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

안조원의 <만언사> 전문 및 해설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4. 14. 13:28

 

* 4주 정도 걸려 본문을 교정하고, 여러 학술 논문과 저서를 참고하여 해설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검토와 수정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부족한 대로 먼저 올리고, 추후 좀 더 꼼꼼하게 수정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인터넷에 떠다니는 판본은 원문의 오류가 너무 많고, 해설의 경우도 오류가 매우 많습니다. 제가 교정 해설한 것 역시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만, 어느 정도는 참고할 만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언사> 전문 상세 해설

 

어와 벗님네야 이내 말씀 들어보소. 인생 천지간(天地間)에 그 아니 느꺼운가. 평생을 다 살아도 다만지 백년(百年)이라, 하물며 백년이 반듯기 어려우니, 백구지과극(白駒之過隙)이요 창해지일속(滄海之一粟)이라, 역려(逆旅) 건곤(乾坤)에 지나는 손이로다. 빌리어 온 인생이 꿈의 몸 가지고서, 남아(男兒)의 하올 일을 평생(平生)을 다 하여도, 풀끝에 이슬이라 오히려 덧없거든, 어와! 내 일이야! 광음(光陰)을 헤어보니, 반생이 채 못 되어 육륙(六六)에 둘이 없네. 이왕 일 생각하고 즉금 일 헤아리니 번복(翻覆)도 측량없다.

 

<현대어 풀이>

아아! 벗님들이여, 이내 말씀을 들어보오. 세상살이에 마음이 북받쳐서 벅차지 아니한가. 평생을 다 살아도 다만 백년뿐이며, 하물며 그것도 반듯하게 살기가 어려우니, 세월은 빠르게 흘러 덧없고, 인생은 보잘 것이 없어, 사람은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일 뿐이로다. 잠시 빌린 인생 꿈같은 몸을 가지고서, 남자의 할 일을 평생을 다 한다 해도풀끝의 이슬처럼 허망하여 오히려 덧없거늘, 아아! 내 처지라니! 세월을 헤아려보니 반평생이 채 못 되고 이제 겨우 서른넷이로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고 지금의 일을 헤아리니 되돌리자 해도 한이 없구나.

 

< 구절풀이>

* 느꺼온가 : 어떤 느낌이 마음에 북받쳐서 벅차지 않은가? * 다만지 : 다만 * 반듯기 : 반듯하게 살기, 평탄하게 살기 * 백구지과극(白駒之過隙) : 백구과극(白駒過隙), 흰 망아지가 빨리 달리는 것을 문틈으로 본다는 뜻으로, 인생이나 세월이 덧없이 짧음을 이르는 말. ≒구극(駒隙). * 창해지일속(滄海之一粟) : 넓고 큰 바닷속의 좁쌀 한 톨이라는 뜻으로, 아주 많거나 넓은 것 가운데 있는 매우 하찮고 작은 것을 이르는 말. 중국 북송의 문인 소식의 <전적벽부(前赤壁賦)>에 나오는 말. * 역려건곤(逆旅乾坤) : 마치 여관과 같은 세상이라는 뜻으로, 덧없고 허무한 세상을 이르는 말. * 꿈의 몸 : 꿈처럼 허망하고 덧없는 인간의 몸(인생) * 남아(男兒) : 남자 * 풄긋 이슬 : 풀끝에 맺힌 이슬처럼 인생이 허망하고 덧없음 * 광음(光陰) : 세월 * 六六에 둘이 없네 : 6☓6=36에 2가 부족하니 34세 * 즉금(卽今) : 지금, 현재 * 번복(翻覆) : (예전과 지금을) 뒤바꿈

 

 

승침(昇沈)도 하도할사 남대되 그러한가 내 홀로 이러한가. 아모리 내 일이라 내 역시 내 몰래라. 장우단탄 절로 나니 도중상감 뿐이로다. 부모생아 하오실 제 죽은 나를 나으시니 부귀공명 하려던지 절도고생 하려던지 천명이 기압던지 선방으로 서험한지 일주야(一晝夜) 죽은 아해 홀연히 살아나네. 평생길흉 점복할 제 수부강녕 가잣시니

 

구절 풀이

* 승침(昇沈) : 올라감과 내려감, 인생의 기복. 영고성쇠(榮枯盛衰) * 남대되 : 남들에게도 * 장우단탄(長吁短嘆) : 긴 한숨과 짧은 탄식이라는 뜻으로, 탄식하여 마지아니함을 이르는 말. * 도중상감(島中傷感) : 섬 속에서 느끼는 상심(傷心) * 부모생아(父母生我) : 부모가 나를 나음 * 절도고생(絶島苦生) : 외딴 섬에서 고생을 함 * 선방(仙方) : 신선들이 쓰는 방책 * 서험(瑞驗) : 상서로운 징험 * 점복(占卜) : 점을 침 * 수부강녕(壽富康寧) : 장수하고, 부유하고, 편안하고, 건강한 것

 

현대어 풀이

인생의 기복이 많고도 많구나. 남들도 그러한가? 나만 홀로 이러한가? 아무리 나의 일이라 해도 나도 역시 모르겠구나. 길고 짧은 탄식이 저절로 나니 도중에 느끼는 상실감뿐이로다. 부모님이 나를 나으실 때 죽은 나를 낳으시니 부귀공명을 누리려고 그랬던지 절도에서 고생을 하려고 그랬던지 천명이 기압하던지 신선들의 방책(方策)을 써서 상서로운 징험을 한 지 만 하루 만에 죽은 아이가 홀연히 살아나네. 평생의 길흉을 점칠 때 수부강녕의 좋은 괘를 얻었으니

 

 

귀양 갈 적 있었으며 이별쉰들 있었으랴. 빛난 채의(彩衣) 몸이러니 노래자들 효측하여 부모앞에 어린 체로 시름없이 자라더니 어와 기박(奇薄)하다 나의 명도 기박(奇薄)하다. 십일세에 자모상(慈母喪)에 호곡애통 혼절(昏絶)하니 그때나 죽었더면 이때 고생 아니 보리. 한 번 세상 두 번 살아 인간행락 하랴던지

 

구절 풀이

* 이별쉰들 : 이별수(離別數)인들, 이별하는 점괘인들 * 채의(彩衣) : 여러 가지 빛깔과 무늬가 있는 옷. * 노래자(老萊子) : 중국 춘추 시대 초나라의 학자. 70세에 어린아이 옷을 입고 어린애 장난을 하여 늙은 부모를 위안하였다고 함 * 효측((效則) : 본받음 * 기박(奇薄) : 팔자, 운수 따위가 사납고 복이 없음 * 자모(慈母) : 자식에 대한 사랑이 깊다는 뜻으로 ‘어머니’를 이르는 말 * 호곡애통(號哭哀痛) : 큰소리로 울며 애통해함 * 인간행락 : 인간 세상의 행복을 누림

 

현대어 풀이

귀양 갈 점괘가 있었으며 이별하는 수(數)인들 있었으랴. 빛나는 채의 몸으로서 나이 70에도 때때옷을 입고 부모님께 어리광부린 노래자를 본받아 부모 앞에서 어리광부리며 시름없이 자랐는데, 아아! 기구하고 박복하구나, 나의 운명이 기구하고 박명하구나. 열한 살에 어머님을 잃고 소리 높여 통곡하다 기절하니 그때 차라리 죽었더라면 지금 고생은 보지 않았을 것을. 남들은 한 번 사는 세상에 나는 두 번 살아서 인간세상의 즐거움을 맛보려던 것인지

 

 

종천지통(終天之痛) 슬픈 눈물 매봉 가절 몇 번인고. 십년양육 외가은공 호의호식 그려으랴. 잊은 일도 만타마는 봉공무하(奉公無瑕) 함이로다. 어진 자당(慈堂) 들어오셔 임사지덕(妊姒之德) 가지시니 맹모의 삼천지교 일마다 법이로다. 증모의 투저(投杼)함은 날 믿어 아니시리. 설리에 읍죽함은 지성이 감천이요 백이의 부마함은 효자의 할 배로다. 입신하여 양명(揚名)함은 문호의 광채로다. 행세(行勢)의 으뜸 일이 글 밖에 또 있난가.

 

구절 풀이

* 종천지통(終天之痛) : 이 세상에서 더할 수 없이 큰 슬픔 * 매봉가절(每逢佳節) : 매양 슬픔으로 명절을 맞음 * 외가은공 : 외갓집의 은공 *봉공무하(奉公無瑕) : 받들어 봉양할 겨를이 없음 * 자당(慈堂) : ‘자당(慈堂)’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깊다는 뜻으로 ‘어머니’를 이르는 말임. 그런데 여기서는 ‘어머니를 여읜 뒤 새로 들어온 서모(庶母)’를 말함. 작자는 11세에 모친상을 당하고, 이후 십년 동안 외가에서 양육된 것으로 되어 있음. * 임사지덕(妊姒之德) : 태임과 태사를 가리킴. 태임은 왕계의 처이며 주문왕의 어머니이고, 태사는 주문왕의 처이자 무왕의 어머니로서 현모양처였다고 함 * 맹모의 삼천지교 :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함 * 법(法)이로다 : 모범이 되다 * 증모의 투저 : 증자의 어머니가 아들이 사람을 죽였다는 말(실제로는 죽이지 않음)을 세 번 듣고 베틀의 북을 내던지고 도망하였다는 말로 남을 참소(讒訴)하는 말을 곧이들음 [참고] 증삼살인(曾參殺人) :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는 말로, 사실이 아닌데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자가 많으면 진실이 된다는 뜻(이 말은 <전국책(戰國策)>“진책(秦策)”에 나온다. 춘추시대 증자가 노(魯)나라의 비(費)라는 읍에 있을 때의 일이다. 이곳의 사람 가운데 증자와 이름과 성이 같은 자가 있었는데, 그가 사람을 죽였다. 사람들이 증자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증삼이 사람을 죽였어요.” 증자 어머니는 말했다. “우리 아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짜고 있던 베를 계속하여 짜 나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또 한 사람이 맘했다. “증삼이 사람을 죽였어요.” 증자의 어머니는 이번에도 여전히 태연하게 베를 짰다. 그러부터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증자가 사람을 죽였어요.” 이에 증자의 어머니는 두려워하며 북을 던지고 담을 넘어 달렸다. 증삼의 현명함과 어머니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이 그를 의심하니, 자애로운 어머니조차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 설리(雪裏)에 읍죽(泣竹) : 효자 맹종(孟宗)의 고사(故事). 병이 깊은 어머니가 죽순(竹筍)을 드시고 싶다고 하는데, 겨울이라 구할 수 없어 대밭에서 걱정하고 있는데 죽순이 별안간 솟아 나왔다고 함. 흔히 곡죽생순(哭竹生筍)의 고사라 함. ‘맹종죽’이라는 말이 여기서 생겼음. * 백이의 부마함 : 백이가 말고삐를 잡고 만류함. * 문호(文豪) : 뛰어난 문학 작품을 많이 써서 알려진 사람 * 광채(光彩)로다 : 영광이로다

 

현대어 풀이

하늘을 뚫을 것 같은 아픔에 슬픈 눈물을 흘리며 명절을 맞았던 것이 몇 번이던고. 십년동안이나 길러주신 외갓집의 은공에 호의호식을 떠올렸으랴. 잊은 일도 많지만 그 공덕은 흠 없이 완벽하였다 할 것이로다. 어진 새 어머니가 들어오셔서 임사지덕을 갖추었으니 맹자 어머니의 가르침을 본받아 하시는 일마다 법도대로 하시는구나. 증자 어머니가 베틀의 북을 내던진 일을 보건대 나를 믿어주시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눈 속에서 죽순을 캔 일은 지성이면 감천한 까닭이요, 백이가 문왕의 말을 붙들고 은나라 정벌을 만류한 것은 효자의 할 일이로다. 몸을 세워 이름을 날림은 문사(文士)들의 영광이로다. 행세하는 데에 제일가는 일이 글 밖에 또 있는가?

