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설의 개념과 특성
1.1 소설의 개념
소설이란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과 흡사한 허구적인 인물과 그와 관련된 가공(架空)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산문 형식의 문학이다. 소설의 상위 범주는 서사(narrative, 敍事)이며, 서사 문학에는 소설, 설화, 민담, 전설 등이 포함된다.
1.2 소설의 어원
① 동양: 동양의 경우, 소설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장자(莊子)> 외물편이다. 이때 소설은 대도(大道)와 거리가 먼 꾸민 말로서, 명예를 구하는 속된 말 나부랭이 또는 패(稗), 즉 가담항어(街談巷語)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오늘날의 소설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② 한국: 이규보의 <백운소설(白雲小說)>에 소설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지만, 대개 패관문학(稗官文學)·패설(稗說)·패사(稗史)·야승(野乘)·수필 등의 포괄적이고 보잘것없는 속설의 개념에 가깝게 인식되어 왔다. 특히 조선시대 유학자들에 의해서 그 가치는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는데, 개화기에 이르러 근대적 소설 개념을 수용한 결과 그 효용성을 인정받게 된다. 즉 소설이 서사 문학의 핵심 장르가 된 것은 근대 이후이다.
③ 서양: 중세 이후로 로망, 노블, 픽션 등의 의미로 이해되었다. ‘로망(roman)’은 중세 기사들의 무용담(武勇談)이나 흥미 위주의 연애담을 가리키는 말로, 라틴어가 아닌 속어(俗語), 즉 로망어로 쓴 이야기라는 뜻이다. ‘노블(novel)’은 이탈리아어인 ‘노벨라(novella)’에서 유래한 말로 새롭고 신기한 내용의 짤막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픽션(fiction)’은 ‘허구(虛構)’, ‘상상(想像)’의 뜻에서 ‘꾸며 낸 이야기’의 뜻으로 확대되어 소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1.3 소설의 특성
① 허구성(虛構性): 인생을 모방·반영한 가공적 사실로 이루어짐→[가공적 사실]
② 진실성(眞實性): 가공적인 사실이긴 하나 인생의 참 모습을 추구함→[진리 형상화]
③ 예술성(藝術性): 예술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함→[예술적으로 창조된 세계]
④ 서사성(敍事性): 이야기 전개를 일정한 시간적 흐름에 따라 산문 형식으로 표현함→[산문 문학]
1.4 소설의 구성 요소
(1) 소설의 3요소
① 주제(theme): 작자의 인생관이 용해된 작품의 중심 사상. 직접적으로 명시되기보다는 인물의 성격과 사건의 전말을 통해 제시되는 것이 보통.
② 구성(plot): 필연적인 인과 관계에 따라 사건을 유기적으로 배열하는 것.
③ 문체(style): 언어를 부려 쓰는 작가의 태도로서 문장으로 구현된 작가의 개성.
(2) 소설 구성의 3요소
① 인물(character): 작중 행동의 주체로 개성, 전형성, 보편성 등을 지녀야 함.
② 사건(story): 작중에 전개되는 이야기로 복선(伏線)이나 암시(暗示)에 의해 인과성, 필연성을 지녀야 함.
③ 배경(setting): 인물 간의 갈등이 펼쳐지는 시간적∙공간적 환경으로, 인물의 심리와 사건 전개에 대한 암시적 역할을 담당함.
2.2 소설 문학의 분류
(1) 길이에 따른 분류
짧은 순서로, ‘장편(掌篇) 소설→단편 소설→중편 소설→장편(長篇) 소설’로 분류한다. 장편(掌篇) 소설이란 흔히 ‘콩트(conte)’라고 하는 것으로 소설 형식 중 가장 짧다. 장편(長篇) 소설은 서구의 로망(roman), 노블(novel)에 해당하는 것으로 상당히 길다. 대하소설(大河小說)이라 해서 10권 이상에 이르는 것도 있다. 물론 연작소설(聯作小說)과는 다르다.
(2) 문예 사조에 따른 분류
① 낭만주의 소설: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발생하여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고,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이며, 현실적이기보다는 낭만적인 경향을 띤 소설을 가리킨다. 서양에서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환상적, 열정적, 주정적인 낭만주의 소설이 풍미(風靡)하였으며, 한국 현대문학사에서는 1920년대 나도향, 김유정 등의 소설을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이효석의 서정주의(抒情主義) 소설도 이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다.
② 사실주의 소설: 낭만주의 소설에 대한 반동으로 발생하여 인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 합리적으로 묘사한 소설이다. 현실성(reality)을 중시하며, 현실을 과장하거나 주관화하는 것을 절제하고 사실적(寫實的)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감정이 절제되고 공상에 빠지지 않는 특징이 있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는 김동인, 현진건, 염상섭의 소설을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③ 자연주의 소설: 자연 과학의 엄밀성을 소설에 적용한 것으로 19세기 말에 프랑스에서 등장한 소설이다. 인물을 하나의 객관적 자연물로 보고 본능적인 욕망, 빈곤 등의 힘에 의해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소설로서, 한국 현대문학사에서는 1920년대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 김동인의 <감자>(1925) 등이 대표적이다.
④ 심리주의 소설: 20세기에 들어와서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를 추구한 소설이다. 프로이드의 정신 분석학의 영향으로 인간의 내면 심리를 주로 묘사하며, 1인칭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기술되는 특징을 지닌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는 1930년대의 이상(李箱)의 <날개>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최명익의 <무성격자>, <심문(心紋)>, <장삼이사(張三李四)> 등도 자의식의 세계를 짙게 드러낸 심리주의 계열의 작품이다.
⑤ 실존주의 소설: 실존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인간이 일정한 상황에 봉착하였을 때 어떻게 행동하고, 그의 자유 의지에 따라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개인의 고독, 자기 정체의 불분명성, 세계의 불명료성과 부조리성 등을 묘파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소설이다. 사르트르의 작품을 통하여 선전되고 문학 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는 장용학의 <요한시집> 등 전후(戰後) 문학에서 이와 같은 경향을 띤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3) 성향과 형식에 따른 소설의 분류
① 농민(農民) 소설: 농민계몽소설, 농민계급소설, 농촌소설, 전원소설, 향토소설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범박하게 농민의 현실을 다룬다는 입장에서는 농민소설, 농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입장에서는 농민계몽소설(심훈의 <상록수>), 농민계급의 현실 인식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농민(계급)소설(이기영의 <고향>), 농촌생활을 소재로 취한다는 입장에서는 농촌소설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또 전원의 삶을 예찬한다는 입장에서는 전원소설, 반도시적(反都市的)∙반문명적(反文明的) 관점을 취한다는 입장에서는 향토소설로 분류하기도 한다.
② 경향(傾向) 소설: 순수한 창작 의욕과 예술성보다는 일정한 정치적·사상적 경향으로 기울어져 대중을 그와 같은 방향으로 계몽하고 유도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닌 소설을 말한다. 러시아혁명 이후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계급문학적 경향이 강조되면서 한때 공산권에서 특히 이런 작품 경향이 활발하였다. 한국 문학사에서 경향문학은 일제 강점기에 등장한 계급문학을 의미한다. 이기영(李箕永)·조명희(趙明熙)·송영(宋影) 등의 농민문학과 한설야(韓雪野)·이북명(李北鳴) 등의 노동문학은 식민지시대 경향문학의 성과이다.
