태에 이르러 더는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되는 거죠.? 한 교수는 이즈음 산소를 싫어하는 ?혐기성? 미생물인 젖산균이 활동을 개시한다고 설명했다. 젖산균은 시큼한 젖산을 만들며 배추․무를 서서히 김치로 무르익게 만든다. 젖산균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되는데, ?다른 미생물이 출현하면 수십 종의 젖산균이 함께 ?박테리오신?이라는 항생 물질을 뿜어 내어 이를 물리친다.?고 한다.

그러나 ?젖산 왕조?도 크게 두 번의 부흥과 몰락을 겪는다. 김치 중기엔 주로 둥근 모양의 젖산균(구균)이, 김치 말기엔 막대 모양의 젖산균(간균)이 세력을 떨친다. 한국 식품 개발 연구원 박완수(46) 김치 연구 단장은 ?처음엔 젖산과 에탄올 등 여러 유기물을 생산하는 젖산균이 지배하지만 나중엔 젖산만을 내는 젖산균이 우세종이 된다?며 ?김치가 숙성할수록 시큼털털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둥근 균이 내뿜는 젖산 탓에 김치의 산도는 점점 높아지는 데 산도가 0.5%(식초는 3%)가 되는 순간, 둥근 균은 쇠퇴하고 그 때부터 막대균이 기하 급수로 증식한다.?고 말한다. 젖산균의 세력 교체인 셈이다. 산성에 강한 막대 균은 이 때부터 김치의 운명을 다하는 ?산도 1%?의 시기까지 계속 세력을 확장한다.

김치는 유독 젖산균이 똘똘 뭉쳐 생태계를 지배하는 독특한 식품이다. 곰팡이, 세균, 효모 등이 섞여 사는 보통의 발효 식품과 달리 김치는 젖산균의 지배 체제가 워낙 공고하게 구축돼 있다는 것이다. ?20여 년 동안 갖가지 김치들을 다 헤집어 봤는데 정말 다른 균은 찾기가 힘듭니다. 김치가 잘 익었을 땐 젖산균밖에 없더라고요. 요구르트는 비교도 안 되는 수십 가지 젖산균들의 덩어리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김치죠.? ?김치 박사? 한 교수의 말이다.

그렇지만 젖산 왕국도 산성화가 진행되면서 최후를 맞이한다. 1mL의 김치에 최대 10억~100억 개까지 증식하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막대 균조차 자신이 만든 젖산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사멸하는 사이에, 젖산을 먹어치우는 효모가 마지막 ?해결사?로 등장한다. ?군내?가 나고 김칫국물에 허연 효모가 뜨기 시작하면 젖산 왕조는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다.

김치 미생물들이 실험실에서 조금씩 규명되면서 이제 김치는 ?어머니 손맛?이 아니라 미생물에 의해 맛이 조절되는 새로운 김치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김치 젖산균 가운데 맛을 좌우하는 우수한 젖산균들을 찾아 낸다면, 이들을 ?씨앗균을 찾아 내는 일은 김치를 국제 식품화하는 ?차세대 김치?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치즈나 요구르트는 이런 씨앗균을 찾아 내어 국제 식품으로 성공시킨 대표 사례다.

최근 토종 젖산균 ?김치아이?의 유전자 지도 초안을 작성한 강사욱 서울대 교수(생명 과학부)는 ?미생물 종은 지금까지 1%만이 알려져 있을 만큼 미지의 영역이 무궁무진한 생물 자원?이라며 ?토종 미생물들이 생물 산업에서 치열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⑵ 허생전(許生傳)

박지원(朴趾源)

이우성(李佑成) 옮김

허생은 묵적골〔墨積洞〕에 살았다. 곧장 남산(南山) 밑에 닿으면, 우물 위에 오래 된 은행나무가 서 있고, 은행나무를 향하여 사립문이 열렸는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막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허생은 글읽기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남의 바느질 품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

하루는 그 처가 몹시 배가 고파서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과거(科擧)를 보지 않으니, 글을 읽어 무엇합니까??

허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독서를 익숙히 하지 못하였소.?

?그럼 장인바치 일이라도 못 하시나요??

?장인바치 일은 본래 배우지 않았는 걸 어떻게 하겠소??

?그럼 장사는 못 하시나요??

?장사는 밑천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소??

처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밤낮으로 글을 읽더니 기껏 `?어떻게 하겠소?? 소리만 배웠단 말씀이오? 장인바치일도 못 한다, 장사도 못 한다면, 도둑질이라도 못 하시나요??

허생은 읽던 책을 덮어놓고 일어나면서,

?아깝다. 내가 당초 글읽기로 십 년을 기약했는데, 인제 칠 년인걸…….?

하고 휙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허생은 거리에 서로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바로 운종가(雲從街)로 나가서 시중의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누가 서울 성중에서 제일 부자요??

변씨(卞氏)를 말해 주는 이가 있어서, 허생이 곧 변씨의 집을 찾아갔다. 허생은 변씨를 대하여 길게 읍(揖)하고 말했다.

?내가 집이 가난해서 무얼 좀 해 보려고 하니, 만 냥(兩)을 뀌어 주시기 바랍니다.?

변씨는

?그러시오.?

하고 당장 만 냥을 내주었다. 허생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변씨 집의 자제와 손들이 허생을 보니 거지였다. 실띠의 술이 빠져 너덜너덜하고, 갖신의 뒷굽이 자빠졌으며, 쭈그러진 갓에 허름한 도포를 걸치고, 코에서 맑은 콧물이 흘렀다. 허생이 나가자,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저이를 아시나요??

?모르지.?

?아니, 이제 하루 아침에, 평생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만 냥을 그냥 내던져 버리고 성명도 묻지 않으시다니, 대체 무슨 영문인가요??

변씨가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남에게 무엇을 빌리러 오는 사람은 으레 자기 뜻을 대단히 선전하고, 신용을 자랑하면서도 비굴한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말을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지만, 말이 간단하고, 눈을 오만하게 뜨며,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재물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해 보겠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안 주면 모르되, 이왕 만 냥을 주는 바에 성명은 물어 무엇을 하겠느냐??

허생은 만 냥을 입수하자, 다시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안성(安城)으로 내려갔다. 안성은 경기도, 충청도 사람들이 마주치는 곳이요, 삼남(三南)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대추․밤․감․배며 석류․귤․유자 등속의 과일을 모조리 두 배의 값으로 사들였다. 허생이 과일을 몽땅 쓸었기 때문에 온 나라가 잔치나 제사를 못 지낼 형편에 이르렀다. 얼마 안 가서, 허생에게 두 배의 값으로 과일을 팔았던 상인들이 도리어 열 배의 값을 주고 사 가게 되었다. 허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 냥으로 온갖 과일의 값을 좌우했으니, 우리 나라의 형편을 알 만하구나.?

그는 다시 칼, 호미, 포목 따위를 가지고 제주도(濟州道)에 건너가서 말총을 죄다 사들이면서 말했다.

?몇 해 지나면 나라 안의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지 못할 것이다.?

허생이 이렇게 말하고 얼마 안 가서 과연 망건값이 열 배로 뛰어올랐다.

허생은 늙은 사공을 만나 말을 물었다.

?바다 밖에 혹시 사람이 살 만한 빈 섬이 없던가??

?있습지요. 언젠가 풍파를 만나 서쪽으로 줄곧 사흘 동안을 흘러가서 어떤 빈 섬에 닿았습지요. 아마 사문(沙門)과 장기(長崎)의 중간쯤 될 겁니다. 꽃과 나무는 제멋대로 무성하여 과일 열매가 절로 익어 있고, 짐승들이 떼지어 놀며, 물고기들이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습디다.?

그는 대단히 기뻐하며,

?자네가 만약 나를 그 곳에 데려다 준다면 함께 부귀를 누릴 걸세.?

라고 말하니, 사공이 그러기로 승낙을 했다.

드디어 바람을 타고 동남쪽으로 가서 그 섬에 이르렀다. 허생은 높은 곳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고 실망하여 말했다.

?땅이 천 리도 못 되니 무엇을 해 보겠는가? 토지가 비옥하고 물이 좋으니 단지 부가옹(富家翁)은 될 수 있겠구나.?

?텅 빈 섬에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대체 누구와 더불어 사신단 말씀이오??

사공의 말이었다.

?덕(德)이 있으면 사람이 절로 모인다네. 덕이 없을까 두렵지, 사람이 없는 것이야 근심할 것이 있겠나??

이 때, 변산(邊山)에 수천의 군도(群盜)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각 지방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수색을 벌였으나 좀처럼 잡히지 않았고, 군도들도 감히 나가 활동을 못해서 배고프고 곤란한 판이었다. 허생이 군도의 산채를 찾아가서 우두머리를 달래었다.

?천 명이 천 냥을 빼앗아 와서 나누면 하나 앞에 얼마씩 돌아가지요??

?일 인당 한 냥이지요.?

?모두 아내가 있소? ?

?없소.?

?논밭은 있소??

군도들이 어이없어 웃었다.

?땅이 있고 처자식이 있는 놈이 무엇 때문에 괴롭게 도둑이 된단 말이오??

?정말 그렇다면, 왜 아내를 얻고, 집을 짓고, 소를 사서 논밭을 갈고 지내려 하지 않는가? 그럼 도둑놈 소리도 안 듣고 살면서, 집에는 부부의 낙(樂)이 있을 것이요, 돌아다녀도 잡힐까 걱정을 않고 길이 의식의 요족(饒足)을 누릴 텐데.?

?아니, 왜 바라지 않겠소? 다만 돈이 없어 못 할 뿐이지요.?

허생은 웃으며 말했다.

?도둑질을 하면서 어찌 돈을 걱정할까? 내가 능히 당신들을 위해서 마련할 수 있소. 내일 바다에 나와 보오. 붉은 깃발을 단 것이 모두 돈을 실은 배이니, 마음대로 가져가구려.?

허생이 군도와 언약하고 내려가자, 군도들은 모두 그를 미친 놈이라고 비웃었다.

이튿날, 군도들이 바닷가에 나가 보았더니, 과연 허생이 삼십만 냥의 돈을 싣고 온 것이었다. 모두들 대경(大驚)해서 허생 앞에 줄지어 절했다.

?오직 장군의 명령을 따르겠소이다.?

?너희들, 힘껏 짊어지고 가거라.?

이에, 군도들이 다투어 돈을 짊어졌으나, 한 사람이 백 냥 이상을 지지 못했다.

?너희들, 힘이 한껏 백 냥도 못 지면서 무슨 도둑질을 하겠느냐? 인제 너희들이 양민(良民)이 되려고 해도, 이름이 도둑의 장부에 올랐으니, 갈 곳이 없다. 내가 여기서 너희들을 기다릴 것이니, 한 사람이 백 냥씩 가지고 가서 여자 하나, 소 한 필을 거느리고 오너라.?

허생의 말에 군도들은 모두 좋다고 흩어져 갔다.

허생은 몸소 이천 명이 1년 먹을 양식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군도들이 빠짐없이 모두 돌아왔다. 드디어 다들 배에 싣고 그 빈 섬으로 들어갔다. 허생이 도둑을 몽땅 쓸어 가서 나라 안에 시끄러운 일이 없었다.

그들은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대〔竹〕를 엮어 울을 만들었다. 땅기운이 온전하기 때문에 백곡이 잘 자라서, 한 해나 세 해만큼 걸러 짓지 않아도 한 줄기에 아홉 이삭이 달렸다. 3년 동안의 양식을 비축해 두고, 나머지를 모두 배에 싣고 장기도(長崎島)로 가져가서 팔았다. 장기라는 곳은 삼십만여 호나 되는 일본(日本)의 속주(屬州)이다. 그 지방이 한참 흉년이 들어서 구휼하고 은 백만 냥을 얻게 되었다.

허생이 탄식하면서,

?인제 나의 조그만 시험이 끝났구나.?

하고, 이에 남녀 이천 명을 모아 놓고 말했다.

?내가 처음에 너희들과 이 섬에 들어올 때엔 먼저 부(富)하게 한 연후에 따로 문자를 만들고 의관(衣冠)을 새로 제정하려 하였더니라. 그런데 땅이 좁고 덕이 엷으니, 나는 이제 여기를 떠나련다. 다만, 아이들을 낳거들랑 오른손에 숟가락을 쥐고, 하루라도 먼저 난 사람이 먼저 먹도록 양보케 하여라.?

다른 배들을 모조리 불사르면서,

?가지 않으면 오는 이도 없으렷다.?

하고 돈 오십만 냥을 바다 가운데 던지며,

?바다가 마르면 주워 갈 사람이 있겠지. 백만 냥은 우리 나라에도 용납할 곳이 없거늘, 하물며 이런 작은 섬에서랴!?

했다. 그리고 글을 아는 자들을 골라 모조리 함께 배에 태우면서,

?이 섬에 화근을 없애야 되지.?

했다.

허생은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의지 없는 사람들을 구제했다. 그러고도 은이 십만 냥이 남았다.

?이건 변씨에게 갚을 것이다.?

허생이 가서 변씨를 보고

?나를 알아보시겠소??

하고 묻자, 변씨는 놀라 말했다.

?그대의 안색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니, 혹시 만 냥을 실패 보지 않았소??

허생이 웃으며,

?재물에 의해서 얼굴에 기름이 도는 것은 당신들 일이오. 만 냥이 어찌 도(道)를 살찌게 하겠소??

하고, 십만 냥을 변씨에게 내놓았다.

?내가 하루 아침의 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글읽기를 중도에 폐하고 말았으니, 당신에게 만 냥을 빌렸던 것이 부끄럽소.?

변씨는 대경해서 일어나 절하여 사양하고, 십분의 일로 이자를 쳐서 받겠노라 했다. 허생이 잔뜩 역정을 내어,

?당신은 나를 장사치로 보는가??

하고는 소매를 뿌리치고 가 버렸다.

변씨는 가만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허생이 남산 밑으로 가서 조그만 초가로 들어가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한 늙은 할미가 우물터에서 빨래하는 것을 보고 변씨가 말을 걸었다.

?저 조그만 초가가 누구의 집이오??

?허 생원 댁입지요. 가난한 형편에 글공부만 좋아하더니, 하루아침에 집을 나가서 5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시고, 시방 부인이 혼자 사는데, 집을 나간 날로 제사를 지냅지요.?

변씨는 비로소 그의 성이 허씨라는 것을 알고, 탄식하며 돌아갔다.

이튿날, 변씨는 받은 돈을 모두 가지고 그 집을 찾아가서 돌려주려 했으나, 허생은 받지 않고 거절하였다.

?내가 부자가 되고 싶었다면 백만 냥을 버리고 십만 냥을 받겠소? 이제부터는 당신의 도움으로 살아가겠소. 당신은 가끔 나를 와서 보고 양식이나 떨어지지 않고 옷이나 입도록 하여 주오. 일생을 그러면 족하지요. 왜 재물 때문에 정신을 괴롭힐 것이오??

변씨가 허생을 여러 가지로 권유하였으나, 끝끝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변씨는 그 때부터 허생의 집에 양식이나 옷이 떨어질 때쯤 되면 몸소 찾아가 도와 주었다. 허생은 그것을 흔연히 받아들였으나, 혹 많이 가지고 가면 좋지 않은 기색으로,

?나에게 재앙을 갖다 맡기면 어찌하오??

하였고, 혹 술병을 들고 찾아가면 아주 반가워하며 서로 술잔을 기울여 취하도록 마셨다.

이렇게 몇 해를 지나는 동안에 두 사람 사이의 정의가 날로 두터워 갔다. 어느 날, 변씨가 5년 동안에 어떻게 백만 냥이나 되는 돈을 벌었던가를 조용히 물어 보았다. 허생이 대답하기를,

?그야 가장 알기 쉬운 일이지요. 조선이란 나라는 배가 외국에 통하질 않고,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질 못해서, 온갖 물화가 제자리에 나서 제자리에서 사라지지요. 무릇, 천 냥은 적은 돈이라 한 가지 물종(物種)을 독점할 수 없지만, 그것을 열로 쪼개면 백 냥이 열이라, 또한 열 가지 물건을 살 수 있겠지요. 단위가 작으면 굴리기가 쉬운 까닭에, 한 물건에서 실패를 보더라도 다른 아홉 가지의 물건에서 재미를 볼 수 있으니, 이것은 보통 이(利)를 취하는 방법으로 조그만 장사치들이 하는 짓 아니오? 대개 만 냥을 가지면 족히 한 가지 물종을 독점할 수 있기 때문에, 수레면 수레 전부, 배면 배를 전부, 한 고을이면 한 고을을 전부, 마치 총총한 그물로 훑어 내듯 할 수 있지요. 뭍에서 나는 만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슬그머니 독점하고, 물에서 나는 만 가지 중에 슬그머니 하나를 독점하고, 의원의 만 가지 약재 중에 슬그머니 하나를 독점하면, 한 가지 물종이 한 곳에 묶여 있는 동안 모든 장사치들이 고갈될 것이매, 이는 백성을 해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후세에 당국자들이 만약 나의 이 방법을 쓴다면 반드시 나라를 병들게 만들 것이오.?

?처음에 내가 선뜻 만 냥을 뀌어 줄 줄 알고 찾아와 청하였습니까??

허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만이 내게 꼭 빌려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능히 만 냥을 지닌 사람치고는 누구나 다 주었을 것이오. 내 스스로 나의 재주가 족히 백만 냥을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운명은 하늘에 매인 것이니, 낸들 그것을 어찌 알겠소? 그러므로 능히 나의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라, 반드시 더욱더 큰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은 하늘이 시키는 일일 텐데 어찌 주지 않았겠소? 이미 만 냥을 빌린 다음에는 그의 복력에 의지해서 일을 한 까닭으로, 하는 일마다 곧 성공했던 것이고, 만약 내가 사사로이 했었다면 성패는 알 수 없었겠지요.?

변씨가 이번에는 딴 이야기를 꺼냈다.

?방금 사대부들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오랑캐에게 당했던 치욕을 씻어 보고자 하니, 지금이야말로 지혜로운 선비가 팔뚝을 뽐내고 일어설 때가 아니겠소? 선생의 그 재주로 어찌 괴롭게 파묻혀 지내려 하십니까??

?어허, 자고로 묻혀 지낸 사람이 한둘이었겠소? 우선,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 같은 분은 적국(敵國)에 사신으로 보낼 만한 인물이었건만 베잠방이로 늙어 죽었고, 반계 거사(磻溪居士) 유형원(柳馨遠) 같은 분은 군량(軍糧)을 조달할 만한 재능이 있었건만, 저 바닷가에서 소요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집정자들은 가히 알 만한 것들이지요. 나는 장사를 잘 하는 사람이라, 내가 번 돈이 족히 구왕(九王)의 머리를 살 만하였으되 바닷속에 던져 버리고 돌아온 것은, 도대체 쓸 곳이 없기 때문이었지요.?

변씨는 한숨만 내쉬고 돌아갔다.

변씨는 본래 이완(李浣) 이 정승과 잘 아는 사이였다. 이완이 당시 어영 대장이 되어서 변씨에게 위항(委巷)이나 여염(閭閻)에 혹시 쓸 만한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변씨가 허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 대장은 깜짝 놀라면서,

?기이하다. 그게 정말인가? 그의 이름이 무엇이라 하던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소인이 그분과 상종해서 3년이 지나도록 여태껏 이름도 모르옵니다.?

?그인 이인(異人)이야. 자네와 같이 가 보세.?

밤에 이 대장은 구종들도 다 물리치고 변씨만 데리고 걸어서 허생을 찾아갔다. 변씨는 이 대장을 문 밖에 서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먼저 들어가서, 허생을 보고 이 대장이 몸소 찾아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허생은 못 들은 체하고,

?당신 차고 온 술병이나 어서 이리 내놓으시오.?

했다. 그리하여 즐겁게 술을 들이켜는 것이었다. 변씨는 이 대장을 밖에 오래 서 있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자주 말하였으나, 허생은 대꾸도 않다가 야심해서 비로소 손을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이 대장이 방에 들어와도 허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이 대장은 몸둘 곳을 몰라하며 나라에서 어진 인재를 구하는 뜻을 설명하자, 허생은 손을 저으며 막았다.

?밤은 짧은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무슨 벼슬에 있느냐??

?대장이오.?

?그렇다면 너는 나라의 신임받는 신하로군. 내가 와룡 선생(臥龍先生) 같은 이를 천거하겠으니, 네가 임금께 아뢰어서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하게 할 수 있겠느냐??

이 대장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제이(第二)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

했다.

?나는 원래 ?제이?라는 것은 모른다.?

하고 허생은 외면하다가, 이 대장의 간청에 못 이겨 말을 이었다.

?명(明)나라 장졸들이 조선은 옛 은혜가 있다고 하여, 그 자손들이 많이 우리 나라로 망명해 와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으니, 너는 조정에 청하여 종실(宗室)의 딸들을 내어 모두 그들에게 시집 보내고, 훈척(勳戚) 권귀(權貴)의 집을 빼앗아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게 할 수 있겠느냐??

이 대장은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무릇, 천하에 대의(大義)를 외치려면 먼저 천하의 호걸들과 접촉하여 결탁하지 않고는 안 되고, 남의 나라를 치려면 먼저 첩자를 보내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 만주 정부가 갑자기 천하의 주인이 되어서 중국 민족과는 친근해지지 못하는 판에, 조선이 다른 나라보다 먼저 섬기게 되어 저들이 우리를 가장 믿는 터이다. 진실로 당(唐)나라, 원(元)나라 때처럼 우리 자제들이 유학 가서 벼슬까지 하도록 허용해 줄 것과, 상인의 출입을 금하지 말도록 할 것을 간청하면, 저들도 반드시 자기네에게 친근하려 함을 보고 기뻐 승낙할 것이다. 국중의 자제들을 가려 뽑아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혀서, 그 중 선비는 가서 빈공과(賓貢科)에 응시하고, 또 서민은 멀리 강남(江南)에 건너가서 장사를 하면서, 저 나라의 실정을 정탐하는 한편, 저 땅의 호걸들과 결탁한다면 한번 천하를 뒤집고 국치(國恥)를 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명나라 황족에서 구해도 사람을 얻지 못할 경우, 천하의 제후(諸侯)를 거느리고 적당한 사람을 하늘에 천거한다면, 잘 되면 대국(大國)의 스승이 될 것이고, 못 되어도 백구지국(伯舅之國)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다.?

이 대장은 힘없이 말했다.

?사대부들이 모두 조심스럽게 예법(禮法)을 지키는데, 누가 변발(?髮)을 하고 호복(胡服)을 입으려 하겠습니까??

허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소위 사대부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오랑캐 땅에서 태어나 자칭 사대부라 뽐내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의복은 흰 옷을 입으니 그것이야말로 상인(喪人)이나 입는 것이고, 머리털을 한데 묶어 송곳같이 만드는 것은 남쪽 오랑캐의 습속에 지나지 못한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예법이라 한단 말인가? 번오기(樊於期)는 원수를 갚기 위해서 자신의 머리를 아끼고 않았고, 무령왕(武靈王)은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되놈의 옷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제 대명(大明)을 위해 원수를 갚겠다 하면서, 그까짓 머리털 하나를 아끼고, 또 장차 말을 달리고 칼을 쓰고 창을 던지며, 활을 당기고 돌을 던져야 할 판국에 넓은 소매의 옷을 고쳐 입지 않고 딴에 예법이라고 한단 말이냐? 내가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는데, 너는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신임받는 신하라 하겠는가? 신임받는 신하라는 게 참으로 이렇단 말이냐? 너 같은 자는 칼로 목을 잘라야 할 것이다.?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칼을 찾아서 찌르려 했다. 이 대장은 놀라서 일어나 급히 뒷문으로 뛰쳐나가 도망쳐서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집이 텅 비어 있고, 허생은 간곳이 없었다.

3단원

⑴ 역사 앞에서

김 성 칠(金聖七)

1950년 6월 25일

낮때쯤 하여 밭에 나갔더니 가겟집 주인 강 군이 시내에 들어갔다 나오는 길이라면서, 오늘 아침 38 전선(三八全線)에 걸쳐서 이북군이 침공해 와서 지금 격전 중이고, 그 때문에 시내엔 군인의 비상 소집이 있고, 거리가 매우 긴장해 있다는 뉴스를 전하여 주었다.

마(魔)의 38선에서 항상 되풀이하는 충돌의 한 토막인지, 또는 강 군이 전하는 바와 같이 대규모의 침공인지 알 수 없으나, 시내의 효상(爻象)을 보고 온 강 군의 허둥지둥하는 양으로 보아 사태는 비상한 것이 아닌가 싶다. 더욱이 이북이 조국 통일 민주주의 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에서 이른바 호소문을 보내어 온 직후이고, 그 글월을 가져오던 세 사람이 38 선을 넘어서자 군 당국에 잡히어 문제를 일으킨 것을 상기(想起)하면 저쪽에서 계획적으로 꾸민 일련의 연극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평화적으로 조국을 통일하자고 호소하여도 듣지 않으니 부득이 무력(武力)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고.

