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그레마스의 행위소 모델의 수용과 해석

국어의 시작과 끝 2012. 5. 7. 10:47

 

그레마스의 행위소 모델의 수용과 해석

 

 

그레마스의 행위소 모델(mod?le actantiel/Aktantenmodell)은 한국에서도 기호학적, 구조주의적 문학 연구자들 사이에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고 실제 한국 문학 작품의 분석에도 자주 적용되어 왔습니다. 한국의 학자들에게 그레마스의 서사이론은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이러한 수용과 적용이 그레마스 모델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출발점으로 해서 그레마스의 모델에 대한 좀더 진전된 이해는 어떤 것인지를 탐색해보려는 시도입니다. 저는, 그렇게 함으로써 이 모델을 지금 우리에게 흔히 알려져 있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이야기 분석의 틀로 재구성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한국의 기호학 연구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그레마스의 행위소 모델은 그의 초기 저서 구조의미론(1966)에 제시된 도식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조나산 컬러나 로버트 숄즈 같은 영어권 이론가들이 그레마스의 구조의미론을 보고 간략하게 설명한 내용에 의거해서 행위소 모델을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레마스가 구조의미론에서 제시한 행위소 모델에 관한 설명과 도식은 다소 애매하고 모순된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오해가 생겨나게 되었고, 실제 텍스트에의 적용 역시 자의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레마스는 구조의미론 이후 의미에 대하여 I, II,(1970, 1983) 기호학 사전(1979) 등의 저서에서 모델을 수정하며 그 의미를 좀더 분명히 했고, 그 결과 초기의 도식이 거의 폐기되기에 이르지만, 이러한 이론적 개선은 한국의 수용 과정에서는 거의 반영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레마스가 구조의미론에서 제시하여 유명해진 도식을 검토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레마스는 기능적인 관점에서 이야기에 보편적으로 6개의 배역이 나타난다고 보고, 이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시켰습니다.

 

발신자(Destinateur) → 대상(objet) → 수신자(Destinataire)

                                      ↑

조력자(adjuvant) → 주체(sujet) ← 반대자(opposant)

 

여기서 주체는 어떤 가치 있는 대상 또는 욕망의 대상을 찾아 나서는 주인공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욕망의 관계로 정의됩니다. 탐색의 과정에는 도움을 주는 자와 방해자가 개입을 하게 마련입니다. 예컨대 신데렐라가 왕자라는 욕망의 대상을 찾아 무도회에 가려고 할 때, 대모가 나타나서 마법의 지팡이로 도움을 줍니다. 반면에 계모는 많은 일거리를 주어 신데렐라의 탐색을 방해합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쉽게 되는데, 발신자와 수신자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위의 도식은 대상이 발신자에게서 수신자에게로 전달됨을 나타냅니다. 그레마스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가 커뮤니케이션, 즉 전달의 축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체가 대상을 찾아나서서 결국 이를 획득하는 과정과 발신자가 대상을 수신자에게 전달하는 과정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주체→대상의 도식은 결국 대상이 주체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왕자는 신데렐라의 차지가 됩니다). 그런데 발신자 → 대상 → 수신자의 도식에 따르면 대상이 수신자의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 대상을 얻는 두 행위소가 둘이 되는 셈인데, 이 두 행위소, 즉 주체와 수신자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위의 도식은 제대로 말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나산 컬러는 구조주의와 시학(1975)이라는 저서에서 그레마스의 구조의미론에 제시된 발신자/수신자 쌍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직관적으로 볼 때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는 나머지 두 관계(주체/대상, 조력자/반대자) 만큼 근본적인 것은 아닌 듯 하다. 모든 이야기에 무언가를 추구하는 인물이 등장하고, 이 인물이 탐색의 과정에서 내적, 외적으로 도움을 받거나 반대에 부딪힌다는 것은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발신자와 수신자 역시 이와 동일한 정도로 근본적인 요소라는 주장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이 부분에서 그레마스는 침묵하고 있다. (컬러, 233쪽) 하지만 구조의미론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레마스가 침묵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레마스의 설명이 부분적으로 모순되고 애매한 것이 사실이고, 위의 도식은 그러한 모호성을 증폭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그레마스 도식의 기계적인 적용은 결코 텍스트의 서사 구조를 포착하는 데 기여할 수 없습니다. 행위소 모델을 분석에 적용할 때에는, 발신자/수신자 관계의 의미가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 혹은 그레마스는 왜 이러한 관계를 이야기의 근본 요소로 도입했는가 하는 등의 문제가 우선 충분히 고찰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문학과 관련된 논의들은 대개 이 문제를 생략해버린 채, 곧바로 모델의 적용에 들어갑니다. 그레마스의 모델에 따르면 이 텍스트는 이러이러하게 분석된다는 식으로. 그러한 분석에서는 발신자/수신자의 개념의 의미가 해석자 자신의 암묵적인 이해에 따라서 달라지고, 구체적인 텍스트에서 어떤 인물을 발신자나 수신자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자의적으로 결정되기 일쑤입니다.