한편 그 초기 형태를 보통 신경향파 소설이라 한다. 신경향파 문학의 특징은 소재를 궁핍한 데서 찾은 것. 지주 대(對) 소작인 또는 공장주 대(對) 노동자의 대립을 중심 플롯(plot)으로 한 것, 결말이 살인·방화로 끝나는 것 등이다. 신경향파 소설의 대표작품으로는 1920년대 김기진, 박영희, 최서해 등의 소설을 들 수 있다.
③ 가전체(假傳體): 어떤 사물이나 동물을 의인화하여 그 일대기를 사전정체(史傳正體)의 형식에 맞추어 허구적으로 풀어 쓴 소설을 말한다. 가전체소설은 허구적 주인공의 행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감계(鑑戒)를 주는 것이 목적이므로 매우 풍자 문학에 해당한다. 고려 중기 임춘의 <국순전(鞠醇傳)>과 <공방전(孔方傳)>, 이규보의 <국선생전(鞠先生傳)>,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 이곡의 <죽부인전(竹夫人傳)>, 식영암의 <정시자전 (丁侍者傳)>, 이첨의 <저생전(楮生傳)> 등이 이에 해당한다.
④ 몽유록(夢遊錄)계 소설: 꿈속의 일을 소재로 하여 구성된 소설을 말한다. 현실세계의 주인공이 꿈을 통해 다른 세계로 들어가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꿈에서 깨어 다시 현실 세계로 되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대개 현실, 꿈, 현실로 진행되는 액자구성을 취하고 있다. <금오신화(金鰲新話)>가 그 초기적 편린(片鱗)을 보여주고 이후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에서 그 유형성이 확립되었다. 이후에는 <수성궁몽유록(壽聖宮夢遊錄)>처럼 소설에 가까워진 경우도 많다.
⑤ 풍자(諷刺) 소설: 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모순과 불합리에 관하여 조롱·멸시·분노·증오 등의 여러 정서 상태를 통하여 독자를 감동시켜 이를 비판하고 고발하는 사회적 소설 양식이다. 풍자는 어리석음의 폭로, 사악함에 대한 징벌을 주축으로 하는 기지(wit)·조롱(ridicule)·반어(irony)·비꼼(sarcasm)·냉소(cynicism)·조소(sardonic)·욕설(invective) 등의 어조를 포괄한다. 김유정의 <만무방>,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치숙>∙<미스터 방>,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 등이 이에 해당한다.
⑥ 세태(世態) 소설: 어떤 특정한 시기의 풍속이나 세태의 한 단면을 묘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소설양식을 말한다. ‘시정소설(市井小說)’ 또는 ‘풍속소설(風俗小說)’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세태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모든 시대에 타당한 인간적 진실을 지닌 인물이 아니라, 어떤 특정 시기의 특정 사회적 양상에 타당한 진실을 지닌 인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태소설의 대표적인 예로는 박태원의 <천변풍경>, 채만식의 <탁류> 등을 꼽는다. <천변풍경>은 청계천변을 무대로, 도시 외곽 지대의 하층민들의 삶의 모습을 카메라가 영화를 찍듯이 객관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또 <탁류>는 군산을 배경으로 하여, 정 주사라는 몰락한 양반가문의 이야기를 큰딸 초봉(初鳳)을 중심으로 하여 펼쳐나가는 작품이다. 당대의 세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금전숭배 사고방식이 삶의 현장에서 어떤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지를 세밀하게 관찰,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다.
3.구성의 유형과 분류
3.1 구성의 개념
소설에서 이야기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를 화소(話素, motive)라고 한다. 화소가 모여 한 편의 이야기를 이룬다. 이때 화소가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된 것을 ‘스토리(story, 이야기)’라고 한다. 또 그 화소들이 실제 작품에 출현하는 순서를 ‘플롯(plot)’이라 한다. ‘플롯’ 역시 사건의 서술이지만, 인과 관계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스토리’와 다르다. 소설의 구성이란 흔히 ‘플롯’과 동의어로 간주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시간적 순서[→스토리]와 인과적 순서[→플롯]에 의해 배열된 모티프들의 전체를 이르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① 스토리(story, 줄거리): 시간적 순서대로 배열된 사건의 진술로, ‘그 다음엔’, ‘그리고 또’와 같이 진행된다.(독서 후의 인상)
(예) 왕이 죽고, 그 다음에 왕비가 죽었다.
② 플롯(plot 구성) : 인과관계에 중점을 둔 사건의 서술로, ‘왜냐 하면?’의 논리로 진행된다.(독서 중의 감상 대상)
(예) 왕이 죽자, 왕비도 슬퍼서 죽었다.
- 스토리 : abcdefghijklmnopqrstuvwxyz
- 플 롯 : F A B H I J E R S T V Y Z
3.2 구성의 단계
① 3단계 구성: 발단→전개→결말[始中終]→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② 4단계 구성: 발단→전개→절정→결말[대단원]
③ 5단계 구성: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대단원]
㈀ 발단: 작품의 도입 단계로 등장인물이 소개되고 배경이 제시되며 사건의 실마리가 나타나는 부분.
㈁ 전개: 사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단계로 사건이 복잡하게 얽히고 갈등과 분규가 일어나며 인물의 성격도 변화 발전하는 부분. 복선, 암시, 생략, 서스펜스 등의 기교가 요구되는 단계.
㈂ 위기: 사건이 절정에 이르는 계기가 되는 단계로 사건의 극적 반전을 가져오는 모멘트가 나타나는 부분.
㈃ 절정: 갈등과 분규가 가장 격렬해지고 사건이 최고조에 이르는 단계이며 동시에 사건 해결의 분기점이 되는 단계. 작품 전체의 의미가 제시되며 위기가 반전되는 단계.
㈄ 결말: 사건이 마무리되며, 모든 갈등과 분규가 해결되고 주인공의 운명이 결정되는 단계.
3.3 구성의 유형
(1) 이야기의 가짓수에 따른 분류
① 단순구성(simple plot)
한 가지 이야기만이 전개되는 구성이다. 단일한 사건이 전개되어 단일한 인상을 주고 단일한 효과를 노리는 구성 방식이다. 주로 단편 소설에서 보인다.
② 복합구성(intricate plot)
두 가지 이상의 이야기가 복합적으로 얽혀 전개되는 구성으로 현대 소설, 장편 소설에 흔히 나타나는 구성 방식이다.
③ 피카레스크 구성(picaresque plot)
독립된 각각의 이야기가 동일한 주제로 엮어지거나, 각각 다른 이야기에 동일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구성이다. 피카레스크소설은 대체로 1인칭 서술자 시점으로 주인공이 고백을 하는 형식으로, 독자와의 친밀감이 생겨, 실감나게 읽을 수 있게 한다.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 <원미동 사람들>, <호밀밭의 파수꾼>, <천변풍경> 등이 있다.
④ 액자식 구성
이야기 속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액자처럼 끼어들어 있는 소설을 말한다. 즉 외부 이야기 속에 내부 이야기가 들어 있는 구성 방식으로, 외부 이야기가 액자의 역할을 하고 내부 이야기가 핵심 이야기가 된다. 박지원의 <옥갑야화>와 김만중의 <구운몽>이 이에 해당되며, 김동인의 <배따라기>, <광화사>, 김동리의 <무녀도(巫女圖)>, <등신불>, 전영택의 <화수분>, 현진건의 <고향>, 황순원의 <목 넘이 마을의 개>, 이청준의 <매잡이>, <병신과 머저리>, <선학동 나그네>, 김승옥의 <환상수첩>등이 이에 해당한다.