하여튼 쌀값이 소두 한 말에 3천 원의 고개를 바라보게 되고, 민생고(民生苦)가 극도에 빠진 오늘날 이 닥쳐온 전란(戰亂)을 백성은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인가.

1950년 6월 26일

아침 일찍 버스 정류장에 나가서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다리는 손님이 여느 날처럼 많지 않다. 이윽고 생각해 보니, 어제의 전투 개시로 말미암아 버스가 징발(徵發)된 듯싶다. 걸어서 학교에 나갔더니 하룻밤 사이에 거리가 어쩐지 술렁술렁하다. 어제 저녁 무렵부터 밤 사이에 멀리서 천둥하는 듯한 소리가 은은히 들려 오더니, 오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북군이 이미 38선을 넘어서 의정부 방면으로 쳐들어오는 대포 소리라 한다.

연구실에는 여느 날과 같이 강(姜), 김(金) 두 학생이 나와서 공부하고 있었다. 내가 기획하는 조그만 학술 조사(學術調査)에 이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협력하고 있고, 그러므로 내 연구실을 이 학생들에게 공개하여 온 것이다. 두 사람이 모두 매우 성실한 천품(天稟)이고, 또 꾸준한 노력가이다.

오늘 하루 호외(號外)가 두 번이나 돌고 신문은 큼직한 활자로`?괴뢰군(傀儡軍)의 38 전선(三八全線)에 긍(亘)한 불법 남침?을 알리었다. 은은히 울려 오는 대포 소리를 들으면서 괴뢰군에 대한 비방과 욕설로 가득 찬 지면(紙面)을 대하니 내일이나 모래쯤은 이 신문의 같은 지면이 괴뢰군에 대한 찬사와 아부로 가득 차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에 스치었다. 시시각각으로 더해 가는 주위의 혼란과 흥분과는 딴판으로 신문 보도는 자못 자신 만만하게`?적의 전면적 패주?라느니`?국군의 일부 해주시(海州市)에 돌입?이라느니 ?`동해안 전선(戰線)에서 적의 2개 부대가 투항(投降)?이라느니 하는 낙관적인 소식을 전하여 주고 있다.

아직도 나이 스물이 될락말락한 강 군이 신문을 보다 말고, ?적이 투항해 왔는지 국군이 투항해 갔는지 알 게 뭡니까?? 하고 그 애티 있는 입언저리에 쓴웃음을 머금는다. 나는 이 말을 듣고 한동안 가슴이 설레었다. 이는 단순히 신문 기사에 대한 경멸이라든가 국방부의 보도에 대한 불신이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고, 강 군의 젊은 모습에 민족의 니힐을 역력히 읽을 수 있어서 나는 사뭇 슬프기만 하였다. 하도 시달리고 들볶이어서 민족의 얼은 이미 젊음의 순진을 잃어버리고, 모든 사물에 대한 비뚤어진 해석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지니지 않아도 좋을 많은 상념(想念)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한 폴란드 시인의 슬픈 노래가 다시금 생각키운다.

집으로 오는 길에 보니 학교에서 느낀 이상으로 거리는 물 끓듯하였다. 한길엔 되넘이 고개를 향하여 질풍(疾風)같이 달리는 군용차가 끊일 사이 없고, 언제 풀려 나왔는지 길가에는 소학교 아동들이 성을 쌓듯 둘러서서 그 고사리 같은 손들이 아프게 박수로써 질주하는 군용차를 환송하고 있다.

?전쟁은 기어이 벌어지고 말았구나.?하는 생각에 뒤이어, `?5년 동안 민족의 넋을 가위누르던 동족 상잔(同族相殘)이 마침내 오고야 마는구나.? 하는 순간 갑자기 길이 팽팽 돌고 눈 앞이 깜깜하여졌다. 약간의 현기증을 느낀 것이었다.

1950년 6월 27일

새벽 라디오에 신성모 국무 총리 서리(署理)의 특별 방송이라 하여 정부가 수원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한다. 밤 사이 대포 소리가 한결 가까이 들려 왔으나 `?그래도 설마 서울이야.? 하고 진득이 배겨 보리라 마음먹었던 것이 단박에 맥이 탁 풀린다.

아침이면 으레껏 하는 버릇으로 닭과 오리를 둘러보았으나 마음은 건성이었다.

문간방에 있는 만수와 순규에게 오늘 아침 차로 고향에 내려가라고 일렀으나 저들에겐 사태가 잘 이해되지 않는 것 같다. 만수는 고향서 온 학생이고 순규는 그와 친한 충청도 고학생이다. 두 사람이 모두 내 명령을 거역하기는 어려우나 그렇다고 당장에 짐을 묶어서 서울을 떠나야만 할 절박한 사정도 딱히 이해되지 않아서 매우 난처해하는 모양이다.

두 사람이 모두 스물 안팎의 청년 학생이나 그들은 나를 믿고, 나는 그들을 탐탁히 여겨 오던 터이므로 여느 때 같으면 망설이는 그들에게 지금 전국(戰局)이 비상히 긴박해 올 성싶다든가, 오늘 아침 차를 붙잡아 타지 아니하면 다시는 차도 없을 것이고, 또 경우에 따라선 서울을 빠져나갈 수 없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라든가, 어차피 너희들을 부모의 슬하로 보내 놓아야만 내 마음이 놓이지, 어떠한 동란(動亂)이 벌어질지 모를 이 판국에 남의 자식을 데리고 있을 수 없다는 거며, 그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었을 것이며, 또 설명해 주어야 할 것이나, 어쩐지 오늘 아침은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그대로 마구 몰아세우고,

?보따리가 다 무에냐, 길에서 어떠한 변이 있을는지도 모를 노릇이고, 또 차도 여간 붐비지 않을 것이니 가방만 들고 학교에 가는 것처럼 하고 가거라.?

하여 사뭇 우기고 또 아침밥을 지어서 시름없이 먹고 있는 것을 숟갈을 빼앗다시피 하고,

?밥 먹을 생각 말고 주먹밥으로라도 꿍쳐 넣어서 얼른 떠나거라. 오늘 아침 차가 마지막 차가 될지도 모를 일이고, 또 반드시 붐빌 것이니, 얼른 가서 차를 잡아타야지. 못 타면 걸어서라도 되돌아오지 말고 고향으로 바로 가거라.?

하고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억지로 내어 보내었다.

그들의 떠나는 양을 보고 새삼스레 마음이 약간 설레었다. 앞으로 서울이 어떠한 동란의 와중에 휩싸일는지, 세상이 바뀌는 일이 있다면 나 자신은 어떠한 처지에 서게 될 것인가. 피란! 피란한다면 이 손바닥만한 38 이남에 어디는 안전한 곳이 있을 것인가. 이 여름철에 어린것들을 데리고 생활의 둥지를 떠나서 어디메 살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박연암이,

?조선 사람은 걸핏하면 피란하길 좋아하지만 구태여 피란하려면 서울이 제일일 것이요, 산중으로 피란함과 같음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니, 첫째 병나기 쉽고, 병나도 고칠 수 없으며, 며칠 안 가서 양식이 다할 것이요, 양식이 다하지 않더라고 도적이 빼앗아 갈 것이다. 더욱이 세상과 동이 떠서 난리가 어떻게 움직여 가는지도 모르고 헛되이 산중에서 목숨을 버리기 쉬우리니 세상에서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으리요.?

한 말이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

아침 후에 정용이를 불러서 양식과 옷과 이불을 얼마쯤 땅 속에 묻고 책상 서랍을 들추어서 대한 민국의 국채(國債)며 이와 비슷한 몇 가지 서류를 불살라 버리었다. 경희며 장희며 대규 형제들에게 오전 중으로 다녀가라고 기별하였으나 인편이 부실했는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온대도 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들은 내 조언이 없더라도 시대의 움직임에 대한 그들의 민첩한 감수성으로 하여 이 거센 물결을 잘 헤엄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마을에 나가니 골목마다 사람들이 모여서 술렁술렁하다. 모두들 전에 없이 긴장한 얼굴들이다. 강 군의 가게에 들러서 외상값을 치르고 계란과 국수와 술과 담배와 과자를 얼마쯤 샀다. 마음 같아선 가게에 있는 물건을 많이 들여다 놓고 싶었으나 남의 이목이 번다해서 조금씩 사렸는데 계란 같은 건 강 군 내외가 권해서 많이 들여왔다. 농성(籠城)할 준비다.

정세는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한 시간 전까지도 골목길에 어슬렁거리던 사람들이 낮때가 가까워질 무렵엔 이미 피란 보퉁이를 꾸려 들고 아이들을 들쳐 업고 마을 앞 행길을 빠져나가고 있다. 미처 진지를 구축할 겨를도 없이 앞산에선 대포를 걸어서 불을 뿜고 있고 전선(前線)에서 물러 나온 병정들인 듯 모자에 풀을 담뿍 꽂은 군인들이 한두 사람씩 산골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그들의 맥빠진 몰골로 하여 모든 것이 짐작이 가지만 북에서 수없이 밀려 내려오는 탱크는 이쪽 대포알이 아무리 명중하여도 꿈쩍도 않는다는 그들의 보고 온 이야기가 모든 사람의 가슴에 불안의 납덩이를 던져 주고 가는 것이다. 우리도 생각다 못하여 정용이 가는 편에 아이들을 붙여 보내고 아내도 겨우 백날이 지난 협아를 업고 나섰다. 아내는 떠나면서 부풀어오른 감정을 억제하고 강잉히 웃어 보여 주었다. 나도 웃으면서 아이들을 조심하라 일렀다.

가족들을 보내고 텅 빈 집 안에 홀로 남으니 비로소 긴장이 풀리고 몸과 마음이 모두 허탈한 것 같다. 내 방에 들어가 침대 위에 번듯이 누워서 두 팔을 깍지껴 베개삼으니 국제 정세랑 민족과 국가의 운명이랑 우리 집과 나 개인의 형편이랑 모든 것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비치어지나 하나도 종잡을 수 있는 결론을 끄집어 낼 수가 없다. 포성이 지척에서 간단없이 울리어 온다. 어떡하면 이 동란의 와중을 헤엄쳐 나가서 살아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아도 별로 신통한 궁리가 돌지 않는다. 오늘밤에 죽는 일이 있어도 숭없지 않게 깨끗이 죽어야겠다 마음에 다짐하였다.

라디오를 틀어 놓으니 대한 민국 공보처의 발표라 하고 아침에 수원으로 천도(遷都) 운운한 것은 오보이고,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있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충용 무쌍(忠勇無雙)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고 거듭 외치었다. 그러나 자꾸만 가까워지는 총포성은 무엇을 의미함일까 ?

오후 두세 시쯤이나 되었을까 한 반 시각 전부터 골목길에서 웅얼웅얼하고 웅성대는 소리가 차츰 높이 들리어 오므로 무슨 일인가 하고 일어나 나가 보니 마을 사람들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조리 산으로 산으로 기어올라가고 있다. 이웃집 춘자 할아버지랑 춘자 어머니랑, 선생님은 어찌할 양으로 그러고 있느냐고 묻는다. 이 마을을 비우란 무슨 명령이 있어서 모두들 이러느냐고 되물으니, 그는 딱히 모르나 아까 어떤 군인이 와서 이 마을이 오늘 밤 안으로 전투 지구가 될 것이라 하여 모두들 산으로 피하는 것이라 한다.

나는 다시 한 번 박연암의 말을 마음 속으로 뇌어 보고 방으로 되돌아와서 탄환이 날아 들어올 성싶은 바깥쪽 벽에 이불을 가리고 다시 침대 위에 네 활개 뻗고 누웠다. 라디오는 국방부 정훈국 보도 과장 김현수의 특별 방송이라 하여 ?맥아더 사령부 전투 지소(支所)를 오늘 직각으로 서울에 설치하게 되어 내일 아침부터 미국 비행기가 직접 전투하게 될 것이니 일선 장병과 후방 국민은 맡은 바 전선과 직장을 사수하라.?는 내용을 녹음해 두고 몇 번을 되풀이하여 방송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방송도 그리 믿어지지 않았다. 이 어려운 시절 막다른 판국에 국가의 공식 발표를 믿지 못하는 내 마음이 슬펐다. 나라고 개인이고 간에 언제나 반드시 바른 말을 해얄 것이고 일시의 편익을 위하여 허위의 길을 밟는 것은 이 곧 자멸의 길과 통하는 것임을 새삼스레 절실하게 느끼었다.

다섯 시쯤 하여 처가 댁 식구들이 와서 온 마을이 모두 비었는데 왜 혼자 이러고 있느냐고 책망이다. 산에 가서 고생하느니 침대 밑에 들어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이 밤을 새울 작정이라 하였으나 굳이 동행하기를 권하므로 구태여 고집 세울 일도 아니라 생각되어 따라나서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작 산에 올라가 보니 골짝마다 기슭마다 사람 투성이여서 바윗돌 틈서리라고 의지될 만한 곳은 발 디밀 틈이 없다. 이 등성이 저 등성이 그럴 만한 곳이 없을까 하여 기웃거리다가 나중엔 지쳐서 어느 산모롱이 소나무 그늘에 아쉬운 대로 자리잡았다.

땀을 들이면서 생각하니 가족을 딴 곳으로 보내고 내가 무얼 하러 이런 곳에 와 있는가 싶다. 더욱이 만일에 돈암동서도 산비알로 피란해야 할 지경에 이른다면 아내가 혼잣손에 아이들 셋을 데리고 어떡할 것인가. 생각이 이에 미치매 한 시각도 이 곳에 지체할 수 없이 마음이 설렌다.

이 때는 이미 산등성이마다 병정들이 진지를 다지고 지향을 잡을 수 없는 포화가 불을 뿜기 시작하였다. 나는 안어른에게 아이들을 가 보아야겠다 하고 미처 붙잡을 사이도 없이 미끄러지듯 그 곳을 빠져 나와서 성북동임 직한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산비알은 걷고 등성이에선 기고 하여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렬로 늘어선 총부리와 총부리 사이를 더듬어서 겨우 성북동 골짜기로 접어들었다. 날은 이미 기울고 비조차 부슬부슬 내리어 나는 다급한 마음에 삼선평(三仙坪) 전찻길까지 한달음에 뛰어갔다. 전찻길에는 군용 자동차가 쏜살같이 달리고 길 양편에는 사람들이 성을 쌓다시피 모였다.

이윽고 자동차의 통행이 뜸하고 양편에 서 있던 사람들이 움직이기에 전찻길을 넘어설 양으로 앞으로 내달았더니 뜻밖에 길에 지키고 섰던 군인이 총자루로 내 옆구리를 힘껏 내지르고 서북(西北) 사투리로 무어라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너무 아파서 말이 나오지 않고 그 자리에 고꾸라질 뻔하였으나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여 오던 길로 되돌아섰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사람의 성이 허물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 전찻길을 횡단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물결에 밀리듯 그 틈에 끼여서 앞으로 내달았다. 결리는 쪽으로 몸을 비틀어서 역시 달음박질로 정용의 집까지 닿았을 제는 기진맥진하였으나 그래도 가족들의 무사한 얼굴들을 대하니 적이 마음이 놓이었다.

그러나 문득 치어다보니 맞은편 낙산(駱山) 성벽을 의지하여 아군의 대포가 자리잡았고 산 위엔 병정들이 즐비하게 깔리어 있다. 저편의 대포알이 필시 이 포진지를 겨냥하여 날아올 것을 생각하니 그 바로 앞자락인 정용의 집으로 온 것은 그야말로 대포알 마중하러 온 것이나 진배없다. 아내와 이 일을 의논하고 경동 중학 앞 이극원 씨 댁으로라도 옮겨 갈까 하는 참에 어디선지 대포알이 휭 하니 날아와서 흙먼지를 말아 올리고, 그러고는 거리에 사람의 그림자가 끊어졌다.

우리는 마침내 이 위험 지대에서 난리의 첫날밤을 새우게 되었다.

어둑어둑할 무렵부터 비는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하고 대포알은 쉴새없이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휘잉 하고 하늘을 찢는 듯 공중을 나는 소리, 이어서 탕 하고 포탄의 터지는 소리. 저것이 백에 한 번 추호라도 겨냥을 잘못하면 우리는 죽을 운명에 놓여 있다 생각하니 듣기에 그리 유쾌한 음성이 아니었다. 안권식은 아이들을 데리고 지하실로 들어가고 자형과 나와 정용이는 부엌바닥에 거적때기 깔고 누웠다. 메루(개)가 대포 소리에 놀라서 자꾸만 우리들 사이로 파고들어서 난처하였다.

⑵ 어느 날 심장이 말했다

진 수 완(陳秀完)

장면 1 약수터(D)

운동하고 있는 사람들, 약숫물 뜨고 있는 사람들로 활기찬 약수터 풍경인데, 그 위로 쩌렁쩌렁하게 들리는,

흥 수:(E)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어요!

사람들이 하던 일들 멈추고 돌아보면, 언덕 끝에서 이제 막 도착하고 있는 흥수와 광도의 모습.

광도 가볍게 맨손 체조하며 오고 있고, 그 옆에 흥수 ?이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항의하며 따라오고 있다.

흥 수:이건 말도 안 돼요, 진짜. 저번 주에도 저──번 주에도 제가 대신 했었잖아요?

광 도:(옆의 학생에게) 학생, 거 물컵 좀 빌립시다.

남학생:(모자 써서 얼굴 잘 안 보이는) 네, 여기. (컵 건네 주고 한쪽으로 가서 몸풀며 운동하는)

흥 수:이건 직무 유기에 책임 회피라구요! 전 분명히 저번 주에 식사 당번 끝냈고, 이번 주는 분명히 아버지가 당번이시잖아요? 근데 그걸 왜 또 제가 대신……. (하며 광도 보면)

광 도:(노려보고 있다) 그래서?

흥 수:(그 눈빛에) 아,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제가 무슨 부엌데기도 아니고, 밥튕이도 아닌데 허구한 날 집 안 살림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광 도:그래서─―.

흥 수:아, 아니 해, 해요. 하긴 하는데…….

광 도:자식, 진작에 그렇게 말할 것이지. 힘들어도 이번 주만 좀 봐 줘. 내가 일이 많아 그래. 밀린 서류며 공문 처리해야지, 일본 자매 결연 학교 애들 오늘 마지막 날이라 환송해 줘야지…….

흥 수:(입이 한 자는 나와서) 알았어요. 한다잖아요.

광 도:알았으면 입 좀 집어 넣어, 임마. (픽 웃고는 약수통 들고 물가 쪽으로 가는)

흥 수:…… (멀어지는 아버지 봤다가) …… (발끝으로 괜히 돌부리 툭툭 차며 혼잣소리처럼) 씨, 나도 고 3인데. 어유, 내 팔자야.

장면 2 영화반(D)

모여 있는 영화반 아이들.

신 화:좋은 애 같던데…….

흥 수:네 눈에 안 좋아 보이는 애도 있냐?

애 라:왜, 나도 멋있던데. 벌써 1`학년 여자애들이 구경 왔더라라니까?

흥 수:눈에 깁스를 하라 그래라.

지 민:(흥수 놀리려고 짐짓) 유진 걔, 어딘지 강렬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거 같지 않냐 ?

정 연:(흥수 쪽 의식하며) 그러게 말야. 이유가 뭘까?

애 라:딴건 몰라도 일단 얼굴이 되잖냐. 솔직히 우리 학교 남학생들, 얼굴이 양심 불량인 애들이 좀 많았냐?

유 미:(수긍하듯 끄덕이고 진지하게) 사람은 일단 잘생기고 봐야겠구나.

애 라:잘생겨서 나쁠 건 없지. 가까운 예로 우리 흥수를 봐.

흥 수:나 뭘 봐?

애 라:흥수 인간성이 얼마나 좋냐. 하지만 그 인간성을 둘러싸고 있는 거죽이 덜 매력적이니까 여자들이 별로 안 따르잖아?

흥 수:(버럭) 내 가죽이 어디가 어때서!

유 미:너무 말라서 비린내 나게 생겼잖아?

흥 수:그 자식은, 그 자식도 근육질은 아니잖아!

지 민:유진은 소프트웨어가 따라 주잖냐. 3`개 국어가 된다잖아, 3`개 국어가.

흥 수:이씨…… (화나고.)

정 연:(어깨 토닥여 주며) 힘 내. 대신 넌 아줌마 팬들이 많잖아?

유 미:맞아. 네가 식당 가서 밥 먹을 때마다, ?아줌마 이거 양념 어떻게 하는 거예요?? 물어 보면, 아줌마들이 귀여워서 죽잖아?

흥 수:(더는 못 참고 가방 들고 일어나는)

신 화:어디가?

흥 수:밥하러 간다. 왜! (나가면)

아이들:(깔깔깔 웃음 터지는)

신 화:너무했다 니들.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지 민:귀엽잖냐. 난 흥수 재롱 보는 맛에 학교 온다야.

아이들:(깔깔깔 웃는)

장면 3 대형 수퍼마켓(D)

흥수 카트 밀며 진열대 사이를 다니고 있다.

그 뒤를 역시 카트를 밀며 진이 따라붙고 있다.

흥수, 적당한 것 골라서 카트 안에 집어넣는데 전부 인스턴트 음식들이다.

흥수가 인스턴트 음식 골라 카트 안에 집어넣으면 다시 빼서 진열대에 올려놓는 진. 흥수, 라면 한 뭉치 골라 와서 집어 넣다가 보면 텅 비어 있는 카트 안.

흥 수:(끓어오르는 것 누르며) 야, 유진!

진 :(본다.)

흥 수:(씩씩 유진 앞으로 와서) 왜 자꾸 내 뒤만 쫄래쫄래 따라다녀?

진 :나도 장 봐야 돼. 내 취미가 요리거든.

흥 수:그럼 너 볼 일 봐. 왜 남 쇼핑하는 거까지 방해하고 난리야! (카트 홱 돌려서 가려는데)

진 :(딴 짓하며) 따뜻한 쌀밥 먹고 싶다며.

흥 수: ! (멈칫하는)

진 :(쌀 봉지 두 개 들고 와서 하나 흥수의 카트에 넣어 주며) 인스턴트말고 밥 먹자 우리.

흥 수:우리?

진 :어, 우리……. 실은 나도 너랑 좀 비슷한 처지거든.

흥 수:뭐 ?

진 :부모님이 아직 미국에 계시기 때문에 나도 거의 혼자야. 외로운 사람들끼리 앞으로 잘 지내 보자. (웃으며 카트 끌고 가는)

흥 수:(보는)

장면 4(신 25) 광도의 거실(N)

열쇠로 문 여는 소리 들리고, 들어서는 흥수.

들어서다 말고 멈칫하는 흥수.

흥수 방에서 들리는 소리.

흥 수:…… ? (방 쪽으로 가는)

장면 5 흥수의 방(N)

들어서다가 하얗게 굳어 버리는 흥수.

광도, 흥수의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 CD 치워 내고 있다.

흥 수:아, 아버지 지금 뭐하세요?

광 도:(대꾸 않고 이번엔 컴퓨터에 연결된 전선들을 뽑아 낸다.)

흥 수:(가방 던지듯 내려놓고 후다닥 달려가 광도 잡으며) 아버지, 뭐하시는 거예요, 지금? 아버지, 아버지.

광 도:(말리는 흥수 손 냉정히 털어 내고 컴퓨터 모니터 들고 나가는)

장면 6 광도의 거실(N)

컴퓨터 들고 나오는 광도, 현관으로 나가려는데,

흥 수:(얼른 뒤따라 나와 붙잡으며) 아버지.

광 도:저리 안 비켜?

흥 수:도대체 왜 이러세요 진짜.

광 도:몰라서 물어?

흥 수:(좀 화나서) (O.L) 몰라서 물어요. 남의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 와서 이게 무슨 경우예요 지금! 이 안에 진행 중인 중요한 프로그램이 깔려 있단 말예요. 그거 깨졌으면 아버지가 책임지실 거예요?

광 도:중요한 프로그램? (버럭) 게임이나 만들고 있는 게 중요한 프로그램이야 임마?

흥 수:! (본다)

광 도:허구한 날 컴퓨터 끼고 앉아 게임이나 구상하고 있으니까 성적이 바닥을 기는 거 아냐!

흥 수:아버지.

광 도:뭐? 대학엔 별 생각이 없어? 너, 니가 무슨 빌 게이츠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모양인데, 정신차려 임마. 너만큼 컴퓨터하는 놈들은 쎄고 셌어! 한심한 놈, 밥 대신 꿈 먹고 사는 놈 아냐 이놈이.

흥 수:(순간 본다. 눈빛에 반항심이 생긴다.)

광 도:너, 오늘부터 수능 보는 날까지 컴퓨터 만질 생각하지 마. 알았어? (다시 들고 나가려는데)

흥 수:(O.L) 언제부터 저한테 그렇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셨어요?

