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을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문병란, <직녀에게>
견우직녀 이야기만큼 시에 자주 등장하는 설화도 드물 것이다. 얼른 떠오르는 것만 들더라도 <견우의 노래>(서정주)가 그렇고, <옥수수 밭에 당신을 묻고>(도종환)가 그렇다. 왜 이렇게 자주 쓰이는 것일까?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선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답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시도 의사소통의 일종인 이상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모두 잘 알고 있는 공통의 토대에서 출발하는 것이 유리할 것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할 수 있다. 그렇다. 도대체 사랑만큼 우리의 관심을 끌고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가 또 어디 있을까? “사건이 극적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할 수 있다. 사실이다. 밋밋하고 굼뜬 이야기보다는 진폭이 큰 이야기가 우리 가슴을 울렁이게 하고 저리게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뿐일까? 좀 더 생각해 보자. 우리 시의 역사를 끝까지 한번 거슬러 올라가 보자. <공무도하가>를 제외하고 가장 오래된 우리 서정시 작품은 <황조가>이다. <황조가>의 내용이 무엇인가? 사랑하던 임과 헤어지고 그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작품이다. 여기에서 가장 근본적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견우직녀 이야기가 그렇게 자주 시화(詩化)되는 것은 그 이야기 구조가 서정시의 본질에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서정시란 자아와의 조화와 합일이 깨진 세계를 두고 그 불화와 상실의 아픔을 노래하는 갈래이다.
<직녀에게>는 이 같은 견우직녀 이야기를 바탕에 깔고 시작하고 있다. 그런 만큼 우리가 접근하고 이해하기에 별 어려움이 없다. 게다가 시어나 상상의 구조도 평이하게 시작하고 있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헤어져 일 년에 오직 단 하루(칠석날), 까막까치가 놓아준 오작교를 건너 재회의 기쁨으로 눈물을 흘리지만, 그것도 잠깐 다시금 헤어져 또 일 년을 기다려야만 한다는 견우직녀 이야기는, 설화학(說話學) 상으로는 우주 현상을 설명하는 신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일상적으로는 정인(情人)과의 별리와 재회에 따르는 슬픔과 기쁨을 서술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나아가서는 ‘일상의 궤를 벗어난 사랑이 치러야 할 대가’라는 윤리적 함의까지 띤 설화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이 시는 일상적인 수준에서 견우직녀 이야기를 시적 소재로 삼고 있다.
제13행까지의 진술은 이 부분을 앞뒤로 감싸고 있는 “이별이 너무 길다/슬픔이 너무 길다”로 요약할 수 있다. 시 속의 견우직녀가 놓여 있는 정황은 설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서로 헤어져 그리움과 슬픔에 잠겨 있지만 상황은 설화보다 훨씬 혹심하다. 설화 속의 그들이 어쨌든 일 년에 한 번씩의 만남을 이루는 데 비해, 이들은 암소가 새끼를 몇 번이고 치도록 못 만났으며 만남을 담보해 주는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버린’ 형편인 것이다(시적 진술에서 보건대 이 오작교는 다시 놓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만큼 재회는 절실하고 또 이루어져야 하건만, 그것이 실로 기약 없는 기대임은 실 감고 풀기와 베 짜고 풀기를 거듭한 직녀의 행위에서 적실히 드러난다. 그러기에 세월과 이별과 슬픔이 ‘너무 길다’(‘길었다’란 과거형이 아니고 현재형 시제로 되어 있음, 곧 이별과 슬픔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으며 또 그것이 지양될지 어떨지도 불확실한 것으로 되어 있음에 주목할 것)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에서 우리는 시적 정황이 전통적인 견우직녀 설화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변형을 가하고(재회 부분의 제거)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 결과 무언가 설화와는 다른 상황이 전개되리란 예감과 긴장을 갖게 된다.
이 예감은 다음 제14행에서부터 시작되는 충격적인 진술로써 현실화된다. 시인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는 직녀가 놓여 있는 상황이 매우 끔찍한 것이다. 그녀는 그냥 예사롭게 견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방이 막혀버린’ 곧 탈출과 변화가 불가능해 보이는 죽음의 땅에 있는 것이다.(따라서 제15행의 ‘손짓’은 만남을 갈망하는 손짓을 넘어 구원을 요청하는 손짓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더구나 만남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쓰이고 있는 제16~17행의 진술 내용은 ‘죽음의 땅’에서 벌어질 수도 있는 참혹한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직녀가 처해 있는 절박한 형편을 더욱 강화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이에 이르면 이 시가 전통적인 견우직녀 설화를 벗어나고 있음을 확실하게 확인하게 된다. 곧 직녀는 설화에서와 같은, 그리운 정인의 의미를 넘어서게 된다. 굳이 지적해 본다면 유방은 육체적인 여성미를, 처녀막은 순결한 여성성을, 머리카락은 (특히나 여성에게는) 물리적인 생명을 가리키는 데 대표적으로 쓰이는 사물들이다. 여자로서의, 인간으로서의 이 모든 것이 상실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정인과의 만남을 갈구하는 일상적인 애련의 심정이 아닌 것이고, 관심의 영역 역시 ‘정인’에게서 ‘만남’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제18행 이하에서도 거듭 만남이 운위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상징의 문맥에서 이 시를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사이에서 정인이란 무엇일까? 그 없이는 세계와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그런 것이 아닌가? 한마디로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 소중한 것이 현재 결여되어 있고 자칫 아주 소실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절박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 그러나 그러한 현실을 어떻게든 돌파해내야 한다는 절절한 상황 인식과 신념을, 연정에 빗대어 읊은 시로 이 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라는, 설화의 내용과도 그리고 이 시의 내용 전개와도 다소 동떨어진, 그러나 성취와 회복에의 갈망을 가리키는 데는 상투적으로까지 쓰이는 어투로 된 구절이 불쑥 말미에 끼어들고 있는 것도 이 시를 상징의 문맥에서 읽어야 한다는 판단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면 시인이 ‘직녀’로 상징하고 있는, 그 소중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시만으로는 알 수 없고 또 구태여 그것을 밝히는 것이 시의 의미망을 축소시키기 쉽기에 별로 바람직한 것도 아니지만, 이 시가 씌어진 1970년대 중반이 10월 유신 직후로 문학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파란의 시기였다는 것만은 상기해 둘 만하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과 <1974년 1월>, 양성우의 <겨울 공화국> 등도 이때에 발표된 시들이다.
한편 이 시가 자신의 주제 의식을 강화하기 위해 반복의 기법을 여러 층위에서 구사하고 있음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별’, ‘슬픔’, ‘길다’, ‘우리’, ‘만나다’ 등의 핵심적인 어구가 반복되고 있고, ‘가슴과 가슴’ ‘이별은 이별은’ 등의 첩어적인 수사도 있다. 또 ‘-이/가 너무 길다’, ‘-도 빼앗기고’, ‘-이/가 없어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하여야 한다’ 등의 구가 반복되기도 하고, ‘이별이 너무 길다/슬픔이 너무 길다’와 같이 문장들이 거듭되기도 한다. 나아가서는 ‘몇 번이고’, ‘밤마다’, ‘몇 필이나’, ‘감고 푼 (실)’, ‘짜고 푼 (베)’와 같이 그 내용에 반복을 담고 있는 어휘들도 많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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