예)철과 나는 베란다 위에 앉아 있었다. 막연한 원시적인 공포감 같은 소심한 느낌에 사로잡혀 무한정 묵묵히 앉아 있었다. 철은 먼 하늘가에 시선을 준 채 연방 담배를 피웠다. 이렇게 한동안 말없이 앉았다가 철은 문득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주었다./형은 스물일곱 살이었고 동생은 스물두 살이었다./형은 둔감했고 위태위태하도록 솔직했고, 결국 조금 모자란 사람이었다./해방 이듬해 삼팔선을 넘어올 때 모두 긴장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판에 큰 소리로,/“야하, 이기 바루 그 삼팔선이구나이, 야하.”/이래 놔서 일행 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일이 있었다.
-이호철, <나상(裸像)> 중에서
→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이 소설이 액자식 구성임을 보여주는 표지 역할을 함에 유의할 것.
(2) 사건의 진행 방식에 따른 분류
① 평면적 구성[진행적 구성]
사건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적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유형이다. 일대기적 구성을 지닌 우리의 고대 소설에서 흔히 발견되며, 서구에서 중세의 로망(roman) 이후 근대 소설에 이르기까지 보편화된 전통적 구성 방법이다.
② 입체적 구성[분석적 구성]
사건의 전개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전개하지 않고, 순서를 바구어 진행하는 방식이다. ‘현재→과거→미래’ 또는 ‘과거→미래→현재’ 등으로 역행시켜 진행시키는 구성 유형으로 현대 소설, 특히 심리주의 소설에서 흔히 나타나는 구성이다.
(3) 통합성 유무에 따른 분류
① 극적 구성[견고한 구성, 유기적 구성]
작품 속의 여러 가지 삽화나 사건 등이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의 순서에 따라 극적인 진행이 이루어져 완전한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되는 구성 방식이다. 단일 구성이나 평면적 구성은 극적 구성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② 삽화적 구성[산만구성, 이완된구성]
작품의 중심 사건과 밀접한 관련성이 없는 듯이 보이는 삽화. 사건들이 산만하게 연결되었거나, 불필요하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사건들이 섞여 있는 구성 방식이다. 피카레스크식 구성, 복합 구성이나 입체적 구성과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
4. 인물의 유형과 갈등
4.1 인물의 개념
소설 속의 등장인물 및 그 인물의 개성을 말한다. 보통 ‘캐릭터(character)’라고 한다. 인물은 행동의 주체, 주제의 구현자라는 점 때문에, 현대소설의 궁극적 목표가 대개 인물을 통한 인간성의 탐구에 있다는 점 때문에 중요하다. 물론 인물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주인공이며, 근대 이후 소설에서 주인공은 대개 ‘문제적 개인’이다. 문제적 개인이란 이 변화무쌍한 세계 속에 내던져져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진정한 가치를 찾기 위해 좌충우돌하며 자기 길을 찾아 일종의 여행을 떠나는 인물을 말한다. 그 인물의 모습을 보며 독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과연 살만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4.2 인물의 유형
(1) 역할에 따른 분류
① 주동 인물(protagonist, 주동자): 소설 속의 주요 사건의 중심에 자리하면서 행동을 주도하는 사람. 대개 긍정적 성격의 인물.
② 반동 인물(antagonist, 반동자, 훼방꾼): 주인공에 대립되는 반대자, 적대자. 대개 갈등을 일으키는 부정적 성격의 인물
③ 부수적 인물(minor character): 이야기 내용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주변적인 인물.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역할을 함.
예) 춘향전의 경우 : 성춘향, 이몽룡(주동 인물), 변 사또( 반동 인물), 향단과 방자(부수적 인물)
(2) 전형성의 존재 여부에 따른 분류
① 전형적 인물: 어떤 특정 부류나 계층의 보편적인 성격을 잘 대변하는 인물.
② 개성적 인물: 자신의 고유한 기질과 성품을 통해 그 독자성을 인정받는 인물.
* 소설 속에서 어떤 인물이 살아 있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전형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성격을 지녀야 함.
(3) 성격의 변화 여부에 따른 분류
① 평면적 인물[정적 인물, 2차원적 인물]: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서 사건이 변화하고 환경이 바뀌어도 성격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인물. 독자에게 쉽게 인지되고, 독자의 기억에 오래 남는 장점이 있지만, 이야기 전개에 박진감을 주는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음.
예) <흥부전>의 흥부와 놀부, <심청전>의 심청 등
② 원형적 인물[동적 인물, 발전적 인물, 3차원적 인물, 입체적 인물]: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서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성격이 반화∙발전하는 인물. 독자에게 인간성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장점이 있음.
예) <무정>의 박영채
(4) 기능에 따른 인물 유형
① 장식적인 요소로서의 인물
주동 인물의 행동 전개에 별 도움을 주거나 장애가 되지 않는 인물을 말한다. 그림으로 치면 배경 정도에 해당하는 부수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림의 배경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듯, 소설에서도 이런 인물군은 중요한 기능을 한다. 예컨대 결혼식 장면에 등장하는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 하객들, 공연 장면에서 큰 의미를 가지지 않은 관객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그 지방의 향토색을 드러내 주는 기능을 하기도 하고,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드러내 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예) 그 집 마당에는 흰 광목두루마기를 받쳐 입은 안팎 동네 어른들이 멍석과 밀짚방석 위에 앉아 국수상들을 받고 있었고, 석공의 일가 푸네기로 보이는 노랑 인조견 저고리의 남끝동을 걷어붙이고 자락치마를 두른 아낙네와 처녀들은 하얀 버선목을 내보이며 발바닥이 묻어 나도록 들락날락 부산이었다. 먼 동네에서도 많은 사람이 일삼아 와 잔치일을 돌봐 주고 있었는데, 그네들의 대부분은 너럭바위 앞이나 신작로 송방 앞에서 장보고 가다 충그릴 때 봐서 이미 익은 낯들이었다. 나는 부조일하러 온 대복 어메나 동네 아이들이 떡부스러기라든가 다식조각 같은 것을 손에 쥐어 줄지 몰라 미리 그런 일이 없도록 한구석에 물러서서 그러저러한 모습들이나 건성으로 보고 서 있었다.
-이문구, <공산토월>
→동네 안팎 어른들, 아낙네와 처녀들, 먼 동네서온 사람들, 대복 에메 등은 결혼식 장면의 배경을 이루는 인물들이다. 사건 전개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향토적인 분위기 연출, 당시 시대 분위기 연출 등에서 의미를 갖는다.
② 행동의 주체로서의 인물
발신자 → 대상 → 수신자
↑
조력자 → 주체 ← 반대자
* 주체와 대상 : 어떤 가치 있는 대상이나 욕망의 대상을 찾아 나서는 인물이 주체 또는 주동자이다. 주동자의 탐색과 욕망의 목적물이 대상인데, 대개 목표가 되는 인물을 말하지만, 때로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 인물을 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신데렐라가 주체라면 왕자는 대상이다.
* 조력자와 반대자 : 주인공의 탐색에 도움을 주는 인물이 조력자(또는 보조자)이고, 그 탐색을 방해하는 인물이 반대자이다. 예를 들어 신데렐라에게 마법의 지팡이를 주는 대모는 조력자이고, 그 탐색을 방해하는 계모는 반대자이다.