광 도:뭐?

흥 수:언제나, 뭐든지 혼자 결정하게 내버려 두셨잖아요. 그렇게 팽겨쳐 둘 때는 언제고, 언제부터 나한테 열렬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셨냐고요.

광 도:(기막힌) 박흥수.

흥 수:제가 필요할 땐 인생은 각자 알아서 사는 거다, 편한 대로 팽개치고, 그러다 아버지 맘에 안 드는 결정을 내리면 불같이 화내시고, 아버지 이러는 거 정말 우습단 말예요.

광 도:뭐야?

흥 수:애초에 관심 없었으면 차라리 끝까지 무관심해 주세요. 이제 와서 아버지가 무슨 권리로 제 인생에 끼어드느냐고요!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광 도:! (기막혀) 야, 임마……. 박흥수.

장면 7 흥수의 방(N)

들어와서 책상에 털썩 앉는 흥수.

책상에 팔 올려놓고 양 손으로 머리 감싸쥐는데……(F.O)

장면 8 2학년 5반 교실(D)

수업 시간 전 소란스러운 교실.

교실문 열리고 광도 들어오면, 아이들 후다닥 자리 찾아서 앉고, 지민 일어나 경례한다.

흥 수:…… (광도 보고 있다가 시선 마주치면 시선 피한다.)

광 도:…… (그런 흥수 봤다가 시선 거두고 교재 넘기며)

광 도:78페이지 할 차례지? (하며 돌아서서 단원 제목 판서하는데, 아이들 어쩐 일인지 키득키득 웃기 시작한다. 흥수, 무슨 일인가 해서 보면 광도의 양복 밑단 반 이상이 풀어져 있다.)

희 진:웬일이니 진짜. 우리 복장 검사는 목숨 걸고 하면서, 자기는 완전 걸레를 입고 다니는구먼.

아 영:그러지 마. 와이프 없는 티가 팍팍 나는 게 불쌍하잖냐.

흥 수:……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이 속상하고)

광 도:(모르는 채 돌아서서 오기 창창하게) 누가 이렇게 떠들어? 입 다물고 책들 펴! (하고는 교재 읽기 시작한다.)

진 :(교재 봤다가) ? (다시 광도를 쳐다본다.)

동 일:(그런 진을 보고) 왜?

진 :선생님 혹시 필리핀에서 오셨어?

용 구:(뒤돌아서) 왜? 불법 체류자같이 생겨서?

진 :아니, 그게 아니라…… 발음이 좀 이상해서. 첨 듣는 억양이거든. (고개 갸웃하고) 필리핀 쪽도 아닌 거 같은데…….

용 구:푸, 푸하…… 푸하하하하하하 ! (웃음 터지고)

아이들:광도? (용구에게 시선 집중되고)

흥 수:……. (남 몰래 울컥 치솟는 느낌이다.)

장면 9 광도의 거실(N)

현관문 열쇠로 열리는 소리 들리고 들어오는 흥수, 들어서다 주방에서 나오는 아버지 발견하고 멈칫 선다.

광 도:밥 먹었냐?

흥 수:생각 없어요. (들어가려는데)

광 도:밥을 생각으로 먹냐? 옷 갈아 입고 나와. (주방으로 들어가는)

흥 수:……. (한숨 쉬는)

장면 10 광도의 주방(N)

광도와 흥수 말없이 식사하고 있다.

잠시 어색한 침묵.

광 도:(수저 내려놓으며 얘기 꺼내려) 박흥수.

흥 수:(O.L) 저, 전학 보내 주세요.

광 도:이제 고 3 되는데 전학은 무슨…….

흥 수:(O.L) 그럼 아버지가 전근 가시든지요.

광 도:! (본다)……. 이유가 뭐야.

흥 수:아버지랑 같은 공간에 있기 싫어요.

광 도:!

흥 수:더 이상 애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떠드는 거 듣기 싫고요……. 아버지 윗사람들한테 굽신거리는 것도 보기 싫고요……. 학교에서 남들 눈치 보느라 아버지 없는 놈처럼 사는 것도 싫어요.

광 도:……. (보고)

흥 수:아버지가 사회에서 겪는 약한 모습, 초라한 모습 다 보고 사는 아들, 아버지 존경하기 힘들어요. 저도 다른 애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광 도:!

흥 수:…….

장면 11 교무실(D)

입구에 어쩡쩡하게 서서 교무실 안을 살피고 있는 흥수.

정 인:(들어오다가) ? 흥수야.

흥 수:(퍼뜩 놀라) 네?

정 인:뭘 그렇게 놀래? 무슨 일로 왔니?

흥 수:네? 아니요, 그냥 잠깐……. (하는데)

재 현:(보고)

정 인:잘됐다. 온 김에 애들 노트 좀 갖다 나눠 줄래?

흥 수:네. (정인 따라 들어가며 슬쩍 아버지 자리 쪽을 보고)

재 현:……. (그런 흥수 놓치지 않고 보는) 김 선생님.

정 인:(노트 챙기다가) 네?

재 현:(일부러 흥수 들으라는 듯) 박광도 선생님 어디 가셨죠?

정 인:아까 병원 갔다 오신다구 나가셨잖아요?

재 현:아아, 참 오늘 결핵 검사 받으시러 갔구나 참.

흥 수:!

정 인:괜찮으셔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재 현:요즘은 약이 좋아져서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잘 먹고 푹 쉬면 낫는다 그러더라고요.

흥 수:…….

장면 12 교정 일각(D)

착잡한 심정으로 앉아 있는 흥수.

흥 수:(E) 아버지랑 같은 공간에 있기 싫어요. 아버지가 사회에서 겪는 약한 모습, 초라한 모습 다 보고 사는 아들, 아버지 존경하기 힘들어요. 저도 다른 애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진 :땅 꺼지겠다.

흥 수:(본다.)

진 :(옆에 앉으며) 무슨 고민 있어?

흥 수:…….

진 :내가 맞혀 볼까?

흥 수:네가 점쟁이냐?

진 :어떻게 알았냐? 맞아, 나 점 볼 줄 알거든. 집시한테 배운 적 있어.

흥 수:너 말야, 내가 너한테 잠깐의 실수로 라이프 스토리의 일부를 들켰다고 해서 날 전부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나 본데, 오버 하지 마.

진 :(웃으며 가져온 봉투를 내민다.)

흥 수:이게 뭐야?

진 :어제 내가 만든 빵. 먹어 보라고.

흥 수:너나 실컷 먹어.

진 :이거 그냥 빵이 아닌데?

흥 수:? (보면)

진 :미국 차이나타운에 가면 후식으로 빵을 주는 데가 있거든? 근데 빵을 쪼개 보면 그 안에 점괘가 들어 있어. 재밌지?

흥 수:(피식 웃으며) 그래서. 이 안에는 점괘가 들어 있냐?

진 :아니. (씩 웃으며) 심장.

흥 수:? (보는)

장면 13 도서관(D)

자리를 잡고 앉는 흥수.

괜히 주위를 한 번 두리번거렸다가 슬쩍 봉투를 열어 본다.

서너 개의 빵과 종이 한 장이 들어 있다.

먼저, 종이를 펴서 보는 흥수. ?아버지를 위한 요리 10`선?이라고 적혀 있고, 간단한 조리 방법이 적혀 있다.

흥 수:…… !

흥수, 이번엔 빵을 하나 꺼내서 쪼개 본다.

안에서 돌돌돌 말린, 아주 작은 종이뭉치가 나온다.

묶여 있는 색실을 풀고 종이를 펴 보는 흥수의 모습 위로.

흥 수:(E) 옛날에 한 청년이 살았다. 청년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여인은 청년에게 별을 따다 달라고 말했다. 청년은 별을 따다 주었다. 여인은 청년에게 달을 따다 달라고 말했다. 청년은 달을 따다 주었다.

장면 14 흥수의 아파트 단지 앞(D)

주머니에 손을 꽂고 생각에 잠겨 걸어오고 있는 흥수.

흥 수:(E) 이제 청년이 더 이상 그녀에게 줄 것이 없게 되었을 때, 여인이 말했다. 네 부모님의 심장을 꺼내 와…….

장면 15 흥수의 방 (D)

방문 열고 들어서는 흥수.

가방 내려놓다가 멈칫하는 흥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새 컴퓨터!

흥 수:(E) 많은 고민과 갈등을 했지만 결국 청년은 부모님의 가슴 속에서 심장을 꺼냈다.

흥 수:……. (어쩐지 찡해져서 컴퓨터를 가만히 만져 보는)

장면 16 광도의 거실(D)

흥수,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있다.

흥 수:(전화 착신되면) 나, 박흥수다. (좀 쑥스러운) 그 뭐냐……. 아, 아버지를 위한 요리말인데, 큼큼…… 버, 버섯전골 끓이는 방법 좀 자세히 말해 봐.

장면 17 광도의 주방(N)

흥수, 앞치마 두르고 요리하고 있다.

식탁 위에는 오만 가지 재료와 기구들이 펼쳐져 있다.

흥수, 연습장에 받아 적은 버섯전골 만드는 법을 봐 가며 열심히 따라 하고 있다. 이 때 밖에서 문 열리는 소리 들린다.

흥수, 나간다.

장면 18 광도의 거실(N)

들어서는 광도.

흥 수:다녀오셨어요?

광 도:그래. (했다가 흥수의 앞치마 보고)?

흥 수:(어색해서) 시, 식사 안 하셨죠?

장면 19 광도의 주방(N)

식탁 중앙에 놓이는, 아직 보글보글 끓고 있는 버섯전골 냄비.

광 도:(벙 쪄서 보고)

흥 수:…… 드, 드세요.

광 도:(비식 새어나오는 웃음) 네가 끓였냐?

흥 수:보, 볼품은 없어 보여도 맛은 있어요.

광 도:하하……, 나 참……. (좋아서) 이걸 정말 네가 끓였단 말야?

흥 수:……. (보는)

광 도:오래 살고 볼 일이다.

흥 수:먹고 살 좀 찌세요. 대충대충 먹으니까 그런 가난한 병에 걸리는 거 아니에요. 남세스럽게 결핵이 뭐예요, 결핵이…….

광 도:……. (기특해서 보다가) 박흥수.

흥 수:(안 보고) 왜요.

광 도:안주도 있는데 술 한 잔 하자.

흥 수:하세요. 언제 허락받고 하셨어요?

광 도:기분 좋다, 그치?

흥 수:헤헤. 네, 꼭 크리스마스 같아요 그쵸?

광 도:그러고 보니 또 그런 것도 같네. 그런 의미에서 건배하자.

흥 수:좋습니다. (건배하고 몸 돌려 마신다.)

광 도:아들놈한테 버섯전골도 얻어 먹고, 이렇게 술도 같이 하고, 좋다!

흥 수:…… (보다가) 아부지!

광 도:왜 불러 !

흥 수:(벌떡 일어나서 꾸벅 인사하며) 컴퓨터, 고맙슴다. 그리고요……. (다시 고개 푹 숙여 인사하며) 죄송함다…….

광 도:…… ? (보는)

흥 수:정말…… 죄송함다…….

광 도:…….

흥 수:……. 한 때 아부지가 부끄러웠슴다. 힘도 없고, 능력도 없어 보여서, 내가 커 가는 만큼 아버지가 작게 보여서……. 애들이 아부지 욕할 때마다 내가 아부지 아들인게 부끄러워서 같이 욕했던 적도 있었슴다.

광 도:…….

흥 수:정말 죄송함다……. 그리고…… 아프지 말고 건강하심 좋겠슴다.

광 도:…… (찡해져서) 박흥수.

흥 수:네.

광 도:이 아버진 말이다……, 네가 참 고맙다.

흥 수 …….

광 도:늘 맑아서, 늘 건강하게 웃어 줘서, 삐딱선 안 타고 버텨 줘서, 이럴 때 이렇게 말해 줄 수 있어서 참 고맙다…….

흥 수:…… 이렇게 이쁜 아들을 다 두고, 아버진 성공한 인생이심다.

광 도:맞다. 성공한 인생이다. (기분 좋게 웃는다.)

흥 수:……. (짠 해져서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위로)

흥 수:(E) 청년은 부모님의 심장을 들고 뛰기 시작했다. 오직 그녀와 함께 할 자신의 행복을 생각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장면 19 광도의 아파트 외경(N)

늦은 밤. 기분 좋게 취한 광도와 흥수의 노랫소리.

가끔 광도가 음정이 틀리면 ?아, 그게 아니잖아요.? 구박하는 흥수의 소리. ?제대로 했는데 뭘 그래 임마.? 반발하는 광도의 소리.

흥 수:(E) 청년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청년의 손에서 심장이 빠져 나갔다. 언덕을 굴러 내려간 심장을 다시 주워 왔을 때, 흙투성이가 된 심장이 이렇게 말했다. 얘야……, 많이 다치지 않았니?

장면 20 프롤로그(D)

(S# 2의 약수터 신)

남학생:(모자를 써서 얼굴은 잘 안 보이는) 네, 여기. (컵 건네 주고 한쪽으로 가서 몸풀며 운동하는)

흥 수:이건 직무 유기에 책임 회피라고요! 전 분명히 저번 주에 식사 당번 끝냈고, 이번 주는 분명히 아버지가 당번이시잖아요!

4단원

⑴ 민족 문화의 전통과 계승

-출전 : KBS 방송극, ?학교 Ⅱ?

이 기 백(李基白)

1

우리는 대체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서양식(西洋式)으로 꾸미고 있다. ?목은 잘라도 머리털은 못 자른다.?고 하던 구한말(舊韓末)의 비분 강개(悲憤慷慨)를 잊은 지 오래다. 외양(外樣)뿐 아니라, 우리가 신봉(信奉)하는 종교(宗敎), 우리가 따르는 사상(思想), 우리가 즐기는 예술(藝術), 이 모든 것이 대체로 서양적(西洋的)인 것이다. 우리가 연구하는 학문(學問) 또한 예외가 아니다. 피와 뼈와 살을 조상(祖上)에게서 물려받았을 뿐, 문화(文化)라고 일컬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서양(西洋)에서 받아들인 것들인 듯싶다. 이러한 현실(現實)을 앞에 놓고서 민족 문화의 전통(傳統)을 찾고 이를 계승(繼承)하자고 한다면, 이것은 편협(偏狹)한 배타주의(排他主義)나 국수주의(國粹主義)로 오인(誤認)되기에 알맞은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그러면 민족 문화의 전통을 말하는 것은 반드시 보수적(保守的)이라는 멍에를 메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 문제(問題)에 대한 올바른 해답(解答)을 얻기 위해서는, 전통이란 어떤 것이며, 또 그것은 어떻게 계승되어 왔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너무도 유명한 영․정조 시대(英正祖時代) 북학파(北學派)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지은 ?열하일기(熱河日記)?나 ?방경각외전(放믐흖脣??에 실려 있는 소설이, 몰락하는 양반 사회(兩班社會)에 대한 신랄(辛辣)한 풍자(諷刺)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문장(文章)이 또한 기발(奇拔)하여, 그는 당대(當代)의 허다한 문사(文士)들 중에서도 최고봉(最高峰)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추앙(推仰)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문학(文學)은 패관 기서(稗官奇書)를 따르고 고문(古文)을 본받지 않았다 하여, 하마터면 ?열하일기?가 촛불의 재로 화할 뻔한 아슬아슬한 장면이 있었다. 말하자면, 연암은 고문파(古文派)에 대한 반항(反抗)을 통하여 그의 문학을 건설(建設)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민족 문화의 전통을 연암에게서 찾으려고는 할지언정, 고문파에서 찾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민족 문화의 전통에 관한 해명(解明)의 열쇠를 제시(提示)하여 주는 것은 아닐까?

전통은 물론 과거로부터 이어 온 것을 말한다. 이 전통은 대체로 그 사회 및 그 사회의 구성원(構成員)인 개인(個人)의 몸에 배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전통은 우리의 현실에 작용(作用)하는 경우(境遇)가 있다. 그러나 과거에서 이어 온 것을 무턱대고 모두 전통이라고 한다면, 인습(因襲)이라는 것과의 구별(區別)이 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인습을 버려야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계승(繼承)해야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에서 이어 온 것을 객관화(客觀化)하고, 이를 비판(批判)하는 입장에 서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 비판을 통해서 현재(現在)의 문화 창조(文化創造)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우리는 전통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같이, 전통은 인습과 구별될 뿐더러, 또 단순한 유물(遺物)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현재에 문화 창조와 관계가 없는 것을 우리는 문화적 전통이라고 부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의미에서는 고정 불변(固定不變)의 신비(神秘)로운 전통이라는 것이 존재(存在)한다기보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전통을 찾아 내고 창조(創造)한다고도 할 수가 있다. 따라서, 과거에는 훌륭한 문화적 전통의 소산(所産)으로 생각되던 것이, 후대(後代)에는 버림을 받게 되는 예도 또한 허다하다. 한편, 과거에는 돌보아지지 않던 것이 후대에 높이 평가(評價)되는 일도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연암의 문학은 바로 그러한 예인 것이다. 비단, 연암의 문학만이 아니다. 우리가 현재 민족 문화의 전통과 명맥(命脈)을 이어 준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의 모두가 그러한 것이다. 신라(新羅)의 향가(鄕歌), 고려(高麗)의 가요(歌謠), 조선 시대(朝鮮時代)의 사설시조(辭說詩調), 백자(白瓷), 풍속화(風俗畵) 같은 것이 다 그러한 것이다.

3

한편, 우리가 계승(繼承)해야 할 민족 문화의 전통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연암의 예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과거의 인습을 타파(打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노력(努力)의 결정(結晶)이었다는 것은 지극히 중대한 사실이다.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과정(創製過程)에서 이 점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만일, 세종(世宗)이 고루(固陋)한 보수주의적(保守主義的) 유학자(儒學者)들에게 한글 창제의 뜻을 굽혔던들, 우리 민족 문화의 최대 걸작품(最大傑作品)이 햇빛을 못 보고 말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원효(元曉)의 불교 신앙(佛敎信仰)이 또한 그러하다. 원효는 당시의 유행(流行)인 서학(西學, 당나라 유학)을 하지 않았다. 그의 ?화엄경소(華嚴經疎)?가 중국(中國) 화엄종(華嚴宗)의 제3조(第三祖) 현수(賢首)가 지은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의 본이 되었다. 원효는 여러 종파(宗派)의 분립(分立)이라는 불교계(佛敎界)의 인습에 항거(抗拒)하고, 여러 종파의 교리(敎理)를 통일(統一)하여 해동종(海東宗)을 열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승려(僧侶)들이 귀족(貴族) 중심의 불교(佛敎)로 만족할 때에 스스로 마을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배움 없는 사람들에게 전도(傳道)하기를 꺼리지 않은, 민중 불교(民衆佛敎)의 창시자(創始者)였다. 이러한 원효의 정신은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귀중한 재산(財産)이 아닐까?

겸재(謙齋) 정선(鄭敾)이나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혹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의 그림에서도 이런 정신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은 화보 모방주의(畵譜模倣主義)의 인습에 반기(反旗)를 들고, 우리 나라의 정취(情趣)가 넘치는 자연(自然)을 묘사(描寫)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산수화(山水畵)나 인물화(人物畵)에 말라붙은 조선 시대의 화풍(畵風)에 항거(抗拒)하여, ?밭 가는 농부(農夫)?, ?대장간 풍경(風景)?, ?서당(書堂)의 모습?, ?씨름하는 광경(光景)?, ?그네 뛰는 아낙네? 등 현실 생활(現實生活)에서 제재(題材)를 취한 풍속화(風俗畵)를 대담(大膽)하게 그렸다. 이것은 당시에는 혁명(革命)과도 같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들의 그림이 민족 문화의 훌륭한 유산(遺産)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 민족 문화의 전통은 부단(不斷)한 창조 활동(創造活動) 속에서 이어 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계승(繼承)해야 할 민족 문화의 전통은 형상화(形象化)된 물건(物件)에서 받는 것도 있지만, 한편 창조적(創造的) 정신 그 자체(自體)에도 있는 것이다.

4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 문화의 전통을 무시(無視)한다는 것은 지나친 자기 학대(自己虐待)에서 나오는 편견(偏見)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첫머리에서 제기(提起)한 것과 같이, 민족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자는 것이 국수주의(國粹主義)나 배타주의(排他主義)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왕성(旺盛)한 창조적 정신은 선진 문화(先進文化) 섭취(攝取)에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새로운 민족 문화의 창조(創造)가 단순한 과거의 묵수(黙守)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또 단순한 외래 문화(外來文化)의 모방(模倣)도 아닐 것임은 스스로 명백한 일이다. 외래 문화도 새로운 문화의 창조에 이바지함으로써 뜻이 있는 것이고, 그러함으로써 비로소 민족 문화의 전통을 더욱 빛낼 수가 있는 것이다.

⑵ 눈 길

이 청 준(李淸俊)

1

?내일 아침 올라가야겠어요.?

점심상을 물러나 앉으면서 나는 마침내 입 속에서 별러 오던 소리를 내뱉어 버렸다. 노인과 아내가 동시에 밥숟가락을 멈추며 나의 얼굴을 멀거니 건너다 본다.

?내일 아침 올라가다니. 이참에도 또 그렇게 쉽게??

노인은 결국 숟가락을 상 위로 내려놓으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묻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내친걸음이었다. 어차피 일이 그렇게 될 바엔 말이 나온 김에 매듭을 분명히 지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네, 내일 아침에 올라가겠어요. 방학을 얻어 온 학생 팔자도 아닌데, 남들 일할 때 저라고 이렇게 한가할 수가 있나요. 급하게 맡아 놓은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고요.?

?그래도 한 며칠 쉬어 가지 않고……. 난 해필 이런 더운 때를 골라 왔길래 이참에는 며칠 좀 쉬어 갈 줄 알았더니…….?

?제가 무슨 더운 때 추운 때를 가려 살 여유나 있습니까.?

?그래도 그 먼 길을 이렇게 단걸음에 되돌아가기야 하겄냐. 넌 항상 한동자로만 왔다가 선걸음에 새벽길을 나서곤 하더라마는……. 이번에는 너 혼자도 아니고……. 하룻밤이나 차분히 좀 쉬어 가도록 하거라.?

?오늘 하루는 쉬었지 않아요. 하루를 쉬어도 제 일은 사흘을 버리는 걸요. 찻길이 훨씬 나아졌다곤 하지만 여기선 아직도 서울이 천릿길이라 오는 데 하루, 가는 데 하루…….?

?급한 일은 우선 좀 마무리를 지어 놓고 오지 않구선…….?

노인 대신 이번에는 아내 쪽에서 나를 원망스럽게 건너다 보았다. 그건 물론 나의 주변머리를 탓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내게 그처럼 급한 일이 없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서울을 떠나올 때 급한 일들은 미리 다 처리해 둔 것을 그녀에게는 내가 말을 해 줬으니까. 그리고 이번에는 좀 홀가분한 기분으로 여름 여행을 겸해 며칠 동안이라도 노인을 찾아보자고 내 편에서 먼저 제의를 했었으니까. 그녀는 나의 참을성 없는 심경의 변화를 나무라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매정스런 결단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었다. 까닭 없는 연민과 애원기 같은 것이 서려 있는 그녀의 눈길이 그것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래, 일이 그리 바쁘다면 가 봐야 하기는 하겠구나. 바쁜 일을 받아 놓고 온 사람을 붙잡는다고 들을 일이겄나.?

한동안 입을 다물고 앉아 있던 노인이 마침내 체념을 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항상 그렇게 바쁜 사람인 줄은 안다마는, 에미라고 이렇게 먼 길을 찾아와도 편한 잠자리 하나 못 마련해 주는 내 맘이 아쉬워 그랬던 것 같구나.?

말을 끝내고 무연스런 표정으로 장죽 끝에 풍년초를 꾹꾹 눌러 담기 시작한다.

너무도 간단한 체념이었다.

담배통에 풍년초를 눌러 담고 있는 그 노인의 얼굴에는 아내에게서와 같은 어떤 원망기 같은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신 곁을 조급히 떠나고 싶어하는 그 매정스런 아들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도 엿볼 수가 없었다.

성냥불도 붙이려 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 풍년초 담배만 꾹꾹 눌러 채우고 앉아 있는 눈길은 차라리 무표정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는 그 너무도 간단한 노인의 체념에 오히려 불쑥 짜증이 치솟았다.

나는 마침내 자리를 일어섰다. 그리고는 그 노인의 무표정에 밀려나기라도 하듯 방문을 나왔다.

장지문 밖 마당가에 작은 치자나무 한 그루가 한낮의 땡볕을 견디고 서 있었다.

2

지열이 후끈거리는 뒤꼍 콩밭 한가운데에 오리나무 무성한 묘지가 하나 있었다. 그 오리나무 그늘에 숨어 앉아 콩밭 아래로 내려다보니 집이라고 생긴 게 꼭 습지에 돋아 오른 여름 버섯 형상을 닮아 있었다.