몇 가지 사례를 통해서, 한국 문학의 분석에서 발신자/수신자 관계가 어떻게 해석되고 적용되고 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레마스의 행위소 모델을 소개하고 한국 문학에 적용한 영향력 있는 학자로서 이어령을 꼽을 수 있겠는데, 그는 우주론적 언술로서의 처용가라는 논문에서 발신자/수신자(그의 번역에 따르면 발송자/수령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달의 축으로서 프로프의 설화 분석으로 보면 왕은 발송자가 되고 그 말을 듣고 모여오는 사람 이를테면 공주를 구하러 온 왕자와 같은 주인공이 수령자가 됩니다. 이 축에서는 알리고 아는 그 기능에 의한 층위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이어령, 67) 여기서 이어령은 전달을 의사소통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욕망의 대상에 관해 알리는 자가 발신자이고(예컨대 왕은 전국에 방을 붙입니다), 이를 통해 욕망의 대상을 알게 되는 자가 수신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단 destinateur(Adressant)와 destinataire(Adressat)라는 용어 자체에 잘 부합되는 해석입니다. 이 두 개념은 일상적인 의미에서 의사 전달 과정의 두 당사자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어령의 해석에 따르면, 발신자에게서 수신자에게로 전달되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에 관한 정보입니다. 여기서 수신자와 주체의 관계도 어느 정도 해명됩니다. 주인공은 수신자로서 탐색해야 할 대상에 대한 정보를 얻은 후에, 주체로서 이 대상을 찾아나섭니다. 수신자와 주체는 항상 동일 인물, 즉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이 욕망(탐색)의 축에서 정의되면 주체가 되고 정보전달의 축에서 정의되면 수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보전달의 축은 욕망의 축의 전제가 됩니다. 어떤 대상을 욕망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대상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발신자는 욕망의 대상에 대해 알려주는 자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주인공에게 대상에 대한 욕망을 불러 일으켜서 탐색을 촉발하는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다시 신데렐라의 예를 들면- 왕자는 신데렐라에게 욕망의 대상인 동시에, 무도회에의 초청장을 보낸 발신자입니다. 흥부와 놀부에서는 흥부가 발신자가 되고 놀부가 수신자가 될 것입니다. 흥부가 들려준 이야기가 놀부에게 박씨에 대한 욕망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또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 발신자는 100년 동안 가시 넝쿨 속에 잠자고 있는 공주에 관한 소문을 전한 익명의 다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발신자의 기능을 욕망의 대상에 관해 알려주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발신자의 존재는 이야기에 근본적인 요소라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주인공은 누군가로부터 들어서 대상에 대한 욕망을 갖게 될 수도 있지만, 그러한 중개 없이 스스로 무언가를 갈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우연히 황금 덩어리를 발견하고 서로 다툰 형제의 이야기를 생각해봅시다. 이 이야기에서는 황금을 갖고 싶어하도록 만든 인물이 따로 없습니다. 황금욕에 눈이 어두웠던 미다스왕의 이야기에서도 황금이라는 대상에 대한 욕망이 누구로부터 촉발되었는지는 불투명합니다. 디오니소스신은 미다스에게 단지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을 뿐이고,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의 뜻을 거슬러서 황금을 무한정 갖고 싶다는 소원을 말합니다. 이 이야기 자체에는 미다스의 황금욕을 조장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 발신자의 자리는 공란으로 남겨져야 하고, 발신자/수신자의 축을 따로 설정하는 것이 불필요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적당한 발신자를 찾기 어려울 때 발신자의 자리를 비워두고 싶지 않은 해석자의 욕망이 행위소 모델의 무리한 적용으로 귀결되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전화'의 의미 구조 분석이라는 논문에서 박혜주는 염상섭의 작품 전화에서의 행위소적 구조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습니다(박혜주, 317).