* 발신자와 수신자 : 주체를 탐색의 길로 인도하고(탐색을 촉발하는 발동자) 또 그 행동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심판과 은혜를 베푸는 발신자) 가치 체계의 관리자가 발신자이다. 발신자가 표방하는 가치에 따라 대상에 가치를 부여하는 인물 또는 발신자의 평가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수신자(또는 수혜자)이다.
예) <양산백전>의 행위소 분석
발신자(옥제) → 대상(추양대) → 수신자(양산백)
↑
조력자(태을선인) → 주체(양산백) ← 반대자(심랑)
[참고] <양산백전>의 줄거리
양현은 늦도록 자식이 없다가 천상의 선동이 하강하는 태몽을 꾸고 산백(山伯)을 낳는다. 추이도 신이한 태몽을 꾸고 양대(陽臺)를 낳는다. 두 사람은 모두 지혜가 남달리 뛰어나다. 운향사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고 함께 공부한다. 산백은 남장한 양대가 여자임을 알아내고 가연을 맺고자 한다. 이에 양대는 언약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양대의 아버지가 심랑에게 양대를 정혼시키자 이를 안 산백은 번민하다가 양대가 왕래하는 길에 시신을 묻어줄 것을 당부하고 죽는다. 양대가 심랑과 혼례를 올린 뒤 침상에 들려 할 때, 한 선관이 내려와 양대를 호위하며 심랑으로 하여금 손대지 못하게 한다. 양대가 신행 길에 산백의 유서를 받아보고 산백의 분묘에서 제를 올리니, 무지개가 비치며 분묘가 갈라진다. 그러자 양대는 그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산백과 양대의 혼이 함께 저승의 선계 방장산에 가 태을선인을 만나 후생연분을 맺기를 간절히 청하므로, 옥제가 이를 허락한다. 산백과 양대는 황건역사로부터 자신들이 삼신산의 신선·선녀였는데 둘이 정을 통하여 상제에게 죄를 짓고 인간세계로 적강(謫降)하였음을 전해 듣는다. 산백과 양대는 무덤 속에서 부활하여 집으로 돌아와 성대하게 혼례를 올린다. 이때 북방 오랑캐가 변방을 침범하여 나라에서 인재를 뽑고자 과거시험을 열자, 산백은 이에 응시하여 문무 양과에 장원급제한다. 그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전쟁에 나아가, 적의 무리들을 격퇴하여 큰 공을 세우고 북평후가 된다. 이후 산백과 양대는 부귀를 누리다가 함께 승천한다.
(3) 성격 창조의 방법
작가가 소설 속에서 인물을 제시하는 방법을 성격 창조 또는 성격화라고 한다. 성격화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기본적인 것은 명명(命名)이나 외양 묘사를 통해 그 인물의 특색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소설에서는 보다 다양하고 복잡한 심리와 행동을 묘사함으로써 인물의 성격을 제시하는 방법이 많이 사용된다.
① 직접적 방법(분석적, 해설적, 편집자적, 논평적 제시): 작가(서술자)가 직접적으로 인물의 특색, 특성을 요약해서 설명해 주는 방법→말하기(telling)
예) 만기(萬基)치과의원에는 원장인 서만기 씨와 간호원 홍인숙 양 외에도 거의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하는 사람 둘이 있다. 그 한 사람은 비분강개파 채익준 씨요, 다른 한 사람은 실의의 인간 천봉우 씨다./두 사람은 다 같이 서만기 원장의 중학교 동창생이다. 그들은 도리어 원장보다도 먼저 나와서 대합실에 자리잡고 신문을 읽고 있는 날도 있었다. 더구나 채익준은 간호원보다도 일찍 나오는 수가 많았다.
-손창섭, <잉여인간(剩餘人間)>
→ 인물의 성격 제시가 매우 직접적이다. 채익준은 비분강개파라고 했고, 천봉우는 실의(失意)의 인간이라고 했다.
② 간접적 방법[극적, 장면적 제시]:행동이나 버릇, 대화, 갈등을 장면적으로 보여 줌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 버리는 방법→보여 주기(showing)
예)
“그까짓 거 날마당 사무실로 갑죠. 다시 써달라고 졸라 댑죠. 아, 그랬더니 새 급사란 녀석이 저보다 크기도 무척 큰뎁쇼, 이 녀석이 막 불근댑니다그려. 그래 한번 쌈을 해야 할 턴뎁쇼, 그 녀석이 근력이 얼마나 센지 알아야 뎀벼들 턴뎁쇼…… 허.”
“그렇지, 멋모르고 대들었다 매만 맞지.”
하니 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또 은근한 말을 한다.
“그래섭쇼, 엊저녁엔 큰 돌멩이 하나를 굴려다 삼산학교 대문에다 놨습죠. 그리구 오늘 아침에 가보니깐 없어졌는뎁쇼. 이 녀석이 나처럼 억지루 굴려다 버렸는지, 뻔쩍 들어다 버렸는지 그만 못 봤거든입쇼, 제―길…….”
하고 머리를 긁는다.
-이태준, <달밤>
→ ‘황수건’의 언행을 통해 인물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좋게 말하면 소박한 인물이고, 나쁘게 말하면 반편(半偏)이라는 소리를 듣는 좀 모자란 인물이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상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직접적 방법 |
간접적 방법 |
말하기(telling) |
보여주기(showing) |
설명 위주 |
묘사 위주 |
서사, 서술 |
행동, 대화, 장면 묘사 |
성격, 심리의 직접적 분석 방법 |
간접적 제시 방법 |
작가의 견해를 나타내는 데 알맞음. |
작가의 견해를 나타내는 데 불편함. |
추상적으로 흐르기 쉬움 |
구체적, 감각적으로 제시함. |
화자의 요약·설명·코멘트는 물론, 타인물의 보고 등을 통하여 이루어짐. |
등장 인물의 언어 행위를 중심으로 타인물에 주는 반응을 극적으로 표현 |
(4) 갈등
통상 소설의 갈등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갈등, 개인과 사회 사이의 갈등, 한 개인의 내면적인 갈등으로 분류되어 왔다. 현대 소설에서 와서도 비슷한 양상이지만, 좀 더 복잡한 갈등 양상을 보여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①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사이의 갈등:이때의 비인간적인 것은 물질주의, 공식주의, 폭력주의, 남성우월주의 등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고전 소설에서 선인과 악인의 갈등은 현대 소설에 와서 대체로 이러한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갈등으로 변화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예) 이튿날 날이 밝자 제50야전병원에 대한 성중위의 첫인상은 수정되었다. 그것은 그가 보았던 것과는 다른 딴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무거운 쇠줄을 늘어뜨리고 정문을 지키고 있는 집총한 위병과 그들의 위병소, 부대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철조망, 그 철조망 밖으로는 아스팔트 깔린 국도가 연변의 점점 작아지는 가로수들과 함께 멀리까지 뻗쳐 있었고, 안으로는 쓰레기 무덤과 푸른 옷을 입은 창백한… 창백한, 머리 깎은 사나이들, 그리고 단조로운 단층의 암갈색 막사들이 떠오르는 태양광선 속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성중위의 머리에는 그것에 대한 잔인한 그러나 적절한 표현이 떠올랐으나 그는 굳이 그것을 소리내어 입 밖으로 발설하려 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푸른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푸른 옷들 틈에 섞인 녹색의 작업복은 그 단정하게 죄어 맨 목 높은 워커와 더불어 우선 씩씩하게 보였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독선적이기도 하였다. 복장의 분류는 사람의 분류를, 따라서 사람의 통솔을, 도와 주고 있었다.