나는 금세 어디서 묵은 빚 문서라도 불쑥 불거져 나올 것 같은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애초의 허물은 그 빌어먹을 비좁고 음습한 단칸 오두막 때문이었다. 묵은 빚이 불거져 나올 것 같은 불편스런 기분이 들게 해 오는 것도 그랬고, 처음 예정을 뒤바꿔 하루만에 다시 길을 되돌아갈 작정을 내리게 한 것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내게 빚은 없었다. 노인에 대해선 처음부터 빚이 있을 수 없는 떳떳한 처지였다. 노인도 물론 그 점에 대해선 나를 완전히 신용하고 있었다.

?내 나이 일흔이 다 됐는디, 이제 또 남은 세상이 있으면 얼마나 길라더냐.?

이가 완전히 삭아 없어져서 음식 섭생이 몹시 불편스러워진 노인을 보고 언젠가 내가 지나가는 말처럼 권해 본 일이 있었다. 싸구려 가치라도 해 끼우는 게 어떻겠느냐는 나의 말 선심에 애초부터 그래 줄 가망이 없어 보여 그랬던지 노인은 단자리에서 사양을 해 버리는 것이었다.

?이럭저럭 지내다 이대로 가면 그만일 육신, 이제 와 늘그막에 웬 딴 세상을 보겄다고…….?

한 번은 또 치질기가 몹시 심해져서 배변이 무척 힘들어하시는 걸 보고 수술 같은 걸 권해 본 일도 있었다. 노인은 그 때도 역시 비슷한 대답이었다.

?나이를 먹어도 아녀자는 아녀자다. 어떻게 남의 눈에 궂은 데를 보이겄더냐. 그냥저냥 참다 갈란다.?

남은 세상이 얼마 길지 못하리라는 체념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그보다 노인은 아무것도 아들에겐 주장하거나 돌려받을 것이 없는 당신의 처지를 감득하고 있는 탓에도 그리 된 것이었다.

고등 학교 1`학년 때 형의 주벽으로 가계가 파산을 겪은 뒤부터, 그리고 마침내 그 형이 세 조카아이와 그 아이들의 홀어머니까지를 포함한 모든 장남의 책임을 내게 떠맡기고 세상을 떠난 뒤부터 일은 줄곧 그렇게만 되어 온 셈이었다. 고등 학교와 대학교와 군영 3년을 치러 내는 동안 노인은 내게 아무것도 낳아 기르는 사람의 몫을 못 했고, 나는 또 나대로 그 고등 학교와 대학과 군영의 의무를 치르고 나와서도 자식놈의 도리는 엄두를 못 냈다. 노인이 내게 베푼 바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럴 처지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대로 형이 내게 떠맡기고 간 장남의 책임을 감당하기를 사양치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인과 나는 결국 그런 식으로 서로 주고받을 것이 없는 처지였다. 노인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대해선 소망도 원망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런 노인이었다. 한데 이번에는 웬일인지 노인의 눈치가 이상했다. 글쎄 그 가치나 수술마저 한사코 사양을 해 온 노인이, 나이 여든에서 겨우 두 해가 모자란 늘그막에 와서야 새삼스레 다시 딴 세상 희망이 생긴 것일까.

노인은 아무래도 엉뚱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꿈이었다. 지붕 개량 사업이 애초의 허물이었다.

?집집마다 모두 도단 아니면 기와들을 얹는단다.?

노인은 처음 남의 말을 하듯이 집 이야기를 꺼냈었다. 어제 저녁때 노인과 셋이서 잠자리를 들기 전이었다. 밤이 이슥해서 형수는 뒤늦게 조카들을 데리고 이웃집으로 잠자리를 얻어 나가 버리고, 우리는 노인과 셋이서 그 비좁은 오두막 단칸방에다 잠자리를 함께 폈다.

?어기영차! 어기영…….?

그 때 어디선가 밤일을 하는 남정들의 합창 소리가 왁자하게 부풀어올랐다.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다가 무슨 소리냐니까 노인이 문득 생각난 듯이 귀띔을 해 왔다.

?동네가 너도나도 집들을 고쳐 짓느라 밤잠을 안 자고 저 야단들이구나.?

농어촌 지붕 개량 사업이라는 것이었다. 통일벼가 보급된 후로는 집집마다 그 초가 지붕 개초가 어렵게 되었단다. 초봄부터 시작된 지붕 개량 사업은 그래저래 제격이었다. 지붕을 개량하면 정부 보조금 5만 원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모심기가 시작되기 전 봄철 한때 하고 모심기가 끝난 초여름께부터 지금까지 마을 집들 거의가 일을 끝냈단다.

나는 처음 그런 노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턱대고 가슴부터 덜렁 내려앉고 있었다. 노인에 대한 빚 생각이 처음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이었다. 이 노인이 쓸데없는 소망을 지니면 어쩌나. 하지만 나는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무엇보다도 나는 노인에 대해서 빚이란 게 없었다. 노인이 그걸 잊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아들에게 섣부른 주문을 내색할 리 없었다. 전부터도 그 점만은 안심을 할 만한 노인의 성깔이었다. 한데다가 그 노인이 설령 어떤 어울리잖을 소망을 지닌다 해도 이번에는 그 집 꼴이 문제 밖이었다. 도대체가 기와고 도단이고 지붕을 가꿀 만한 집 꼴이 못 되었다. 그래저래 노인도 소망을 지녀 볼 엄두를 못 낸 모양이었다. 이야기하는 말투가 영락없이 남의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오해였다. 노인의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관에서 하는 일이라면 이 집에도 몇 번 이야기가 있었겠군요??

사태를 너무 낙관한 나머지 위로 겸해 한 마디 실없는 소리를 내놓은 것이 나의 실수였다.

노인은 다시 자리를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머리맡에 놓아 둔 장죽 끝에다 풍년초 한 줌을 쏘아 박기 시작했다.

?왜 우리 집이라 말썽이 없었더라냐.?

노인은 여전히 남의 말을 옮기듯 덤덤히 말했다.

?이장이 쫓아와 뜸을 들이고, 면에서 나와서 으름장을 놓고 가고……. 그런 일이 한두 번뿐이었으면야……. 나중엔 숫제 자기들 쪽에서 사정조로 나오더라.?

?그래 어머닌 뭐라고 우겼어요??

나는 아직도 노인의 진심을 모르고 있었다.

?우길 것도 뭣도 없는 일 아니겄냐. 지놈들도 눈깔이 제대로 박힌 인간들인 것인디……. 사정을 해 오면 나도 똑같이 사정을 했더니라. 늙은이도 사람인디 나라고 어디 좋은 집 살고 싶은 맘이 없겄소. 맘으로야 천번 만번 우리도 남들같이 기와도 입히고 기둥도 갈아 내고 하고는 싶지만 이 집 꼴을 좀 들여다보시오들. 이 오막살이 흙집 꼴에다 어디 기와를 얹고 말 것이 있겄소…….?

?그랬더니요??

?그랬더니 몇 번 더 발길을 스쳐 가더니 그 담엔 흐지부지 말이 없더라. 지놈들도 이 집 꼴을 보면 사정을 모를 청맹과니들이라더냐??

노인은 그 거칠고 굵은 엄지손가락 끝으로 뜨거운 장죽 끝을 눌러 대고 있었다.

?그 친구들 아마 이 동네를 백 퍼센트 지붕 개량으로 모범 마을을 만들고 싶어 그랬던 모양이군요.?

나는 왠지 기분이 씁쓸하여 그런 식으로 그만 이야기를 얼버무려 넘기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결정적인 실수였다.

?하기사 그 사람들도 그런 소리들을 하더라. 오늘 밤일을 하고 있는 저 집을 끝내고 나면 이제 이 동네에서 지붕 개량을 안 한 집은 우리하고 저 아랫동네 순심이네 두 집밖엔 안 남는다니까 말이다.?

?그래도 동네 듣기 좋은 모범 마을 만들자고 이런 집에까지 꼭 기와를 얹으라 하겠어요.?

?그래 말이다. 차라리 지붕에 기와나 도단만 얹으랬으면 우리도 두 눈 딱 감고 한번 저질러 보고 싶기도 하더라마는, 이런 집은 아예 터부터 성주를 다시 할 집이라 그렇제…….?

모범 마을이 꼬투리가 되어서 이야기가 다시 엉뚱한 곳으로 번지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다시 가슴이 섬짓해 왔다. 하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고 말았다.

?하기사 말이 쉬운 지붕 개량이제 알속은 실상 새 성주를 하는 집도 여러 집 된단다.?

한번 이야기를 꺼낸 노인이 거기서부터는 새삼 마을 사정을 소상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지붕 개량 사업이라는 것은, 알고 보니 사실 융통성이 꽤나 많은 일이었다. 원칙은 그저 초가 지붕을 벗기고 기와나 도단을 얹은 것이었지만, 기와의 하중을 견뎌 내기 위해선 기둥을 몇 개쯤 성한 것으로 갈아 넣어야 할 집들이 허다했다. 그걸 구실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주를 새로 하듯 집들을 터부터 고쳐 지어 버렸다. 노인에게도 물론 그런 권유가 여러 번 들어왔다. 기둥이 허술해서 기와를 못 얹는다는 건 구실일 뿐이었다.

허술한 기둥을 구실로 끝끝내 기와 얹기를 미뤄 온 집이 세 가구가 있었는데 이 날 밤에 또 한 집이 새 성주를 위해서 밤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노인이 기와 얹기를 단념한 것은 집 기둥이 너무 허약해서가 아니었다. 노인은 새 성주가 겁이 나 일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허술한 기둥만 믿을 수가 없었다. 일은 아직도 낙관할 수 없었다. 나는 불시에 다시 그 노인에 대한 나의 빚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노인도 거기서 한동안은 그저 꺼져 가는 장죽불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하더니 이윽고는 더 이상 소망을 숨기기가 어려운 듯 가는 한숨을 삼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그 한숨 끝에다 무심결인 듯 덧붙이고 있었다.

?이참에 웬만하면 우리도 여기다 방 한 칸쯤이나 더 늘여 내고 지붕도 도단으로 얹어 버리면 싶긴 하더라만…….?

마침내 노인이 당신의 소망을 내비친 것이었다.

?오늘 당할지 내일 당할지 모를 일이기는 하다만, 날짐승만도 못한 목숨이 이리 모질기만 하다 보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구나. 저런 옷궤 하나도 간수할 곳이 없어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치다 보면 어떤 땐 그저 일을 저질러 버리고 싶은 생각이 꿀떡 같아지기도 하고…….?

노인은 결국 그런 식으로 당신의 소망을 분명히 해 버리고 만 셈이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런 소망을 지녔던 것만은 분명히 한 것이다.

나는 이제 할 말이 없었다. 눈을 감은 채 듣고만 있었다. 노인에 대해선 빚이 없음을 골백번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면에서도 그냥 흐지부지 지나가 주더라만 내년엔 또 이번처럼 어떻게 잠잠해 주기나 할는지. 하기사 면 사람들 무서워 집을 고친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제. 늙은이 냄새가 싫어 그런지 그래도 한데서 등짝 붙이고 누울 만한 방 놔 두고 밤마다 남의 집으로 잠자릴 얻어 다니는 저것들 에미 꼴도 모른 체하지는 못할 일이니라.?

내가 아예 대꾸를 않으니까 노인은 이제 혼잣말 비슷이 푸념을 계속했다. 듣다 보니 그 노인의 머릿속엔 이미 꽤 구체적인 계획표까지 마련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라에서 보조금을 5만 원이나 내 주겄다, 일을 일단 저지르고 들었더라면 큰돈이야 얼마나 더 들 일이 있었을라더냐……. 남정네가 없어 남들처럼 일손을 구하기가 쉽진 못했겄지만 네 형수가 여름 한철만 밭을 매 주기로 했으면 건넛집 용석이 아배라도 그냥 모른 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흙일을 돌볼 사람은 그 용석이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고 기둥을 갈아 낼 나무 가대는 이장네 산에서 헐값으로 몇 개를 부탁해 볼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노인의 장죽 끝에는 이제 불기가 꺼져 식어 있었다. 노인은 연신 그 불이 꺼진 장죽을 빨아 대면서, 한사코 그 보조금 5만 원과 이웃의 도움이 아까워서라도 일을 단념하기가 아쉬웠다는 투였다.

하지만 노인은 그러면서도 끝끝내 내게 대한 주장이나 원망의 빛을 보이진 않았다. 이야기의 형식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로서 그런 생각을 해 봤을 뿐이고, 그럴 뻔했다는 말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나에 대해선 어떤 형식으로도 직접적인 부담감을 느끼게 하지 않으려는 식이었다. 말하는 목소리도 끝끝내 그 체념기가 짙은 특유의 침착성을 잃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다 소용 없는 일이다. 세상일이 그렇게 맘같이만 된다면야 나이 먹고 늙은 걸 설워 안 할 사람이 있을라더냐. 나이를 먹으면 애기가 된다더니 이게 다 나이 먹고 늙어 가는 노망기 한가지제.?

종당에는 그 당신의 은밀스런 소망조차도 당신 자신의 실없는 노망기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노인의 내심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한 마디 말참견도 없이 눈을 감고 잠이 든 체 잠잠히 누워만 있던 아내까지도 그것을 분명히 눈치채고 있었다.

?당신, 어젯밤 어머니 말씀에 그렇게밖에 응대해 드릴 방법이 없었어요??

오늘 아침 아내는 마당가로 세숫물을 떠 들고 나왔다가 낮은 소리로 추궁을 해 왔다. 그 때 나는 아내에게 그저 쓸데없는 참견 말라는 듯 눈매를 잔뜩 깎아 떠 보였었다. 아내는 그러는 나를 차라리 경멸조로 나무랐다.

?당신은 참 엉뚱한 데서 독해요. 늙은 노인네가 가엾지도 않으세요. 말씀이라도 좀더 따뜻하게 위로를 드릴 수 있었을 텐데 말예요.?

아내도 분명 노인의 말뜻을 알아듣고 있었다. 그리고 나보다도 노인의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노인에 대한 나의 속마음도 속속들이 모두 읽고 있는 게 당연했다. 내일 아침으로 서둘러 서울로 되돌아가겠노라는 나의 결정에 아내가 은근히 분개하고 나선 것도 그런 사연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다고 그년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수가 있는가.

어쨌든 노인이 이제라도 그 집을 새로 짓고 싶어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아무래도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닌게아니라 나이를 먹으면 노인들은 모두 어린애가 되어 가는 것일까. 노인은 정말로 내게 빚이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만 것일까. 노인의 말처럼 그건, 일테면 노망기가 분명했다. 그런 염치도 못 가릴 정도로 노인은 그렇게 늙어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노인의 그런 노망기를 원망할 필요도 없었다.

문제는 서로 간의 빚의 문제였다. 노인에 대해 빚이 없다는 사실만이 내게는 중요했다.

염치가 없어져서건, 노망을 해서건 노인에 대해 내가 갚아야 할 빚만 없으면 그만인 것이다.

── 빚이 있을 리 없지. 절대로! 글쎄 노인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정면으로는 말을 꺼내지 못하질 않던가 말이다.

어디선가 계속 무덥고 게으른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비로소 자신을 굳힌 듯 오리나무 그늘에서 몸을 힘차게 일으켜 세웠다. 콩밭 아래로 흘러 뻗은 마을이 눈 앞으로 멀리 펼쳐져 나갔다. 거기 과연 아직 초가 지붕을 이고 있는 건 노인네의 그 버섯 모양의 오두막과 아랫동네의 다른 한 채가 전부였다.

── 빌어먹을 ! 그 지붕 개량 사업인지 뭔지 하필 이런 때 법석들이지?

아무래도 심기가 편할 수는 없었다. 나는 공연히 그 지붕 개량 사업 쪽에다 애꿎은 저주를 보내고 있었다.

3

해가 훨씬 기운 다음에야 콩밭을 가로질러 노인의 집 뒤꼍으로 뜰을 들어서려다 보니, 아내는 결국 반갑지 않은 화제를 벌여 놓고 있었다.

?이 나이에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좋은 세상을 살겄다고 속없이 새 방 들이고 기와 지붕을 덮자겄냐. 집 욕심 때문이 아니라 나 간 뒷일이 안 놓여 그런다.?

뒤꼍에서 안뜰로 발길을 돌아 나서려는데, 장지문을 반쯤 열어 젖힌 안방에서 노인의 말소리가 도란도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날씨가 선선한 봄가을 철이나, 하다못해 마당에 채일(차일)이라도 치고들 지내는 여름철만 되더라도 걱정이 덜하겄다마는, 한겨울 추위 속에서나 운 사납게 숨이 딸깍 끊어져 봐라. 단칸방 아랫목에다 내 시신 하나 가득 늘여 놓으면 그 일을 어쩔 것이냐.?

이번에도 또 그 집에 관한 이야기였다. 노인을 어떻게 위로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아내는 노인의 소망을 더 이상 어떻게 외면할 수가 없도록 노골화시켜 버리고 싶은 것일까. 답답하게 눈치만 보고 도는 그 나에 대한 아내의 원망은 그토록 뿌리가 깊고 지혜로웠더란 말인가. 노인의 이야기는 아내가 거기까지 유도해 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노인은 이제 그 아내 앞에 당신의 집에 대한 소망을 분명한 목소리로 털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당신의 소망에 대한 솔직한 사연을 말하고 있었다. 노인의 그 오랜 체념이 습관과 염치를 방패삼아 어물어물 고비를 지나가려던 내 앞에 노인의 소망이 마침내 노골적인 모습을 드러내 온 것이었다. 노인의 소망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면 그렇게 분명한 대목까지는 만나게 될 줄을 몰랐던 일이었다.

나는 마치 마지막 희망이 무너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노인의 설명에는 나에게는 마침내 분명해진 것이 있었다. 노인이 갑자기 그 집에 대한 엉뚱한 소망을 지니게 된 당신의 내력이었다. 노인은 아직도 당신의 삶을 위해서는 새삼스런 소망을 지니지 않고 있었다. 노인의 소망은 당신의 사후에 내력이 있었다.

?떠돌아들어 살아오긴 했어도, 난 이 동네 사람들한테 못할 일은 한 번도 안 해 보고 살아온 늙은이다. 궂은 밥 먹고 궂은 옷 입고 궂은 잠자리 속에 말년을 보냈어도 난 이웃이나 이 동네 사람들한테 궂은 소리는 안 듣고 늙어 왔다. 이 소리가 무슨 소린고 하니 나 죽고 나면 그래도 이 동네 사람들, 이 늙은이 주검 위에 흙 한 삽, 뗏장 한 장씩은 덮어 주러 올 거란 말이다. 늙거나 젊거나 그렇게 내 혼백 들여다봐 주러 오는 사람들을 어찌할 것이냐. 사람은 죽어 이웃이 없는 것보다 더 고단한 것도 없는 법인디, 오는 사람 마다할 수 없고 가난하게 간 늙은이가 죽어서라도 날 들여다봐 주러 오는 사람들한테 쓴 소주 한 잔 대접해 보내고 싶은 게 죄가 될 거나. 그래서 그저 혼자서 궁리해 본 일이란다. 숨 끊어지는 날 바로 못 내다 묻으면 주검하고 산 사람들이 방 하나뿐 아니냐. 먼 데서 온 느그들도 그렇고……. 그래서 꼭 찬바람이나 막고 궁둥이 붙여 앉을 방 한 칸만 어떻게 늘여 봤으면 했더니라마는……, 그게 어디 맘 같은 일이더냐. 이도 저도 다 늙고 속없는 늙은이 노망길 테이제…….?

노인의 소망은 바로 그 당신의 죽음에 대한 대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알 만한 노릇이었다. 살림이 망쪼나고 옛 살던 동네를 나와 떠돌기 시작하면서부터 언제나 당신의 죽음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 해 오지 않던 노인이었다. 동네 뒷산 양지바른 언덕 아래다 마을 영감 한 분에게 당신의 집터(노인은 당신의 무덤 자리를 늘 그렇게 말했다.)를 미리 얻어 놓고 겨울철에도 날씨가 좋으면 그 곳을 찾아가 햇볕 바래기를 하다가 내려온다던 노인이었다. 노인은 이제 당신의 죽음에 마지막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더 노인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발길을 움직여 소리 없이 자리를 피해 버리고 싶었다. 한데 그 때였다. 쓸데없는 일에 공연히 감동을 잘 하는 아내가 아무래도 견딜 수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전에 사시던 집은 터도 넓고 칸 수도 많았다면서요??

아내가 느닷없이 화제를 바꾸고 나섰다. 별달리 노인을 달랠 말이 없으니까, 지나간 일이나마 그렇게 넓게 살던 옛집의 기억을 상기시켜서라도 노인을 위로하고 싶어진 것이리라. 그것은 노인도 한때 번듯한 집 살림을 해 온 기억을 되돌이키게 해서 기분을 바꿔 드리고 싶어서이기도 했겠지만, 그 외에도 그것은 또 언제나 가난한 살림만을 보고 가게 하는 부끄러운 며느리 앞에 당신의 자존심을 얼마간이나마 되살려 내게 할 가외의 효과도 있을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당분간 다시 자리를 피할 필요가 없어지고 있었다.

?옛날 살던 집이야, 크고 넓었제. 다섯 칸 겹집에다 앞뒤 터가 운동장이었더니라.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남의 집 된 지가 20년이 다 된 것을…….?

?그래도 어머님은 한때 그런 좋은 집도 살아 보셨으니 추억은 즐거운 편이 아니시겠어요? 이 집이 답답하고 짜증나실 땐 그런 기억이라도 되살려 보세요.?

?기억이나 되살려서 어디다 쓰게야. 새록새록 옛날 생각이 되살아나다 보면 그렇지 않아도 심사가 어지러운 것을.?

?하긴 그것도 그러실 거예요. 그렇게 넓은 집에 사셨던 생각을 하시면 지금 사시는 형편이 더 짜증스러워지기도 하시겠죠. 뭐니뭐니 해도 지금 형편이 이렇게 비좁은 단칸방 신세가 되고 마셨으니 말씀예요.?

노인과 아내는 잠시 그렇게 위론지 넋두린지 분간이 가지 않는 소리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오가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는 그 아내의 동기가 다시 조금씩 의심스러워지고 있었다. 아내의 말투는 그저 노인을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노인을 위로해 드리기는커녕 심기만 점점 더 불편스럽게 하고 있었다. 노인에게 옛집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은 당신의 불편스런 심기를 주저앉히기보다 오늘을 더욱더 비참스럽게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집을 고쳐 짓고 싶은 그 은밀스런 소망을 자꾸만 밖으로 후벼 대고 있었다. 아내의 목적은 차라리 그 쪽에 있었던 것 같았다. 아내에 대한 나의 판단은 과연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방이 이렇게 비좁은데 그럼 어머니, 이 옷장이라도 어디 다른 데로 좀 내놓을 수 없으세요? 이 옷장을 들여놓으니까 좁은 방이 더 비좁지 않아요.?

아내는 마침내 내가 가장 거북스럽게 시선을 피해 오던 곳으로 화제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바로 그 옷궤 이야기였다.

17, 8년 전, 고등 학교 1`학년 때였다. 술버릇이 점점 사나워져 가던 형이 전답을 팔고 선산을 팔고, 마침내는 그 아버지 때부터 살아 온 집까지 마지막으로 팔아 넘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K`시에서 겨울 방학을 보내고 있던 나는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아보고 싶어 옛 살던 마을을 찾아가 보았다. 집을 팔아 버렸으니 식구들을 만나게 될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달리 소식을 알아볼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스름을 기다려 살던 집 골목을 들어서니 사정은 역시 K`시에서 듣고 온 대로였다.

집은 텅텅 비어진 채였고 식구들은 어디론지 간 곳이 없었다. 나는 다시 골목 앞에 살고 있던 먼 친척간 누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누님의 말을 들으니, 노인이 뜻밖에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가 어디냐. 네가 누군디 내 집 앞 골목을 이렇게 서성대고 있어야 하더란 말이냐.?

