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제인천군사결(寄弟仁川郡事潔)
-동생 인천군사 결(潔)에게 부침
제형하처공개안(弟兄何處共開顔)
-동생과 형이 어디서 함께 환히 웃어나 볼까?.
서망인산안경한(西望仁山眼更寒)
- 서녘 인산을 바라보니 새삼 눈시울이 차갑구나.
*인산 (仁山): 한양 도성의 서쪽 산 인왕산과에 동생이 있는 인천을 뜻하는 듯.
홀유음서래시문(忽有音書來示問)
- 홀연히 (동생의) 편지가 와 안부를 물어 보는데
병창지일적요간(病窓遲日寂寥間)
- 병실 창밖의 해는 더디 지고, 적막하기만 한 때라.
오가형수조춘휴(吾家荊樹早春隳)
- 우리 집 박태기나무(=형수)가 이른 봄에 떨어져나가
* 형수: 형제의 우의와 관련된 고사가 전하는 나무.
개견남주제일지(介遣南州第一枝)
- 남쪽 지방에 한 가지를 떼어 보냈는데,
지원인풍취호택(秪願仁風吹好澤)
- 단지 원하는 것은 어진 바람이 불고 좋은 은혜를 입어
편시우로흡분피(遍施雨露洽紛披)
- 두루 내리는 비와 이슬에 흡족할 만큼 꽃 피었으면
* 형수와 관련된 고사 :
紫荊樹는 박태기나무로 공과의 낙엽관목이다. 봄에 자주 빛 나비 모양의 꽃이 몇 개씩 모여 피는데 중국이 원산지다. 열매는 한약제로도 쓰이며 홍콩의 국화로 국기에도 들어 있기도 하다. 속제해기라는 책에 자형화에 관한 글이 있는데 내용인 즉 경조(서울 또는 지방 이름)에 전진이라는 사람의 삼형제가 살았는데, 재산을 나누기로 의논하고 생활에 필요한 자산은 모두 평균하게 나누었으나 오직 당 앞에 있는 자형수 한 그루만 남게 되었다. 같이 의논하여 세 조각으로 쪼개기로 하고 날이 밝자 가서 자르려고 하니 그 나무가 불을 맞은 듯 말라죽고 있었다. 전진이 가서 보고 크게 놀라 아우들에게 말하기를 「수목이 한 그루로 나왔는데 자른다는 말을 듣고 초취하게 말라 죽으니 이는 사람이 나무만 같지 못하기 때문이다.」하고 인하여 슬픔을 이기지 못하면서 다시는 나무를 가르지 못하였다. 그 소리에 응하여 나무가 다시 살아나 무성해지니 형제가 감동하여 재물 보화를 다시 합쳐 관리하고 효자의 가문을 이루었으며, 전진은 벼슬이 태중대부에 이르렀다 한다.
<참고 해설>
이 시는 세종과 문종조에 걸쳐 영의정을 지난 경재(敬齋) 하연(12세손) 대감이 세종 때 사간원 대사간 문종때 첨지중추원사를 지내신 동생 심량(深亮) 하결(12세손) 대감에게 보내신 칠언절구의 한시입니다. 즉 대사간공께서는 1436년에 인천군사(仁川郡事)를 제수(除授)받으셨고, 이때 중형(仲兄)이신 문효공께서 축하의 시를 지어주신 것입니다.
두 분께서는 1431년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시고, 2년 후인 1433년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시어 양친상을 예법대로 극진히 행하셨다 합니다. 또 이와 관련하여 <해동명현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있습니다.
“양친(목옹공 할아버님과 할머님)께서 연세가 연만 하셨으나 무병건강 하셨다. 생전에 다섯분의 형제가 다 생존해 계셨으며 모두 효심이 지극하였다. 5형제 뜻을 모아 지금의 서대문 밖에 자리를 잡아 구경당(具慶堂)을 지어 극진한 봉양으로 영화를 누리시게 되었다. 경사스러운 날을 맞으면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도 색동옷을 입으시고 춤을 추시며 장수를 비는 술잔을 올렸다. 모든 사람들은 이를 칭송하여 다투어 노래를 하더라.”
이 시가 쓰여진 1436년경이면 부모를 잃은 슬픔이 아직 가시지 않은 때이기도 해서, 형제간의 정이 더욱 애틋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하연 대감은 중앙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내시던 시절입니다. 동생을 지방으로 보내니 마음이 많이 적적했을 것으로 생각이 되며, 그 절절한 심경이 잘 나타나 있는 한시입니다.