-서정인, <후송(後送)>
→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이질적인 개체를 분류하여 동질화하는 것이 야전 병원이다. 그리고 ‘복장’이다. 이 체계에 대한 잔인하고도 적절한 표현이 떠올랐다고 표현하고 있거니와, 그 표현은 아마도 ‘이건 감옥과 다를 게 없군’ 류의 유추일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처럼 군대, 감옥, 학교, 병원 등은 일상인을 분류하고 동질화하여, 그들을 통치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들이다. 이 제도들은 그 장(場)에 속한 사람들이 번호로 불린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개체적 특성을 몰각하고 그 대신 그들의 평균화, 동질화를 속성으로 삼는다. 제도에 의한 인간성의 상실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② 신구(新舊)의 갈등: 새로운 것과 옛 것의 갈등을 말하는데,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갈등, 늙은 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갈등, 진보 세력과 보수(또는 수구) 세력 사이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예) “아버지께서는 너무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마는 어쨌든 세상에 좀 할 일이 많습니까. 교육사업, 도서관사업, 그 외 지금 조선어자전 편찬하는 데…….”/상훈이는 조심도 하려니와 기를 눅이어서 차근차근히 이왕지사 말이 나왔으니 할 말을 다 하겠다는 듯이 말을 이어 나가려니까 또 벼락이 내린다./“듣기 싫다! 누가 네게 그 따위 설교를 듣자던? 어서 가거라.”/“하여간에 말씀입니다. 지난 일은 어쨌든 지금 이 판에 별안간 치산이란 당한 일입니까. 치산만 한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서원을 짓고 유생들을 몰아다 놓으시렵니까? 돈도 돈이거니와 지금 시대에 당한 일입니까?”/상훈이는 아까보다 좀 어기를 높여서 반대를 하였다.
-염상섭, <삼대(三代)>
→ 아들 조상훈과 아버지 조의관의 대립은 신구(新舊) 갈등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아들 조상훈은 아버지의 산소를 매만져서 다듬는 일, 즉 치산(治山)에 반대하고 있다. 전통적 가치관과 새로운 가치관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③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갈등: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 부유층과 소외 계층 사이의 갈등 등을 말한다. 권력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의 갈등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예) 이사님은 살결 좋은 얼굴에 적이 노기를 띠더니, 그들 틈에 끼여 있는 곰보를 힐끗 보고는,/“고서방 당신은 또 뭘 하러 왔소? 작년 것도 못다 내고서 또 무슨 낯으로 여기 오우?”/매섭게 꼬집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장부를 뒤적거리면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일행은 허탕을 치고 밖으로 나왔다./그리고 며칠 뒤, 저수지 밑 고서방의 논을 비롯하여 여기저기에, 그예 입도차압(立稻差押)의 팻말이 붙기 시작했다./농민들은 알아보지도 못하는 그 차압 팻말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피땀을 흘려 가면서 지은 곡식에 손도 못 대다니? 그들은 억울하고 분하기보다, 꼼짝없이 인젠 목숨을 빼앗긴다는 생각이 앞섰다./고서방은 드디어 야간도주를 하고 말았다.
-김정한, <사하촌>
→ 가혹하게 소작료 징수하는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갈등을 잘 보여준다. 지주는 가뭄에도 불구하고 혹독한 소작료를 정하는 횡포를 부린다. 이에 주민들은 보광사 농사조합으로 지불 연기를 호소하러 가지만 오히려 조합 이사에게 귀찮거든 논을 부치지 말라는 협박만 듣고 물러난다. 결국 소작인들은 차압 취소와 소작료 면제를 탄원해 보려고 보광사로 찾아가게 된다.
④ 도시적인 것과 농촌적인 것 사이의 갈등: 신구(新舊) 갈등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경우도 있고, 전통적인 것과 외래적인 것 사이의 갈등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경우도 있다. 인간 사이의 조화∙ 인간과 환경을 사이의 조화∙ 전통적 관습의 존중 등이 농촌적인 가치를 대변한다고 한다면, 적자생존의 현실 인정∙개발과 경제 성장의 중시∙신문물의 적극적 수용 등은 도시적 가치를 대변한다 할 수 있다.
예) 빈대 피가 댓잎처럼 긁힌 토벽, 메주 뜨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갈자리 방에 아랫도리 벗은 손자들이 제멋대로 굴러 자고, 쑥물 사발을 옆에 놓고 신을 삼고 있는 맏아들, 갈퀴손으로 누더기를 깁고 있는 맏며느리, 화산댁이는 그만 당장이라도 뛰어가고 싶다. 아들의 등을 쓰담아 기침을 내려 주고 며느리와 무르팍을 맞대고 실컷 울고 나면 가슴이 후련해질 것만 같다. 또 뒤쳐 눕는다./‘아무리 시에미가 시에미 같지 않기로니 첨 보는 시에미에게 인삿절도 없이, 본바없는 것 같으니, 그래도 마실 사람들은 작은아들 돈 잘 벌고 하리깔레(하이칼라) 메누리 봤다고 부러하더라만, 시장시럽고 가시롭다. 지가 탈기 없는 것도, 신양기가 있는 것도 다 기집 탓이지 머고, 여태껏 땅 한 뙈기 못 사는 것도 안살림 잘못 사는 탓이지 머고.’ 화산댁이는 눈꼬리만 따갑고 잠은 점점 멀어 갔다.
-오영수, <화산댁이>
→ 두메 시골의 어머니와 도회지 살림을 하는 아들이 그 문화적 차이로 인하여 겪는 갈등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작품이다. 도시인이 된 아들과 며느리는 도시적인 속악성만 몸에 밴 데 비하여, 무지해서 비록 실수를 거듭하고 있을망정 화산댁에게는 시골의 순박성과 따스한 인정이 있다.
⑤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사이의 갈등: 남성인 가장(家長)이 가족성원에 대하여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가족을 지배 ·통솔하는 가족형태로 인해 야기되는 비인간적인 삶의 양상에 문제 제기하는 작품에서 흔히 보이는 갈등 유형이다. 페미니즘(feminism) 소설이 이에 해당한다.
5. 시간과 공간
이 절에서 다룰 ‘소설의 시간과 공간’의 구식(舊式) 개념은 ‘배경(背景)’이다. 물론 예전에도 배경 개념을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라는 개념으로 확장하여 사용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이 절의 중심 개념으로 ‘배경’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시간’의 경우 단순히 배경적 요소로서만이 아니라, 텍스트 자체의 구성 요소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케케묵은 ‘배경’ 개념으로 온전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5.1 소설의 시간
(1) 이야기 시간과 텍스트 시간의 개념
① 이야기 시간: 이야기 속에서 연결된 사건들이 자연적 시간 순서에 따라 배열되는 방식을 말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둘 이상이 되면, 여러 가지 사건들이 얽혀 서로 동시성을 띠고 일어나게 된다.
② 텍스트 시간: 텍스트 내에서 여러 가지 요소들이 배열되는 방법을 말하며, 달리 ‘서술 시간’이라고도 한다. 독자는 텍스트에 쓰인 대로 문장을 차례로 읽어가기 때문에, 텍스트 시간은 이야기 시간이 보여주는 복잡한 흐름을 그대로 보여 줄 수 없다.