한참 뒤에 어디선가 누님의 소식을 듣고 달려 온 노인이 문간 앞에서 어정어정 망설이고 있는 나를 보고 다짜고짜 나무랐다. 행여나 싶은 마음으로 노인을 따라 문간을 들어섰으나 집이 팔린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 날 밤 노인은 옛날과 똑같이 저녁을 지어 내왔고, 거기서 하룻밤을 함께 지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일찍 K`시로 나를 다시 되돌려 보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노인은 거기서 마지막으로 내게 저녁밥 한 끼를 지어 먹이고 당신과 하룻밤을 재워 보내고 싶어, 새 주인의 양해를 얻어 그렇게 혼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내가 다녀갈 때까지는 내게 하룻밤만이라도 옛집의 모습과 옛날의 분위기 속에 자고 가게 해 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문간을 들어설 때부터 집안 분위기는 이사를 나간 빈 집이 분명했었다. 한데도 노인은 그 때까지 매일같이 그 빈 집을 드나들며 먼지를 털고 걸레질을 해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때 노인은 아직 집을 지켜 온 흔적으로 안방 한쪽에다 이불 한 채와 옷궤 하나를 예대로 그냥 남겨 두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K 시로 다시 길을 나설 때서야 비로소 집이 팔린 사실을 시인해 온 노인의 심정으로는 그 날 밤 그 옷궤 한 가지나마 옛집 살림살이의 흔적으로 남겨서 나의 괴로운 잠자리를 위로하고 싶었음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러한 내력이 숨겨져 온 옷궤였다.

떠돌이 살림에 다른 가재 도구가 없어서도 그랬겠지만, 이 20년 가까이를 노인이 한사코 함께 간직해 온 옷궤였다. 그만큼 또 나를 언제나 불편스럽게 만들어 온 물건이었다. 노인에게 빚이 없음을 몇 번씩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가도 그 옷궤만 보면 무슨 액면가 없는 빚 문서를 만난 듯 기분이 새삼 꺼림칙스러워지곤 하던 물건이었다.

이번에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노인의 방을 들어선 순간에 벌써 기분을 불편스럽게 해 오던 옷궤였다. 그리고 끝내는 이틀 밤을 못 넘기고 길을 다시 되돌아갈 작정을 내리게 한 것도 알고 보면 바로 그 옷궤의 허물이 컸을지 모른다.

아내도 물론 그 옷궤에 관한 내력을 내게서 들을 만큼 듣고 있었다. 아내가 옷궤의 내력을 알고 있는 여자라면, 그 옷궤에 관한 나의 기분도 짐작을 못할 그녀가 아니었다. 더욱이 내가 바깥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걸 알고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나는 어느 새 그 콧속을 후비는 못된 버릇이 되살아날 만큼 긴장을 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갑자기 묵은 빚 문서가 튀어나올 것 같은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노인이 치사하게 그 묵은 빚 문서로 나를 궁지에 몰아 넣으려 덤빌 수도 있었다.

── 그래 보라지. 누가 뭐래도 내겐 절대로 빚진 게 없으니까. 그래 본들 없는 빚이 생길 리가 있을라구.

나는 거의 기도를 드리듯 눈을 감고 기다렸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도 그 무심스러워 보이기만 한 노인의 대꾸였다.

?옷궤를 내 놓으면 몸에 걸칠 옷가지는 다 어디다 간수하고야? 어디다 따로 내놓을 데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걸 어디다 내놓을 데가 생긴다고 해도 그것 말고는 옷가지 나부랑일 간수해 둘 데는 있어얄 것 아니냐.?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노인은 그리 그 옷궤 쪽에는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옷이야 어떻게 못을 박아 걸더라도, 사람이 우선 좀 발이라도 뻗고 누울 자리가 있어야잖아요. 이건 뭐 사람보다도 옷장을 모시는 꼴이지 뭐예요.?

아내는 거의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옷궤에 대한 노인의 집착심을 시험해 보기 위한 수작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노인의 반응은 여전히 의연했다.

?그건 네가 모르는 소리다. 그 옷궤라도 하나 없으면 이 집을 누가 사람 사는 집이라 할 수 있겄냐. 사람 사는 집 흔적으로 해서라도 그건 집 안에 지녀야 할 물건이다.?

?어머님은 아마 저 옷장에 그럴 만한 사연이 있으신가 보군요. 시집 오실 때 해 오신 건가요??

노인의 나이가 너무 높다 보니 아내는 때로 그 노인 앞에 손주딸처럼 버릇이 없어지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숫제 장난기 한가지였다.

?내력은 무슨…….?

노인은 이제 그것으로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옷궤 이야기는 더 이상 들추고 싶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내도 이젠 그쯤에서 호락호락 물러설 여자가 아니었다. 노인이 입을 다물어 버리자 아내도 그만 거기서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더니 이윽고는 다시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하긴 어쨌거나 어머님 마음이 편하진 못하시겠어요. 뭐니뭐니 해도 옛날에 사시던 집을 지켜 오시는 게 최선이었는데 말씀예요. 도대체 그 집은 어떻게 해서 팔리게 되었어요??

다시 그 집 얘기였다. 그 역시 모르고 묻는 소리가 아니었다. 아내는 그 옷궤의 내력과 함께 집이 팔리게 된 사정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있었다. 하면서도 그녀는 다시 노인에게 그것을 되풀이시키려 하고 있었다. 옷궤를 구실로 그 노인의 소망을 유인해 내려는 그녀 나름의 노력의 연장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태도도 아직은 아내에 못지 않게 끈질긴 데가 있었다.

?집이 어떻게 팔리기는……. 안 팔아도 좋은 집을 장난삼아서 팔았을라더냐. 내 집 지니고 살 팔자가 못 돼 그리 된 거제…….?

알고도 묻는 소릴 노인은 또 노인대로 내력을 얼버무려 넘기려고 하였다.

?그래도 사정은 있었을 게 아녜요? 그 집을 지을 때 돌아가신 아버님이 몹시 고생을 하셨다고 하던데요.?

?집이야 참 어렵게 장만한 집이었지야. 남같이 한 번에 지어 올린 집이 아니고 몇 해에 걸쳐서 한 칸씩 두 칸씩 살림 형편 좇아서 늘여 간 집이었더니라. 그렇게 마련한 집이 결국은 내 집이 못 되고……. 그런다고 이제 그런 소린 해서 다 뭣을 하겄냐. 어차피 내 집이 못 될 운수라 그리 된 일을 이런 소리 곱씹는다고 팔려 간 집 다시 내 집이 되어 돌아올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리 어렵게 장만한 집이라 애석한 생각이 더할 게 아녜요. 지금 형편도 그럴 수밖에 없고요. 어떻게 되어 그리 되고 말았는지 그 때 사정이라도 좀 말씀해 보세요.?

?그만둬라. 다 소용 없는 일이다. 이제는 거럭저럭 세월이 흘러서 기억도 많이 희미해진 일이고…….?

한사코 이야기를 피하려는 노인에게 아내는 마침내 마지막 수단을 동원하고 있었다.

?좋아요. 어머님께선 아마 지난 일로 저까지 공연히 속을 상하게 할까 봐 그러시는 모양인데요. 그래도 별로 소용이 없으세요. 저도 사실은 이야기를 대강 다 들어 알고 있단 말씀예요.?

?이야기를 들어? 누구한테서??

노인이 비로소 조금 놀라는 기미였다.

?그야 물론 저 사람한테지요.?

노인의 물음에 아내가 대답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밖에서 엿듣고 있는 나를 지목한 말투가 분명했다. 짐작대로 그녀는 벌써부터 내가 밖에서 엿듣고 있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그 집을 팔게 된 사정뿐만도 아니에요. 어머님께서 저 사람한테 그 팔려 간 집에서 마지막 밤을 지내게 해 주신 일도 모두 알고 있단 말씀예요. 모른 척하고 있기는 했지만 저 옷장 말씀예요. 그 날 밤에도 어머님은 저 헌 옷장 하나를 집 안에다 아직 남겨 두고 계셨더라면서요. 아직도 저 사람한테 어머님이 거기서 살고 계신 것처럼 보이시려고 말씀이에요.?

아내는 차츰 목소리가 떨려 나오고 있었다.

?그렇담 어머님, 이제 좀 속 시원히 말씀해 보세요. 혼자서 참아 넘기시려고만 하지 마시고, 말씀이라도 하셔서 속을 후련히 털어 놔 보시란 말씀이에요. 저흰 어머님 자식들 아닙니까. 자식들한테까지 어머님은 어째서 그렇게 말씀을 참아 넘기시려고만 하세요.?

아내의 어조는 이제 거의 울먹임에 가까웠다. 노인도 이젠 어찌할 수가 없는지, 한동안 묵묵히 대꾸가 없었다. 나는 온통 입 안의 침이 다 마르고 있었다. 노인의 대꾸가 어떻게 나올지 숨도 못 쉰 채 당신의 다음 말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내나 나의 조바심하고는 아랑곳도 없이 노인은 끝내 내 심기를 흐트리지 않았다.

?그래 그 아그(아이)도 어떻게 아직 그 날 밤 일을 잊지 않고 있더냐??

?그래요. 그리고 그 날 밤, 어머님은 저 사람이 집을 못 들어가고 서성대고 있으니까 아직도 그 집이 안 팔린 것처럼 저 사람을 안으로 데려다가 저녁까지 한 끼 지어 먹이셨다면서요??

?그럼 됐구나. 그렇게 죄다 알고 있는 일을 뭐 하러 한사코 나한테 되뇌게 하려느냐.?

?저 사람은 벌써 잊어 가고 있거든요. 저 사람한테선 진짜 얘기를 들을 수도 없고요. 사람이 독해서 저 사람은 그런 일 일부러 잊어요. 그래 이번엔 어머님한테서 진짜 이야길 듣고 싶은 거예요. 저 사람 얘기 말고 어머님의 그 날 밤 진짜 심경을 말씀이에요.?

?심정이나마나 저하고 별다른 대목이 있었을라더냐. 사세 부득해서 팔았다곤 하지만 아직은 그래도 내 발길이 끊이지 않은 집인데, 그 집을 놔 두고 그 아그가 그래 발길을 주춤주춤 어정대고 서 있더구나…….?

아내의 성화를 견디다 못해 노인은 결국, 마지못한 어조로 그 날 밤 일을 돌이키고 있었다. 어조에는 아직도 그 날 밤의 심사가 조금도 실려 있지 않은 채였다.

?그래, 저를 나무래서 냉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더니라. 그리고 더운 밥 지어 먹여서 그 집에서 하룻밤을 재워 가지고 동도 트기 전에 길을 되돌려 떠나 보냈더니라.?

?그래, 그 때 어머님 마음이 어떠셨어요??

?마음이 어떻기는야. 팔린 집이나마 거기서 하룻밤 저 아그를 재워 보내고 싶어 싫은 곪고 드나들며 마당도 쓸고 걸레질도 훔치며 기다려 온 에미였는디, 더운 밥 해 먹이고 하룻밤을 재우고 나니 그만만 해도 한 소원은 우선 풀린 것 같더구나.?

?그래, 어머님은 흡족한 기분으로 아들을 떠나 보내셨다는 그런 말씀이시겠군요. 하지만 정말로 그게 그렇게 될 수가 있었을까요? 어머님은 정말로 그렇게 흡족한 마음으로 아들을 떠나 보내실 수 있으셨을까 말씀이에요. 아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더라도 어머님 자신은 그 때 변변한 거처 하나 마련해 두시질 못하셨을 처지에 말씀이에요.?

?나더러 또 무슨 이야길 더 하라는 것이냐??

?그 때 아들을 떠나 보내실 때 어머님 심경을 듣고 싶어요. 객지 공부 가는 어린 아들을 그런 식으로 떠나 보내시면서 어머님 자신도 거처가 없이 떠도셔야 했던, 그 때 처지에서 어머님이 겪으신 심경을 말씀이에요.?

?그만두거라. 다 쓸데없는 노릇이니라. 이야기를 한들 그 때 마음이야 네가 어찌 다 알아들을 수가 있겄냐.?

노인은 다시 이야기를 사양했다. 그러나 그 체념기가 완연한 노인의 어조에는 아직도 혼자 당신의 맘 속으로만 지녀 온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을 거 같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내는 그런 나의 기미를 눈치채고 있었다 하더라도 노인만은 아직 그걸 알지 못하고 있었다. 노인의 말을 그쯤에서 그만 중단시켜야 했다. 아내가 어떻게 나온다 하더라도 내게까지 그것을 알게 하고 싶지는 않을 노인이었다. 내 앞에선 더 이상 노인의 이야기가 계속될 수가 없었다.

나는 이윽고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 그 노인의 눈길이 닿고 있는 장지문 앞으로 모습을 불쑥 드러내고 나섰다.

4

위험한 고비는 그럭저럭 모두 지나가고 있었다.

저녁상을 들일 때 노인은 언제나처럼 막걸리 한 되를 가져오게 하였다. 형의 술버릇 때문에 집안 꼴이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노인은 웬일로 내게 술 걱정을 그리 하지 않았다. 집에만 가면 당신이 손수 막걸리 한 되씩을 미리 마련해다 주곤 하였다.

?한 잔 마시고 잠이나 자거라.?

그러면서 언제나 잠을 자기를 권하는 것이었다. 이 날 저녁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정 내일 아침으로 길을 나설라냐??

저녁상이 들어왔을 때 노인은 그렇게 조심스런 목소리로 나의 내심을 한 번 더 떠왔을 뿐이었다.

?가야 할 일이 있으니까 가겠다는 거 아니겠어요.?

나는 노인에게 공연히 짜증기가 치민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노인은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래 알았다. 저녁하고 술이나 한 잔하고 일찍 쉬어라.?

아침부터 먼 길을 나서려면 잠이라도 일찍 자 두라는 것이었다. 나는 말없이 노인을 따랐다. 저녁 겸해서 술 한 되를 비우고, 그리고 술기를 못 견디는 사람처럼 일찌감치 잠자리를 펴고 누웠다. 형수님이 조카들을 데리고 잠자리를 찾아 나가자 이 날 밤도 우리는 세 사람 합숙이었다.

어쨌거나 이제 위태로운 고비는 그럭저럭 거의 다 넘겨 가는 셈이었다. 눈을 붙였다. 깨고 나면 그것으로 모든 건 끝나는 것이었다. 지붕이고 옷궤고 더 이상 신경을 쓸 일이 없어진다. 노인에게 숨겨진 빚 문서가 있을까. 하지만 이 날 밤만 무사히 넘기고 나면 노인의 어떤 빚 문서도 그것으로 영영 휴지가 되는 것이다.

── 잠이나 자자. 빚이고 뭐고 잠들면 그만이다. 노인에게 빚은 내가 무슨 빚이 있단 말인가…….

나는 제법 홀가분한 기분으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술기 탓인지 알알한 잠 기운이 이내 눈꺼풀을 덮어 왔다.

그렇게 얼마쯤 아늑한 졸음기 속을 헤매고 난 때였을까. 나는 웬일인지 문득 잠기가 서서히 엷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어렴풋한 선잠기 속에 도란도란 조심스런 노인의 말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그 날 밤사말로 갑자기 웬 눈이 그리도 많이 내렸던지, 잠을 잤으면 얼마나 잤겠느냐마는 그래도 잠시 눈을 붙였다가 새벽녘에 일어나 보니 바깥이 왼통 환한 눈 천지로구나……. 눈이 왔더라도 어쩔 수가 있더냐. 서둘러 밥 한 술씩을 끓여다가 속을 데우고 그 눈길을 서둘러 나섰더니라…….?

나는 다시 정신이 번쩍 들고 말았다. 어찌된 일인지 노인이 마침내 그 날 밤 이야기를 아내에게 가닥가닥 털어놓고 있는 중이었다.

?처지가 떳떳했으면 날이라도 좀 밝은 다음에 길을 나설 수 있었으련만, 그 땐 어찌 그리 처지가 부끄럽고 저주스럽기만 했던지……. 그래 할 수 없이 새벽 눈길을 둘이서 나섰지만, 시오 리나 되는 장터 차부까지 산길이 멀기는 또 얼마나 멀더라냐.?

기억을 차근차근 더듬어 나가고 있는 노인의 몽롱한 목소리는 마치 어린 손주 아이에게 옛 얘기라도 들려 주고 있는 할머니의 그것처럼 아늑한 느낌마저 깃들고 있었다. 아내가 결국엔 노인을 거기까지 유도해 냈음이 분명했다.

── 이야기를 한들 네가 어찌 다 알아들을 수가 있겄냐……. 낮결에 노인이 말꼬리를 한 가닥 깔고 넘은 기미를 아내가 무심히 들어 넘겼을 리 없었다.

그 날 밤 ── 아니 그 날 새벽 ―─ 아내에겐 한 번도 들려 준 일이 없는 그 날 새벽의 서글픈 동행을, 나 자신도 한사코 기억의 피안으로 사라져 가 주기를 바라 오던 그 새벽의 눈길의 기억을 노인은 이제 받아 낼 길이 없는 묵은 빚 문서를 들추듯 허무한 목소리로 되씹고 있었다.

?날은 아직 어둡고 산길은 험하고,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도 차부까지는 그래도 어떻게 시간을 대어 갈 수가 있었구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의 머릿속에도 마침내 그 날의 정경이 손에 닿을 듯 역력히 떠올랐다. 어린 자식놈의 처지가 너무도 딱해서였을까. 아니, 어쩌면 노인 자신의 처지까지도 그밖엔 달리 도리가 없었을 노릇이었는지 모른다. 동구 밖까지만 바래다 주겠다던 노인은 다시 마을 뒷산의 잿길까지만 나를 좀더 바래 주마 우겼고, 그 잿길을 올라선 다음에는 새 신작로가 나설 때까지만 산길을 함께 넘어 가자 우겼다.

그럴 때마다 한 차례씩 애시린 실랑이를 치르고 나면 노인과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있을 수가 없었다. 아닌게아니라 날이라도 좀 밝은 다음이었으면 좋았겠는데, 날이 밝기를 기다려 동네를 나서는 건 노인이나 나나 생각을 않았다. 그나마 그 어둠을 타고 마을을 나서는 것이 노인이나 나나 마음이 편했다. 노인의 말마따나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내가 미끄러지면 노인이 나를 부축해 일으키고, 노인이 넘어지면 내가 당신을 부축해 가면서, 그렇게 말없이 신작로까지 나섰다. 그러고도 아직 그 면소 차부까지는 길이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나는 결국 그 면소 차부까지도 노인과 함께 신작로를 걸었다. 아직도 날이 밝기 전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우리는 어찌 되었던가.

나는 차를 타고 떠나가 버렸고, 노인은 다시 그 어둠 속의 눈길을 되돌아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건 거기까지뿐이었다.

노인이 그 후 어떻게 길을 되돌아갔는지는 나로서도 아직 들은 바가 없었다. 노인을 길가에 혼자 남겨 두고 차로 올라서 버린 그 순간부터 나는 차마 그 노인을 생각하기 싫었고, 노인도 오늘까지 그 날의 뒷얘기는 들려 준 일이 없었다. 한데 노인은 웬일로 오늘사 그 날의 기억을 끝까지 돌이키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장터 거리로 들어서서 차부가 저만큼 보일 만한 데까지 가니까, 그 때 마침 차가 미리 불을 켜고 차부를 나오는구나. 급한 김에 내가 손을 휘저어 그 차를 세웠더니, 그래 그 운전수란 사람들은 어찌 그리 길이 급하고 매정하기만 한 사람들이더냐. 차를 미처 세우지도 덜 하고 덜크렁덜크렁 눈 깜짝할 사이에 저 아그를 훌쩍 실어 담고 가 버리는구나.?

?그래서 어머님은 그때 어떻게 하셨어요.?

잠잠히 입을 다문 채 듣고만 있던 아내가 모처럼 한 마디를 끼어 들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다시 노인의 이야기가 두려워지고 있었다. 자리를 차고 일어나 다음 이야기를 가로막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럴 수가 없었다. 사지가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온몸이 마치 물을 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몸을 어떻게 움직여 볼 수가 없었다.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달콤한 슬픔, 달콤한 피곤기 같은 것이 나를 아늑히 감싸 오고 있었다.

?어떻게 하기는야. 넋이 나간 사람마냥 어둠 속에 한참이나 찻길만 바라보고 서 있을 수밖에야……. 그 허망한 마음을 어떻게 다 말할 수가 있을 거나…….?

노인은 여전히 옛 얘기를 하듯 하는 그 차분하고 아득한 음성으로 그 날의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한참 그러고 서 있다 보니 찬바람에 정신이 좀 되돌아오더구나. 정신이 들어 보니 갈 길이 새삼 허망스럽지 않았겄냐. 지금까진 그래도 저하고 나하고 둘이서 함께 헤쳐 온 길인데 이참에는 그 길을 늙은 것 혼자서 되돌아서려니……. 거기다 아직도 날은 어둡지야……. 그대로는 암만해도 길을 되돌아설 수가 없어 차부를 찾아 들어갔더니라. 한 식경이나 차부 안 나무 걸상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려니 그제사 동녘 하늘이 훤해져 오더구나……. 그래서 또 혼자 서두를 것도 없는 길을 서둘러 나섰는디, 그 때 일만은 언제까지도 잊혀질 수가 없을 것 같구나.?

?길을 혼자 돌아가시던 그 때 일을 말씀이세요? ?

?눈길을 혼자 돌아가다 보니 그 길엔 아직도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지나간 사람이 없지 않았겄냐. 눈발이 그친 신작로 눈 위에 저하고 나하고 둘이 걸어온 발자국만 나란히 이어져 있구나.?

?그래서 어머님은 그 발자국 때문에 아들 생각이 더 간절하셨겠네요.?

?간절하다뿐이었겄냐. 신작로를 지나고 산길을 들어서도 굽이굽이 돌아온 그 몹쓸 발자국들에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의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둘기만 푸르륵 날아올라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되돌아오는 듯 놀라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뛰어나올 것만 싶었지야. 하다 보니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따라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어머님 그 때 우시지 않았어요??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 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아라……. 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만 빌고 왔제…….?

노인의 이야기는 이제 거의 끝이 나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내는 이제 할 말을 잊은 듯 입을 조용히 다물고 있었다.

?그런디 그 서두를 것도 없는 길이라 그렁저렁 시름없이 걸어온 발걸음이 그래도 어느 참에 동네 뒷산을 당도해 있었구나. 하지만 나는 그 길로는 차마 동네를 바로 들어설 수가 없어 잿등 위에 눈을 쓸고 아직도 한참이나 시간을 기다리고 앉아 있었더니라…….?

?어머님도 이젠 돌아가실 거처가 없으셨던 거지요.?

한동안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아내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진 듯 갑자기 노인을 추궁하고 나섰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울먹임 때문에 떨리고 있었다. 나 역시도 이젠 더 이상 노인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나마 노인을 가로막고 싶었다. 아내의 추궁에 대한 그 노인의 대꾸가 너무도 두려웠다. 노인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불빛 아래 눈을 뜨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사지가 마비된 듯 가라앉아 있는 때문만이 아니었다. 졸음기가 아직 아쉬워서도 아니었다. 눈꺼풀 밑으로 뜨겁게 차 오르는 것을 아내와 노인 앞에 보일 수가 없었다. 그것이 너무도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이번에도 그러는 나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여보, 이젠 좀 일어나 보세요. 일어나서 당신도 말을 좀 해 보세요.?

그녀가 느닷없이 나를 세차게 흔들어 깨웠다. 그녀의 음성은 이제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그래도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뜨거운 것을 숨기기 위해 눈꺼풀을 꾹꾹 눌러 참으면서 내처 잠이 든 척 버틸 수밖에 없었다. 음성이 아직 흐트러지지 않고 있는 건 오히려 그 노인뿐이었다.

?가만 두어라. 아침 길 나서기도 피곤할 것인디 곤하게 자고 있는 사람 뭣 하러 그러냐.?

노인은 일단 아내의 행동을 말려 두고 나서 아직도 그 옛 얘기를 하는 듯한 아득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당신의 남은 이야기를 끝맺어 가고 있었다.

?그런디 이것만은 네가 잘못 안 것 같구나. 그 때 내가 뒷산 잿등에서 동네를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던 일 말이다. 그건 내가 갈 데가 없어 그랬던 건 아니란다. 산 사람 목숨인데 설마 그 때라고 누구네 문간방 한 칸이라도 산 몸뚱이 깃들일 데 마련이 안 됐겄냐. 갈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침 햇살이 활짝 퍼져 들어 있는디, 눈에 덮인 그 우리 집 지붕까지도 햇살 때문에 볼 수가 없더구나. 더구나 동네에선 아침 짓는 연기가 한참인디 그렇게 시린 눈을 해 갖고는 그 햇살이 부끄러워 차마 어떻게 동네 골목을 들어설 수가 있더냐. 그놈의 말간 햇살이 부끄러워서 그럴 엄두가 안 생겨나더구나. 시린 눈이라도 좀 가라앉히고자, 그래 그러고 앉아 있었더니라…….?

5단원

⑴ 관동별곡(關東別曲)

정 철(鄭澈)

江강湖호애 病병이 깁퍼 竹쿴林님의 누엇더니,

關관東동 八팔百?里니에 方방面면을 맛디시니,

어와 聖셩恩은이야 가디록 罔망極극퍛다.

延연秋츄門문 드리쾓라 慶경會회 南남門문 킞라보며,

下하直직고 믈너나니 玉옥節졀이 알? 셧다.

平평丘구驛역 큚을 캱라 黑흑水슈로 도라드니,

蟾셤江강은 어듸메오, 稚티岳악이 여긔로다.