 

 

 

동사고문 사서삼경 당음장편 송명사(宋明史)를 세세히 숙독하고 자자(字字)이 외워시니. 읽기도 하려니와 짓긴들 아니하랴. 삼월춘풍 화류시와 구추황국 단풍절에 소인묵객 벗이 되어 음풍영월 일삼을 제 당시(唐時)의 조격이요 송명시(宋明時)의 재치로다. 문여필(文與筆)이 한가지라 어느 것이 다를손가. 짓기도 하려니와 쓰긴들 아니하랴. 번화감제 부벽서와 사치공자 병풍서를 왕우군의 진체런가 조맹부의 촉체런가. 여러가지 잘하기로 일시재동 일컫더니 오매구지 요조숙녀 전전반측 생각하니,

 

 

 

구절 풀이

* 동사(東史) : 동국(東國)의 역사(歷史)란 뜻으로, 우리나라의 역사(歷史)를 일컫던 말 * 당음장편(唐音長篇) : 당음과 장편. 당(唐)나라 때의 잘 지은 시를 뽑은 책과 제한 없이 긴 고시체의 시 * 자자(字字)이 : 글자 하나하나 * 화류시(花柳時) : 꽃과 버들이 한창인 계절 * 구추황국(九秋黃菊) : 구월달의 노랗게 핀 국화 * 소인묵객(騷人墨客) : 시문(詩文)과 서화(書畵)를 일삼는 사람. [참고] 소인(騷人)은 중국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부(離騷賦)’에서 유래(由來)한 말로, 글을 쓰는 사람, 풍류를 즐기고 읊는 사람, 즉, 문인(文人)이나 시인(詩人)을 일컬음. 소객(騷客), 묵객(墨客)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말함. * 조격(調格) : 시 따위의 가락과 격식 * 문여필(文與筆) : 글짓기와 글쓰기 * 왕우군(王右軍) : 왕희지, 중국(中國) 진(晉)나라 시대(時代)의 서예가 * 번화감제 : 번화하게 만든 정도의 뜻인 듯 * 부벽서(付壁書) : 벽에 붙이는 그림 또는 글씨 * 사치공자(奢侈公子) : 지체가 높은 집안의 사람들의 사치스러운 * 왕우군(王右君) : 왕희지를 가리킴, 우군은 벼슬명 * 진체(晉體) : 중국 진(晉)나라의 명필인 왕희지의 서체 * 조맹부(趙孟頫) : 중국 원나라 때의 화가, 서예가 * 촉체(蜀體) : 중국 촉나라 조맹부의 서체 * 일시재동(一時才童) : 한 때의 신동(神童) * 오매구지(寤寐求之) : 자나 깨나 찾음 * 전전반측(輾轉反側) : 고민이 많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임

 

현대어 풀이

우리나라의 옛 역사와 옛 글, 사서삼경, 당음과 장편, 송나라와 명나라의 역사를 세세하게 숙독하고 글자 하나하나까지 외웠으니 책을 읽기도 하려니와 글을 짓기인들 아니하랴. 삼월 춘풍에 꽃피고 버들 숲 우거질 때와 가을에 노란 국화 피고 단풍이 들 때에 소인묵객과 벗이 되어 음풍영월로 일을 삼을 때 당나라 때의 품격을 갖췄으며 송나라 명나라 때의 재치를 닮았도다. 글짓기와 글씨쓰기가 한가지로 중요하니 글을 짓기도 하려니와 쓰기인들 아니할쏘냐. 번화감제한 부벽서와 사치공자 병풍글씨를 쓰니 왕희지의 진체이던가 조맹부의 촉체이던가. 여러 가지를 모두 잘하기에 한때의 재동(才童)이라 일컬으니 자나 깨나 요조숙녀를 구하기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생각하더니

 

 

동방화촉(洞房華燭) 느저간다 이십 전에 유실(有室)이라. 유폐정정 법을 받아 삼종지의 알았으니 내조(內助)에 어진 처는 성가(成家)할 징조로다. 유인유덕 우리 백부 구세동거 효측하여 일가지내 한데 있어 감고우락 같이 하니 의식분별 뉘 아던가. 세간구차 내 몰래라 입신양명 길을 찾아 권문귀댁 어디어디 장군문하 막빈인가 승상부중 기실인가 천금준마환소첩은 소년 놀이 더욱 조타. 자긍맥상번화성은 나도 잠간 하오리다. 이전 마음 전혀 잊고 호심광흥 절로 난다.

 

구절풀이

* 동방화촉(洞房華燭) : 부인의 방에 촛불이 아름답게 비친다는 뜻으로, 신랑이 신부의 방에서 첫날밤을 지내는 일 * 유실(有室)이라 : 부인을 맞이함 * 유폐정정(幽閉貞靜) : 아주 깊이 감추어둔 곧고 맑은 부녀자의 덕 * 삼종지의(三從之義) : 봉건시대 여자가 지켜야 할 세 가지 도리, 곧, 어려서는 아버지를 좇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좇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좇음 * 성가(成家) : 일가(一家)를 이룸 * 유인유덕(有仁有德) : 어질고 덕이 있음 * 의식분별 : 입고 먹는 것을 따지는 일 * 구세동거(九世同居) : 아홉 세대의 친족(親族)이 한 집안에 삶. 집안이 화목(和睦)함을 이르는 말 * 일가지내(一家之內) : 한 집안 안에 * 감고우락(甘苦憂樂) : 달고 쓰고 근심스럽고 즐거움 * 권문귀댁(權門貴宅) : 권문세가의 존귀한 집안 * 막빈(幕賓) : 장군을 따라다니며 일을 돕는 벼슬아치 * 기실(記室) : 기록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는 사람 * 천금준마환소첩(千金駿馬換小妾) : 위나라 조창(曹彰)은 어떤 말을 보고 탐이 났으나, 그 주인이 절대로 팔려고 하지 않자 자신의 첩과 바꾸었다고 함. * 자긍맥상번화성(自矜陌上繁華盛) : 스스로 거리에서 번화하고 성대한 차림을 뽐냄 * 호심광홍(豪心狂興) : 호탕한 마음과 미친 듯한 흥취

 

현대어 풀이

결혼이 늦어간다. 스무 살 전에 부인을 맞이하였도다. 깊고도 맑은 부녀의 덕성을 모범으로 삼아 삼종지도를 잘 지키니 내조를 잘하는 어진 마누라는 장차 한 집안을 일으킬 징조로구나. 어질고도 덕이 많은 우리 큰아버지 아홉 세대가 함께 거처한 중국의 일을 본받아 한 집안 안에 함께 살아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하니 입고 먹는 것을 분별하는 일을 누가 하겠는가. 살림살이는 나 몰라라 팽개치고 입신양명의 길을 찾아 권문세가면 어디어디라도 찾아가고, 장군문하에 막빈처럼 드나들기, 승상부 안에 기실(記室)인 것처럼 드나들기, 천금준마 훌륭한 말은 첩과 바꾸더라도 좋으니 바로 소년들의 호기로운 놀이로다. 자긍맥상번화성은 나도 잠깐 하오리다. 이전의 차분한 마음은 전혀 잊어버리고 호기로운 마음과 미친 듯한 흥이 절로 나는구나.

 

 

백마왕손 귀한 벗과 유협경박 다 따른다. 무릉장대 천진교도 명승지라 알려지다. 삼청운대 광통굔들 노리처가 아니런가. 화조월석 빈 날 없이 주사청루 거닐 적에 만준향료 진취하고 절대가인 침닉하여 취대라군 고운 태도 청가묘무 회롱할 제 풍류호사 긔 뉘신고. 주중선군 부러하랴 만사무심 잊었더니 일조홀연 양심 나데. 소년놀이 그만하자 부모근심 깊으시다 맥상번화 자랑마라 구리화도 늦어간다.

 

구절풀이

* 유협경박(幽峽輕薄) : 경박한 날라리들 * 화조월석(花朝月夕) : 꽃피는 아침과 달뜨는 저녁, 좋은 나날들 * 주사청루(酒肆靑樓) : 술집과 기생집 * 만준향료(滿樽香料) : 잔에 가득찬 술과 향기로운 요리 * 진취(盡取) : 남김없이 다 마시고 먹음 * 침닉(沈溺) : 깊이 빠져듬 * 취대라군(翠黛羅裙) : 미인의 눈썹과 비단. 즉 아름다운 여인을 뜻함 * 청가묘무(淸歌妙舞) : 청아한 노래와 멋진 춤 * 주중선군(酒中仙君) : 술 속의 신선 * 만사무심(萬事無心) : 모든 일에 무관심함 * 일조홀연(一朝忽然): 하루아침에 갑자기 * 구리화도(究理華道) : 이치를 연구하고 도를 빛냄

 

현대어 풀이

백마를 탄 왕손(王孫)같은 귀한 친구와 경박한 날라리들이 다 따른다. 무릉장대한 친진교도 명승지의 이름이 났고 삼청운대한 광통교인들 놀이터가 아니던가. 꽃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 하루도 쉬지 않고 술집과 기생집을 거닐 때에 잔에 가득찬 술과 향기로운 요리를 남김없이 마시고 먹고, 절대가인에게 흠뻑 빠져서 미인의 고운 자태와 노래와 춤을 즐길 때 이처럼 풍류와 호사를 즐기는 자가 그 누구인가? 술 속의 신선을 부러워하랴. 다른 모든 일에 무심하여 잊었더니 하루아침에 갑자기 양심이 드는구나. 소년놀이는 그만하자. 부모님의 근심이 깊으시다. 맥상번화 자랑마라 공부하는 일도 늦어간다.

 

 

옛 마음 다시 나서 하던 공부 고쳐하여 밤을 새와 낮을 이어 일시불철 하난고야. 부모봉양 하랴던지 내 몸 위한 일일런지 수삼년을 각고(刻苦)하니 무식지인 면(免)하거다. 어와 바랐으랴 꿈결에나 바랐으랴. 어락원에 들어가서 금문옥계 문을 열어 디미니 천(賤)하온 몸이 천문근처 바랐으리. 금의(錦衣)를 몸에 감고 옥식(玉食)을 베고 있어 부귀에 싸였으며 번화(繁華)에 잠겼세라. 일진겸대(一陣兼帶) 삼사처는 궁임뿐이 아니로다.

 

구절 풀이

* 무식지인(無識之人) : 무식한 사람 * 금문옥계(金門玉階) : 금으로 된 문과 옥으로 된 계단. 궁궐의 비유 * 천(賤)하온 : 미천(微賤)한 * 천문(天門) : 대궐, 궁궐의 문 * 금의(錦衣) : 비단 옷 * 번화(繁華) : 번잡하고 화려함

 

현대어 풀이

옛 마음이 다시 나서 하던 공부 다시 하며 밤낮을 새워 불철주야하는구나. 부모봉양을 하려했던지, 내 몸을 위해서였는지는 모르나 수년을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하니 무식한 사람은 면하였다. 아아! 바랐으랴. 꿈속에서라도 바랐으랴. 어악원(御樂院)에 들어가 금문옥계(金門玉階) 화려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천(賤)한 내가 감히 대궐문을 드나드는 것을 바랐으랴. 금으로 된 옷을 입은 것 같고 옥으로 된 음식을 먹는 것처럼 부귀에 쌓였으며 갑자기 번화(繁華)한 세상에 잠기게 되었어라. 한번 벼슬길로 나아가매 두 가지 일을 겸임하여 서너 곳을 다니는 일은 반드시 궁궐의 일만으로는 아니로다.

 

 

복과재생이라 소심봉공(小心奉公) 잘못하여 삭관퇴거 하온 후에 칠일옥중 지내오니 곱던 의복 무색하고 조흔 음식 맛이 없네. 망극천은 가이없어 희극삭환비 눈물 난다. 어와 과분하다 천은도 과분하다. 궁임겸대 망극천은 생각사록 과분하다. 번화부귀 고쳐하고 금의옥식 다시하여 장안도상(長安途上) 너른 길로 비마경구(肥馬輕裘) 다닐 적에 소비친척(素非親戚) 강위친(强爲親)은 예로부터 일렀나니 여기 가도 손을 잡고 저기 가도 반겨하니 입신도 되다하고 양명도 하다하리 만사여의 하였으니 막비천은 모를소냐.

 

구절 풀이

* 복과재생(福過災生) : 복이 지나고 재앙이 생김 * 소심봉공 : 삼가고 근심하여 국가와 임금을 위해 마음을 다함 * 삭관퇴거(削官退去) : 삭탈관직으로 물러남 * 무색(無色)하고 : 겸연쩍어 부끄럽고 * 망극천은(罔極天恩) : 임금의 은혜가 끝이 없음 * 가이없어 : 끝이 없어 * 희극환비(喜隙換悲) : 기쁨이 다하고 슬픔이 됨 * 번화부귀 : 번화하고 부귀하게 되다 * 금의옥식(錦衣玉食) : 비단옷과 흰쌀밥이라는 뜻으로,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르는 말. * 비마경구(肥馬輕裘) : 살진 말과 가벼운 갓옷이라는 뜻으로, 부귀한 사람의 차림새 * 소비친척(素非親戚) 강위친(强爲親) : 본래 친척이 아니나 서로 친해짐 [참고] “有馬有金 兼有酒헐ㅅ제 素非親戚이 强爲親터니/一朝에 馬死黃金盡하니 親戚도 還爲路上人이로다/세상에 人事ㅣ 이러하니 그를 슬워 하노라”(말과 돈과 거기에 술마저 있으니, 본시 친척이 아니나 서로가 친해졌음. 하루아침에 말이 죽고 돈도 떨어짐. 다시 노상에 지나가는 관계없는 사이가 됨.) * 만사여의(萬事如意) : 모든 일이 뜻대로 됨 * 막비천은(莫非天恩) : 임금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현대어 풀이

복이 지나고 재앙이 생기나니 깨끗한 마음으로 업무를 보지 못하여 관직이 깎이고 물러나와 칠일동안 옥에 갇혀 지내니 고왔던 의복은 색깔이 바래고 좋은 음식도 맛이 없네. 망극한 임금의 은혜는 끝이 없어 기쁨이 다하고 슬픔으로 바뀌어 눈물이 나는구나. 아아! 과분하다. 임금의 은혜가 과분하다. 두 가지의 궁궐의 직무를 맡아보는 망극한 임금의 은혜가 생각할수록 과분하구나. 번화함과 부귀를 다시 누리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다시 먹으며 장안의 넓은 길로 한껏 호사를 부리며 다닐 적에 소비친척 강위친은 예로부터 일렀으니 여기가도 손을 잡고 저기 가도 반겨하니 입신(立身)도 하였다하고 양명(揚名)도 하였다고 할 수 있으리라. 만사가 뜻대로 되었으니 그 어느 것도 임금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충칙진명(忠則盡命) 아랐으니 쇄신보국(碎身報國) 하랴던지 졸부귀가 불상이라 곤마복중 되것고야. 극성즉필패하고 흥진즉비래니라. 다 오르면 나려오고 가득하면 넘치나니 호사가 다마하고 조물이 시기한지 인간작죄 많이 하여 화전충화(花田衝火) 되었는지 청천백일 맑은 날에 뇌성벽력 급히 치니 삼혼칠백 날아나서 천지인사 아올소냐. 여불승의(如不勝衣) 약(弱)한 몸에 이십오근 칼을 쓰고 수쇄족쇄 하온 후에 사옥 중에 드단말가. 나의 죄를 혜아리니 여산여해 하겠고야.