 

속물적 욕망 → 기생바람(채홍) → 이주사

                         ↑

돈(전화, 선물) → 이주사 ← 아내, 김주사

 

속물적 욕망을 발신자로 설정한 것은 아마도 이주사가 기생 채홍을 찾아가 바람을 피우도록 만든 것이 속물적 욕망이라는 뜻에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이미 욕망의 축으로 정의된다면, 발신자를 속물적 욕망으로 정의하는 것은 욕망이 욕망을 불러일으켰다는 식의 동어반복입니다. 그것은 이주사를 기생에게 찾아가도록 사주한 인물을 찾을 수 없는 데서 나온 궁색한 해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발신자/수신자의 관계를 이어령의 관점과는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로, 곽진석의 논문 탐색담의 유형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논문에서는 수신자와 주체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곽진석은 수신자를 주체의 노력에 의해서 획득된 대상이 최종적으로 귀착되는 인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발신자의 요구에 의해 주체가 대상을 추구하고, 대상은 주체의 손을 거쳐서 수신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주체가 신데렐라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탐색 행위를 하는 경우에는 주체와 수신자가 일치하지만, 김유신처럼 나라를 위한 행위에 있어서 수신자는 김유신 자신이 아니라 나라가 됩니다(수신자를 곽진석과 같은 의미에서 해석하는 사람들은 수신자보다는 수익자라는 번역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서 곽진석은 김유신전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하고 있습니다.

 

(천의(�n)) → 평정(ꠕꠗ � → 신라

                     ↑

갈의노인(褐 yꠓꠘ � → 김유신 ← 적군

 

이어령의 경우에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전달되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에 관한 정보였던 반면, 곽진석의 해석에서는 대상 자체가 전달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이런 의미의 전달은 김유신에게서 신라의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김유신이 신라에 평정을 가져왔다), 천의가 직접적인 전달의 주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발신자를 천의로 볼 때, 곽진석은 발신자란 주체로 하여금 욕망하고 탐색하게 하는 자라는 이어령의 관점을 따르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김유신이라는 주체는 천의에 따라서 세상을 평정하는 길에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발신자는 주체와의 관계에서 정의되어야 하고, 수신자인 신라와 직접적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도식은 천의와 김유신 사이의 관계를 전혀 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유신과 수신자인 신라 사이의 전달 관계도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도식 자체와 도식 속에 나타나는 행위소의 기능에 대한 해석이 이렇게 서로 모순되고 있는 것입니다.

발신자/수신자의 개념 규정이 명확히 내려지지 않은 경우에 행위소 모델의 적용이 얼마나 자의적으로 될 수 있는지를 김만수의 논문 함세덕 '동승'의 행위소 모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함세덕의 희곡 동승을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도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김만수, 239쪽).

 

모성(발신자) → 어머니(대상) → 모성(수신자)

                              ↑

미망인, 초부(협조자) → 동승(주체) ← 주지스님(방해자)

 

그러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입니다. 발신자와 수신자가 모두 모성이라는 사실은, 이 작품이 모성을 그리워하는 소년의 모습을 그린 멜로드라마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해준다. 소년이 모성을 그리워 한다면, 모성을 욕망의 대상으로 볼 수도 있겠는데, 어떻게 모성이 발신자인 동시에 수신자가 된다는 것인지 이 논문의 내용만으로는 도저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어머니라는 대상이 모성으로부터 모성으로 전달된다는 뜻인지? 이처럼 난해한 해석에서는 발신자, 수신자의 개념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제 견해에 따르면, 그레마스의 행위소 모델에서 발신자/수신자의 관계의 핵심적인 의미는 행위소 개념의 발생 맥락과 이야기의 의미론적 기반을 이루는 가치 체계의 문제라는 두 가지 요인을 고려하지 않고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레마스의 행위소 모델을 낳은 세가지 중요한 저서가 있는데, 뤼시엥 테니에르의 구조적 통사론 개설, 블라디미르 프로프의 민담 형태론, 마지막으로 수리오의 2십만개의 극적 상황들이 그것입니다. 테니에르는 언어학자이자 문법학자로 문장을 주부와 술부로 이분하는 전통적 문법을 거부하고, 하나의 동사를 중심으로 여러 항의 행위소들이 관계를 맺는 통사 모델을 제안했습니다. 행위소, actant이란 개념은 테니에르에게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로써 동사는 일종의 함수로 이해됩니다. 예컨대 가다라는 동사는 나, 너, 기차 등등의 행위소를 항으로 하는 1항 함수이고, 먹는다는 동사는 한편에 나, 너, 강아지 등의 행위소와 다른 편에 사과, 고기, 빵 등의 행위소를 요구하는 2항 함수라는 것입니다. 테니에르는 4개의 행위소를 구분합니다. 제1행위소(주체 또는 주어:행동을 수행하는 자), 제2행위소(대상 또는 목적어: 행동을 당하는 자), 제3행위소(수혜자 또는 간접목적어), 반주어(contrasujet, 수동문장의 주어). 구조의미론에서 그레마스는 테니에르의 행위소 개념들이 비체계적으로 나열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예컨대 주체와 대상은 이항 대립으로 맞서고 있는 반면, 제3행위소인 수혜자에 대응되는 행위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문장에서 동일한 주어라도 대상(직접 목적어)에 대해서는 주체라고 규정하고, 수혜자에 대해서는 시혜자라는 행위소로 규정하자고 제안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수동문의 주어인 반주어를 제외한 테니에르의 3 행위소가 그레마스에게서 다음과 같은 두개의 행위소 쌍으로 변형됩니다.