昭쇼陽양江강 콉린 믈이 어드러로 든단 말고.

孤고臣신 去거國국에 白?髮발도 하도 할샤.

東동州횷 밤 계오 새와 北븍寬관亭뎡의 올나퍛니,

三삼角각山산 第뎨一일峰봉이 퍛마면 뵈리로다.

弓궁王왕 大대闕궐 터희 烏오鵲쟉이 지지괴니,

千쳔古고 興흥亡망을 아콋다, 몰퇲콋다.

淮회陽양 녜 일홈이 마초아 캱팋시고.

汲급長쾸孺유 風풍彩?를 고텨 아니 볼 게이고.

營영中쿶이 無무事턢퍛고 時시節졀이 三삼月월인 제,

花화川쳔 시내길히 楓풍岳악으로 버더 잇다.

行퍪裝장을 다 쿉티고 石셕逕경의 막대 디퍼,

百?川쳔洞동 겨팕 두고 萬만瀑폭洞동 드러가니,

銀은 캱팊 무지게, 玉옥캱팊 龍룡의 초리,

섯돌며 탾콋 소퀳 十십里리의 퉢자시니,

들을 제콋 우레러니 보니콋 눈이로다.

金금剛강臺쾬 큢 우層층의 仙션鶴학이 삿기 치니,

春츈風풍 玉옥笛쿊聲셩의 첫퉨을 컇돗던디,

縞호衣의玄현裳샹이 半반空공의 소소 퀌니,

西셔湖호 콭 主쥬人인을 반겨셔 넘노콋 쾠.

小쇼香향爐노 大대香향爐노 눈 아래 구버보고,

正졍陽양寺턢 眞진歇헐臺쾬 고텨 올나 안퉥마리,

廬녀山산 眞진面면目목이 여긔야 다 뵈콉다.

어와, 造조化화翁옹이 헌턢토 헌턢퍞샤.

콍거든 퓁디마나, 셧거든 솟디 마나.

芙부蓉용을 고잣콋 쾠, 白?玉옥을 믓것콋 쾠,

東동溟명을 박틍콋 쾠, 北북極극을 괴왓콋 쾠.

놉흘시고 望망高고臺쾬, 외로올샤 穴혈望망峰봉이

하콍의 추미러 므턢 일을 턢로리라,

千쳔萬만劫겁 디나쾓록 구필 줄 모퀦콋다.

어와 너여이고, 너 캱팈니 쿜 잇콋가.

開컃心심臺쾬 고텨 올나 衆듕香향城셩 킞라보며,

萬만二이千쳔峰봉을 歷녁歷녁히 혀여퍛니

峰봉마다 큦쳐 잇고 긋마다 서린 긔운,

큛거든 조티 마나, 조커든 큛디 마나.

뎌 긔운 흐터 내야 人인傑걸을 큗쾗고쟈.

形형容용도 그지업고 體톄勢셰도 하도 할샤.

天텬地디 삼기실 제 自퉢然연이 되연마콋,

이제 와 보게 되니 有유情졍도 有유情졍퍞샤.

毗비盧로峰봉 上샹上샹頭두의 올라 보니 긔 뉘신고.

東동山산 泰태山산이 어콉야 놉돗던고.

魯노國국 조븐 줄도 우리콋 모퀦거든,

넙거나 넙은 天텬下하 엇퀞퍛야 튃닷 말고.

어와 뎌 디위퀪 어이퍞면 알 거이고.

오퀦디 못퍛거니 콉려가미 고이퍞가.

圓원通통골 캱콋 길로 獅턢子퉢峰봉을 틍자가니,

그 알? 너러바회 化화龍룡쇠 되여셰라.

千쳔年년 老노龍룡이 구?구? 서려 이셔,

晝듀夜야의 흘녀 내여 滄창海퍥예 니어시니,

風풍雲운을 언제 어더 三삼日일雨우퀪 디련콋다.

陰음崖애예 이온 플을 다 살와 내여턢라.

磨마訶하衍연 妙묘吉길祥샹 雁안門문재 너머 디여,

외나모 텕근 쾓리 佛블頂뎡臺쾬 올라퍛니,

千쳔尋심絶졀壁벽을 半반空공애 셰여 두고,

銀은河하水슈 한 구?퀪 촌촌이 버혀 내여,

실캱티 플텨이셔 뵈캱티 거러시니,

圖도經경 열두 구?, 내 보매콋 여러히라.

李니謫쿊仙션 이제 이셔 고텨 의논퍛게 되면,

廬녀山산이 여긔도곤 낫단 말 못퍛려니.

山산中쿶을 큟양 보랴, 東동海퍥로 가쟈턢라.

籃남輿여 緩완步보퍛야 山산映영樓누의 올나퍛니,

玲녕瓏농 碧벽溪계와 數수聲셩 啼뎨鳥됴콋 離니別별을 怨원퍛콋 쾠,

旌졍旗긔를 쿉티니 五오色?이 넘노콋 쾠,

鼓고角각을 섯부니 海퍥雲운이 다 것콋 쾠.

鳴명沙사길 니근 큚이 醉틦仙션을 빗기 시러,

바다퍞 겻팕 두고 海퍥棠당花화로 드러가니,

白?鷗구야 콉디 마라, 네 버딘 줄 엇디 아콋.

金금?난窟굴 도라드러 叢총石셕亭뎡 올라퍛니,

白?玉옥樓누 남은 기동 다만 네히 셔 잇고야.

工공?슈의 셩녕인가, 鬼귀斧부로 다쾓큗가.

구팈야 六뉵面면은 므어슬 象샹톳던고.

高고城셩을란 뎌만 두고 三삼日일浦포퀪 틍자가니,

丹단書셔콋 宛완然연퍛되 四턢仙션은 어쾬 가니.

예 사흘 머믄 後후의 어쾬 가 쿜 머믈고.

仙션遊유潭담 永영郞낭湖호 거긔나 가 잇콋가.

淸틟澗간亭뎡 萬만景경臺쾬 몃 고쾬 안돗던고.

梨니花화콋 킡셔 디고 졉동새 슬피 울 제,

洛낙山산 東동畔반으로 義의相샹臺쾬예 올라 안자,

日일出츌을 보리라 밤듕만 니러퍛니,

祥샹雲운이 집퍑콋 동, 六뉵龍뇽이 바퇴콋 동,

바다퍥 쿆날 제콋 萬만國국이 일위더니,

天텬中듕의 티퀌니 毫호髮발을 혜리로다.

아마도 녈구름 근쳐의 머믈셰라.

詩시仙션은 어쾬 가고 咳퍥唾타만 나맛콉니.

天텬地디間간 壯장퍝 긔별 퉢셔히도 퍞셔이고.

斜샤陽양 峴현山산의 ???팶을 므니킡와

羽우蓋개芝지輪륜이 鏡경浦포로 콉려가니,

十십里리 氷빙紈환을 다리고 고텨 다려,

長쾸松숑 울흔 소개 슬틳장 펴뎌시니,

믈결도 자도 잘샤 모래퀪 혜리로다.

孤고舟쥬 解퍥纜람퍛야 亭뎡子퉢 우퍥 올나가니,

江강門문橋교 너믄 겨팕 大대洋양이 거긔로다.

從Q容용퍝댜 이 氣긔像샹, 闊활遠원퍝댜 뎌 境경界계,

이도곤 캱퉥 쾬 쿜 어듸 잇닷 말고.

紅홍粧장 古고事턢퀪 헌턢타 퍛리로다

江강陵능 大대都도護호 風풍俗쇽이 됴흘시고.

節절孝효旌졍門문이 골골이 버러시니

比비屋옥可가封봉이 이제도 잇다 퍞다.

眞진珠쥬館관 竹쿴西셔樓루 五오十십川쳔 콉린 믈이

太태白?山산 그림재퀪 東동海퍥로 다마 가니,

틏하리 漢한江강의 木목覓멱의 다히고져.

王왕程뎡이 有유限퍝퍛고 風풍景경이 못 슬킄니,

幽유懷회도 하도 할샤, 客컄愁수도 둘 듸 업다.

仙션?사퀪 퀒워 내여 斗두牛우로 向향퍛살가,

仙션人인을 틍퉢려 丹단穴혈의 머므살가.

天텬根근을 못내 보와 望망洋양亭뎡의 올은말이,

바다 밧근 하콍이니 하콍 밧근 므서신고.

?득 노퍝 고래, 뉘라셔 놀내관쾬,

블거니 핗거니 어즈러이 구콋디고.

銀은山산을 것거 내여 六뉵合합의 콉리콋 쾠,

五오月월 長쾸天텬의 白?雪셜은 므턢 일고.

져근덧 밤이 드러 風풍浪낭이 定뎡퍛거콍,

扶부桑상 咫지尺의 明명月월을 기쾓리니,

瑞셔光광 千쳔丈쾸이 뵈콋 쾠 숨콋고야.

珠쥬簾렴을 고텨 것고, 玉옥階계퀪 다시 쓸며,

啓계明명星셩 돗도록 곳초 안자 킞라보니,

白?蓮년花화 퍝 가지퀪 뉘라셔 보내신고.

일이 됴흔 世셰界계 콓대되 다 뵈고져.

流뉴霞하酒쥬 캱득 부어 쾗쾓려 무론 말이,

英영雄웅은 어쾬 가며, 四턢仙션은 긔 뉘러니.

아큟나 맛나 보아 콭 긔별 뭇쟈 퍛니,

仙션山산 東동海퍥예 갈 길히 머도 멀샤.

松숑根근을 볘여 누어 픗퉨을 얼픗 드니,

켊애 퍝 사퀬이 날쾓려 닐온 말이,

그쾬퀪 내 모퀦랴, 上샹界계예 眞진仙션이라.

黃황庭뎡經경 一일字퉢퀪 엇디 그퀲 닐거 두고,

人인間간의 내려와셔 우리퀪 쾪오콋다.

져근덧 가디 마오. 이 술 퍝 잔 머거 보오.

北븍斗두星셩 기우려 滄챵海퍥水슈 부어 내여,

저 먹고 날 머겨콍 서너 잔 거후로니,

和화風풍이 習습習습퍛야 兩냥腋퇾을 추혀 드니,

九구萬만里리 長쾸空공애 져기면 콍리로다.

이 술 가져다가 四턢海퍥예 고로 콋화,

億억萬만蒼창生텆을 다 醉틦케 큧근 後후의,

그제야 고텨 맛나 쿜 퍝 잔 퍛.고야.

말 디쟈 鶴학을 팈고 九구空공의 올나가니,

空공中듕 玉옥簫쇼 소퀳 어제런가 그제런가.

나도 퉨을 컇여 바다퍞 구버보니,

기퍑퀪 모퀦거니 캱인들 엇디 알리.

明명月월이 千쳔山산萬만落낙의 아니 비쵠 쾬 업다.

- 송강가사(松江歌辭) 이선본(李選本)

⑵ 간디의 물레

김 종 철(金鍾哲)

무슨 까닭인지 그 동안 수입이 금지되었다가, 최근 국내에서도 볼 수 있게 된 영화 중에 ?간디?가 있다. 이 영화 자체는 보는 각도에 따라 미흡한 작품인 것도 사실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간디의 반식민주의 투쟁의 비교적 충실한 연대기가 작성되어 있음을 보지만, 간디라는 한 위대한 영혼과 그 영혼의 모태인 인도 민중의 근원적인 심성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시선을 느끼지는 못한다. 이것은 헐리우드 영화의 피할 수 없는 한계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사회 교육적 가치는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파괴와 억압의 시대라고 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상황에서 비폭력의 이념을 고수했던 한 고귀한 인간에 마주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뜻깊은 경험이다. 더구나 이 영화는 매우 인상적으로, 일상 생활 속의 간디를 늘 물레를 돌리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간디의 사상의 진의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폭력주의와 물레 ―― 얼핏 보아서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이 양자 간의 유기적 관계를 해명하는 것은 간디 사상의 근본에 이르는 첩경일 수도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비폭력․비협력주의는 영국 식민당국을 불구화시키기 위한 투쟁적인 방책으로 기능하였다. 그러한 투쟁의 한 수단으로서 영국에서 수입되는 직물을 거부하고 인도의 민중이 그동안 잊혀졌던 전통적인 가내 수공업을 부활시켜 스스로의 생활 필수품을 자급 자족하는 길이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식민지적 착취 구조로부터 이탈의 가능성도 실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현실 정치 및 경제적 이해 관계의 차원에서만 간디의 비폭력․비협력주의를 본다는 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관점이다.

간디 사상의 요체인 비폭력주의는 하나의 유효한 정치적 투쟁 수단이기 이전에 근원적으로 만유의 법칙을 사랑으로 파악하는 위대한 종교적․철학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폭력주의 운동은 결코 수동적인 저항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악에 대한 보답을 악으로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거의 불가사의하게 깊고 부드러운 영혼 속에서 우러나오는 실천적 행동이었다.

간디는 절대로 몽상가는 아니다. 그가 말한 것은 폭력을 통해서는 인도의 해방도, 보편적인 인간 해방도 없다는 것이었다. 민족 해방은 단지 외국 지배자의 퇴각을 의미하는 것일 수는 없다. 참다운 해방은 지배와 착취와 억압의 구조를 타파하고 그 구조에 길들여져 온 심리적 습관과 욕망을 뿌리로부터 변화시키는 일 ― 다시 말하여 일체의 ?칼의 교의(敎義)?로부터의 초월을 실현하는 것이다.

간디의 관점에서 볼 때, 무엇보다 큰 폭력은 인간의 근원적인 영혼의 요구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물질적 이득의 끊임없는 확대를 위해 착취와 억압의 구조를 제도화한 서양의 산업 문명이었다.

근대 산업 문명은 사람들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끊임없이 이기심을 자극하며, 금전과 물건의 노예로 타락시킬 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평화와 명상의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로 인하여 유럽의 노동 계급과 빈민에게 사회는 지옥이 되고, 비서구 지역의 수많은 민중은 제국주의의 침탈 밑에서 허덕이게 되었다. 여기에서 간디 사상에 물레의 상징이 갖는 의미가 드러난다. 간디는 모든 인도 사람들이 매일 한두 시간만이라도 물레질을 할 것을 권유하였다. 물레질의 가치는 경제적 필요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물레는 무엇보다 인간의 노역에 도움을 주면서 결코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 인간적 규모의 기계의 전형이다. 간디는 기계 자체에 대해 반대한 적은 없지만, 거대 기계에는 필연적으로 복잡하고 위계적인 사회 조직,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 도시화, 낭비적 소비가 수반된다는 것을 주목했다. 생산 수단이 민중 자신의 손에 있을 때 비로소 착취 구조가 종식된다고 할 때,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는 그 자체로 비인간화와 억압의 구조를 강화하기 쉬운 것이다.

간디는 산업화의 확대, 또는 경제 성장이 참다운 인간의 행복에 기여한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었다. 간디가 구상했던 이상적인 사회는 자기 충족적인 소농촌 공동체를 기본 단위로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중앙 집권적인 국가 기구의 소멸과 더불어 마을 민주주의에 의한 자치가 실현되는 공간이다. 거기에서는 인간을 도외시한 이윤을 위한 이윤 추구도, 물건과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탐욕도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은 비폭력과 사랑과 유대 속에 어울려 살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하고, 자기 완성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상에 매우 적합한 정치 공동체라 할 수 있다.

물레는 간디에게 그러한 공동체의 건설에 필요한 인간 심성의 교육에 알맞는 수단이기도 했다. 물레질과 같은 단순하지만 생산적인 작업의 경험은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의 분리 위에 기초하는 모든 불평등 사상의 문화적․심리적 토대의 소멸에 기여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먹을 빵을 손수 마련해 먹는 창조적 노동?에의 참여와 거기서 얻는 기쁨은 소박한 삶의 가치를 진정으로 긍정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간디는 생각하였다. 결국 간디의 사상은 욕망을 억지로 참아야 하는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욕망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간디의 메시지는 경제 성장의 논리에 대한 무비판적인 순종과 편의주의적 생활의 안이성에 깊숙이 젖어 있는 우리들에게 헛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갖 생명에 위해를 가해 온 산업 문명이 인간 생존의 자연적․생물학적 기초 자체를 파괴하는 데까지 도달한 지금 그것이 정말 헛소리로 남는다면 우리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6단원

⑴ 산정 무한 (山情無限)

정 비 석(鄭飛石)

내금강 역사(驛舍)에 도착.

어느 외국인의 산장을 그대로 떠다 놓은 듯이 멋진 양관(洋館). 외금강 역과 아울러 이 한국식 내금강 역은 산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무한 정다운 호대조(好對照)의 두 건물이다. 내(內)와 외(外)를 여실히 상징한 것이 더 좋았다.

십삼야월(十三夜月)의 달빛 차갑게 넘실거리는 역 광장에 나서니, 심산(深山)의 밤이라 과시(果是) 바람은 세찬데, 별안간 계간(溪澗)을 흐르는 물소리가 정신을 빼앗을 듯 소란하여 추위는 한층 뼈에 스민다. 장안사(長安寺)로 향하여 몇 걸음 걸어가며 고개를 드니, 산과 산들이 병풍처럼 사방에 우쭐우쭐 둘러선다. 기쓰고 찾아온 바로 저 산이 아니었던가고 금새 어루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힘껏 호흡을 들여마시니, 어느덧 간장(肝臟)도 청수(淸水)에 씻기운 듯 맑아 온다. 청계를 끼고 물소리를 즐기며 걸어가기 십 분쯤, 문득 발부리에 나타나는 단청(丹靑)된 다리는 이름부터 격에 어울려 함부로 건너기조차 외람된 문선교(問仙橋)!

문선교! 어느 때 어떤 은사(隱士)가 예까지 찾아와서 선경(仙境)이 어디냐고 목동에게 차문(借問)한 고사라도 있었던가? 있을 법한 일이면서 깜짝 소문에조차 듣지 못한 것은, 역시 선경과 속계(俗界)가 스스로 유별(有別)한 탓이었던가?

차문주가하처재(借問酒家何處在)

목동요지행화촌(牧童遙指杏花村)*

은 속계의 노래로, 속계에서는 이만하면 풍류객이었다. 동양류의 선경이란 풍류객들이 사는 고장을 일컬음이니, 선경과 속계는 백지 한 겹밖에 아닐 듯이 믿어지니, 이미 세진(世塵)을 떨치고 나선 몸이라 서슴지 않고 문선교를 건너기로 하였다.

이튿날 아침, 고단한 마련해선 일찌감치 눈이 떠진 것은 몸에 지닌 기쁨이 하도 컸던 탓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간밤에 볼 수 없던 영봉(靈峰)들을 대면하려고 새댁같이 수줍은 생각으로 밖에 나섰으나, 계곡은 여태 짙은 안개 속에서, 준봉(峻峰)은 상기 깊은 구름 속에서 용이하게 자태를 엿보일 성싶지 않았고, 다만 가까운 데의 전나무, 잣나무 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뜨일 뿐이었다.

모두 근심 없이 자란 나무들이었다.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밋밋하게 자란 나무들이었다. 꼬질꼬질 뒤틀어지고 외틀어지고 한 야산 나무밖에 보지 못한 눈에는, 귀공자와 같이 기품이 있어 보이는 나무들이었다.

조반 후 단장(短杖) 짚고 험난한 전정(前程)을 웃음경삼아 탐승(探勝)의 길에 올랐을 때에는, 어느덧 구름과 안개가 개어져 원근 산악이 열병식하듯 점잖이들 버티고 서 있는데, 첫눈에 비치는 만산의 색소는 홍(紅)! 이른바 단풍이란 저런 것인가 보다 하였다.

만학천봉(萬壑千峰)이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는 듯, 산색(山色)은 붉을 대로 붉었다. 자세히 보니, 홍(紅)만도 아니었다. 청(靑)이 있고, 녹(綠)이 있고, 황(黃)이 있고, 등(橙)이 있고, 이를테면 산 전체가 무지개와 같이 복잡한 색소로 구성되었으면서, 얼른 보기에 주홍만으로 보이는 것은 스펙트럼의 조화던가!

복잡한 것은 색(色)만이 아니었다. 산의 용모는 더욱 다기(多岐)하다. 혹은 깎은 듯이 준초(峻?)하고, 혹은 그린 듯이 온후(溫厚)하고, 혹은 막잡아 빚은 듯이 험상궂고, 혹은 틀에 박은 듯이 단정하고……, 용모, 풍취(風趣)가 형형색색인 품이 이미 범속(凡俗)이 아니다.

산의 품평회를 연다면, 여기서 더 호화로울 수 있을까 ? 문자 그대로 무궁무진(無窮無盡)이다. 장안사 맞은편 산에 울울창창(鬱鬱蒼蒼) 우거진 것은 모두 잣나무뿐인데, 모두 이등변삼각형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섰는 품이,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흡사히 괴어 놓은 차례탑(茶禮塔) 같다. 부처님은 예불상(禮佛床)만으로는 미흡해서, 이렇게 자연의 진수성찬을 베풀어 놓으신 것일까? 얼른 듣기에 부처님이 무엇을 탐낸다는 것이 천만부당한 말 같지만, 탐내는 그것이 물욕 저편의 존재인 자연이고 보면, 자연을 맘껏 탐낸다는 것이 이미 불심(佛心)이 아니고 무엇이랴.

장안사 앞으로 흐르는 계류(溪流)를 끼고 돌며 몇 굽이의 협곡(峽谷)을 거슬러 올라가니, 산과 물이 어울리는 지점에 조그마한 찻집이 있다.

다리도 쉴 겸, 스탬프북을 한 권 사서, 옆에 구비된 기념 인장을 찍으니, 그림과 함께 지면에 나타나는 세 글자가 명경대(明鏡臺)! 부앙(俯仰)하여 천지에 참괴(褓?함이 없는 공명한 심경을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이르나니, 명경대란 흐르는 물조차 머무르게 하는 곳이란 말인가! 아니면, 지니고 온 악심(惡心)을 여기서만은 정(淨)하게 하지 아니치 못하는 곳이 바로 명경대란 말인가! 아무러나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찻집을 나와 수십 보를 바위로 올라가니, 깊고 푸른 황천담(黃泉潭)을 발 밑에 굽어보며 반공(半空)에 외연(巍然)히 솟은 층암 절벽(層巖絶壁)이 우뚝 마주 선다. 명경대였다. 틀림없는 화장경(化粧鏡) 그대로였다. 옛날의 죄의 유무를 이 명경(明鏡)에 비추면, 그 밑에 흐르는 황천담에 죄의 영자(影子)가 반영되었다고 길잡이는 말한다.

명경! 세상에 거울처럼 두려운 물건이 다신들 있을 수 있을까? 인간 비극은 거울이 발명되면서 비롯했고, 인류 문화의 근원은 거울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나의 지나친 억설(臆說)일까? 백 번 놀라도 유부족(猶不足)일 거울의 요술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일상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가경(可驚)할 일인가?

신라조 최후의 왕자인 마의 태자(麻依太子)는 시방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바위 위에 꿇어 엎드려, 명경대를 우러러보며 오랜 세월을 두고 나무아미타불을 염송(念誦)했다니, 태자도 당신의 업죄(業罪)를 명경에 영조(映照)해 보시려는 뜻이었을까? 운상기품(雲上氣稟)에 무슨 죄가 있으랴만, 등극(登極)하실 몸에 마의(麻衣)를 감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 이미 불법(佛法)이 말하는 전생의 연(緣)일는지 모른다.

두고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며 계곡을 돌아 나가니, 앞으로 염마(閻魔)처럼 막아 서는 웅자(雄姿)가 석가봉(釋迦峰), 뒤로 맹호(猛虎)같이 덮누르는 신용(神容)이 천진봉(天眞峰)! 전후 좌우를 살펴봐야 협착(狹窄)한 골짜기는 그저 그뿐인 듯.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절박감을 느끼며 그대로 걸어 나가니, 간신히 트이는 또 하나의 협곡!

몸이 감길 듯이 정겨운 황천강(黃泉江) 물줄기를 끼고 돌면, 길은 막히는 듯 나타나고, 나타나는 듯 막히고, 이 산에 흩어진 전설과, 저 봉에 얽힌 유래담을 길잡이에게 들어 가며 쉬엄쉬엄 걸어 나가는 동안에, 몸은 어느덧 심해(深海)같이 유수(幽邃)한 수목 속을 거닐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천하에 수목이 이렇게도 지천으로 많던가! 박달나무, 엄나무, 피나무, 자작나무, 고로쇠나무,……. 나무의 종족은 하늘의 별보다도 많다고 한 어느 시의 구절을 연상하며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단풍뿐, 단풍의 산이요 단풍의 바다다.