 

구절 풀이

* 충칙진명(忠則盡命) : 충성한다는 것은 곧 목숨을 다하는 것이다 * 쇄신보국(碎身報國) : 뼈를 가루로 만들고 몸을 부술 정도로 나라에 충성을 다함. * 졸부귀(猝富貴)가 불상(不祥)이라 : 벼락부자는 상서롭지 못하며 오히려 재액이 뒤따른다는 말 * 곤마복중(困馬腹中) : 곤하여 쓸모없어진 말을 잡아먹음(정확한 해석을 아직 하지 못함) * 극성즉 필패(極盛則必敗) : 지극히 흥성하면 곧 반드시 망함 * 흥진즉비래(興盡則悲來) : 흥이 다하면 곧 슬픔이 찾아옴 * 다마(多魔)하고 : 마(魔)가 많이 끼어든다. 나쁜 일이 많이 생긴다. * 조물(造物) : 조물주(造物主), 하느님 * 인간작죄(人間作罪) : 인간이 죄를 지음 * 화전충화(花田衝火) : 화초밭에 일부러 불을 지름. 몰인정한 일을 함 * 삼혼칠백(三魂七魄) : 사람의 혼백을 통틀어 이르는 말 * 천지인사(天地人事) : 하늘인지 땅인지도 모르고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정신을 잃음 * 여불승의(如不勝衣) : 옷의 무게도 이기지 못함 * 수쇄족쇄 : 수갑과 족쇄 * 사옥(司獄) : 범죄를 지은 자가 갇히는 감옥 * 여산여해(如山如海) : 산과 같고 바다 같음

 

현대어 풀이

충성이란 목숨을 다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몸이 가루가 되도록 나라에 충성하려던 것이, 갑작스런 부귀는 오히려 상서롭지 못하여 나의 몸을 해치게 되었구나. 극히 흥성하면 곧 시들고 흥이 다하면 곧 슬픔이 찾아오는 것이라. 다 오르면 이제 내려오게 되어 있고 가득차면 이제 넘치는 것이다. 좋은 일에는 마(魔)가 끼고 조물주가 시기하였는지 인간이 죄를 많이 지어 화전중화 되었는지 해가 뜬 맑은 날에 뇌성벽력 급히 치니 사람의 혼백이 온통 달아나서 인사불성이 되었구나. 옷의 무게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약한 몸에 이십 오근 칼을 쓰고 수갑과 족쇄를 차고 사옥에 갇히게 되었단 말인가. 나의 죄를 헤아리니 산과 바다처럼 크도다.

 

 

아깝다 내 일이야 애닯다 내 일이야. 평생일심 원하기를 충효겸전 하자더니 한 번 일을 그릇하고 불충불효 다 되것다. 회서자이 막급이라 뉘우친들 무삼하리. 등잔불 치는 나비 저 죽을 줄 알았으면 어디서 식록지신이 죄 짓자 하랴마는 대액(大厄)이 당전하니 눈조차 어둡고나. 마른 섭흘 등에 지고 열화(烈火)에 들미도다. 재가 된들 뉘 탓이리 살 가망 없다마는 일명(一命)을 꾸이오셔 해도(海島)에 보내시니 어와 성은이야 가지록 망극하다.

 

구절 풀이

* 평생일심(平生一心) : 평생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기 * 충효겸전(忠孝兼全) : 나라에 충성함과 부모에 효도함을 똑같이 온전히 함 * 회서자이막급(悔逝者而莫及) : 일이 잘못된 뒤라 아무리 뉘우쳐도 어찌할 수 없음. 서제막급(噬臍莫及). 후회막급(後悔莫及) * 식록지신(食祿之臣) : 녹을 받아먹는 신하 * 대액(大厄) : 큰 액운 * 당전(當前) : 앞에 도달함. 당면(當面) * 섭흘 : 섶(잎나무, 풋나무, 물거리 따위의 땔나무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 열화(熱火) : 맹렬(猛烈)하게 타는 불. * 들미도다 : (불에) 듦이로다. * 일명(一命) : 한 사람의 목숨 * 꾸이오셔 : 귀하여 여겨 * 해도(海島) : 섬 * 가지록 : 갈수록

 

현대어 풀이

아깝다 내 일이야, 애달프다 내 일이야. 평생 동안 한마음으로 원하기를 충(忠)과 효(孝)를 아울러 온전히 하고자 하였더니 한 번 일을 그릇되게 하여 불충불효가 되었구나. 후회가 막급이라 뉘우친들 무엇하랴. 등잔불을 치는 나방은 저 죽을 줄 알았으며, 녹을 먹는 신하치고 죄를 지으려 하랴마는 큰 액운이 앞에 당도하니 눈조차 어둡구나. 마른 섶을 등에 지고 뜨거운 불길에 뛰어든 것이로다. 설령 재가 된들 누구 탓이겠는가? 살아날 가망이 없다마는 사람의 한 목숨을 귀하게 여기셔서 섬으로 보내시니, 아아! 임금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망극하구나.

 

 

강두에 배를 대어 부모친척 이별할 제 슬픈 눈물 한숨소리 막막수운 머무는 듯 손잡고 일은 말삼 조히가라 당부하니 가삼이 막히거든 대답이 나올소냐. 여취여광하여 눈물도 하직이라. 강상에 배 떠나니 이별 시(時)가 이 때로다. 산천이 근심하니 부자(父子) 이별함이로다. 요도일성에 흐르는 배 살 같으니 일대장강(一帶長江)이 어느덧 가로 서라. 풍편(風便)에 우는 소리 긴 강을 건너오네. 행인(行人)도 낙루(落淚)하니 내 가삼 뮈어진다. 호부(呼父)일성 엎더지니 애고 소리뿐이로다.

 

구절 풀이

* 강두(江頭) : 강가의 나루 * 막막수운(漠漠愁雲) : 막막하고 근심스러운 기색 * 여취여광(如醉如狂) : 취한 것 같기도 하고 미친 것 같기도 함 * 요도일성(搖掉一聲) : (상앗대, 삿대) 흔들거리는 소리 * 낙루(落淚) : 눈물을 떨어뜨림 * 호부일성(呼父一聲) : 아버지를 부르는 외마디 큰 소리

 

현대어 풀이

강나루에 배를 대어 부모와 친척들을 이별할 때 슬픈 눈물과 한숨소리에 막막하고 근심스러운 기색 머무는 듯하고 손잡고 이르는 말씀 잘 가거라 당부하니 가슴이 막히는데 대답이 나오겠느냐. 취한 듯 미친 듯 눈물도 떨어지는구나. 강위에 배 떠나니 이별할 때가 이 때로다. 산천이 모두 근심스러워하니 부자(父子)가 이별하기 때문이라. 노와 상앗대의 소리에 흐르는 배가 화살처럼 빨리 나아가니 긴 강이 어느덧 가로막겠는가. 바람결에 우는 소리 긴 강을 건너오네. 지나가던 사람도 눈물을 흘리니 내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아버지를 부르는 외마디 소리하고 엎어지니 ‘애고’하는 소리뿐이로다.

 

 

규천고지 아모련들 아니 갈길 되올소냐. 범 같은 관차들은 수이 가자 재촉하니 할 일 업서 말게 올라 앞 길을 바라보니 청산은 몇 겹이며 녹수는 몇 구빈고. 넘도록 뫼히어늘 건너도록 물이로다. 석양은 재를 넘고 공산이 적막한데 녹음은 욱어지고 두견이 제혈하니 슬프다 저 새소리 불여귀는 무삼일고. 네 일을 이름이냐 내 일을 이름이냐 가뜩이 허튼 근심 눈물에 젖었어라. 만수에 연쇄하니 내 근심 먹음은 듯 천림에 노결하니 내 눈물 뿌리는 듯 뜨던 말 재게 하니.

 

구절 풀이

* 규천고지(叫天告地) : 몹시 슬프거나 분하여 하늘과 땅을 향하여 울부짖음. * 관차(官差) : 관아에서 파견하던 군뢰(軍牢), 사령(使令) 따위의 아전 * 말게 올라 : 말에 올라 * 수이 : 쉽게, 빨리 * 넘도록 뫼이거늘 : 넘어도 넘어도 산이거늘 * 제혈(啼血)하니 : 피를 토할 듯이 우니 * 불여귀(不如歸) : 두견새, 소쩍새, 여기서는 돌아감만 같지 못하다는 뜻으로도 쓰임(중의법) * 만수(萬水) : 가득한 물 * 연쇄(連鎖) : 이어지니 * 노결(露結) : 이슬 맺힘 * 뜨던 말 : 동작이 느리고 굼뜨던 말 * 재게 하니 : 행동이 민첩하고 빠르게 하니

 

현대어 풀이

하늘과 땅을 향해 울부짖어도 안 가도 되는 귀양길이더냐. 호랑이 같은 관리들은 얼른 가자 재촉하니 할 일 없어 말에 올라 앞길을 바라보니 청산은 몇 겹이나 쌓였고 녹수는 또 몇 굽이나 되더란 말이냐. 넘어도 넘어도 또 산이거늘 건너도 건너도 물이더라. 석양은 재를 넘어가고 텅 빈 산은 적막한데, 푸른 숲 우거지고 두견새는 피토하듯 울어대니, 슬프다 저 새소리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리란 불여귀(不如歸) 소리 무슨 일인가? 너의 일을 말하는 것이냐, 나의 일을 말하는 것이냐. 가뜩이나 허튼 근심 눈물에 젖었구나. 넓은 물에 이어지니 내 근심을 머금은 듯하고, 깊은 수풀에 이슬 맺히니 내 눈물을 뿌리는 듯하여 굼뜨고 느리던 말이 재촉하니

 

 

앞 참은 어디메고 높은 재 반겨 올라 고향을 바라보니 창망한 구름 속에 백구비거 뿐이로다. 경기따 다 지나고 충청도 다다르니 계룡산 높은 뫼를 눈결에 지나쳤다. 열읍(列邑)의 관문 받고 골골이 점고하여 은진을 넘어 드니 여산(礪山)은 전라도라. 익산 지나 전주 들어 성시산림 들어보니 반갑다 남문 길이 장안도 의연하다. 백각전 벌어지니 종각도 지내는 듯 한벽당 소쇄한데 조일(朝日)이 높았세라. 만가(萬家)골 너른 들에 장천(長天)이 빗겼어라. 금구(金溝) 태인 정읍 지나 장성 역마 갈아 타고 나주 지나 영암 들어 월출산을 돌아드니

 

구절 풀이

* 참(站) : 옛날의 역(驛). 60리마다 1참을 설치함 * 높은 재 : 높은 고개 * 창망(滄茫) : 넓고 멀어서 아득함 * 백구비거(白鷗飛去) : 흰 갈매기가 날아감 * 경기따 : 경기도 땅 * 눈결 : 눈에 슬쩍 뜨이는 잠깐 동안 * 열읍(列邑) : 여러 고을, 지나가는 모든 고을 * 관문(官問 받고 : 국경이나 주요 지점의 통로를 통과하기 위해 사람과 물품을 조사받고 * 점고(점(點考) : 명부에 일일이 점을 찍어 가며 사람의 수를 조사함 * 은진(恩津) : 충남 논산시에 있는 옛 읍. * 여산(礪山) : 전라북도 익산시(益山市)에 속해있는 지명 * 성시산림 : 전북 남원 근처의 산림 * 백각전(百角殿) : 가게 이름 * 종각(鐘閣) : 큰 종을 달아 두기 위하여 지은 누각 * 한벽당(寒碧堂) :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누각 * 소쇄(瀟灑) : 기운이 맑고 깨끗하다 * 조일(朝日) : 아침 해 * 금구(金溝) : 전라북도 김제군에 속한 지명

 

현대어 풀이

앞에 있는 역(驛)은 어디쯤인가. 높은 고개에 반겨 올라가 고향땅을 바라보니 멀고 아득한 흰 갈매기 날아갈 뿐이로다. 경기도를 다 지나고 충청도에 다다르니 계룡산 높은 봉을 엉겁결에 지나쳤다. 여러 고을의 관문에서 조사를 받고 고을마다 점고하여 은진을 넘어드니 전라도 땅 여산이라. 익산을 지나 전주에 들어가 성시산림 들어보니 반갑도다 남문 길, 장안도 옛날과 다름없구나. 백각전 펼쳐 있으니 종각도 지나치는 것 같구나. 한벽당은 맑고 깨끗한데 아침 해가 드높더라. 만가골 넓은 들에 긴 하늘도 비꼈구나. 금구, 태인, 정읍을 지나 장성의 역마를 갈아타고 나주를 지나 영암을 들어가 월출산을 돌아 들어가니

 

 

만이천봉이 반공(半空)에 솟았는 듯 일국지명산이라 경치도 조타마는 내 마음 어득하니 어느 겨를 살펴보리. 천관산을 가리키고 달마산을 지나가니 불분주야 몇 날만에 해변(海邊)으로 오단말가. 바다를 바라보니 파도도 흉용(洶湧)하다. 가이업슨 바다이요 한없은 파도로다. 태극조판 하온 후에 천지광대 하다거늘 하늘 아래 없사옴이 따이런가 알았더니 즉금(卽今)으로 볼 양이면 천하이 다 물이로다. 바람도 쉬어 가고 구름도 멈쳐 가네. 나는 새도 못 넘을 데 제를 어이 가잔말고.