예) 그 후 몇 번이고 심문이 지나갔다. 모든 것은 결정되었다. 인제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얼음장처럼 밑이 차다. 아무 생각도 없다. 전신의 근육이 감각을 잃은 채 이따금 경련을 일으킨다. 발자국 소리가 난다. 말소리도. 시간이 되었나 보다. 문이 삐그덕거리며 열리고 급기야 어둠을 헤치고 흘러 들어오는 광선을 타고 사닥다리가 내려올 것이다. 숨죽인 채 기다린다. 일순간이 지났다. 조용하다. 아무런 동정도 없다. 어쩐 일일까……? 몽롱한 의식의 착오 탓인가. 확실히 구둣발 소리다. 점점 가까워 오는…… 정확한…… 그는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고개를 들었다. 맑은 광선이 눈부시게 흘러 들어온다. 사닥다리다./“뭐 하고 있어! 빨리 나와!”/착각이 아니었다. 그들은 벌써부터 빨리 나오라고 고함을 지르며 독촉하고 있었다. 한단 한단 정신을 가다듬고 감각을 잃은 무릎을 힘껏 괴어 짚으며 기어올랐다. 입구에 다다르자 억센 손아귀가 뒷덜미를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몸이 밖으로 나가는 순간 눈 속에 그대로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찬 눈이 얼굴 위에 스치자 정신이 돌아왔다. 일어서야만 한다. 그리고 정확히 걸음을 옮겨야 한다. 모든 것은 인제 끝나는 것이다. 끝나는 그 순간까지 정확히 나를 끝맺어야 한다.
-오상원, <유예>
→ 인간에게 전쟁은 선택한 것이면서 또한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된 부조리라는 실존주의적 주제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 시간이 매우 짧음에도 불구하고 텍스트 시간은 비교적 길게 설정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2) 소급 제시와 사전 제시
① 소급 제시: 시간적으로 앞서 일어난 사건이 텍스트에서는 순서상으로 뒤에 제시되는 경우. 회상(回想)이나 회고(回顧)가 대표적인데, 영화로 치면 플래시백(flashback)과 비슷함.
예) 상일꾼일 바엔 남의 세토(貰土:소작) 마지기라도 얻어 제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삼십을 바라보도록 남의 집 머슴살이만 하고 다니던 코삐뚤이 삼복이가 하루 아침 무슨 생각이 났던지, 돈벌이를 간답시고, 조석이 간데없는 부모에게다 처자식 떠맡기고는 훌쩍 일본으로 떠나 버렸다. 그것이 열두 해 전.
-채만식, <미스터 방>
② 사전 제시: 시간적으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슬쩍 보여주는 경우. 일종의 예시(豫示)임.
예) 몽롱한 의식 속에 갓 지나간 대화가 오고 간다. 한 시간 후면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사박사박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 밑에 부서지던 눈, 그리고 따발총구를 등뒤에 느끼며 앞장서 가는 인민군 병사를 따라 무너진 초가집 뒷담을 끼고 이 움 속 감방으로 오던 자신이 마음속에 삼삼히 아른거린다. 한 시간 후면 나는 그들에게 끌려 예정대로의 둑길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몇 마디 주고받은 다음, 대장은 말할 테지. 좋소. 뒤를 돌아다보지 말고 똑바로 걸어가시오. 발자국마다 사박사박 눈 부서지는 소리가 날 것이다.
-오상원, <유예>
(3) 요약적 서술과 장면 제시
① 요약적 서술: 이야기 시간에 비해 텍스트 시간이 짧은 경우. 텍스트에서 이야기 시간을 압축하는 것임.
예) 늙은 어미 아비와, 젊은 가속이 뼈품으로 버는 것을 얻어먹으며 굶으며 하면서 한 일년 빈둥거리고 놀더니, 적이 회심이 들었는지, 이번엔 처자식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서울로 올라와서는 현저동 비탈의 다 찌부러진 행랑방을 얻어 살면서, 처음 일년은 용산 있는 연합군 포로수용소엘 다니며 입에 풀칠을 하였고-이 동안 그는 상해에서 귀로 익힌 토막영어가 조금 더 진보되었고./다시 일년이나는, 그것 역시 상해에서 익힌 것을 밑천삼아 구두 직공으로 구둣방엘 다니며 그럭저럭 살았고. 그러다 일본이 싸움에 지느라고, 구두를 너무 해트려 가죽이 동이 나서, 구둣방이 너나없이 문을 닫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이번엔 궤짝 한 개 짊어지고 신기료장수로 나서고 말았다.
-채만식, <미스터 방>
② 장면 제시: 이야기 시간의 지속과 텍스트 시간의 지속이 등가인 것처럼 서술되는 경우. 등장인물 간의 대화 장면이 이에 해당함.
예) “진정인가?”/“머, 지끔 당장이래두, 내 입 한 번만 떨어진다 치면, 기관총 들멘 엠피가 백 명이구 천 명이구 들끓어 내려가서, 들이 쑥밭을 만들어 놉니다, 쑥밭을.”/“고마우이!”/백주사는 복수하여지는 광경을 서언히 연상하면서, 미스터 방의 손목을 덤쑥 잡는다./“백골난망이겠네.”/“놈들을 깡그리 죽여 놀 테니, 보슈.”/“자네라면야 어련하겠나.”/“흰말이 아니라 참 이승만 박사두 내 말 한마디면 고만 다 제바리유.”/미스터 방은 그리고는 냉수 그릇을 집어 한 모금 물고 꿀쩍꿀쩍 양치를 한다.
--채만식, <미스터 방>
5.2 소설의 공간
(1) 공간의 개념
소설 속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를 ‘소설의 공간(또는 공간적 배경)’이라고 한다. 소설의 공간은 실재성을 기준으로 할 때 경험적 공간과 환상적 공간으로 구별할 수 있다. 전자는 인간의 실제적인 활동이 이루어지는 현실 공간을 말하고, 후자는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공간으로 허구적이고 초월적인 공간을 말한다.
대개의 소설에서 공간은 한 곳으로 고정되기보다는 인물이 이동하면서 확대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 경우 시간과 공간은 결합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다. 즉 소설은 일종의 여행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 이동의 경로는 소설의 주제와 구성,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에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2) 공간의 기능
① 인물의 행동과 사건 전개에 사실성을 부여한다.
‘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세 갈래로 나 있었다. 한 줄기는 전라도 땅 구례(求禮) 쪽에서 오고 한 줄기는 경상도 쪽 화개골〔花開峽〕에서 흘러내려, 여기서 합쳐서, 푸른 산과 검은 고목 그림자를 거꾸로 비추인 채, 호수같이 조용히 돌아, 경상 전라 양도의 경계를 그어 주며, 다시 남으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섬진강(蟾津江) 본류였다.
하동(河東), 구례, 쌍계사(雙磎寺)의 세 갈래 길목이라, 오고 가는 나그네로 하여, ‘화개장터’엔 장날이 아니라도 언제나 흥성거리는 날이 많았다. 지리산(智異山)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쌍계사 세이암(洗耳岩)의, 화개협 시오 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다. 경상 전라 양도 접경이 한두 군데일 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일렀다.
-김동리, <역마> 중에서
→ 이 작품은 ‘역마살’을 소재로 하여, 한국적인 운명관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역마살은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길 위를 떠도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말한다. 이 점에서 ‘화개장터’라는 공간적 배경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암시하는 동시에, 사건 전개에 사실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길이 세 갈래로 나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이 ‘세 갈래 길’이 작품의 주인공인 성기의 역마살과 밀접한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② 시대와 사회 분위기와 호응하며, 사건 전개를 암시한다.