 

주체 대상

발신자(시혜자) 수신자(수혜자)

 

이것이 그레마스의 행위소 모델의 출발점입니다. 이 맥락에서 발신자/수신자는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준다는 형식의 문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레마스가 말한대로 발신자/수신자는 전달의 축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신자를 수익자라고 번역하는 것도 일견 타당해보입니다.

그런데 그레마스가 문장 단위를 벗어나서 이야기 텍스트에 적합한 행위소 모델을 구상하면서 발신자의 개념은 다소 변화합니다. 여기서 그레마스는 프로프와 수리오의 모델에 의존하는데, 프로프는 잘 알려진대로 러시아 요정담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역할들을 7개로 정리했고, 수리오는 드라마에 보편적인 6개 배역을 점성술적 용어를 사용해서 정리했습니다. 그레마스는 전혀 다른 장르에서 서로 독립적으로 구상된 모델이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 흥미를 느끼고 특정 장르를 초월해서 이야기 구조의 행위소 모델을 세우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여기서 프롭과 수리오의 인물들을 차례로 열거해 보겠습니다.

 

프롭

 

악한

수여자(주인공에게 마법의 수단을 주는 인물)

조력자

찾는 대상이 되는 공주와 그녀의 아버지

파견자(주인공을 탐색에 보내는 사람)

주인공

가짜 주인공

 

수리오

 

사자: 지향적인 힘

태양: 지향되는 가치

땅: 이 가치의 잠정적인 수혜자

화성: 반대자

저울: 재판관. 가치의 공정한 분배자

달: 구조자

 

그레마스는 이 두 모델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행위소 모델로 통합시킵니다.

 

주체: 주인공/사자

대상: 찾는 대상/태양

발신자: 파견자/저울

수신자: 주인공/땅

조력자: 수여자, 조력자/달

반대자: 악한, 가짜 주인공/화성

 

이러한 비교를 통해서 우리는 프롭의 모델에서 주체와 수신자가 일치하고(주인공), 수리오의 모델에서는 양자가 다르다는 사실(사자/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어느 정도는 그레마스 모델에 대한 이어령의 해석과 곽진석의 해석 사이의 차이에 대응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령은 발신자/수신자의 관계를 어떤 가치 대상의 전달 관계로 보지 않고 정신적인 전달의 관계, 대상에 대한 욕망을 일깨우고 일깨워지는 관계로 해석했습니다. 프롭의 모델의 파견자를 발신자로 보는 것은 이러한 해석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파견자가 발신자라면 당연히 파견되는 자인 주인공이 수신자로 정의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주체와 수신자가 일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울을 가치의 분배자로 하고 땅을 가치의 수혜자로 하는 수리오의 모델은 그레마스가 테니에르에 입각해서 정의한 발신자/수신자 개념의 본래 의미(시혜자와 수혜자)에 좀더 가깝습니다. 그것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준다는 문장형식의 틀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프롭의 모델에서 발신자/수신자의 관계는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하도록 시킨다는 사역 문장의 구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테니에르의 통사론에서는 사역문장에 특유한 행위소적 관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결국 발신자/수신자 관계의 의미는 프롭의 모델을 통해서 더 확장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레마스는 어떻게 발신자/수신자의 이 두 가지 의미, 사역 동사적 의미(시킨다)와 수여 동사적 의미(준다)를 동일시할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그레마스는 구조의미론에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프롭의 파견자와 수리오의 저울을, 프롭의 주인공과 수리오의 땅을 등치시키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관점을 어떤 통합적인 틀 속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한, 해석자는 두 관점 사이에 어떤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어령은 프롭적인 관점을 택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수리오적 관점으로 이 모델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곽진석은 절충을 시도하여, 발신자는 프롭의 파견자로 보고, 수신자는 수리오의 땅(수혜자)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이론의 일관성을 파괴하는 해석입니다. 파견자는 파견되는 자에 대응되어야 하고 수혜자는 시혜자에 대응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레마스는 의미에 대하여(1970)에서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가 계약의 관계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계약은 특정한 가치 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프롭이 분석한 민담의 줄거리 구조는 다음과 같이 도식화될 수 있습니다.