 

구절 풀이

* 일국지명산(一國之名山) : 한 나라의 이름난 산 * 천관산(天冠山) : 장흥에 있는 호남 5대 명산 가운데 하나 * 달마산(達摩山) : 전남 해남에 있는 산 * 불분주야(不分晝夜) :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 흉용(洶湧) : 물결이 매우 세차게 일어남. 또는 물이 힘차게 솟아남 * 태극조판(太極肇判) : 천지가 처음 만들어짐, 천지개벽 * 천지광대(天地廣大) : 하늘과 땅이 넓고도 큼 * 제를 : 저기를

 

현대어 풀이

만이천봉이 허공에 솟아있는 듯하고 한나라의 명산이기에 경치도 좋다마는 내 마음이 아득하니 어느 겨를에 살펴보겠는가. 장흥의 천마산을 향하여 해남 달마산을 지나가니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며칠 만에 해변까지 왔더란 말인가. 바다를 바라보니 파도도 매우 험하구나. 끝없는 바다요, 한없는 파도로다. 천지가 처음 만들어진 후에 하늘과 땅이 넓고 크다 하거늘 하늘 아래 더 이상 큰 것이 없는 것은 땅인 줄로만 알았더니 지금 볼 양이면 천하가 모두 물이로구나. 바람도 쉬어 가고 구름도 멈추었다 가네. 날아가는 새도 못 넘을 저곳을 어찌 가잔 말인고.

 

 

때마침 서북풍이 내 길을 재촉난 듯 선두(船頭)에 있는 백기 동남을 가리키니 천석(千石) 싣는 대중선에 쌍돛을 높이 달고 건장한 도사공이 배머리에 높게 서서 지곡총 한 곡조를 어사와로 화답하니 마디마다 처량하다. 적객심회 어떠할고. 회수장안 돌아보니 부운폐일 아니 뵌다. 나가는 길 어인 길고 무심 일로 가는 길고. 불로초 구하려고 삼신산을 찾아가니 동남동녀 아이어든 방사 서시 따라가랴. 동정호 밝은 달에 악양루 오르랴나. 소상강 궂은 비에 조상군 하랴는가. 전원이 장무하니 귀거래 하옵는가.

 

구절 풀이

* 지곡총 : 노를 저을 때 나는 소리 * 어사화 : 노를 저을 때 사람들이 힘을 쓰면서 내는 소리 * 적객심회(謫客心懷) : 귀양을 가는 사람의 마음 * 회수장안(回首長安) : 머리를 돌려 서울 쪽을 돌아봄 * 부운폐일(浮雲蔽日) : 뜬 구름이 해를 가림 * 동남동녀(童男童女) : 소년 소녀 * 방사(方士) 서시 : ‘서시’는 서복(徐福)이라고도 하며 중국 진(秦)나라 때 사람. 진시황의 명을 받들어 동남동녀 3천명을 데리고 불사약을 구하러 봉래산(蓬萊山)을 향하여 떠난 뒤에 돌아오지 않았다 함. 방사=요술쟁이 * 조상군(弔湘君) : 상군(湘君)을 조상(弔喪)함. 요임금의 딸 아황(娥黃)과 여영(女英)이 함께 순임금에게 시집갔다가 순임금이 창오(蒼梧)에서 죽자 상수에 빠져 죽어 상수(湘水)의 신(湘君)이 됨 * 전원(田園)이 장무(將蕪)하니 : 전원이 장차 황폐해지려하니. 중국 진(秦)나라의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의 첫 부분 * 귀거래(歸去來) : 관직을 물러나서 고향으로 돌아감

 

현대어 풀이

때마침 서북풍이 내 길을 재촉하는 듯, 뱃머리에 꽂힌 흰 깃발이 동남쪽을 가리키니 천석이나 실을 수 있는 큰 배에 쌍돛을 높이 달고 건장한 선장이 뱃머리에 높이 서고 지곡총하는 뱃노래에 어사화로 화답하니 그 노래 마디마디가 처량하다. 귀양객의 마음은 어떠할까. 고개를 들어 서울장안을 돌아보니 뜬 구름에 해가 가려 보이지 않는구나. 지금 나아가는 길은 어떤 길로 무슨 일로 가는 길인고. 불로초 구하려고 삼신산(三神山)을 찾아가는가. 동남동녀(童男童女)도 아닌데 어찌 방사(方士) 서복(徐福)을 따라가랴. 동정호 밝은 달에 악양루(岳陽樓)에 오르려고 하는가. 소상강 궂은비에 상군(湘君)을 조상하려 하는가. 전원(田園)이 장차 황폐해지려하니 고향으로 되돌아가려 함인가?

 

 

노어회 살쪘으니 강동거 하옵는가. 오호주 흘리저어 명철보신 하랴는가. 긴 고래 잠간 만나 백일승천 하랴는가. 부모처자 다 버리고 어드러로 혼자 가노. 우는 눈물 소이 되어 대해수를 보타인다. 어디서 일편흑운 홀연광풍 무삼일고. 산악 같은 높은 물결 배머리를 둘러치네. 크나큰 배 조리 젓듯 오장육부(五臟六腑) 다 나온다. 천은 입어 남은 목숨 마자 진(盡)케 되겠구나. 초한건곤 한 영중에 장군기신(將軍其身) 되려니와 서풍낙일 멱라수에 굴삼려는 불원이라.

 

구절 풀이

* 노어회(鱸魚膾) : 농어회 * 강동거(江東去) : 강동으로 내려감. 예전에 장한이란 벼슬아치가 벼슬을 사임하며 고향의 농어회가 먹고 싶어 고향인 강동으로 내려간다고 함 * 오호(五胡) : 중국의 동한(東漢)에서 남북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북방으로부터 중국 본토에 이주한 다섯 민족. 흉노(匈奴), 갈(羯), 선비(鮮卑), 저(氐), 강(羌)을 이름(오호주, 오후주 : 뜻이 분명하지 않음. 배의 일종인 듯) * 명철보신(明哲保身) : 총명하고 사리에 밝아 일을 잘 처리하여 자기 몸을 보존함 * 백일승천(白日昇天) : 붉은 해가 하늘 높이 떠오름 * 긴 고래 잠간 만나 백일승천 하랴는가. : 이는 당나라 시인 이백이 스스로를 기경선인(騎鯨仙人)이라 부른 것에서 연유. * 소(沼)이 되어 : 연못이 되어 * 대해수를 보타인다 : 큰 바닷물에 더한다 * 일편흑운(一片黑雲) : 한 조각 검은 구름 * 홀연광풍(忽然狂風) : 갑자기 부는 미친 듯한 바람 * 조리 젓듯 : 쌀을 일거나 물기를 뺄 때 쓰는 조리를 젓듯이 즉 큰 파도가 배를 이리저리 마음껏 흔들어대는 모양. 배 멀미하는 장면임. * 마자 진(盡)케 : 그마저 다하게 * 초한건곤(楚漢乾坤) :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건곤일척의 큰 승부를 가름 * 한(漢) 영중(營中) : (싸움에서 승리한) 한나라 군영 안의 * 장군기신 : 장군의 몸 * 서풍낙일(西風落日) : 가을바람에 해는 떨어지고 * 멱라수 : 중국 호남성 상음현의 북쪽에 있는 강. 서쪽으로 흘러 상강(湘江)으로 들어감. 전국시대에 초나라 삼려대부(三閭大夫) 굴원이 주위의 참소로 분함을 못 이겨 이곳에 빠져 죽은 곳으로 유명함. 지금은 멱수(汨水)라 일컬음 * 굴삼려(屈三閭) : 삼려대부의 벼슬을 하던 초나라의 시인 굴원(屈原) * 불원(不願) : 원하지 않음. 즉 물에 빠져 죽고 싶은 마음이 없음

 

현대어 풀이

농어회가 살이 올랐으니 이제 그만 강동의 고향으로 내려가려 함인가. 오호에 배를 띄우고 물살 흐르는 대로 저어가며 명철보신(明哲保身)하려 함인가. 기다란 고래를 잠깐 만나 한낮에 하늘로 올라가려 함인가. 부모처자를 모두 버리고 어디로 혼자 가는가. 우는 눈물이 연못이 되어 큰 바닷물에 보태어지는구나. 어디서 한 조각 검은 구름과 문득 불어오는 미친 바람은 무슨 일인가? 산악과 같은 높은 물결이 뱃머리를 둘러치네. 크나큰 배를 마치 조리를 젓듯 흔들어대니 오장육부가 다 나오는 것처럼 토악질이 나오는구나. 임금의 은혜를 입어 남은 목숨이 그나마 다하게 되겠구나. 초(楚)와 한(漢)이 패권을 다투매 한(漢)나라 진영 안의 장군의 몸이 될지언정 서풍에 해떨어질 때 멱라수에 빠져죽는 굴원이 되기는 원치 않도다.

 

 

차역천명 할일 없다. 일생일사 어찌하리. 출몰사생 삼주야에 노 지우고 닻을 지니 수로천리 다 지내어 추자섬이 여기로다. 도중(島中)으로 들어가니 적막하기 태심(太甚)하다. 사면으로 돌아보니 날 알 리 뉘 있으리. 보이나니 바다히요 들리나니 물소리라. 벽해상전 갈린 후에 모래 모여 섬이 되니 추자섬 생길 제는 천작지옥이로다. 해수(海水)로 성(城)을 싸고 운산(雲山)으로 문(門)을 지어 세상이 끈쳐으니 인간(人間)은 아니로다. 풍도섬이 어디메뇨 지옥이 여기로다.

 

구절 풀이

* 차역천명(此亦天命) : 이것 역시 하늘이 낸 운명이다 * 일생일사(一生一死) : 죽고 사는 것 * 출몰사생(出沒死生) : 죽음과 삶 사이를 헤맴 * 삼주야(三晝夜) : 3일 밤낮 * 도중(島中) : 섬 안 * 태심(太甚) : 아주 심하다 * 벽해상전(碧海桑田) :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는 것처럼 엄청난 변화 * 천작지옥(天作地獄) : 하늘이 만든 지옥 * 운산(雲山) : 구름과 산 * 끊쳤으니 : 끊어졌으니, 단절되었으니 * 인간(人間) : 인간세상 * 풍도(酆都)섬 : 염라대왕이 다스리는 지옥

 

현대어 풀이

이것 역시 하늘의 운명이니 어찌할 길이 없구나. 죽고 사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삼일동안 죽었다가 살아나기를 여러 번 한 후에 노와 닻을 아래로 내리니 물길 천리를 다 지나고 추자섬이 바로 여기로다. 섬 안으로 들어가니 적막하기가 극히 심하구나. 사면을 돌아보니 나를 알 사람이 누가 있으랴. 보이나니 바다요, 들리나니 물소리라. 벽해(碧海)와 상전(桑田)이 나뉘어진 후에 모래가 모여 섬이 되니 추자섬은 하늘이 만든 지옥이로다. 바닷물로 성을 쌓고 구름산으로 문을 만들어 인간세상으로부터 끊어졌으니 인간세계가 아니로다. 가장 나쁜 지옥이라는 풍도(酆都)섬이 어디이냐, 지옥이 바로 여기로다.

 

 

어디로 가잔 말고 뉘 집으로 가잔 말고 눈물이 가리우니 걸음마다 엎더진다. 이 집에가 의지하자 가난(家難)하다 핑게하고 저 집에가 주인(主人)하자 연고 있다 칭탈하네. 이집 저집 아모덴들 적객주인 뉘 좋달고 관력(官力)으로 핍박(逼迫)하고 세부득이 맡았으니 관채 더러 못한 말을 만만할손 내가 듣네. 세간 그릇 흩던지며 역정내어 하는 말이 저 나그네 헤어보소 주인 아니 불상한가. 이집 저집 잘사는 집 한두 집이 아니어든 관인들은 인정(人情) 받고 손님네는 혹언(酷言) 들어 구타여 내 집으로 연분 있어 와 계신가. 내 살이 담박한 줄 보시다야 아니 알가. 앞뒤에 전답(田畓) 없고 물속으로 생애(生涯)하야 앞 언덕에 고기 낚아 웃녘에 장사 가니 삼망 얻어 보리섬이 믿을 것도 아니로세.

 

구절 풀이

* 연고(緣故) 있다 칭탈(稱頉)하네 : 사정이 있다고 핑계를 대네 * 아모덴들 : 어느 곳인들 * 적객주인(謫客主人) : 귀양객을 받아들인 집의 주인 * 관력(官力) : 관청의 위력 * 세부득이 : 형세가 부득이하여, 어쩔 수 없이 * 관채 : 관차 * 헤어보소 : 헤아려보시오, 생각해보시오 * 인정(人情)받고 : 뇌물을 받고 * 혹(酷言)들어 : 모진 말을 들어 * 살이 : 살림살이 * 담박(淡泊) : 깨끗할 정도로 가진 것이 없음 * 물속으로 생애하여 : 물속에서 건저 내는 물고기 등으로 생활을 함 * 웃녘 : 윗동네 * 삼망 : 그물의 일종, 삼마이 그물이라고도 함

 

현대어 풀이

어디로 가자는 말인가, 누구의 집으로 가자는 말인가. 눈물이 앞을 가리니 걸음마다 엎어진다. 이집에 가서 의지하자하니 가난하다고 핑계를 대고, 저 집에 가서 주인해달라고 하니 받지 못할 까닭이 있다며 핑계를 대네. 이집 저집 아무데인들 귀양객을 맡은 주인이면 누가 좋다고 할 것인가. 관청의 위력으로 핍박하니 형세가 부득이하여 맡았으니 관차(官差)에게는 차마 하지 못하는 불평의 말을 만만한 내가 듣게 되는구나. 세간그릇 흩어 던지며 역정 내며 하는 말이 “저 나그네 생각해보소. 주인인 내가 불쌍하지도 않은가. 이집 저집 잘사는 집이 한두 집이 아니건만 관차들은 뇌물을 받고 귀양객 당신은 모진 말을 들어 구태여 내 집으로 무슨 연분이 있어 와 계신가. 내 살림살이가 깨끗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보면 모를까. 앞뒤에 전답(田畓)이 없고 물속에서 물고기 잡는 것으로 생활을 하여 앞 언덕바위에서 고기를 낚아 윗동네에 가서 장사를 하니 삼망 그물로 얻은 보리 몇 섬 있는 것은 믿을 것이 아니로세.