산 전체가 요원(燎原) 같은 화원(花園)이요, 벽공에 외연히 솟은 봉봉(峰峰)은 그대로가 활짝 피어 오른 한 떨기의 꽃송이다. 산은 때 아닌 때에 다시 한 번 봄을 맞아 백화 난만(百花爛漫)한 것일까? 아니면 불의의 신화에 이 봉 저 봉이 송두리째 붉게 타고 있는 것일까? 진주홍(眞朱紅)을 함빡 빨아들인 해면같이, 우러러 볼수록 찬란하다.

산은 언제 어디다 이렇게 많은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가, 일시에 지천으로 내뿜는 것일까?

단풍이 이렇게까지 고운 줄은 몰랐다. 김 형은 몇 번이고 탄복하면서, 흡사히 동양화의 화폭 속을 거니는 감흥을 그대로 맛본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도 한 떨기 단풍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리는 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 버린 것 같다.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짜면, 물에 헹궈 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

그림 같은 연화담(蓮花潭) 수렴폭(垂簾瀑)을 완상하며, 몇십 굽이의 석계(石階)와 목잔(木棧)과 철삭(鐵索)을 답파하고 나니, 문득 눈앞에 막아서는 무려 삼백 단의 가파른 사닥다리 ── 한 층계 한 층계 한사코 기어오르는 마지막 발걸음에서 시야는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탁 트인다. 여기가 해발 오천 척의 망군대(望軍臺) ── 아! 천하는 이렇게도 광활하고 웅장하고 숭엄하던가 !

이름도 정다운 백마봉(白馬峰)은 바로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서 있고, 내일 오르기로 예정된 비로봉(毘盧峰)은 단걸음에 건너뛸 정도로 가깝다. 그 밖에도, 유상무상(有象無象)의 허다한 봉들이 전시(戰時)에 할거(割據)하는 군웅(群雄)들처럼 여기에서도 불끈 저기에서도 불끈, 시선을 낮춰 아래로 굽어보니, 발 밑은 천인단애(千?斷崖), 무한제(無限際)로 뚝 떨어진 황천 계곡에 단풍이 선혈(鮮血)처럼 붉다. 우러러보는 단풍이 새색시 머리의 칠보 단장(七寶丹粧) 같다면, 굽어보는 단풍은 치렁치렁 늘어진, 규수의 붉은 치마폭 같다고나 할까. 수줍어 수줍어 생글 돌아서는 낯 붉은 아가씨가 어느 구석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도 같구나!

저물 무렵에 마하연(摩訶衍)의 여사(旅舍)를 찾았다.

산중에 사람이 귀해서였던가. 어서 오십사는, 상냥한 안주인의 환대도 은근하거니와, 문고리 잡고 말없이 맞아 주는 여관집 아가씨의 정성은 무르익은 머루알같이 고왔다.

여장(旅裝)을 풀고 마하연암(摩訶衍庵)을 찾아갔다. 여기는 선원(禪院)이어서, 공부하는 승려뿐이라고 한다. 크지도 않은 절이건만, 승려 수는 실로 30명은 됨 직하다. 이런 심산에 웬 승려가 그렇게도 많을까 !

한없는 청산 끝나 가려 하는데, [無限靑山行欲盡]

흰구름 깊은 곳에 노승도 많아라. [白雲深處老僧多]*

옛글 그대로다.

노독(路毒)을 풀 겸 식후에 바둑이나 두려고 남포등 아래에 앉으니, 온고지정(溫故之情)이 불현듯 새로워졌다.

?남포등은 참말 오래간만인데.?

하며 불을 바라보는 김 형의 말씨가 하도 따뜻해서, 나도 장난삼아 심지를 돋우었다 줄였다 하며, 까맣게 잊었던 옛 기억을 되살렸다. 그리운 얼굴들이, 흐르는 물의 낙화(落花)송이같이 떠돌았다.

밤 깊어 뜰에 나가니, 날씨는 흐려 달은 구름 속에 잠겼고, 음풍(陰風)이 몸에 선선하다. 어디서 솰솰 소란히 들려 오는 소리가 있기에 바람 소린가 했으나, 가만히 들어 보면 바람 소리만도 아니요, 물 소린가 했더니 물 소리만도 아니요, 나뭇잎 갈리는 소린가 했더니 나뭇잎 갈리는 소리만은 더구나 아니다. 아마, 바람 소리와 물 소리와 나뭇잎 갈리는 소리가 함께 어울린 교향악인 듯싶거니와, 어쩌면 곤히 잠든 산의 호흡인지도 모를 일이다.

뜰을 어정어정 거닐다 보니, 여관집 아가씨가 등잔 아래에 외로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책일까? 밤 깊는 줄조차 모르고 골똘히 읽는 품이, 춘향(春香)이 태형(笞刑) 맞으며 백(百)으로 아뢰는 대목일 것도 같고, 누명 쓴 장화(薔花)가 자결을 각오하고 원한을 하늘에 고축(告祝)하는 대목일 것도 같고, 시베리아로 정배(定配) 가는 카투사의 뒤를 네플류도프 백작이 쫓아가는 대목일 것도 같고……, 궁금한 판에 제멋대로 상상해 보는 동안에 산 속의 밤은 처량히 깊어 갔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산을 찾아 나섰다. 자꾸 깊은 산 속으로만 들어가기에, 어느 세월에 이 골을 다시 헤어나 볼까 두렵다. 이대로 친지와 처자를 버리고 스님이 되는 수밖에 없나 보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이키니, 몸은 어느 새 구름을 타고 두리둥실 솟았는지, 군소봉(群小峰)이 발 밑에 절하여 아뢰는 비로봉 중허리에 나는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 날씨는 급격히 변화되어, 이 골짝 저 골짝에 안개가 자옥하고 음산한 구름장이 산허리에 감기더니, 은제(銀梯), 금제(金梯)에 다다랐을 때, 기어이 비가 내렸다. 젖빛 같은 연무(煙霧)가 짙어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다. 우장(雨裝) 없이 떠난 몸이기에 그냥 비를 맞으며 올라가노라니까, 돌연 일진 광풍(一陳狂風)이 어디서 불어 왔는지, 휙 소리를 내며 운무(雲霧)를 몰아가자, 은하수같이 정다운 은제와, 주홍 주단 폭같이 늘어놓은 붉은 진달래 단풍이, 몰려가는 연무 사이로 나타나 보인다. 은제와 단풍은 마치 이랑이랑으로 섞바꾸어 가며 짜 놓은 비단결같이 봉에서 골짜기로 퍼덕이며 흘러내리는 듯하다. 진달래는 꽃보다 단풍이 배승(倍勝)함을 이제야 깨달았다.

오를수록 우세(雨勢)는 맹렬했으나, 광풍이 안개를 헤칠 때마다 농무(濃霧) 속에서 홀현홀몰(忽顯忽沒)하는 영봉(靈峰)을 영송(迎送)하는 것도 가히 장관이었다.

산마루가 가까울수록 비는 폭주(暴注)로 내리붓는다. 만이천 봉을 단박에 창해(滄海)로 변해 버리는 것일까. 우리는 갈데없이 물에 빠진 쥐 모양을 해 가지고 비로봉 절정에 있는 찻집으로 찾아드니,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고 섰던 동자(童子)가 문을 열어 우리를 영접하였고, 벌겋게 타오른, 장독 같은 난로를 에워싸고 둘러앉았던 선착객(先着客)들이 자리를 사양해 준다. 인정(人情)이 다사롭기 온실 같은데, 밖에서는 몰아치는 빗발이 어느덧 우박으로 변해서 창을 때리고 문을 뒤흔들고 금시로 천지가 뒤집히는 듯하다. 용호(龍虎)가 싸우는 것일까? 산신령이 대로(大怒)하신 것일까? 경천동지(驚天動地)도 유만부동(類萬不同)이지, 이렇게 만상을 뒤집을 법이 어디 있으랴고, 간장(肝腸)을 죄는 몇 분이 지나자, 날씨는 삽시간에 잠든 양같이 온순해진다. 변환(變幻)도 이만하면 극치에 달한 듯싶다.

비로봉 최고점이라는 암상(巖上)에 올라 사방을 조망했으나, 보이는 것은 그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해(雲海)뿐, ── 운해는 태평양보다도 깊으리라 싶었다. 내․외․해(內外海) 삼 금강(三金剛)을 일망지하(一望之下)에 굽어 살필 수 있다는 한 지점에서 허무한 운해밖에 볼 수 없는 것이 가석(可惜)하나, 돌이켜 생각건대 해발(海拔) 육천 척에 다시 신장(身長) 오 척을 가하고 오연(傲然)히 저립(佇立)해서, 만학천봉을 발 밑에 꿇어 엎드리게 하였으면 그만이지,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

마음은 천군만마(千軍萬馬)에 군림하는 쾌승(快勝) 장군보다도 교만해진다.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설 자리를 삼가, 구중 심처(九重深處)가 아니면 살지 않는자작나무는 무슨 수중(樹中) 공주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애화(哀話) 맺혀 있는 용마석(龍馬石) ── 마의 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 ── 철책(鐵柵)도 상석(床石)도 없고, 풍림(楓霖)에 시달려 비문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化石)된 태자의 애기(愛騎) 용마의 고영(孤影)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 듯, 소복(素服)한 백화(白樺)는 한결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中天)에 서럽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險山)에 들어온 것은, 천 년 사직(社稷)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몸에 짊어지려는 고행(苦行)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 공주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入山)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胸裡)가 어떠했을까? 흥망(興亡)이 재천(在天)이라, 천운(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蒼氓)에게 베푸신 도타운 자혜(慈惠)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 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 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依支)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暗然)히 수수(愁愁)롭다.

⑵ 1890년대 한국 여성의 삶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이인화 옮김

쪾 한국식 빨래

한국의 모든 시냇가에는 편평한 돌 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더러운 옷을 물 속에 담그고, 꽉 비틀어 짜서 돌판에다 올려놓고 반반한 방망이로 두드리며 빨래하는 여자들이 가득하다.

한국의 전통적인 빨래 방법은 극히 뛰어난 것이다. 한국식 빨래의 첫 공정(工程)은 나무나 짚을 태운 재를 물에 풀어 빨랫감을 적시는 것이다. 그렇게 잿물에 담가 둔 빨랫감을 두드려 빤 다음, 다시 잿물에 넣고 삶는다. 펄펄 끓는 물에 푹 삶은 빨래를 다시 두드려 빤 다음 맑은 물에 헹구고 짜서 빨랫줄에 넌다. 밝은 햇빛 아래에서 하얗게 말린 후 밥풀로 아주 엷게 풀을 먹이고, 곤봉처럼 생긴 ?다듬잇방망이?로 나무판 위에서 짧고 빠르게 얼마 동안 두드린다. 이 결과, 보통의 흰 무명은 그 깨끗함이 막 뽑아 낸 흰 새틴과 같다.

한국 빨래의 흰색은 항상 나로 하여금 현성축일(顯聖祝日: the Transfiguration)에 나타난 예수님의 옷에 대해 성(聖) 마가가 언급한 ?세상의 어떤 빨랫집도 그것을 그토록 희게 할 수 없다.?는 말을 기억하게 했다. 이 흰 옷, 특히 겨울에 흰 솜을 채워 넣은 옷을 입는 것은 여성의 고되고 간단없는 노동을 필요로 한다. 외투〔두루마기〕는 빨 때마다 반드시 실을 빼어 풀고 다시 꿰매어야 하며, 몇몇 긴 솔기는 종종 풀도 먹여야 하고 훨씬 더 많은 바느질을 해야만 한다.

그 외에도 한국의 농촌 여성들은 가족의 모든 의복을 만들고 모든 식사를 준비하고, 무거운 공이와 절구로 쌀을 탈곡하고 씻고, 무거운 짐을 시장까지 머리에 이고 나르며, 또한 물을 긷고,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나가 밭에서 일을 한다. 그들은 일찍 일어나고 자정이 넘어서야 휴식하며, 틈날 때마다 실을 뽑고 베를 짠다. 대개 많은 아이들을 낳는데 아이들은 세 살까지 젖을 떼지 못한다.

농촌 여성들에게 기쁨이 없다고 말해도 될지 모른다. 그녀들은 자신의 며느리에게 고된 일의 일부를 물려줄 때까지 단지 막일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고된 노동 때문에 한국의 농촌 여성들은 삼십대에 이미 오십대로 보이고, 사십이면 흔히들 이가 없어진다. 개인적인 몸치장조차도 인생의 아주 이른 시절에 그녀의 삶에서 사라진다.

쪾 격리된 삶

한국 여성의 지위에 대해 일반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상류 사회에서는 절대적 격리가 하나의 규범이 된다. 부녀자들은 자신의 안마당과 건물을 가지며, 남자들의 건물에 달린 창문은 그 곳을 향해서는 안 된다. 방문객은 절대로 가족 중 여성에게 눈짓을 보낼 수 없다. 그들의 안부를 묻는 것은 예의에서 많이 벗어나는 것이고, 마치 그녀들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정중한 손님의 의무다. 여성들은 어떠한 지적(知的) 교육도 받지 않고, 어느 계층에서나 다 열등한 지위를 가진다.

어떤 종류의 이원적인 철학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으나 한국 남성은 여성이 열등한 존재로서 남성에 부속된 상태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학문의 요약 `격몽요결(擊蒙要訣)?, 역사 개요` ?통감절요(通鑑節要)?, 젊은이의 학습 ?소학(小學)? 등 널리 읽혀지는 교과서들이 여성에게 이러한 관점을 강요하고, 여성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남성들과 만나기 시작하면서 매일매일 확증을 받는다.

여성의 격리는 5`세기 전, 사회의 기강이 혼란하고 성적으로 문란했던 전 왕조(王朝)의 폐단을 극복하고 가족 제도를 보호하기 위해 지금의 왕조에 의해서 도입되었다. 여성의 격리는 제임스(Heber James) 씨가 말한 것처럼 남자가 여자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를 믿기 때문에 계속되었다.

도시 여성이나 상류 계층 여성의 도덕적 건전성은 우리 유럽 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하류 계층의 여성들을 제외한 모든 여성들은 젊거나 나이가 들었거나를 막론하고 법의 강제력보다 더한 관습에 의해 집의 안뜰에서 격리되어 있다. 밤에 적절히 숨어 외출하는 것과 때때로 여행하거나 방문하는 것이 필요할 때 엄격하게 가려진 가마를 타고 외출하는 것이 중상류 계층 여성의 유일한 외출이다. 하류 계층의 여성들은 단지 일을 하기 위한 이유로 외출한다.

시해된 왕비는 나의 한국 여행에 대한 느낌을 내게 말해 주면서 그녀 자신은 한국에 관해, 심지어는 수도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며 단지 거둥의 길만을 안다고 했다.

딸들은 아버지에 의해, 아내는 남편에 의해 죽고, 여성들은 심지어 자살까지도 한다. 달레(Dallet) 신부의 기록에 의하면 이방인이 우연이건 계획적이었건 그들의 손을 건드리게 되면 이런 여성들의 사회에선 난리가 나는 것이다. 이 때는 재빨리 그 여성의 하녀가 주인을 불구덩이 같은 재난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그 남정네가 건드린 것은, 주인이 아니라 별로 문제될 만큼 가치가 없는 자신의 손이라고 거짓 고백을 하는 법이라고 한다.

법은 어떤 남자도 여성의 방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선비가 그의 아내의 방 안에 자신을 숨기고 있을 때 모반(謀叛)을 제외한 어떠한 범죄로도 그를 잡지 못한다. 자기 집의 지붕을 고치려는 사람은 우연히 자신이 옆집 여인을 보는 것을 막기 위해 이웃에게 반드시 알려야 한다. 일곱이 지난 나이부터는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는 떨어져야 하고, 여자는 결혼할 때까지 아버지와 남자 형제를 제외한 어떤 남성도 보지 못하며 엄격하게 격리되어 있다. 결혼 후에 여자는 단지 그녀의 친척과 남편의 가까운 친척을 볼 수 있다.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도 계집아이를 숨긴다. 한국 여행에서 나는 여자가 방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섯 살 이상으로 보이는 중상류층 처녀를 보지 못했다. 처녀 시절에 사회적 존재로서 국가에 공헌하게 하는 현명함을 이 나라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체제 아래에서 한국 여성이 불쾌함과 불편함을 느끼고, 유럽 여성들이 향유하는 자유에 대해 갈망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격리는 모든 나라들의 관습이다. 모든 나라들은 세련되고 노골적인 차이만 있을 뿐 각각 자기 나름대로 양식화된 여성들의 격리를 행한다. 그러므로 여성들의 자유에 대해 일방적인 척도를 적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처음에 나는 한국의 여성들은 그들이 가치 있는 가재 도구이기에 엄격히 보호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내가 한국 여성들이 여성에 대한 우리의 관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고 물었을 때 한 지적인 한국 여성은 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에구, 가엾기도 해라. 우리는 당신의 남편이 당신을 너무 구박하고 보살피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쪾한국인과 결혼의 의미

한국인은 결혼하기 전까지 하잘것없는 존재이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고려될 여지가 없는 존재, ?떠꺼머리 총각(hobbledehoy)?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에서 결혼은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이며 사회적 명망과 사회적 지위를 향해 도약하는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이다.

길고 숱이 많은 머리를 정중앙에서 가르마 타서 등 뒤로 땋아 내리고, 짧고 띠를 두른 겉옷을 입고, 비록 몸은 숙성했다 할지라도 어쩐지 갈 곳 없어 보이며 처녀들에게는 항상 낯선 사람으로 취급되던 젊은이는 혼인 서약을 구성하는 정식화된 맞절과 함께 완전히 변모한다. 그는 옆머리를 잘라 내고 긴 머리를 묶어 새로 만들어진 ?상투?로 다듬는다. 상투끈을 묶고 말총으로 만든 테두리 없는 실내 모자, 탕건을 쓰는데 이런 머리 단장을 하지 않은 성인 남자는 볼 수가 없다. 이렇게 되면 남자들은 검은 모자를 쓰고 길고 풍성한 외투를 입게 되고 그의 볼썽사납던 걸음걸이는 위엄을 갖춘 팔자 걸음으로 변한다. 그의 소년 친구들은 이제 그의 손아랫사람들이 된다. 그의 성(姓) 뒤에는 우리 나라의 ?미스터?에 해당하는 경칭이 붙고 그를 언급할 때는 반드시 경칭이 사용된다. 말하자면 하잘것없던 존재(nobody)에서 한 몫을 하는 존재(somebody)로 바뀌는 것이다.

여자는 결혼함으로써 흔들릴 수 없는 운명의 길을 걷게 된다. 한국에서 시집 못 간 노처녀는 순결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는 절간의 여승방(女僧房) 같은 곳으로 추방되기 일쑤다. 일곱 살부터 아버지의 집 안뜰에 완전히 갇혀 살던 소녀는 다시 열일곱 살을 전후하여 시아버지 댁 안방에 갇혀 살게 된다. 친정의 낡은 구속이 파괴되면 그 때부터는 남편의 집이 그녀의 감옥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관습?이다.

이런 관습이 견딜 수 없는 고난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그저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젊은 부부들이 스스로 배우자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말은 부연할 필요가 없다. 결혼은 그들의 부친들에 의해 주재되며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아들이 스무 살이 되도록 결혼을 시키지 않는 사람은 무능하고 게으른 아비라는 평판을 듣게 된다.

열일곱에서 열여덟 살이 남자들이 결혼하는 평균 연령이다. 그러나 소녀는 나이를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는 시기라면 언제나 혼인 적령기이다. 그 소녀가 적어도 열여섯 살이 되기 전까지는 아내로서의 역할을 떠맡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 한편 열에서 열두 살의 소년들 역시 그의 부모들이 모종의 이유로 혼사를 매듭짓기를 원한다든지, 적당한 혼처가 나타난다든지 하면 한결같이 결혼한다. 그래서 이 꼬마 신랑들이 노란 모자와 청색 및 분홍색이 섞인 겉옷, 짐짓 점잔을 빼고 앉아 있는 거동은 도회지의 명물 중의 하나다.

7단원

⑴ 춘향전 (春香傳)

【앞부분의 줄거리】

전라도 남원에 사는 월매라는 퇴기(退妓)는 성 참판과의 사이에서 춘향(春香)을 낳는다. 춘향은 용모가 아름답고 시화(詩畵)에 능하였는데, 어느 봄날, 방자를 데리고 경치를 즐기러 나온 남원 부사의 아들 이몽룡(李夢龍)의 눈에 띄게 된다. 이몽룡은 첫눈에 반하여 방자를 시켜 만나 보고는, 그 날 밤으로 춘향의 집을 찾는다. 춘향과 백년 가약(百年佳約)을 맺은 이몽룡은, 그 후 날마다 춘향을 찾아 사랑을 나눈다. 얼마 후, 부친의 전출로 상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자, 몽룡은 후일을 약속하고 한양으로 떠난다.

한편, 남원에 새로 부임한 사또인 변학도는 정사는 돌보지도 않은 채 기생 점고부터 하려 한다. 애초부터 춘향의 용모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변 사또는, 춘향을 찾아 내게 하여 수청을 들라 강요한다. 그러나 춘향은 이몽룡에 대한 정절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며 거절한다. 이에 변 사또는 미천한 계집이 정절을 내세움이 가당치 않다고 하면서 옥에 가둔다.

이몽룡은 한양으로 간 뒤,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전라도 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오게 된다. 내려오는 도중에 농부들의 말을 듣고, 남원의 변 사또가 학정(虐政)을 일삼고 있다는 사실과 옥중에 있는 춘향의 사정을 알게 되며, 춘향의 편지를 가지고 가는 방자를 만나 편지 내용을 보고 춘향의 형편을 더욱 잘 알게 된다. 춘향의 집에 당도해서도 걸인의 행색으로 월매와 향단이를 속임은 물론, 옥중에 있는 춘향을 만나서도 끝내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걸인 행세를 한다. 춘향은 그런 이몽룡을 원망하기는커녕 내일 변 사또의 생일 잔치에서 자기가 죽게 될 것이며, 그러면 자기를 잘 묻어나 달라는 당부로 변함 없는 사랑과 정절을 드러낸다.

교과서에 실린 내용은, 옥에 갇힌 춘향을 만난 다음 날 아침, 변 사또의 생일 잔치 장면에서부터 이 작품이 끝나는 데까지이며, 뒤얽힌 사건과 갈등이 해결되는 대목이다.

근읍(近邑) 수령이 모여든다. 운봉 영장(營將), 구례, 곡성, 순창, 옥과, 진안, 장수 원님이 차례로 모여든다. 좌편에 행수 군관(行首軍官), 우편에 청령 사령(聽令使令), 한가운데 본관(本官)은 주인이 되어 하인 불러 분부하되,

?관청색(官廳色) 불러 다담(茶啖)을 올리라. 육고자(肉庫子) 불러 큰 소를 잡고, 예방(禮房) 불러 고인(鼓人)을 대령하고, 승발(承發) 불러 차일(遮日)을 대령하라. 사령 불러 잡인(雜人)을 금하라.?

이렇듯 요란할 제, 기치(旗幟) 군물(軍物)이며 육각 풍류(六角風流) 반공에 더 있고, 녹의 홍상(綠衣紅裳) 기생들은 백수 나삼(白手羅衫) 높이 들어 춤을 추고, 지야자 두덩실 하는 소리 어사또 마음이 심란하구나.

?여봐라, 사령들아. 네의 원전(前)에 여쭈어라. 먼 데 있는 걸인이 좋은 잔치에 당하였으니 주효(酒肴) 좀 얻어 먹자고 여쭈어라.?

저 사령 거동 보소.

?어느 양반이관대, 우리 안전(案前)님 걸인 혼금(?禁)하니 그런 말은 내도 마오.?

등 밀쳐 내니 어찌 아니 명관(名官)인가. 운봉이 그 거동을 보고 본관에게 청하는 말이

?저 걸인의 의관은 남루하나 양반의 후예인 듯하니, 말석에 앉히고 술 잔이나 먹여 보냄이 어떠하뇨? ?

본관 하는 말이

?운봉 소견대로 하오마는…….?

하니 ?마는? 소리 훗입맛이 사납겠다. 어사 속으로, `오냐, 도적질은 내가 하마. 오라는 네가 져라.?

운봉이 분부하여

?저 양반 듭시래라.?

어사또 들어가 단좌(端坐)하여 좌우를 살펴보니, 당상(堂上)의 모든 수령 다담을 앞에 놓고 진양조 양양(洋洋)할 제 어사또 상을 보니 어찌 아니 통분하랴. 모 떨어진 개상판에 닥채저붐, 콩나물, 깍두기, 막걸리 한 사발 놓았구나. 상을 발길로 탁 차 던지며 운봉의 갈비를 직신,

?갈비 한 대 먹고지고.?

?다라도 잡수시오.?

하고 운봉이 하는 말이

?이러한 잔치에 풍류로만 놀아서는 맛이 적사오니 차운(次韻) 한 수씩 하여 보면 어떠하오? ?

?그 말이 옳다.?