삼팔 접경의 이 북쪽 마을은 드높이 갠 가을 하늘 아래 한껏 고즈넉했다. /주인 없는 집 봉당에 흰 박통만이 흰 박통을 의지하고 굴러 있었다. /어쩌다 만나는 늙은이는 담뱃대부터 뒤로 돌렸다. 아이들은 또 아이들대로 멀찌감치서 미리 길을 비켰다. 모두 겁에 질린 얼굴들이었다./동네 전체로는 이번 동란에 깨어진 자국이라곤 별로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자기가 어려서 자란 옛 마을은 아닌 성싶었다.
-황순원, <학>
③ 작중 분위기를 제시하고, 인물의 행동과 태도를 암시한다.
예) 역장은 먼지 낀 유리를 통해 대합실 안을 대충 휘둘러본다. 대합실이라고 해야 고작 국민학교 교실 하나 정도의 크기이다. 일제 때 처음 지어졌다는 그 작은 역사 건물은 두 칸으로 나누어져서 각각 사무실과 대합실로 쓰이고 있는 터였다. 대개의 간이역이 그렇듯이 대합실 내부엔 눈에 띌 만한 시설물이라곤 거의 없다. 유난히 높은 천장과 하얗게 회칠한 사방벽 때문에 열 평도 채 못 되는 공간이 턱없이 넓어 보여서 더욱 을씨년스런 느낌을 준다. 천장까지 올라가 매미마냥 납작하니 붙어 있는 형광등의 불빛이 실내 풍경을 어슴푸레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임철우, <사평역>
④ 상징성을 지녀, 작품의 주제를 부각시킨다.
타작마당 돌가루 바닥같이 딱딱하게 말라붙은 뜰 한가운데, 어디서 기어들었는지 난데없는 지렁이가 한 마리 만신에 흙고물 칠을 해가지고 바동바동 굴고 있다. 새까만 개미떼가 물어 뗄 때마다 지렁이는 한층 더 모질게 발버둥질을 한다. 또 어디선지 죽다 남은 듯한 쥐 한 마리가 튀어 나오더니 종종걸음으로 마당 복판을 질러서 돌담 구멍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김정한, <사하촌(寺下村)>
⑤ 인물의 심리 상태와 호응을 이룬다.
동욱이가 들어 있는 집은 인가에서 뚝 떨어져 외따로이 서 있었다. 낡은 목조건물이었다. 한 귀퉁이에 버티고 있는 두 개의 통나무 기둥이 모로 기울어지려는 집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기와를 얹은 지붕에는 두세 군데 잡초가 반 길이나 무성해 있었다. 나중에 들어 알았지만 왜정 때는 무슨 요양원으로 사용되어 온 건물이라는 것이었다. 전면(前面)은 본시 전부가 유리창문이었는데 유리는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들이치는 비를 막기 위해서 오른편 창문 안에는 가마니때기가 늘이워 있었다. 이 폐가와 같은 집 앞에 우두커니 우산을 받고 선 채, 원구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집에 도대체 사람이 살고 있을까?
-손창섭, <비 오는 날>
6. 시점과 초점화
6.1 소설의 시점
(1) 서술자와 시점의 개념
① 서술자(서술(敍述者, narrator) : 서술자란 소설에서 이야기를 말해주는 서술기능을 수행하는 허구적 화자(話者)를 말한다. 소설에서 이야기를 말해주는 화자로서의 서술자는 자신이 서술하는 이야기보다 상위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서술자는 이야기의 바깥에서 이야기의 모든 과정을 중재할 뿐,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유형의 서술자를 ‘이야기 외적 서술자’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서술자가 자신이 서술하고 있는 이야기의 등장인물인 경우는 서술자가 등장인물에 묶여 있다는 뜻에서 ‘이야기 내적 서술자’라고 한다. 서술자는 배경의 묘사, 인물에 대한 판단, 시간의 요약이나 장면의 전환, 상황에 대한 논평, 등장인물과 상관없는 사실에 대한 언급 등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② 시점(視點, point of view) : 소설에서 대상, 사건을 바라보는 서술자의 시각, 관점으로, 소설의 진행이 어떤 인물의 눈을 통해 보여지는가 하는 관찰의 각도와 위치를 말한다.
(2) 시점의 종류
① 1인칭 주인공 시점 :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시점이다. 행동의 동기, 심리 상태 등이 주인공 바로 자신의 것이므로, 그것을 소상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나’의 이야기에 대해 쉽게 신뢰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주동 인물이 자신의 경험을 주관적 관점에서 분석하게 되므로, 이야기의 객관성이 약화될 우려가 있다. 서간체 소설, 일기체 소설, 자전적 소설, 심리 소설 등에서 빈번히 나타난다.
예)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난 무엇보다 외로움을 느꼈다. 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권위를 깡그리 무시당한 안토니오의 무너진 등이 견딜 수 없어 콧등이 시큰해졌고, 그보다는 무너져내리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목격해야 하는, 그럼으로써 평생 씻을 수 없는 내면의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갈 어린 아들 브루노 때문에 나는 혀를 깨물어야 했다./ 왜? 왜냐고? 그건…… 빌어먹을, 내가 바로 또 다른 브루노였으니깐……./ 이 망할 놈의 기억, 저 비디오 테이프를 찢어버려야 하는 건데…… 나는 다시 거칠게 발렌타인의 병목을 잡아챘다.
-김소진, <자전거 도둑> 중에서
② 1인칭 관찰자 시점 : 작품 속에 등장하는 부차적 인물인 ‘나’가 주인공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시점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에 비해 서술의 내용이 제한이 많지만, 서술 시점의 주관성과 관찰 대상의 객관성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점에서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보다 월등히 높은 신뢰감을 갖게 된다.
예) 나는 모든 것을 다시 보았다. 농삿집 치고는 유난히도 말끔한 마루청,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지 않은 장독대,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길찬 장다리꽃들…… 그 어느 것 하나에도 그녀의 손이 안 간 곳이 없으리라 싶었다. 이러한 집 안팎 광경들을 통해서 나는 건우 어머니가 꽤 부지런하고 친절한 여성이라는 것을 고대 짐작할 수가 있었다. 젊음이 한창인 열아홉부터 악지 세게 혼자서 살아 왔다는 것과, 어려운 가운데서도 외아들 건우를 나룻배를 태워 가면서까지 먼 일류 중학에 보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농촌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건우의 입성이 항시 깨끗했다는 사실들이 어련히 안 그러리 싶어지기도 했다. 얼핏 보아서는 어리무던한 여인 같기도 하지만 유난히 볼가진 듯한 이마라든가, 역시 건우처럼 짙은 눈썹 같은 데선 그녀의 심상치 않을 의지랄까, 정열 같은 것을 읽을 수가 있었다.