 

 

신겸처자 세 식구의 호구(糊口)하기 어렵거든 양식 없는 나그네는 무엇 먹고 살려는고. 집이라고 서 볼손가 기어들고 기어나며 방 한 간에 주인 들고 나그네는 잘 데 없네. 뛰자리 한 잎 주어 첨하에 거처하니 냉지에 누습하고 즘생도 하도할사. 발남은 구렁배암 뼘남은 청진의라 좌우로 둘렀으니 무섭고도 증그럽다. 서산에 일락하고 그믐밤 어두운데 남북촌 두세 집에 솔불이 희미하다. 어디서 슬픈 소리 내 근심 더하는고. 별포(別浦)에 배 떠나니 노 젓는 소리로다.

 

구절 풀이

* 신겸처자(身兼妻子) : 홀로 있는 몸이 아니고 세 식구(食口)임 * 호구(糊口) : 입에 풀칠을 한다는 뜻으로, 겨우 끼니를 이어 감 * 뛰자리 : 띠로 엮은 자리 * 첨하에 : 처마 밑에 * 냉지(冷地)에 누습(漏濕)하고 : 찬 땅에 축축한 기운이 스며남 * 발남은 구렁배암 : 한 발이 넘는 구렁이 * 뼘남은 청진의라 : 한 뼘이 넘는 푸른 지네

 

현대어 풀이

혼자도 아니고 처와 자식도 있으니 세 식구의 입에도 풀칠하기 어려운데 양식도 없는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살려 하는고. 집이라고 서 볼손가 기어들어가고 기어나가며 방 한 칸에 주인이 들고 나그네인 나는 잘 데가 없네. 갈대로 엮은 자리 한 장 주어 처마 밑에서 거처하니 찬 땅에 습기가 축축하고 벌레들도 많기도 많구나. 한 발도 넘는 구렁이, 한 뼘도 넘는 푸른 지네라. 좌우로 빙 둘러 지나가니 무섭고도 징그럽다. 서산에 해는 지고 그믐밤은 어두운데 남북의 마을 두세 집에서 관솔 등불이 희미하다. 어디서 슬픈 소리는 내 근심을 돋우는고. 이별하는 포구에 배가 떠나니 노 젓는 소리로다.

 

 

눈물로 밤을 새와 아참에 조반드니 덜 쓰른 보리밥에 무장떵이 한 종자라. 한 술 떠서 보고 큰 덩이 내어놓고 그도 저도 아조 없어 굴물 적이 간간이라. 여름날 긴긴 날에 배고파 어려웨라. 의복을 돌아보니 한숨이 절로 난다. 남방염천 찌는 날에 빨지 못한 누비바지 땀이 배고 땀이 올라 굴둑 막은 덕석인가. 덥고 검기 다 바리고 내암새를 어이하리. 어와 내 일이야 가련히도 되었고나.

 

구절 풀이

* 덜 쓰른 보리밥에 무장떵이 한 종자라 : 아주 거친 밥과 반찬을 이름 * 무장 : 뜬 메주에 물을 붓고 2, 3일 후에 물이 우러나면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3, 4일간 익힌 것. * 간간이라 : 간혹 있다 * 남방염천(南方炎天) : 남쪽지방의 뜨거운 여름 * 덕석 : 멍석을 말한다. 볏짚으로 만들어서 곡식을 말릴 때 주로 씀 * 내암새 : 냄새

 

현대어 풀이

눈물로 밤을 새고 아침에 밥을 먹으니 덜 익은 보리밥에 무장 한 접시라. 한 술 떠서 보고 큰 덩이 내어놓고 그도 저도 아주 없어 굶을 때가 자주 있다. 여름날 긴긴 날에 배가 고파 어렵구나. 의복을 살펴보니 한숨이 절로 난다. 남쪽지방의 찌는 듯한 날씨에 빨지 못한 누비바지에 땀이 올라서 굴뚝을 막는 데에 쓰던 멍석인 것처럼 더럽고 축축하다. 덥고 검은 것은 말고라도 냄새가 나는 것은 어찌하리. 아아! 내 신세야 가련하게도 되었구나.

 

 

손잡고 반기난 집 내 아니 가옵더니 등밀어 내치는 집 구차히 빌어 있어 옥식진찬 어데 가고 맥반염장 대하오며 금의화복 어데 가고 현순백결 하였는고. 이 몸이 살았는가 죽어서 귀신인가 말하니 살았으나 모양은 귀신일다. 한숨 끝에 눈물 나고 눈물 끝에 한숨이라. 도로혀 생각하니 어이없어 웃음 난다. 이 모양이 무슴 일고 미친사람 되었고나.

 

구절 풀이

* 손잡고 반가는 집 : 손잡고 반겨하는 집(서울에서 잘 나갈 때의 일임) * 등밀어 내치는 집 : 유배지에서 깃들어 사는 집을 말함 * 옥식진찬(玉食珍饌) : 훌륭한 밥과 반찬 * 맥반염장(麥飯鹽醬) : 보리밥에 소금과 간장, 즉 보잘 것 없는 식사 * 금의화복(錦衣華服) : 비단옷과 화려한 옷 * 현순백결(懸鶉百結) : 옷이 해어져서 백 군데나 기웠다는 뜻으로, 누덕누덕 기워진 옷 * 도로혀 : 돌이켜 * 전산후산(前山後山) : 앞산 뒷산

 

현대어 풀이

예전에 손을 잡고 반겨하는 집에도 내가 가지 않았었는데 오늘날에는 등을 밀어 내치는 집에 구차하게도 빌붙어 있으니 옥식(玉食)같은 좋은 밥과 진찬(珍饌)같은 훌륭한 반찬은 어디로 가고 보리밥에 소금장을 대하며 좋고도 비싼 옷을 어디로 가고 여기저기 기운 헌옷을 입고 있는가. 이 몸이 살아 있는가, 죽어서 귀신이 되었는가.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살아는 있으나 모양은 죽은 귀신이로다. 한숨 끝에 눈물이 나고 눈물 끝에 한숨이라. 돌이켜 생각하니 어이없어 웃음이 난다. 이 모양이 무슨 일인고 미친 사람이 다 되었구나.

 

 

어와 보리가을 되었는가 전산후산에 황금빛이로다. 남풍은 때때 불어 보리물결 치는고나. 지게를 벗어 놓고 전간(田間)에 굼일면서 한가히 뷔는 농부. 묻노라, 저 농부야 밥 우희의 보리술을 몇 그릇 먹었느냐. 청풍에 취한 얼굴 깨연들 무엇하리. 연년이 풍년드니 해마다 보리 비어 마당에 뚜드려서 방아에 쓸어내어 일분(一分)은 밥쌀하고 일분(一分)은 술쌀하여 밥 먹어 배부르고 술먹어 취한 후에 함포고복하여 격앙가를 부르나니. 농부의 저런 흥미 이런 줄 알았더면 공명을 탐(貪)치 말고 농사를 힘쓸 것을 백운이 즐거온 줄 청운이 알았으면 탐화봉접(探花蜂蝶)이 그물에 걸렸으랴.

 

구절 풀이

* 보리가을 : 익은 보리를 거두어들이는 일.[가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에 유의. ‘가을하다’는 ‘벼나 보리 따위의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다.’의 뜻임] * 전간(田間)에 굼일면서 : 밭사이에서 꼼지락거리며 일하는 * 깨연들 : (술에서) 깬들 * 연년(年年) : 해마다 * 일분(一分) : 일부분 * 함포고복(含哺鼓腹) : 배불리 먹어 배를 두드리며 흥겨워함 * 격앙가(擊壤歌) : 풍년이 들어 농부가 태평한 세월을 즐기는 노래 * 탐화봉접(探花蜂蝶) : 꽃을 찾는 벌과 나비. 기생집을 드나들며 국고를 축내다 죄를 지은 자신을 가리킴 * 그물 : 법망에 걸림

 

현대어 풀이

아아! 보리를 가을하는 때가 되었는가. 앞산 뒷산에 황금빛이로다. 남풍은 때때로 불어 보리물결 치는구나. 지게를 벗어 놓고 밭에서 꾸물거리며 한가하게 보이는 농부들. 내 물어보노라. 저 농부야 밥 위에 보리술을 몇 그릇이나 먹었느냐. 청풍에 취한 얼굴이 깬들 무엇하리. 해마다 풍년이 드니 해마다 보리를 베어 마당에서 두드려서 방아에 찧어내어 일부는 밥을 하고 일부는 술을 만들어, 밥 먹어 배부르고 술 먹어 취한 후에 함포고복(含哺鼓腹)하여 격앙가를 부르니, 농부의 저런 흥미가 이렇게 좋은 줄을 알았더라면 공명(功名)을 탐하지 말고 농사에나 힘을 쓸 것을, 흰 구름이 즐거운 줄을 푸른 구름이 알았다면 꽃 찾는 나비와 벌처럼 법망(法網)에 걸려 이 고생을 하랴.

 

 

어제는 옳던 일이 오늘이야 왼 줄 아니 뉘우쳐 하는 마음 없다야 하랴마는 범 물릴 줄 알았으면 깊은 뫼에 들어가며 떨어질 줄 알았으면 높은 낢에 올랐으랴. 천동할 줄 알았으면 잠간 루(樓)에 올랐으랴. 파선할 줄 알았으면 전세대동 실었으랴. 실수할 줄 알았으면 내가 장기 벌였으랴. 죄 지을 줄 알았으면 공명 탐차 하였으랴. 산진메 수진메와 해동청 보라메가 심수총림 숙여 들어 산계야앙 차고 날제 아깝다 걸리었다 두 날개 걸리었다. 먹기에 탐심 나서 형극(荊棘)에 걸리었다.

 

구절 풀이

* 왼 줄 : 그릇된 일인 줄 * 낢 : 나무 * 천동(天動) : 천둥 * 루(樓) : 높은 누각 * 파선(破船) : 배가 깨짐 * 전세대동 : 세금으로 걷은 쌀 * 내가 장기 : 내기장기(도박장기)인 듯 * 공명 탐차 : 공명을 탐하고자 * 산진메 : 야생으로 여러 해 된 매를 산진(山陳)이라 함 * 수진메 : 집에서 길들여 여러 해 된 매를 수진(手陳)이라 함 * 해동청 : 매의 일종으로 푸른빛의 매 * 보라매 : 그 해 봄에 나서 길들여 가을이 되매 사냥을 나갈 수 있는 매. ‘보라’는 몽고어로서 ‘가을’의 뜻임 * 심수총림(深樹叢林) : 깊은 숲속 * 산계야목(山鷄野鶩) : 산꿩과 들오리 * 날제 : 날아갈 때 * 탐심(貪心) : 탐욕의 마음 * 형극(荊棘) : 나무의 가시. 고난의 길

 

현대어 풀이

어제는 옳던 일이 오늘에서야 그른 줄을 아니 뉘우쳐하는 마음이 없다고야 하겠는가마는 호랑이에게 물릴 줄을 알았으면 깊은 산에 올라갈 것이며, 떨어질 줄 알았으면 높은 나무에 올랐으랴. 천둥번개 칠 줄을 알았으면 잠깐 누각에 올랐으랴. 파선(破船)할 줄 알았으면 세금으로 걷은 쌀을 실었으랴. 실수할 줄 알았으면 내기장기를 벌였겠느냐. 죄 지을 줄 알았으면 공명을 탐하고자 하였으랴. 산진이 수진이 해동청 보라매가 깊은 숲속에 날아 들어와 산꿩과 들오리를 차고 날아갈 제, 아깝다 걸리었다. 두 날개가 걸리었다. 먹는 일에 탐이 나서 나무의 가시에 걸리었구나.

 

 

어와 민망하다 주인박대 민망하다. 아니 먹은 헛 주정에 욕설조차 비경하다. 혼자 말로 군말하듯 나 들으라 하는 말이, 건너집 나그네는 정승(政丞)의 아들이요 판서(判書)의 아우로서 나라에 득죄하고 절도(絶島)에 들어와서 이전 말은 하도 말고 여기 사람 일을 배와 고기낚기 나무베기 자리치기 신삼기와 보리 동냥 하여다가 주인양식 보태는데, 한 군데는 무슨 일로 하로 이틀 몇날 되되 공한 밥만 먹으려노. 쓰자하는 열 손가락 꼼작이도 아니하고 걷자하는 두 다리는 움직이도 아니하네. 석은 남게 박은 끌가 전당 잡은 촛대런가 종 찾으면 양반인가 빚 받으련 채주(債主)런가.