 

계약의 확립 계약의 수행 보상에 의한 승인 또는 징벌

 

여기서 그레마스가 말하는 계약은 근대 민법에 따른 대등한 당사자 간의 계약이라기보다는 성서적 의미의 신과 인간의 계약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신은 발신자로서 인간에게 어떤 과업의 수행(탐색)을 요구합니다. 이 때 신은 파견자로서의 발신자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이 약속을 지켰을 때 신은 인간의 노력에 대해 보상을 해줍니다. 그것은 수혜자이자 심판자, 즉 수리오의 저울로서의 발신자입니다. 발신자의 두 가지 의미가 계약의 성립과 완성이라는 과정 속에서 차례차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레마스는 기호학 사전(1979)에서 발신자의 두 가지 기능을 명백히 구분합니다. 하나는 조작하는 발신자(탐색을 촉발하는 발신자)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하고 은혜를 베푸는 발신자입니다. 그러나 이들 기능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전 과정에서 차례차례 나타나는 발신자의 두 가지 양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레마스는 조작하는 발신자를 최초의 발신자로, 심판하는 발신자를 최후의 발신자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조작하는 발신자든, 심판하는 발신자든 간에, 우리는 발신자를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가치체계의 관리자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가치 체계에 입각해서 발신자는 주체를 탐색의 길로 인도하고 그의 행동에 대한 평가를 내리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진짜 주인공과 가짜 주인공이 구별되고 그에 따라 상과 벌이 배분됩니다. 가짜 주인공이란 명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주어진 계약의 위반자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에 따를 때 수신자와 주체는 항상 일치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욕망의 대상과의 관계에서 주체로 정의되고, 발신자와의 관계에서 수신자가 됩니다. 발신자는 수신자를 평가하고, 이 수신자는 주체로서 자기가 원하는 대상에 일정한 가치를 부여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행위소적 구조를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나타낼 수 있겠습니다.

 

발신자 → 수신자-주체 → 대상

 

발신자를 단순히 욕망하게 하는 자로 보지 않고 가치체계의 관리자라고 정의하면,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발신자는 왕자가 아니라 신데렐라의 대모가 될 것입니다. 대모는 신데렐라의 착한 성격을 높이 평가하여 그녀에게 행복을 안겨주고 의붓 언니들의 못된 성질을 심판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대모를 통해서 선과 악의 질서가 다시 확립되고 가치의 재분배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흥부와 놀부의 경우에도 흥부가 놀부에게 욕망을 일깨우는 발신자라고 볼 것이 아니라, 흥부와 놀부, 이 두 주인공을 평가하는 심판자의 역할을 하는 제비를 발신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미다스왕의 경우도 황금욕이 발신자가 아니라,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의 황금욕을 심판하고 그를 은자의 삶으로 이끌어가는 디오니소스가 발신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 의할 때, 우리는 발신자/수신자의 축이 이야기 구조에서 얼마나 핵심적인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나산 컬러의 말대로 주인공이 어떤 가치 대상을 추구하는 것은 상당히 보편적인 이야기의 구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에는 거의 언제나 대상을 추구하는 주인공의 행위에 대해 평가하는 심급이 수반되게 마련입니다. 발신자/수신자의 축은 이야기의 이러한 차원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주사의 발신자를 속물적 욕망으로 보는 관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가 드러납니다. 발신자는 이주사의 욕망을 속물적이라고 평가하는 주체와 관련되는 것이지, 결코 속물적 욕망 자체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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