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

맹사성, <강호사시가> 이해와 감상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4. 25. 05:02

 

국문학사상 최초의 연시조로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작자가 만년에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돌아가 한가한 세월을 보내며 자연을 즐기고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내용을 계절에 따라 한 수씩 노래한 작품이다. 각 수는 ‘江湖(강호)에 ~이 드니’로 시작하여 ‘亦君恩(역군은)이샷다’로 끝을 맺고 있으며, 특히 종장 첫구 둘째 음보에 작자의 생활이 집약되어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적 통일성은 자연의 변함없는 조화와 임금의 끝없는 은혜를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다.

제1연에서는 강호에 봄이 찾아와 시냇가에서 싱싱한 물고기를 안주 삼아 탁주를 마시는 흥겹고 한가로운 풍류 생활을, 제2연에서는 여름날 한가로운 초당에서 시원한 강 바람을 쐬며 지내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노래하고 있다. 제3연에서는 가을날 강에 배를 띄워 고기를 잡으며 즐기는 생활을, 제4연에서는 눈 내린 겨울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강촌 생활을 유유자적하게 즐기고 있는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유유자적하는 선비의 생활을 읊은 강호가도(江湖歌道)를 수립한 작품으로, 강호에서 자연을 즐기면서도 항상 임금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은 것은 조선 시대의 유교 사상, 충의 사상의 반영이라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조선조 사대부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이이(李珥)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맹사성 선생 동상

 

 

 

 

 

맹사성 [孟思誠, 1360~1438]

 

본관 신창(新昌). 자 자명(自明). 호 고불(古佛) ·동포(東浦). 시호 문정(文貞). 온양(溫陽) 출생.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 검열(檢閱)을 거쳐 전의승(典儀丞)·기거사인(起居舍人)·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수원판관(水原判官)·내사사인(內史舍人)·예조정랑(禮曹正郞)·시어사(侍御史)·간의(諫議)를 지내고, 1400년(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 1406년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거쳐 이듬해 진전사(進箋使) 시종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한성부윤이 되었다.

1408년 대사헌에 오르자 왕의 허락도 없이 부마 조대림(趙大臨)을 국문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 한주(韓州)로 유배되었으나, 영상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풀려나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판을 거쳐 1416년 판서(判書)로 승진, 호조(戶曹)·공조(工曹)를 거쳐 1419년(세종 1)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1425년 좌군도총제부판사(左軍都摠制府判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문신으로는 최초로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고, 1427년 우의정에 올랐다.

1429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이듬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감수, 1431년 좌의정이 되고 다시 춘추관영사(春秋館領事)를 겸임,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찬진(撰進)하고 1435년 노령으로 사임하였다. 황희(黃喜)와 함께 조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했고, 성품이 청백검소하여 남루한 행색으로 수령(守令)의 야유를 받았는데, 도망하던 수령이 관인(官印)을 못에 빠뜨려 후에 그 못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음률(音律)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하고 악기도 만들었다. 또 청백리로 기록되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작품에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