 

구절 풀이

* 주인박대 : 귀양지의 집주인이 박절하게 대함 * 헛 주정 : 술에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하는 주정 * 비경(非驚) : 놀라운 일이 아니다 * 군말 : 하지 않아도 좋을 쓸데없는 군더더기 말 * 건너집 나그네 : 건넛집에 들어와 있는 유배객 * 절도(絶島) : 외딴 섬 * 이전 말 : 예전의 부귀영화를 누리던 시절의 이야기 * 자리치기 : 멍석, 돗자리 등을 만들기 * 신삼기 : 짚신 만들기 * 한 군데는 : (다른) 한곳에서는, 즉 우리 집에서는 * 하로 이틀 몇 날 되되 : 하루 이틀 몇 날이 되었으되 * 공한 밥 : 공짜 밥,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함 * 남게 박은 끌가 : 나무에 박은 끌인가. ‘끌’은 망치로 한쪽 끝을 때려서 나무에 구멍을 뚫거나 겉면을 깎고 다듬는 데 쓰는 연장 * 채주(債主) : 빚을 받으려는 사람

 

현대어 풀이

아아! 민망하다. 주인 박대가 민망하다. 술 먹지도 않은 헛주정에 욕설조차 심하구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듯 나에게 들으라는 듯 하는 말이, “건너집 귀양객은 정승의 아들이요 판서의 아우로서 나라에 죄를 얻어 이 절해고도(絶海孤島)에 들어와서 이전에 자기가 호사(豪奢)를 부리던 얘기는 하지도 않고 여기 사람들의 어렵고 힘든 일을 배워 고기 낚기, 나무 베기, 돗자리치기, 짚신삼기, 보리동냥 등을 하여 주인집 양식을 보태는데, 한군데는(즉, 우리 집에서는) 무슨 일로 하루 이틀 몇 날이 되었으되 공짜 밥만 먹으려 하는가. 사용하라고 달려 있는 열 손가락은 꼼짝도 하지 않고 걸으라고 있는 두 다리는 옴짝하지도 아니하네. 썩은 나무에 박은 끌인가 전당포에 잡힌 촛대이런가. 종을 찾으러 온 양반인가, 빚 받으러 온 사람인가.

 

 

동이성의 권당인가 풋낯의 친구런가 양반인가 상인(常人)인가 병인인가 반편인가 화초라고 두고 보며 괴석(怪石)이라 놓고 볼까. 은혜 끼친 일이 있어 특명으로 먹으려나. 저 지은 죄 내 아던가 저의 서름 뉘 아던가. 밤낮으로 우는 소리 한숨 지고 슬픈 소리 듣기에 즈즐하고 보기에 귀찬하다. 한 번 듣고 두 번 듣고 통분키도 하다마는 풍속을 보아하니 해연이 막심하다. 인륜(人倫)이 없었으니 부자(父子)의 싸움이요 남녀를 불문하니 계집의 등짐이라.

 

구절 풀이

* 동이성(同異姓)이 권당(眷堂) : 성부동남(姓不同-)이라는 말을 풀어서 쓴 것, 즉 성이 같거나 다른 가까운 친척 * 풋낯의 : 얼굴 익힌 지가 얼마 되지 않은 * 병인인가 반편인가 : 병신인지 반편이(지능이 보통 사람보다 모자라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인지 * 괴석(怪石) : 기이하게 생긴 완상용 수석 * 특명으로 : 특별한 명분으로 * 저 지은 죄 내 아던가 : 저(나)가 지은 죄를 내가 알 턱이 있는가? 즉 나와 관련이 없다는 말 * 즈즐하고 : 몹시 지루하고, 싫증이 나고 * 귀찮하다 : 귀찮다 * 풍속(風俗) : 유배지인 추자도의 풍속을 말함 * 해연(駭然)이 막심(莫甚)하다 : 놀랍고 이상스러운 점이 많다 * 계집의 등짐이라 : 여자들도 등짐을 하더라. 등짐 일을 하는 것은 당시에나 지금에나 거의 남자들의 몫임

 

현대어 풀이

성이 같거나 다른 친척인가 이제 막 얼굴을 튼 친구인가. 양반인가 상민인가 병든 사람인가 반편이인가. 화초(花草)라고 두고 볼 것인가, 괴석(怪石)이라고 놓고 감상할까. 나에게 은혜를 끼친 적이 있어 특별한 명분으로 얻어먹으려 하는가. 제가 지은 죄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으며 저의 서러움을 누가 알던가. 밤낮으로 우는 소리 한숨이 나오고 슬픈 소리 듣기에도 싫증이 나고 보기에도 귀찮구나. 주인의 이러한 궁성거리는 말을 한 번 듣고 두 번 듣고 통분하기도 하지마는 이곳의 풍속을 보아하니 해괴망측한 일이 많구나. 인륜(人倫)이 없으니 부자(父子)간에 싸움질이요, 남녀의 분별이 없으니 계집들이 등짐을 지는구나.

 

 

방언이 괴이하니 존객(尊客)인들 아올소냐. 다만지 아는 것이 손꼽아 주먹 헴에 두 다섯 홑 다섯 뭇다섯 곱기로다. 포학과 탐욕이 예의염치 되었음에 분전승합(分錢乘合)으로 효제충신 삼아있고 한둘 공덕으로 지효(至孝)로 알았으니 혼정신성(昏定晨省)은 보리 담은 대독이요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은 돈 모으는 벙어리라. 왕화(王化)가 불급하니 견융의 행사로다. 인심이 아니어든 인사(人事)를 책망하랴. 내 귀향 아니러면 이런 모양 보았으랴.

 

구절 풀이

* 방언 : 사투리 * 다만지 : 오직, 다만 * 다섯 꼽기 : 십진법이 아닌 5진법을 사용함 * 분전승합(分錢乘合) : 푼돈과 얼마 되지 않는 곡식 * 효제충신(孝悌忠信) : 효도와 우애, 충성과 신의 * 혼정신성(昏定晨省) : 저녁에는 잠자리를 살피고, 아침에는 일찍이 문안을 드린다는 뜻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도리 * 대독 : 큰 항아리 *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 : ‘나갈 때는 반드시 아뢰고, 돌아오면 반드시 얼굴을 뵌다'라는 뜻으로, 외출할 때와 귀가했을 때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 * 왕화(王化) : 임금의 교화(敎化) * 견융(犬戎)의 행사 : 오랑캐들의 행동, 오랑캐들의 습속 * 인심이 아니어든 인사를 책망하랴 : 사람들의 마음이 오랑캐처럼 막돼먹은 판에 행동거지의 옳고 그름을 따지겠는가? * 귀향 : 귀양살이, 유배(流配)

 

현대어 풀이

그 지방 사투리가 괴이(怪異)하니 존객인들 알겠느냐.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주인의 셈법에 둘 다섯, 홑 다섯 등으로 모두가 오진법이더라. 포학과 탐욕을 예의염치로 삼고 푼돈을 두고 다투는 것을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삼으니 한두 가지 공덕을 쌓고 그것이 지극한 효도인 것으로 아니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예절은 보리를 담아둔 큰 항아리 같이 볼품없으며 나가고 돌아올 때 부모님께 고하는 법은 아예 없어 벙어리처럼 말이 없다. 임금의 가르침이 미치지 못하니 하는 짓마다 오랑캐의 습속(習俗)이로다. 사람들의 기본 심성이 말이 아닌데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 책망할 것이냐. 내가 귀양살이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모양을 보았겠는가?

 

 

조고마한 실개천에 발을 빠진 소경놈도 눈 먼 줄만 한탄하고 개천 원망(怨望) 안하나니 임자 아녀 짖는 개를 꾸짖어 무엇하리. 아마도 할 일 없이 생애를 생각하고 고기낚기 하자하니 물머리를 어찌하고. 나무 베기 하자하니 힘 모자라 어찌하며 자리치기 신삼기는 모르거든 어찌하리. 어와 할 일 없다 동냥이나 하여보자. 탈 망건 갓 숙이고 홑 중치막 띠 끄르고 총만 남은 헌 짚신에 세살 부채 차면(遮面)하고 남초 없는 빈 담뱃대 소일(消日) 조로 가지고서 비슥비슥 걷는 걸음 걸음마다 눈물 난다.

 

구절 풀이

* 물머리 : 배 멀미 * 탈 망건 : 망건을 벗다 * 중치막 : 벼슬하지 아니한 선비가 소창옷 위에 덧입던 웃옷 * 총 : 짚신이나 미투리 따위의 앞쪽의 우뚝 솟은 부분 * 세살 부채 : 가는 살을 붙인 부채 * 차면(遮面)하고 : 얼굴을 가리고 * 남초(藍草) : 담배 * 소일 조로 가지고서 : 심심풀이삼아서 가지고

 

현대어 풀이

조그만 실개천에 발이 빠진 소경도 눈먼 것을 한탄하고 개천 원망 하지 않으니 주인이 아니어서 짖는 개를 꾸짖어서 무엇하리.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생계를 생각하고 물고기 낚기를 하자하니 배 멀미를 어찌하고, 나무를 베자하니 힘이 모자라 어찌하며, 돗자리치기와 신을 삼는 일은 할 줄 모르니 어찌하리. 아아! 할 일 없다. 동냥이나 하여보자. 망건을 벗고 갓을 숙여 쓰고 홑 중치막의 띠를 끄르고 총만 남은 헌 짚신에 가는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담뱃잎도 없는 빈 담뱃대를 심심풀이로 가지고서 비슥비슥 걷는 걸음에 걸음마다 눈물이 난다.

 

 

세상인사 꿈이로다 내 일 더욱 꿈이로다. 엊그제는 부귀자(富貴者)요 오늘 아침 빈천자라. 부귀자 꿈이런가 빈천자 꿈이런가. 장주호접 황홀하니 어느 것이 정 꿈인고. 한단치보(邯鄲稚步) 꿈인가 남양초려 큰 꿈인가. 화서몽 칠원몽에 남가일몽 깨고 나서 몽중흉사 이러하니 새벽 대길 하오리다. 가난한 집 지내치고 넉넉한 집 몇 집인고 사립문을 드자할가 마당에 섰자하랴.

 

구절 풀이

* 내 일 : 나의 일, 내가 당한 현실의 상태 * 장주호접(長晝胡蝶) : 긴 낮의 나비에 관한 꿈, 인생의 덧없음을 이르는 말 * 정 꿈인고 : 진짜 꿈인가 * 한단치보(邯鄲稚步) : 한단은 조나라 수도인데, 한단 사람의 걸음걸이가 매우 아름답다고 하여 연나라 소년이 와서 그 걸음걸이를 배우다가 옳게 배우지도 못하고 자기 본래의 걸음걸이마저 잃어버렸다는 이야기. 즉 남의 흉내만 내다가 자기 본분을 잊는다는 뜻. * 남양초려(南陽草廬) : 제갈양이 출사하기 전 머물렀던 남양의 초가집 * 화서몽(華胥夢) : 옛날 황제가 낮잠을 자면서 화서(華胥)라는 무위자연의 나라를 꾼 꿈. 일장춘몽과 뜻이 통함 * 남가일몽(南柯一夢) : 남쪽 가지에서의 꿈이란 뜻으로, 덧없는 꿈이나 한때의 헛된 부귀영화를 이르는 말 * 몽중흉사(夢中凶事) : 꿈속의 흉한 일. 꿈속에서 흉한 일을 당하면 현실에서 좋은 일이 일어난다 함 * 대길(大吉) : 크게 좋은 일이 일어남 * 드자할가 : 들어갈까 * 섰자하랴 : 서 있을까

 

현대어 풀이

세상의 인간사는 모두 꿈이로다.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일도 더욱 꿈이로다. 엊그제는 부귀한 사람이었고 오늘 아침엔 빈천한 사람이라. 부귀했던 과거가 꿈이던가, 빈천한 오늘이 꿈이런가. 큰 낮의 호랑나비 되는 꿈이 황홀하니 어느 것이 진정 꿈인가. 한단치보의 꿈인가 남양에서 밭 갈던 삶이 큰 꿈인가. 화서몽, 칠원몽에 남가일몽 깨고 나서 꿈속에서 보이던 흉한 일이 이러하니 현실로 돌아온 새벽에는 크게 길할 것이로다. 가난한 집은 그냥 지나고 넉넉하게 잘 사는 집은 몇 집이나 되는가. 사립문 안에 들어가자고 할까 마당에 서겠다고 할 것인가.

 

 

철없는 어린 아해 소 같은 젊은 계집 손가락질 가라치며 귀향다리 온다하니 어와 고이하다. 다리 지칭(指稱) 고이하다 구름다리 징검다리 돌다리 토다리라 춘정월 십오야(夜) 상원야 밝은 달에 장안시상 열 두 다리 다리마다 바람 불어 옥호금준은 다리다리 배반(杯盤)이요 적성가곡은 다리다리 풍류로다. 웃다리 아래다리 석은 다리 헛다리 철물(鐵物)다리 판자(板子)다리 두다리 돌아들어 중촌(中村)을 올라 광통다리 굽은다리 수표(水標)다리 효경(孝經)다리 마전(馬廛)다리 아량 위 겻다리라. 도로 올라 중학(中學)다리 다리 나려 향다리요 동대문(東大門) 안 첫다리며 서대문 안 학다리 남대문 안 수각다리 모든 다리 밟은 다리 이 다리 저 다리 금시초문(今始初聞) 귀향다리 수종다리 습다림가 천생이 병신인가.

 

구절 풀이

* 귀향다리 : 귀양객을 낮춰서 놀리는 호칭 * 춘정월 십오야 : 정월 15일 보름 * 상원야(上元夜) : 음력 정월 보름날 밤 * 장안시상 : 서울 장안 거리의 * 옥호금준(玉壺金樽) : 옥 술단지와 금 술잔 * 배반(杯盤) : 술상에 차려 놓은 그릇. 또는 거기에 담긴 음식. 혹은 흥취 있게 노는 잔치 * 적성가곡 : 춘향가 속에 들어 있는 노래. 적성가(남원 땅에 처음 내려온 이몽룡이 방자를 앞세우고, .광한루에 가서..