하니 운봉이 운(韻)을 낼 제, 높을 고(高)자, 기름 고(膏)자 두 자를 내어 놓고 차례로 운을 달 제 어사또 하는 말이

?걸인도 어려서 추구권(抽句卷)이나 읽었더니, 좋은 잔치 당하여서 주효를 포식하고 그저 가기 무렴(無廉)하니 차운 한 수 하사이다.?

운봉이 반겨 듣고 필연(筆硯)을 내어 주니 좌중(座中)이 다 못하여 글 두 귀[句]를 지었으되, 민정(民情)을 생각하고 본관의 정체(正體)를 생각하여 지었겄다.

?금준 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千人血)이요,

옥반 가효(玉盤佳肴)는 만성고(萬姓膏)라.

촉루락시(燭淚落時) 민루락(民淚落)이요,

가성 고처(歌聲高處) 원성고(怨聲高)라.?

이 글의 뜻은,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일만 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일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았더라.?

이렇듯이 지었으되, 본관은 몰라보고 운봉이 이 글을 보며 내념(內念)에

`?아뿔싸, 일이 났다.?

이 때, 어사또 하직하고 간 연후에 공형(公兄) 불러 분부하되,

?야,야, 일이 났다.?

공방(工房) 불러 포진(鋪陳) 단속, 병방(兵房) 불러 역마(驛馬) 단속, 관청색 불러 다담 단속, 옥 형리(刑吏) 불러 죄인 단속, 집사(執事) 불러 형구(刑具) 단속, 형방(刑房) 불러 문부(文簿) 단속, 사령 불러 합번(合番) 단속, 한참 이리 요란할 제 물색없는 저 본관이

?여보, 운봉은 어디를 다니시오??

?소피(所避)하고 들어오오.?

본관이 분부하되,

?춘향을 급히 올리라.?

고 주광(酒狂)이 난다.

이 때에 어사또 군호(軍號)할 제, 서리(胥吏) 보고 눈을 주니 서리, 중방(中房) 거동 보소. 역졸(驛卒) 불러 단속할 제 이리 가며 수군, 저리 가며 수군수군, 서리 역졸 거동 보소. 외올 망건(網巾), 공단(貢緞) 쌔기 새 평립(平笠) 눌러 쓰고 석 자 감발 새 짚신에 한삼(汗衫), 고의(袴衣) 산뜻 입고 육모방치 녹피(鹿皮) 끈을 손목에 걸어 쥐고 예서 번뜻 제서 번뜻, 남원읍이 우군 우군, 청파 역졸(靑坡驛卒) 거동 보소. 달 같은 마패(馬牌)를 햇빛같이 번듯 들어

?암행 어사 출도(出道)야 !?

외는 소리, 강산이 무너지고 천지가 뒤눕는 듯, 초목 금순[草木禽獸]들 아니 떨랴.

남문에서

?출도야 !?

북문에서

?출도야!?

동․서문 출도 소리 청천에 진동하고,

?공형 들라!?

외는 소리, 육방(六房)이 넋을 잃어,

?공형이오.?

등채로 휘닥딱

?애고 중다.?

?공방, 공방!?

공방이 포진 들고 들어오며,

?안 하려던 공방을 하라더니 저 불 속에 어찌 들랴.?

등채로 후닥딱

?애고, 박 터졌네.?

좌수, 별감 넋을 잃고, 이방, 호방 실혼(失魂)하고, 삼색 나졸(三色羅卒) 분주하네.

모든 수령 도망할 제 거동 보소. 인궤(印櫃) 잃고 과줄 들고, 병부(兵符) 잃고 송편 들고, 탕건(宕巾) 잃고 용수 쓰고, 갓 잃고 소반(小盤) 쓰고, 칼집 쥐고 오줌 누기. 부서지니 거문고요, 깨지느니 북, 장고라. 본관이 똥을 싸고 멍석 구멍 새앙쥐 눈 뜨듯 하고 내아(內衙)로 들어가서

?어 추워라, 문 들어온다, 바람 닫아라. 물 마른다, 목 들여라.?

관청색은 상을 잃고 문짝 이고 내달으니, 서리, 역졸 달려들어 후닥딱

?애고, 나 죽네 !?

이 때 수의 사또 분부하되

?이 골은 대감이 좌정하시던 골이라, 훤화(喧譁)를 금하고 객사(客舍)로 사처(徙處)하라.?

좌정(座定) 후에

?본관은 봉고 파직(封庫罷職)하라.?

분부하니,

?본관은 봉고 파직이요 !?

사대문에 방 붙이고 옥 형리 불러 분부하되,

?네 골 옥수(獄囚)를 다 올리라.?

호령하니 죄인을 올리거늘, 다 각각 문죄(問罪) 후에 무죄자 방송(放送)할새,

?저 계집은 무엇인다? ?

형리 여짜오되,

?기생 월매 딸이온데, 관정(官庭)에 포악(暴惡)한 죄로 옥중에 있삽내다.?

?무슨 죄다? ?

형리 아뢰되,

?본관 사또 수청(守廳)으로 불렀더니 수절(守節)이 정절(貞節)이라 수청 아니 들려 하고, 관전(官前)에 포악한 춘향이로소이다.?

어사또 분부하되,

?너만 년이 수절한다고 관정 포악하였으니 살기를 바랄쏘냐. 죽어 마땅하되 내 수청도 거역할까? ?

춘향이 기가 막혀

?내려오는 관장(官長)마다 개개이 명관이로구나. 수의(繡衣) 사또 듣조시오. 층암 절벽(層巖絶壁) 높은 바위 바람 분들 무너지며, 청송 녹죽(靑松綠竹) 푸른 남기 눈이 온들 변하리까? 그런 분부 마옵시고 어서 바삐 죽여 주오.?

하며,

?향단아, 서방님 어디 계신가 보아라. 어젯밤에 옥문간에 와 계실 제 천만 당부하였더니 어디를 가셨는지, 나 죽는 줄 모르는가??

어사또 분부하되,

?얼굴을 들어 나를 보라.?

하시니, 춘향이 고개를 들어 대상(臺上)을 살펴보니 걸객(乞客)으로 왔던 낭군, 어사또로 뚜렷이 앉았구나. 반 웃음 반 울음에

?얼씨구나 좋을씨고. 어사 낭군 좋을씨고. 남원 읍내 추절(秋節) 들어 떨어지게 되었더니, 객사에 봄이 들어 이화 춘풍(李花春風) 날 살린다. 꿈이냐 생시냐, 꿈을 깰까 염려로다.?

한참 이리 즐길 적에 춘향 모 들어와서 가없이 즐겨하는 말을 어찌 다 설화(說話)하랴. 춘향의 높은 절개 광채 있게 되었으니 어찌 아니 좋을쏜가?

어사또 남원 공사(公事) 닦은 후에 춘향 모녀와 향단이를 서울로 치행(治行)할 제, 위의(威儀) 찬란하니 세상 사람들이 누가 아니 칭찬하랴. 이 때, 춘향이 남원을 하직할새, 영귀(榮貴)하게 되었건만 고향을 이별하니 일희일비(一喜一悲)가 아니 되랴.

?놀고 자던 부용당(芙蓉堂)아, 너 부디 잘 있거라. 광한루(廣寒樓), 오작교(烏鵲橋)며 영주각(瀛州閣)도 잘 있거라. 춘초(春草)는 연년록(年年綠)하되 왕손(王孫)은 귀불귀(歸不歸)라, 날로 두고 이름이라. 다 각기 이별할 제 만세 무량(萬歲無量) 하옵소서, 다시 보긴 망연(茫然)이라.?

이 때, 어사또는 좌우도(左右道) 순읍(巡邑)하여 민정을 살핀 후에 서울로 올라가 어전(御前)에 숙배(肅拜)하니, 삼당상(三堂上) 입시(入侍)하사 문부(文簿)를 사정(査定) 후에 상이 대찬(大讚)하시고 즉시 이조 참의(吏曹參議) 대사성(大司成)을 봉하시고, 춘향으로 정렬 부인(貞烈夫人)을 봉하시니, 사은(謝恩) 숙배하고 물러 나와 부모전에 뵈온대, 성은(聖恩)을 축수(祝壽)하시더라.

이 때, 이판(吏判), 호판(戶判), 좌우 영상(左右領相) 다 지내고, 퇴사(退仕) 후 정렬 부인으로 더불어 백 년 동락할새, 정렬 부인에게 삼남 이녀를 두었으니, 개개이 총명하여 그 부친을 압두(壓頭)하고 계계승승(繼繼承承)하여 직거 일품(職居一品)으로 만세 유전(萬世流傳) 하더라.

⑵ 건축과 동양 정신

김 수 근(金壽根)

현대인에게 비친 환경 문제의 심각성은 인류 문화의 존속 여부와 직접 관련된 문제이므로, 왜 이것이 건축에서도 문제가 되어야 하느냐고 새삼스럽게 논할 필요가 없다.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환경 문제에 관하여 책임감 있는 건축이 되느냐라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필요로 하는 생활 공간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건축이 어떻게 하면 자연 환경의 균형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 나갈 수 있느냐가 문제시되어야 한다. 이것은 곧 공간 설계를 하는 건축가가 어떤 가치를 추구할 수 있으며, 그러한 가치 추구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고려해야 함을 말한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건축가의 가치관, 사고 방식, 또는 공간 개념에 관한 문제가 된다. 어떤 공간 개념이 한 건축가의 생각을 지배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공간 설계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연 환경과 인간의 생활 환경이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야 하는 오늘의 건축가들에게 필요한 공간 개념이란 어떤 것인가.

공간 개념에 대한 필자의 관심을 한국적인 공간 개념의 특징을 찾는 데서 시작되었다. 공간 개념은 보편적인 것이면서도 각 문화권마다 특유의 내용을 담고 있으리라 생각했으므로 우리 나라의 자연적인 조건들과 문화적인 여건들에 의해서 형성된 공간 개념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한 관심의 결과로서 얻은 것이 이미 발표된 바 있는 ?궁극의 공간(ultimate space)?이란 개념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그것은 가장 ?인공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 인간은 다른 생물들처럼 단순한 생존을 계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공간만도 아니고, 인간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역시 생활 수단을 마련하기 위한 생산 활동 또는 경제 활동만을 위한 공간도 아닌 ?제3의 공간?이 있어야 비로소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창작 활동을 위한 공간, 조용히 명상하는 공간, 인간의 정신 생활을 풍부하게 해 주는 여유의 공간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 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궁극의 공간인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 건축에서 문방(文房)은 특히 이러한 궁극의 공간 개념을 잘 나타내 준 것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생활의 멋을 중요한 가치로 여겨 왔던 우리 조상들의 생각을 잘 반영해 주기도 한다.

생활에서의 여유를 주는 공간이라면 더 큰 공간일수록 좋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적 공간 개념에는 그와 같은 여유를 추구하면서도 그것이 큰 공간일수록 좋다는 생각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왜 여유의 공간을 넓은 공간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우리의 국토가 너무 좁기 때문이었을까? 넓은 공간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간단했었기 때문일까? 이러한 부정적 해답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적극적인 가치 부여를 한다면 거기에는 아주 중요한 사상적 근거가 전제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인간은 결코 자연을 정복할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궁극적인 가치들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자연과의 조화를 최대한으로 살피는 공간 개념을 근거로 하고 있음이 중요한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공간 개념을 환경 문제와 결부시켜서 생각하면 어떤 시사점들을 얻을 수 있을까?

건축 행위라는 것은 자연 환경을 인간의 생활 환경으로 고쳐 가는 행위라고 할 수도 있다. 물질 문명의 발달은 계속 더 적극적인 건축 행위를 필요로 하는 것도 사실이다.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더 크고 화려한 건축물을 요구해 오는 사람들에게 건축은 아무 거리낌없이 건축 행위를 계속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팽창 위주의 건물 행위가 무제한 계속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치게 되었다. 인간의 요구 조건만이 아니라 자연의 필요 조건도 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새로운 공간 설계를 원하는 고객이나 그것만으로써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건축 행위가 적극적으로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내느냐도 생각해야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어떤 부정적 결과가 야기되는지도 고려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네가티비즘?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부정적 측면도 고려해 보는 사고 방식을 표현해 주기 위한 것이다.

네가티비즘은 결코 건축 행위를 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건축 행위를 하되 긍정적인 면과 밝은 면, 또는 인간 중심적인 면이나 건축주의 요청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건축 설계에서 제외되기 쉬운 중요한 측면들을 신중하게 고려하자는 것이 네가티비즘의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건축 행위가 전제하고 있는 기본 가치관에 관한 문제가 된다. 네카티비즘은 하나의 건축 사상 내지는 건축 철학적 입장이다.

한국적 공간 개념의 특징을 네가티비즘으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사상의 근거는 우리의 전통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전통 사상이 무엇이냐에 대한 논의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우리의 전통 문화에 크게 영향을 준 사상을 말하자면 유가 사상(儒家思想), 불가 사상(佛家思想), 그리고 도가 사상(道家思想)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 사상에 관한 한 이웃의 중국이나 일본과 꼭 같은 문화 전통을 이어받아 왔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자연 조건과 역사적 상황의 특이성 때문에 그런 사상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좀 다른 면을 강조해 오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차이점을 우리는 ?소극적?이라든지 ?소박한?이란 말로 표현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이 바로 네가티비즘적인 사상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고 싶은 것이다. 유가, 불가 및 도가의 사상에서 네가티비즘적인 요소들을 비교적 강하게 살려온 것이 우리 문화의 특징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면 그러한 네가티비즘적 요소들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 유가 사상(儒家思想)은 지나치게 실리만을 추구하는 사람을 부도덕하게 여긴다. 물질적인 손익에 너무 밝은 사람은 인격적으로 모자라는 사람으로 취급해 온 것이다. 이것은 상업주의나 금전 만능주의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해 주는 네가티비즘이다. 또, 기독교에서 말하는 황금률(golden rule)은 ?남이 너에게 해 주었으면 하는 일을 먼저 네가 남에게 하라.?라는 긍정적 표현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유가에서는 ?남이 너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은 너도 남에게 하지 마라?라는 부정적 표현 형식으로 되어 있다. 기독교는 적극적으로 선행(善行)을 주장하지만, 유가에서는 그와 같은 적극적인 선행이 끼칠 수 있는 부정적 결과를 고려해서 자기의 행위가 남에게 어떤 악(惡)을 자행하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네가티비즘적 사고 방식이다.

둘째, 불가 사상(佛家思想)은 금욕주의를 통하여 물질 생활에 대한 부정적 사고를 가르친다. 그리고 불가의 자비 정신도 인간의 고통과 번뇌에 깊은 관심을 갖게 하는 네가티비즘적 정신이다. 불가적 윤리도 남에게 행복이나 쾌락을 더해 주는 적극적 행동보다는 남에게 고통이나 불행을 끼치지 않도록 행동하게 하는 소극적 태도를 가르친다. 이것은 서양의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nism)가 말하는 최다수(最多數)의 사람들을 위한 최대 행복(最大幸福)의 추구를 행동의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수의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불행이나 고통을 가져오게 하도록 노력하라는 부정적 공리주의(negative utilitanism)에 해당하는 윤리 사상이다.

셋째, 도가 사상(道家思想)은 인간이 자기 편리를 위하여 또는 자연 정복의 목적을 위하여 기술 개발에 집념하는 것을 옳지 못한 것으로 가르쳐 왔다. 이것은 기술 만능주의에 대한 네가티비즘적 사상이다. 또, 도가에서는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가 기능적으로 완벽하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하나의 도구가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법도 없으며, 한 가지 측면에서만 볼 때는 아무 쓸모 없는 물건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유용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기능만을 고려하는 기능주의적 사고에 대하여 네가티비즘적인 반기능주의를 가르친다. 그뿐만 아니라 도가 사상에도 인간 행동의 역기능적인 면을 강조해서 가능한 한 인간의 의식적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연적인 방법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하라는 ?무위(無爲)?의 사상이 있다. 이것은 극단적인 네가티비즘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의 전통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네가티비즘을 오늘의 건축 행위 또는 공간 설계에 적용하고자 할 때 어떠한 공간 개념들을 의식하게 하는가?

네가티비즘이 시사하는 공간 개념들은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생활 공간의 한계성에 관한 것으로, 둘째는 공간의 이용으로, 그리고 셋째는 공간 설계에서 공간의 기능과 양식 또는 형태에 관한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의 전통 사상이 가지고 있는 네가티비즘은 분명히 과학 기술의 발전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갖게 해 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네가티비즘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과학 기술이 없이는 살 수 없는 현대에서 과학 기술이 개발되지 않았던 동굴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과학 기술의 발전을 멈출 수도 없거니와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만 오늘의 이 시점에서 볼 때 과학 기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특히 인간의 생활 공간에 관해서는 그러한 한계성의 인식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아무리 위대한 과학 기술의 힘이지만 인간의 생활 공간을 무제한 확장시켜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달나라 같은 우주 공간이나 바닷속 또는 땅 속 공간을 이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되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소요되는 자원을 어떻게 공급하느냐라는 문제가 남아 있다. 소모되지 않는 자원이 무제한 공급될 수 없는 한 그런 공간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의 수도 제한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얼마나 경제적인지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과학 기술에 의한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이 지구상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자연 자원과 생활 공간은 제한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공간을 이용할 때 우리는 두 가지 한계점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우리는 이 지구상에서 생물이 서식할 수 있는 전체 공간의 제한성을 전제로 하고서 그 중에서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생활 공간의 한계를 깨뜨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인간의 생활 공간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제한된 공간을 어떻게 나누어서 이용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므로 어떤 목적을 위해서든 필요 이상의 공간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적정 공간(適正空間, appropriate space)?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 인간이 차지할 수 있는 전체 생활 공간도 생태학적으로 적정 공간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개개 인간이 차지할 수 있는 공간도 적정 공간의 한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둘째, 절대적 생활 공간의 한계가 함께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 자원의 한계이므로 우리는 이 문제 때문에도 공간 이용에 관한 한계점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생물들이 살아온 공간이란 태양의 열과 빛, 맑은 공기, 물, 그리고 흙을 이용할 수 있는 자연 환경이었다. 이와 같이 자연 자원에 의존하는 생활 공간을 ?자연 공간(自然空間, natural space)?이라고 한다면, 과학 기술을 이용한 인간의 생활 공간에는 비자연적(非自然的)인 것이 많다. 인공적인 난방 장치, 냉방 장치, 조명 장치, 환기 장치, 상수도 및 하수도 시설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공간이 모두 그런 것이다.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자연 자원에 대하여 네가티비즘적인 생각을 한다면 인간의 생활 공간도 자연 공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방향으로 고쳐 나가도록 해야 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공간 설계에서 네가티비즘을 적용한다는 것은 그 설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유용하게 이용이 될 것인지를 생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 끼칠 수 있는 해(害)가 얼마나 될까 하는 것도 생각해 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란 대체로 이미 다른 생명체들에 의해서 사용이 되고 있는 공간이다. 현재 생명체가 전혀 서식하고 있지 않은 공간을 개척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아주 예외의 경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 새로운 공간을 이용하고자 하는 계획은 대개의 경우 다른 어떤 생명체의 생활 공간을 침범하는 행위가 되고 만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까지 자연의 공간은 무제한으로 우리 인간을 위해 마련된 것처럼 착각해 왔다. 이것은 마치 유럽에서 북아메리카로 건너간 이민들이 그 넓은 땅을 하느님이 자기들에게 준비해 준 것처럼 착각하고서 그 곳에 이미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이다. 현대와 같은 속도로 우리 인간이 계속 자연의 공간을 침범해 나가다가는 가까운 장래에 자연으로부터의 보복을 받아서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다는 의식 때문에 이런 문제에 대한 네가티비즘적인 사고가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

공간 이용에서 네가티비즘이 문제시되어야 하는 또 한 가지 측면은 인간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이다. 하나의 공간을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제한해 버린다는 것은 언제나 그 제한된 공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항감을 느끼게 하거나 상대적인 빈곤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대도시 안에 있는 빈민촌(ghetto)은 그 자체가 제한된 공간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사실상은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 행동의 제한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특수 공간을 만든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그 공간 밖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빈민촌에서 벗어 나오고 싶지만 바깥 공간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못 나오는 사람들은 있으나 바깥 공간에서 빈민촌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어떠한 공간 설계든 그것으로 인해서 그 공간에서 추방당하거나 제외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적으로 공간 설계는 그 제한된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이나 그 공간 밖에 있는 사람들이 꼭 같이 그 설계의 결과로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한 공간의 안과 밖이 다같이 좋은 목적을 위해 이용이 될 수 있게 된 것을 ?통합 공간(統合空間, integrated space)?이라고 한다면, 이 공간 개념은 하나의 건물 안에 있는 공간들이나 건물들 사이의 공간들, 또는 도시 공간 전체와 인간의 생활 공간 전체를 계획하고 설계하는 데도 적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공간 개념을 시로써 표현해 준 사람은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Prost)였다. ?담장 손질(mending wall)?이라는 그의 시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담을 쌓기 전에 나는 알고 싶군요,

내가 무엇을 쌓아 들이거나 무엇을 쌓아 막는지,

그리고 누구에게 내가 해를 끼치게 될 것인지를.

무언가 담장을 싫어하는 게 있지요,

그것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것이.

그러나 인간은 담이 없이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프로스트는 또한 위에서 인용한 시에서 두 집 사이에 있는 담장을 손질해야 한다는 이웃 사람들의 말을 인용한다. ?좋은 담장은 좋은 이웃을 만듭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유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전체 인구가 현재의 수준에 머문다고 하더라도 제한된 전체 생활 공간을 고려한다면 개인의 사유 공간(私有空間)은 적정 공간의 한계를 넘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것은 사유 공간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그 대신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으면서 사유 공간의 기능도 할 수 있는 ?공유 공간(公有空間, public space)?을 최대한으로 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의 공간을 독점함으로써 나에게 편리한 점도 많겠으나 그것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불편을 줄 것인지를 의식하는 것이 네가티비즘적인 사고이다.

공간의 기능과 형태에 관한 네가티비즘적인 접근 방법은 기능주의의 한계와 역기능적 요소를 의식하게 한다. 공간의 기능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설계는 있을 수 없다. 다만 설계자가 미리 생각한 공간의 기능만을 배려한 공간 설계가 문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처럼 제한된 기능만을 만족시켜 주는 기능주의적 설계일수록 역기능의 결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많다. 그것은 처음에 요청되었던 기능 자체가 불필요하게 되거나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됨으로써 새로운 기능이 요청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기능적으로 애매하면서도 다양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공간이 바람직한 것이다. 그와 같은 기능적 애매성이란 잘못된 설계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훌륭한 시의 언어가 애매한 의미를 가짐으로써 감상자들에게 여러 가지 풍부한 해석을 하게 해 주는 것과 같이 훌륭한 설계이기 때문에 기능적인 애매성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다양한 감정, 기분 또는 사고(思考)의 체험을 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공간을 ?기분 공간(氣分空間, mood space)?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기능적으로는 애매한 공간이지만 그 애매성은 계획된 애매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분 공간이란 애매하도록 설계된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의 형태(form)는 그것의 기능(function)과 독립된 것일 수밖에 없다. 기능적으로 애매한 공간은 어떤 고정된 양식의 형태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간의 기능과 형태에 관한 네가티비즘적인 사고가 시사하는 또 한 가지 개념은 구조적인 가변성이나 유연성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공간의 구조가 기능의 변화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어머니의 자궁이 태아가 성장해 감에 따라서 커져 가다가 해산 후에는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것과 같은 그러한 공간을 말한다. 그런데 공간 자체의 구조와 기능의 변화에 따라서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은 네가티비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공간이 구조상으로 변화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그 주위에 있는 공간들이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자궁이 커져감에 따라서 신체 내의 다른 공간들은 거기에 적응해서 그 구조를 변화시켜 가듯이, 외부 공간을 침범하는 공간 확장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하나의 내부 공간을 확대시킬 수 있고, 또 다시 축소시킬 수도 있는 그러한 구조적 가변성이 네가티비즘적인 사고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한 공간을 ?자궁 공간(子宮空間, womb space)?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자연이 가지고 있는 네가티비즘적인 공간 이용의 방법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개념이라 생각된다. 자연은 필요에 따라서 공간의 크기와 형태를 변화시키되 결코 필요 이상의 공간을 차지하게 하지 않는다는 자연의 방법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공간 개념이다. 이것은 또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모색하고 자연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자는 네가티비즘의 대표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상과 같은 네가티비즘적 사고는 건축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문화 영역에서도 이미 논의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새로운 것을 주장하고자 하는 논문이 아니다. 이미 있어 온 한 가지 유형의 사고 방식을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환경 문제와 관련시켜 봄으로써 공간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건축 행위를 더욱 더 책임감 있는 행위가 될 수 있게 하자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특히 ?네가티비즘?이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사고 방식이 우리의 가치관과 창작 행위에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이것을 하나의 건축 사상으로 제안하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