-김정한, <모래톱 이야기>
③ 전지적 작가 시점 : 소설의 이야기가 작중인물이 아닌 이야기 밖의 다른 사람에의 서술하는 것을 보통 3인칭 서술이라고 한다. 그중 작가가 등장인물의 행동과 태도는 물론 그 내면세계까지도 분석하여 서술해 주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을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고 한다. 서술의 각도를 다양하게 잡을 수 있어 인생의 총체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작가가 지나칠 정도로 개입할 경우, 특히 편집자적 논평을 가미하는 등의 서술 태도를 보여 주면, 독자가 몰입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예) 청진기의 상아꼭지를 환자의 가슴에서 등으로 옮겨 두 줄기의 고무줄에서 감득되는 숨소리를 감별하면서도, 이인국 박사의 머릿속은 최후 판정의 분기점을 방황하고 있었다./‘입원시킬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환자의 몰골이나 업고 온 사람의 옷매무새로 보아 경제 정도는 뻔한 일이라 생각되었다./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마음에 켕기는 것이 있었다. 일본인 간부급들이 자기 집처럼 들락날락하는 이 병원에 이런 사상범을 입원시킨다는 것은 관선 시의원이라는 체면에서도 떳떳지 못할 뿐더러, 자타가 공인하는 모범적인 황국신민의 공든 탑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순간 그는 이런 경우의 가부 결정에 일도양단하는 자기 식으로 찰나적인 단안을 내렸다./그는 응급치료만 하여 주고 입원실이 없다는 가장 떳떳하고도 정당한 구실로 애걸하는 환자를 돌려보냈다.
-전광용, <꺼삐딴 리>
④ 작가 관찰자 시점: 작가가 외부 관찰자의 위치에서 객관적 태도로 서술하는 시점이다. 즉 외부 관찰에 의거하여 해설이나 평가를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건을 제시한다. 현대 사실주의에서 주로 사용되는 시점으로, 단편 소설에서는 극적 효과를 얻기 위한 수법으로 효과적이다.
예) 역시 앞 사내의 발자국을 되밟으며 따라 걷던 큰 키의 사내는 힉 한 번 혼자 웃었다. 앞 사내의 바지가 정강이까지 온통 물에 젖어 있어 차츰 얼어들고 있는 것이었다./“노형, 그거 그렇게 젖어서 어떻게 합니까? 진작 이 위로 건너실 걸…….”/“제에기랄, 누가 아니래우. 근데 옷은 이렇게 벌써 뻐쩍 얼어드는데 이놈의 발이 통 안 시렵다니…….”/잠시 사이를 두었다간,/“그래, 꼭 그날 밤도 이랬지! 제기랄…….”/신음하듯 중얼댔다. 그러자 큰 키의 사내가, 그날 밤이라뇨……? 하고 불쑥 물었다. 그러나 앞선 사내는 대꾸 없이 개울 상류를 향해 자꾸 치오르며 옆 산비탈을 올려다보곤 했다.
-전상국, <동행>
⑤ 시점의 혼합:보통 한 작품에는 한 시점이 적용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장면에 맞게 시점을 이동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전체적으로 작가 관찰자 시점을 유지하지만, 꼭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살짝 이동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예)
-나는 자다가 꿈결같이 ‘으으으으으으’ 하는 소리를 들었다. 잠깐 잠이 반쯤 깨었으나 다시 잠들었다. 잠이 들려고 하다가 또 깜짝 놀라서 깨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물었다./“저게 누가 울지 않소?”/“아범이구려.”/나는 벌떡 일어나서 귀를 기울였다. 과연 아범의 우는 소리다. 행랑에 있는 아범의 우는 소리다./‘어찌하여 우는가. 사나이가 어찌하여 우는가. 자기 시골서 무슨 슬픈 상사의 기별을 받았나? 무슨 원통한 일을 당하였나?’/나는 생각하였다. ‘어이어이’ 느껴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내에게 물었다./“아범이 왜 울까?”/“글쎄요, 왜 울까요?” (→1인칭 주인공 시점에 가까움)
-전영택, <화수분>
-그런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이다. 화수분은 새옷을 입고 갓을 쓰고, 길 떠날 행장을 차리고 안으로 들어온다. 그것을 보니까, 지난밤에 아내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난다. 시골 있는 형 거부가 일하다가 발을 다쳐서 일을 못 하고 누워 있기 때문에, 가뜩이나 흉년인데다가 일을 못 해서 모두 굶어죽을 지경이니, 아범을 오라고 하니 가보아야 하겠다는 말을 듣고, 나는 “가보아야겠군” 하니까, 아내는 “김장이나 해주고 가야 할 터인데” 하기에 “글쎄, 그럼 그렇게 이르지” 한 일이 있었다. 아범은 뜰에서 허리를 한번 굽히고 말한다. (→1인칭 관찰자 시점에 가까움)
-전영택, <화수분>
-화수분은 양평서 오정이 거의 되어서 떠나서, 해져 갈 즈음 해서 백 리를 거의 와서 어떤 높은 고개를 올라섰다. 칼날 같은 바람이 뺨을 친다. 그는 고개를 숙여 앞을 내려다보다가, 소나무 밑에 희끄무레한 사람의 모양을 보았다. 그것을 곧 달려가 보았다. 가본즉 그것은 옥분과 그의 어머니다. 나무 밑 눈 위에 나뭇가지를 깔고, 어린것 업는 헌 누더기를 쓰고 한끝으로 어린것을 꼭 안아 가지고 웅크리고 떨고 있다. 화수분은 왁 달려들어 안았다. 어멈은 눈은 떴으나 말은 못 한다. 화수분도 말을 못 한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움)
-전영택, <화수분>
⑥ 편집자적 논평: 서술의 과정에서 독자를 직접 상대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작품에 드러나는 경우를 말한다. 작품 안의 한 구성 요소인 서술자는 통상 작품 안의 또 다른 구성 요소인 청자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런데 불쑥 실제 독자를 염두에 둔 서술, 즉 작가가 실제 독자를 염두에 두고 서술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두고 편집자적 논평이라고 한다.
예) 이제는 영채의 말을 좀 하자. 영채는 과연 대동강의 푸른 물결을 헤치고 용궁의 객이 되었는가. 독자 여러분 중에는 아마 영채의 죽은 것을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신 이도 있을지요. 고래로 무슨 이야기책에나 (나오듯) 늦도록 일점 혈육이 없던 사람이 아들 아니 낳은 자 없고, 아들을 낳으면 귀남자 아니 되는 법 없고, 물에 빠지면 살아나지 않는 법 없는 모양으로, 영채도 아마 대동강에 빠지려 할 때에 어떤 귀인에게 건짐이 되어 어느 암자에 승이 되어 있다가 장차 형식과 서로 만나 즐겁게 백년가약을 맺어, 수부귀다남자 하려니 하고, 소설 짓는 사람의 좀된 솜씨를 넘겨 보고 혼자 웃으신 이도 있으리라.
혹 영채가 빠져 죽는 것이 마땅하다 하여 영채가 평양으로 간 것을 칭찬하신 이도 있을지요, 빠져 죽을 까닭이 없다 하여 영채의 행동을 아깝게 여기실 이도 있으리라. 이렇게 여러 가지로 독자 여러분의 생각하시는 바와 내가 장차 쓰려 하는 영채의 소식이 어떻게 합하며 어떻게 틀릴지는 모르지마는, 여러분의 하신 생각과 내가 한 생각이 다른 것을 비교해 보는 것도 매우 흥미있는 일일 듯하다.
-이광수, <무정>
'현대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향수-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0) | 2012.04.03 |
---|---|
김수영 파밭 가에서 문제와 해설 (0) | 2012.03.27 |
의사진술과 시적 허용 (0) | 2011.10.05 |
문병란 그리고 조관우 직녀에게 (0) | 2011.07.15 |
김영랑의 「연 1」을 읽으면서 (0) | 2011.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