남원의 경치를 둘러보며 부르는 노래 대목) * 수종다리 : 백수증(白水症). 다리가 부어올라서 점점 퍼지게 되는 수종

 

현대어 풀이

철없는 어린 아이와 소 같은 젊은 계집이 손가락질 가리키며 귀양다리 온다고 하니 아아! 괴이(怪異)하다. 다리라고 칭하는 것이 괴이하다. 구름다리, 징검다리, 흙다리라. 정월 15일 보름날 밝은 달에 서울 장안의 열 두 다리 다리마다 바람 불어 옥 술단지에 금 술잔마다 다리다리 배반(杯盤)이요, 적성가곡은 다리다리 풍류로다. 웃다리, 아랫다리, 썩은 다리, 헛다리, 철물로 만든 다리, 판자로 만든 다리, 사람의 두 다리로 돌아들어 중촌을 올라가 광통다리, 굽은 다리, 수표다리, 효경다리, 마전다리, 아량 위의 곁다리라. 도로 올라가 중학다리, 다리를 내려오니 향다리요, 동대문 안 첫다리며, 서대문 안 학다리, 남대문 안의 수각다리, 모든 다리를 밟고 온 다리, 이 다리 저 다리 다 들어봤지만 귀향다리는 금시초문이라. 다리가 부어올라 점점 퍼지는 수종다리이니 습다리인가, 천생이 병신인가?

 

 

아마도 이 다리는 실족하여 병든 다리 두 손길 느려치면 다리에 가까오니 손과 다리 머다한들 그 사이 얼마치리. 한 층을 조곰 높여 손이라나 하여주렴. 부끄럼이 몬저 나니 동냥말이 나오더냐. 장가락 입에 물고 아니가는 헛기침에 허리를 굽힐 제는 공손(恭遜)한 인사로다. 내 허리 가이 없어 비부(婢夫)에게 절이로다. 내 인사 차서(次序) 없이 종에게 존대(尊待)로다.

 

구절 풀이

* 느려치면 : 길게 늘어뜨리면 * 머다한들 : 멀다고 한들 * 손이라나 하여주렴 : 손이라고나 불려주렴, 손[手, 손님(客)] * 동냥말 : 동냥을 달라는 부탁의 말 * 장가락 : 장타령, 빌어먹는 거지들이 부르는 노래 * 비부(卑夫) : 비천한 사람 * 차서(次序) : 위아래의 분별이 없어, 위아래 구별하지 않고 * 존대(尊待) : 높여 대하다

 

현대어 풀이

아마도 이 다리는 실족(失足)하여 병든 다리일 것이니, 두 손길을 늘어뜨리면 다리에 가까울 것이니 손과 다리 사이가 멀다 한들 그 사이가 얼마나 멀 것인가. 다리라고 부르지 말고 한 층을 조금 높여 손이라고 불러주렴. 부끄럼이 먼저 나니 동냥을 달라는 말이 나오더냐. 장타령을 차마 내뱉지도 못하고 잘 나오지도 않는 헛기침에 허리를 굽힐 때는 공손하게 인사할 뿐이로다. 내 허리가 가엾어서 비천한 것들에게 절을 하게 되도다. 나의 인사는 위아래가 없이 종에게도 존대를 하는구나.

 

 

혼자말로 중중(重重)하니 주린 중 들어온가 그 집사람 눈치알고 보리 한 말 떠서주며 가져가오 불상하고 적객(謫客) 동냥 예사(例事)오니 당면(當面)하여 받을 제는 마지못한 치사(致辭)로다. 그렁저렁 얻은 보리 들고 가기 어려우니 어느 노비 수운(輸運)하리. 아모려나 저 보리라 갓은 숙여 지려니와 홑 중치막 어찌할고.

 

구절 풀이

* 중중하니 : 중얼중얼하니 * 주린 중 : 굶주린 스님 * 눈치알고 : 눈치로 알아차리고 * 예사오니 : 특별한 일이 아니고 예사로 있는 일이니 * 당면(當面)하여 : 바로 눈앞에 당함 * 치사(致謝) : 고맙고 감사하다는 뜻을 표시함 * 수운(輸運)하리 : 물건을 나를 것인가 * 저 보리라 : 등에 물건을 지다

 

현대어 풀이

혼자말로 중얼중얼하니 굶주린 중이 들어왔는가. 그 집 사람이 눈치로 알아차리고 보리 한 말 떠서 주며 가져가시오, 불쌍한 귀양객들의 동냥질은 예사로 있는 일이라오. 막상 닥쳐서 동냥을 받을 때는 마지못해 치사하더라. 그럭저럭 얻은 보리를 들고 가기가 어려우니 어느 노비가 있어 운반하리. 아무튼 한 번 짐을 져보리라. 갓은 숙여지지만 입은 홑 중치막은 거추장스러워 어이할꼬.

 

 

주변이 으뜸이라 변통을 아니하랴. 넓은 소매 구기질러 품속으로 넣고 보니 긴등 거리 제법이라 하 괴이(怪異)치 아니하다. 아마도 꿈이로다 일마다 꿈이로다 동냥도 꿈이로다 등짐도 꿈이로다 뒤에서 당기는 듯 앞에서 미옵는 듯 아모리 굽흐려도 자빠지니 어찌하리. 머지 아닌 주인집을 천신만고(千辛萬苦) 겨우오니 존전(尊前)의 출입(出入)인가 한출첨배 하는고야. 저 주인 거동보소 코웃음 비웃으며 양반도 할일 없네. 동냥도 하시었고 귀빈도 속절없네. 등짐도 지시었고 밥싼 노릇 하오시니 저녁 밥 많이 먹소.

 

구절 풀이

* 주변 : 일을 주선하거나 변통함 * 변통(變通) : 형편과 경우에 따라서 일을 융통성 있게 잘 처리함 * 긴등 : 길게 뻗어 나간 언덕의 등성이 * 하 괴이치 : 너무 괴이하지, 너무 이상하지 * 일마다 : 하는 일마다 * 등짐 : 등에 짐을 짊어짐 * 미옴는 듯 : 미는 듯 * 굽흐려도 : 등을 굽으려고 해도 * 머지 아닌 : 멀지 않은 * 존전(尊前) : 신불(神佛)이나 존귀한 사람의 앞 * 한출첨배(汗出沾背) : 몹시 부끄럽거나 무서워서 흐르는 땀이 등을 적심 * 밥싼 노릇 : 밥 먹을 자격이 있는 행동

 

현대어 풀이

주변머리 좋은 것이 으뜸이라. 변통을 아니 할 것인가. 넓은 소미는 구겨 질러서 품속으로 넣고 보니 긴 언덕의 거리가 제법 되나 너무 괴이하게 보이지는 않구나. 아마도 꿈이로다. 하는 일마다 모두 꿈이로다. 동냥도 꿈이로다. 등짐도 꿈이로다. 뒤에서 당기는 듯, 앞에서 미는 듯, 아무리 허리를 굽히려 해도 자빠지니 어찌하리. 멀지도 않은 주인집을 천신만고 끝에 겨우 오니 높은 상전(上典)집에 출입을 하는 것같이 등에서 땀이 나오는구나. 저 주인의 거동을 보소. 코웃음 치며 비웃으며 “양반도 참 할 일이 없네. 동냥질도 하시었으니 귀한손님이라도 어쩔 수 없나 보네. 등짐까지 지셨고 밥값을 하셨으니 저녁밥이나 많이 먹소.”

 

 

네 웃음도 듣기 싫고 많은 밥도 먹기 싫다. 동냥도 한 번이지 빌긴들 매양하랴. 평생에 처음이요 다시 못할 일이로다. 차라리 굶을진정 이 노릇은 못하리라. 무삼 일을 하잔 말고 신삼기나 하자하고 짚 한단 추려다가 신날부터 꼬아보니 조희 노도 모르거든 삿기꼬기 어이 알리. 다만 한 발 다 못 꼬아 손가락이 부르트니 할 리 없어 내어 놓고 긴 삼대를 베껴내어 자리 노를 배와 꼬니 천수만한 이 내 마음 부칠 데 전혀 없어 노꼬기에 부치었다.

 

구절 풀이

* 빌긴들 : (양식을) 빌기 인들 * 매양(每樣)하랴 : 항상 하랴, 늘 하랴 * 신날 : 짚신이나 미투리 바닥에 세로로 놓은 날. 네 가닥이나 여섯 가닥으로 하여 삼는다 * 조희 노 : 종이로 가늘게 비비거나 꼬아 만든 줄 * 삿기꼬기 : 새끼 꼬기 * 삼대 : 삼나무의 줄기 * 자리 노 : 돗자리를 만들기 위해 꼬는 줄 * 천수만한(千愁萬恨) : 이것저것 슬퍼하고 원망함. 또는 그런 슬픔과 한 * 부칠 데 : (취미나 마음을) 부칠 데

 

현대어 풀이

네 웃음도 듣기 싫고 많은 밥도 먹기 싫다. 동냥질 하는 것도 한 번이지 빌어먹는 일을 항상 할 것인가. 평생에 처음이요, 다시는 못할 일이로다. 차라리 굶을지언정 이 노릇은 못하겠다. 그러면 무슨 일을 하잔 말인가. 짚신 삼기나 하자하고 짚 한 단을 추려다가 신날부터 꼬아보니 종이 노도 모르는데 새끼 꼬기를 알겠는가. 다만 한 발을 다 못 꼬고 손가락이 부르트니 하릴없이 그만 두고 긴 삼대를 베껴내어 돗자리 줄을 배워서 꼬니 근심 많고 한이 많은 이 내 마음 붙일 데가 전혀 없어 노를 꼬는 일에 부쳤다.

 

 

날이 가고 밤이 새니 어느 시절 되었는고. 오동이 엽락(葉落)하고 금풍이 소슬하니 하목(夏鶩)은 제비(齊飛)하고 추천(秋天)은 일색(一色)일 제 황국 단풍이 금수장(錦繡帳)이 되었으며 만산초목이 잎잎마다 추성이라. 새벽 서리치는 날에 외기러기 슬피 우니 고객이 먼저 듣고 임 생각이 새로워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 보고지고. 나래 돋힌 학이 되어 날아가서 보고지고. 만리장천 구름 되어 떠나가서 보고지고. 낙락장송 바람 되어 불어가서 보고지고.

 

구절 풀이

* 오동이 엽락하고 : 오동나무의 잎이 떨어지고 * 금풍(金風) : 가을바람을 달리 이르는 말. 오행에 따르면 가을은 금(金)에 해당한다는 데에서 이르는 말 * 소슬(蕭瑟) : 으스스하고 쓸쓸하다 * 하목(夏鶩)은 제비(諸飛)하고 : 흰뺨검둥오리는 나란히 날고 * 추천(秋天) : 가을 하늘 * 황국(黃菊) : 노란 국화 * 금수장(錦繡帳) : 비단에 수를 놓아 만든 장막 * 추성(秋聲) : 가을의 소리 * 고객(孤客) : 외로운 나그네

 

현대어 풀이

날이 가고 밤이 새니 어느 시절이 되었는가. 오동잎이 떨어지고 금풍이 으스스하고 쓸쓸하게 불어오니 흰뺨검둥오리는 나란히 날고 가을 하늘은 한빛일 때 노란 국화와 단풍잎으로 비단 장막을 이루었으며 온 산의 초목들은 잎사귀마다 가을소리를 내더라. 새벽 서리치는 날에 외기러기 슬피 우니 외로운 나그네가 먼저 듣고 임 생각이 새롭게 나더라.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임의 얼굴이 보고 싶다. 날개 돋친 학이 되어 날아가서 보고 싶다. 만 리나 되는 넓은 하늘 구름 되어 떠나가서 보고 싶다. 낙락장송(落落長松)의 바람이 되어 불어가서 보고 싶다.

 

 

오동추야 달이 되어 비초여나 보고지고. 분벽사창(粉壁紗窓) 세우(細雨)되어 뿌려서나 보고지고. 추월춘풍 몇몇 해를 주야불리 하옵다가 전신만수(轉身萬愁) 머다 머되 소식조차 돈절하니 철석간장 아니어든 그리움을 견딜소냐. 어와 못 잊을다 임을 그려 못 잊을다. 용문검 태아검에 비수검(匕首劒)을 손에 쥐고 청산리 벽계수를 힘까지 버히어도 끊어지지 아니하고 한 데 이어 흐르나니 물 버히는 칼도 없고 정(情) 버히는 칼도 없네.

 

구절 풀이

* 오동추야(梧桐秋夜) : 오동잎 떨어지는 가을 달밤 * 분벽사창(粉壁紗窓) : 흙벽과 비단 휘장을 친 창. 여기서는 임금이 계신 방을 말함. * 세우(細雨) : 가랑비 * 추월춘풍(秋月春風) : 가을의 달과 봄바람 * 주야불리(晝夜不離) : 밤낮으로 떨어지지 않음 * 돈절(頓絶) : 소식이나 연락 따위가 딱 끊어짐 * 철석간장(鐵石肝腸) : 굳센 의지나 지조가 있는 마음, 무정한 마음 * 용문검(龍紋劍) : 용을 수놓은 검 * 태아검(太阿劍) : 중국 초나라 보검(寶劍)의 하나. 구야자(歐冶子)와 간장(干將)이 함께 만든 것으로 용연(龍淵), 공포(工布)와 더불어 명검으로 불린다 * 버히어도 : (칼로) 베어도

 

현대어 풀이

오동잎 떨어지는 밤에 달이 되어 비추어나 보고 싶다. 북벽으로 난 비단창문에 가는 비가 되어 뿌려나 보고 싶다. 추월춘풍 몇 년이나 밤이고 낮이고 이별 없이 지내다가 전신만수 멀다고 하되 소식조차 끊어지니 쇠나 돌로 된 간장(肝腸)이 아니거든 그리움을 견딜쏘냐. 아아! 못 잊겠다. 임이 그리워 못 잊겠다. 용문검, 태아검에 비수검을 손에 쥐고 청산리 벽계수를 힘껏 베어내도 끊어지지 않고 다시 한데 뭉쳐 이어져 흐르나니 물을 베는 칼도 없고 정(情)을 베어내는 칼도 없네.