원래 이 한시는 경재 하연 대감의 유고 문집으로 전하는데, 1972년 당시 진주하씨 대종친회장이셨던 하두철 박사님께서 번역하여 출간한 바 있습니다. <진양하씨세어른문집>에 수록된 우리말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형제가 어느 곳에 안색을 풀어볼까?
서쪽으로 인산을 바라보니 눈이 차가와 온다.
홀연히 소식이 와 안부 물으니,
병들어 누운 창 밖 해는 더디어 적막한 때라,
우리 집 형나무는 이른 봄에 이지러져,
남쪽 고을에 한 가지를 나누었다.
단지 원하노니 어진 바람 좋은 혜택 불어와서,
비 이슬 함께 내려 시든 가지 흠뻑 적셔주오.
제가 번역한 것은 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제 생각을 가미하여 부분적으로 수정한 바가 없지는 않습니다. 좋은 해설에 누가 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됩니다.
* 참고로 대사간공 하결 대감은 본 블로그 운영자인 저의 직계 할아버지이십니다.
** 뜬금없이 무슨 족보 타령이냐고 눈을 흘길 분도 있을 것 같네요. 하지만 개인 블로그인만큼 많은 양해 바랍니다. 실은 하연 대감은 황희 정승의 후임으로 영의정에 오른 분입니다. 세종의 아들인 문종의 사부이시기도 하고요. 맹사성의 시조를 해설하다가 생각나서 올렸습니다. 맹사성 선생과는 친분이 깊었고, 맹사성 대감은 당시 좌의정이었습니다. 세 분 모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정승이시고, 청렴했을 뿐만 아니라, 학식과 문장에 뛰어났던 분들이십니다.
시흥시 소래산 소산서원 소재 하연 대감 묘
* 하연(河演)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신희(新稀). 부윤을 지낸 하자종(河自宗)의 아들이다.
[생애]
1376년(고려 우왕 2)에 태어나 일찍이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396년(조선 태조 5)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춘추관 수찬관이 되었다. 이어 집의, 동부대언, 예조판서를 지냈다. 1423년(세종 5)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는 조계종 등 불교 5종파를 선(禪)·교(敎) 양종,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를 국가로 환수시켰다. 1425년(세종 7)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이후 예조참판과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한때 천안에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유배에서 풀려나 1431년에 대제학이 되고 형조판서·좌참찬 등 고위관직을 지내고 의정부에 들어가 이조의 일을 맡아보았다. 1445년 좌찬성이 되었고 이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449년 영의정에 올랐다. 의정부에 들어간 지 20여 년간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또 1451년(문종 1)에는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왕이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 하자 이에 반대 상소를 올리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1453년(단종 1) 별세하였다.
[학문과 사상]
정몽주의 문인으로서 학문의 정도를 지키고자 노력했으며, 시문이 예스럽고 필법이 굳세어 하륜(河崙)이 경탄하여 마지않았다. 조선의 숭유배불정책에 충실하여 사찰과 승려에 관한 제도 확립에 앞장섰다.
하연(河演:1376-1453)
세종31년 황희의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오른 하연은, 고려우왕2년에 오늘날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에서 부윤 하자종(河自宗)의 다섯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자는 연량(淵亮), 호를 경재(敬齋) 또는 신희옹(新稀翁) 했던 하연의 가문은, 조상대대로 고려조에 벼슬이 그치지 않았고, 조선초기에 들어 더욱 번창하였던 진주지방의 호족이었다.
시조 하진(河珍)은 사직(司直), 고조부 하의는 호군(護軍), 증조부 하즙(河楫)은 문하찬성사, 할아버지 하윤원(河允源)은 공민왕때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 홍건적을 타도하는데 큰 공을 세워 공신에 올랐으며, 하연의 아버지 하자종은 뒤에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하연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혀 조선조 태조때 21세로 문과에 올라 첫 벼슬로 봉상시(奉常寺) 녹사에 제수되었는데, 나라의 제사와 대관이 죽었을때 시호(諡號)를 짓는 일을 맡는 종8품 직위였다.
하연은 천성이 곧고 독서에 심취하는 학자로서의 기품을 인정받아 곧 직예문춘추관수찬관이라는 비중있는 직위에 오른데 이어, 사헌부 집의, 동부대언을 거쳐 세종때 지신사에 올라 측근에서 바른 말로 왕을 잘 보필하여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하연은 일찍이 태종으로부터 “간관(諫官)으로써 의연한 자세로 일을 말한다”는 치하의 말을 들었고, 세종은 하연의 깨끗하고 바른 언행에 감동, 그에게 상으로 금은대(金銀帶)를 내렸으나 하연은 극구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420년 하연은 세종의 특임으로 관기를 총괄하는 대사헌에 올랐는데, 세종이 정책적으로 밀어붙친 불교정비 방책을 하연에게 맡기니, 하연은 조선조에 들어 흐트러진 불교개혁에 착수, 불교의 종파를 7종에서 선·교(禪·敎) 양종으로 통합하고 36본산으로 개편하는 일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불교에 호감을 가진 세종의 불교숭상문제가 조선의 국시인 배불정책과 맞물려 정쟁의 빌미가 되자 불교정비에 깊히 관여했던 하연은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어 한동안 천안에 유배당하는 파란도 겪었다.
그러나 세종은 하연의 인품을 헤아려 곧 그를 형조참판으로 기용하고, 병조참판을 거쳐 대제학에 승차시켰다. 이어 다시 대사헌을 역임하게 한 뒤 형조판서·좌참찬·우의정·좌의정으로 승진시키고, 1449년 10월 드디어 영의정에 발탁하니 하연의 나이 74세였다.
이듬해 2월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더니, 세종의 아우로 일찍 죽은 성녕대군의 명복을 비는 왕실의 불교원찰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고 자리에서 물러나 버렸다.
1453년 단종1년 8월 하연은 벼슬에서 물러난지 2년만에 78세 일기로 숨을 모았다. 사람들은 그를 법을 잘 지킨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이라 불렀다.
조정은 하연에게 문효공(文孝公)으로 시호를 내리고 문종의 묘정에 배향하였으며, 세조때 청백리에 녹권하고 충효문을 세웠다.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소래산에 정경부인 성산이씨와 합장으로 된 그의 묘소는 신도비와 함께 향토유적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처음 세운 신도비는 좌의정 남지(南智)가 짓고 김교직(金敎直)이 썼었는데, 새로 세워진 신도비는 488년이 지난 1940년에 문학박사 이가원(李家源)이 지었다.
하연은 <경상도지리지>·<사서오경대전>·<성리대전>·<오례의(五禮儀)>·진양연고(晉陽聯藁)>·<경재집> 등 저서를 남겼다.
하연은 일찍이 정몽주에게서 배우면서 정도(正道)를 바로잡고,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일을 본분으로 삼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시를 잘 지었으며 독서를 좋아 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하연의 형인 하왕(河왕)·하형(河泂) 아우인 하결(河潔)·하부(河溥)도 모두 관직에서 이름을 냈고, 그의 세 아들로 장자 하효명(河孝明)은 이조참판, 차남 제명(悌明)은 이조정랑, 3남 우명(友明)은 효행과 학덕이 높아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조선조 인물 가운데 수(壽)와 부(富), 복(福)을 가장 두루 갖춘 인물로 평가받는 하연은 후손도 매우 번창하였다.
광해군때 경상도 합천에 하연의 내외와 아들 하우명의 진상(眞像)을 모신 타진당(妥眞堂)이 세워졌고, 인조때 그 옆에 신천서원을 세워 하연 부자를 제향하였다.
또 숙종때는 오늘날의 하동군 옥종 종화리에 종천서원을 세워 하연의 덕행을 기렸고, 시흥의 묘소 아래에는 후손들과 전국의 유림들이 소산서원을 창건하여 제사를 받들어 왔다.
* 하결(河潔)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심량(深亮)이다. 1380년(고려 우왕 6) 청주목사를 지낸 하자종(河自宗)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벼슬길에 올라 직장이 되었고 1411년(태종 11) 치도봉책광연전등문과(治道封策廣延殿登文科)에서 14등으로 급제하였다. 1418년(세종 원년) 정언, 1420년 호조좌랑을 지냈다. 1436년(세종 18) 인천군사를 제수받았고 1441년 사헌부장령, 성균관사예를 거쳐 인천군수가 되었다. 1444년 통정대부에 올랐고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으며 1451년(문종 1)에는 첨지중추원사에 임명되었다.
1453년(단종 1) 관직에서 물러나 정읍으로 낙향하였다. 정읍 진산촌 동쪽에 자리 잡고 정사(精舍)를 지어 가까운 벗들과 시를 읊으며 여생을 보냈다. 숙부인(淑夫人) 밀양 박씨(密陽朴氏)와의 사이에 2명의 아들을 두었다. 묘는 전라북도 정읍시 신월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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