 

 

물 끊기도 어려우니 마음 끊기 어이하리. 용문지적(龍門之跡) 가비업고 옥정지수(玉井之水) 흐리오며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되고 벽해가 상전되나 임 그리는 마음이야 변할 길이 있을소냐. 내 이리 그리운 줄 아오시나 모르시나 내 아니 잊었거든 임이 혈마 잊었으랴. 풍운이 흩어져도 모도힐 때 있었으니 엄상이 차다한들 우로(雨露)가 아니오라. 울음 울어 떠난 임을 웃음 웃어 만나고저 이리저리 생각하니 가삼 속에 불이 난다. 간장(肝腸)이 다 타오니 무엇으로 끄잔 말고. 끄기가 어려울 손 오장의 불이로다. 천상수 얻어오면 끌 법도 있건마는 알고도 못 얻으니 셔가 바타 말이 없네.

 

구절 풀이

* 용문지적(龍門之跡) : 명망(名望)이 높은 사람의 흔적 * 옥정지수(玉井之水) : 좋은 샘의 물 * 혈마 : 설마 * 모도힐 때 : 모아질 때, 모일 때 * 엄상(嚴霜) : 된서리 * 우로(雨露) : 비와 이슬 * 가삼 : 가슴 * 오장(五臟) : 간장, 심장, 비장, 폐장, 신장의 다섯 가지 내장을 통틀어 이르는 말 * 천상수(天上水) : 하늘 위의 물. 빗물 * 셔가 바타 : 혀가 밭아서, 혀가 말라서

 

현대어 풀이

물을 끊기도 어려우니 마음 끊기를 어찌 할 수 있으리. 용문지적 가비없고 옥정의 물이 흐리니 임을 그리는 마음이야 변할 리가 있을쏘냐. 내가 이렇게 그리운 줄을 임이 설마 잊었으랴. 풍운이 흩어져도 모아질 때가 있으니 된서리가 차다한들 기껏 비와 이슬이 아니겠는가. 울음 울고 떠난 임을 웃음 웃고 만나고자 이리저리 생각하니 가슴 속에 불이 난다. 간장(肝腸)이 다 타오르니 무엇으로 끈단 말인가. 끄기가 어렵기로는 오장(五臟)에 붙은 불이로다. 천상수를 얻어온다면 끌 법도 하다마는 알고도 못 얻으니 혀가 말라서 말이 없네.

 

 

차라리 쾌(快)히 죽어 이 설움을 잊자하고 포구사변(浦口沙邊) 혼자 앉아 종일토록 통곡하며 망해투사 하려함도 한 번 두 번 아니오며 적적중문(寂寂重門) 굳이 닫고 천사만사 다 바리고 불식아사 하랴함도 한 번 두 번 아니오며 일각삼추 더디 가니 이 고생을 어찌할꼬. 시비에 개 짖으니 나를 놓을 관문(官文)인가. 반겨서 바라보니 황어 파는 장사로다. 바다에 배가 오니 사문(赦文) 갖은 관선(官船)인가 일어서서 바라보니 고기 낚은 어선(漁船)이라. 하로도 열두 시(時)에 몇 번을 기다린고. 설움 모여 병이 되니 백 가지 병 한데 난다.

 

구절 풀이

* 포구사변 : 포구의 모래밭 가 * 망해투사(茫海投死) : 망망한 바다에 몸을 던져 죽음 * 적적중문 : 고요하고 쓸쓸한 중문(中門) * 천사만상(千思萬思) : 온갖 생각 * 불식아사(不食餓死) : 굶어서 죽음 * 일각삼추(一刻三秋) : 일각(一刻)은 지금 시간으로 15분. 일각이 삼년처럼 느껴짐 [참고] 일각이 삼추(三秋) 같다 : 짧은 동안도 삼 년같이 생각된다는 뜻으로,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시비(柴扉) : 사립문 * 관문(官文) : 관청의 문서, 즉 공문서 * 황어파는 : 황어를 파는, 황어(黃魚)는 전어나 철갑상어를 말함 * 사문(赦文) : 나라의 기쁜 일을 맞아 죄수를 석방할 때에, 임금이 내리던 글 * 한데 난다 : (온갖 병이) 한꺼번에 난다

 

현대어 풀이

차라리 얼른 죽어 이 설움을 잊자하고 포구의 모래사장에 혼자 앉아 종일토록 통곡하며 바다에 몸을 던져 죽자고 한 것도 한 두 번이 아니며, 쓸쓸하고 고요한 중문을 굳게 닫고 온갖 생각 다 버리고 굶어죽자 하려함도 한 두 번이 아니니, 하루가 삼년처럼 더디게 가니 이 고생을 어찌할까. 사립문에 개가 짖으니 나를 그만 놓아주라는 관청의 공문서인가. 반가워 바라보니 황어를 파는 장사치로다. 바다에 배가 오니 나를 그만 석방하라는 문서를 갖고 오는 관선(官船)인가. 일어서서 바라보니 고기 잡는 어선이라. 하루도 열두 때 몇 번을 기다렸는가. 설움이 모여 병이 되니 백 가지의 병이 한꺼번에 나는구나.

 

 

배고파 허기증과 몸 추워 냉증(冷症)이요 잠 못들어 현기(眩氣)나고 조갈증은 예증이라. 술로 드온 병이오면 술을 먹어 고치오며 임으로 든 병이 오면 임을 만나 고치나니 공명(功名)으로 든 병에는 공명하여 고치잔들 활을 맞고 놀란 새가 살바지에 앉자하랴. 신농씨 꿈에 만나 병 고친 약을 물어 청심환 회심단(回心丹)에 강심탕(强心湯)을 먹었은들 천금준마 잃은 후에 외양집을 고침이랴. 갖은 성냥 다 배호자 눈 어두운 모양일다. 어와 이 사이에 해 벌써 저물었다. 청추가 다 지나고 엄동(嚴冬)이 되단말까.

 

구절 풀이

* 냉증 : 냉병(冷病). 하체를 차게 하여 생기는 병증 * 조갈증(燥渴症) : 입술이나 입 안, 목 따위가 몹시 마르는 느낌이나 증세 * 예증(例症) : 평소에 늘 앓는 병 * 살바지 : 과녁에 화살이 날아와 꽂힐 자리. 살받이 * 신농씨(神農氏) : 중국의 옛 전설 속의 제왕으로 삼황(三皇)의 한 사람. 농업·의료·악사(樂師)의 신, 주조(鑄造)와 양조(釀造)의 신이며, 또 역(易)의 신, 상업의 신이라고도 한다 * 청심환(淸心丸) : 심경(心經)의 열을 푸는 환약 * 천금준마(千金駿馬) : 값이 비싸고 뛰어난 명마 * 천금준마 잃은 후에 외양집을 고침이랴. : 망양보뢰(亡羊補牢) * 성냥 : 쇠를 불에 불리어 재생하거나 연장을 만듦. ‘성냥간’은 ‘대장간’의 방언 * 배호자 : 배우고 나자 * 눈 어두운 : 눈이 어두워지게 된, 눈이 멀게 된 * 청추(淸秋) : 맑게 갠 가을. 음력 8월을 달리 이르는 말

 

현대어 풀이

배고파서 허기증이 나고, 몸이 추어 냉증이 나고, 잠 못 들어서 현기증이 나며 조갈증은 늘상 있는 병이라. 술로 든 병이라면 술을 먹어 고치고 임 때문에 난 병이라면 임을 만나 고치나니. 공명(功名)으로 든 병에는 공명(功名)으로 고치자고 한들 화살을 맞고 놀란 새가 화살처럼 곧은 나뭇가지에 앉으려고 할 것이냐. 신농씨를 꿈에 만나 병을 고치는 약을 물어 청심환, 회심단, 강심탕을 먹는다한들 천금을 주고 산 비싼 말을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격이라. 온갖 물건을 만드는 기술을 다 배우자마자 눈이 어두워 소경이 되는 격이라. 아아! 어느 사이에 해가 저물었다. 맑은 기운의 가을이 다 지나고 추운 겨울이 되었단 말인가.

 

 

강촌에 눈 날리고 북풍이 호노(豪怒)하여 산하(山下) 산상(山上)에 백옥경이 되었으니 십이루(十二樓) 오경(五景)을 일실(一室)로 통하도다. 저 건너 높은 뫼에 홀로 섰는 저 소나무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내 이미 알았나니 광풍이 아무련들 겁(怯)할 것이 없거니와 도채 멘 저 초부야 행여나 찍으리라. 동백화 퓌온 꽃은 눈 속에 붉었으니 설만장안에 학정홍과 의연(依然)하다. 엊그제 그런 바람 간밤의 이런 눈에 높은 절(節) 고운 빛이 고침이 없었으니 춘풍에 도리화는 도로혀 부끄럽다.

 

구절 풀이

* 백옥경(白玉景) : 하늘 위에 옥황상제가 산다고 하는 가상적인 서울과 같은 풍경. 눈 덮인 풍경의 미화(美化) * 십이루(十二樓) : 중국 곤륜산에서 선인(仙人)이 산다는 열두 채의 높은 누각 * 오상고절(傲霜孤節) : 서릿발이 심한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외로이 지키는 절개. 대개 국화를 그렇게 부름 * 도채 멘 : 도끼를 맨 * 초부(樵夫) : 나무꾼 * 설만장안(雪滿長安) 학정홍(鶴頂紅) : 눈 속에 꽃이 피어 학 머리처럼 붉음. 동백꽃을 묘사하는 말임. [참고] 정다산의 <탐진촌요> 에도 “雪裏花開鶴頂紅(설리화개학정홍) : 눈 속에 꽃이 피어 학 머리처럼 붉도다”라는 표현이 있음. * 높은 절(節) : 높은 절개 * 도리화(桃李花) : 복숭아꽃과 자두나무 꽃. ‘오얏’은 ‘자두’의 비표준어임. * 도로혀 : 도리어.

 

현대어 풀이

강촌(江村)에는 눈이 날리고 북풍이 크게 불어 산 밑과 산 위가 모두 백옥경이 되었으니 곤륜산의 신선들이 산다는 십이루의 누각과 오경이 일실로 통하는구나. 저 건너 높은 산에 홀로 서 있는 저 소나무야, 서릿발에도 굴하지 않는 외로운 절개가 있음은 내 이미 알았나니 광풍이 아무리 분다고 한들 겁날 것이 없거니와 도끼를 맨 저 나무꾼이 행여나 찍을까 두렵구나. 동백꽃은 눈 속에서 붉게 피었으니 눈 덮인 장안에 학 머리와 함께 전과 다름이 없구나. 엊그제 그렇게 불던 바람과 간밤에 이렇게 내린 눈에 높은 절개와 고운 빛깔이 달라짐이 없으니 봄바람에 까불대는 복숭아꽃, 자두나무 꽃이 도리어 부끄럽다.

 

 

어와 외박(外泊)하니 설풍(雪風)에 어찌하리. 보선 신발 다 없으니 발이 시려 어이하리. 하물며 찬 데 누워 얼어 죽기 편시로다. 주인의 근력(筋力) 빌어 방 반간 의지하니 흙바람 발랐은들 죠희맛 아올손가. 벽마다 틈이 벌어 틈마다 버레로다. 구렁 지네 섞여있어 약간(若干) 버레 저허하랴. 굵은 버레 주어내고 적은 버레 던저주네. 대를 얽어 문(門)을 하고 헌 자리로 가리오니 적은 바람 가리온들 큰 바람 어찌하리. 도중(島中)의 나무 모와 조석(朝夕)밥 겨우 짓네.

 

구절 풀이

* 외박(外泊) : 밖에서 잠을 잠 * 편시(片時)로다 : 잠깐이다, 금방이다 * 근력 빌어 : 힘을 빌려 * 방반간 : 반 칸짜리 방 * 흙바람 : 흙벽 * 죠희맛 아올손가 : 종이를 바르지 않았음 * 버레로다 : 벌레로다 * 구렁 지네 : 구린내가 나는 지네, 노래기를 말함 * 저허하랴 : 두려워하랴, 무서워하랴 * 대을 얽어 : 대나무를 얽어서 * 헌 자리로 : 낡은 돗자리로 * 도중의 나무 : 섬 안의 나무

 

현대어 풀이

아아! 한데서 잠을 자니 눈보라에 어찌 견디리. 보선과 신발이 다 없으니 발이 시려 어이 견디리. 하물며 찬 데 누워 얼어 죽기가 잠시로다. 주인의 힘을 빌려 반 칸짜리 방을 지어 의지하니 흙벽을 바른들 종이 바른 벽 같을까. 벽마다 틈이 벌어져 틈마다 벌레로다. 노래기가 섞여있어 웬만한 벌레를 두려워하랴. 굵은 벌레는 주워내고 적은 벌레는 던져버리네. 대를 엮어 헌 자리로 가리니 적은 바람은 가린다 하더라도 큰 바람은 어찌하리. 섬 안의 나무를 주워 모아 아침 저녁밥을 겨우 짓네.

 

 

가난(艱難)한 손의 방에 불김이 쉬울소냐. 섬거적 뜯어 펴니 선단(仙緞) 뇨히 되었거늘 개가죽 추켜 덮고 비단이불 삼았세라. 적무인 빈 방안에 게발 물어 던지드시 새우잠 곱송거려 긴긴밤 새와 날 제 우흐로 한기(寒氣) 들고 아래로 냉기(冷氣) 올라 일홈은 온돌이나 한데만도 못하고야. 육신이 빙상(氷霜)되어 한전이 절로 날 제 송신하는 솟대런가 과녁 맞은 살대런가 사풍세우 문풍진가 칠보광의 금나빈가 사랑 만나 안고 떠나 겁난 끝에 놀라 떠나 양생법을 모르거든 고치(叩齒)조차 무삼일고.

 

구절 풀이

* 손의 방에 : 손님(작자)의 방에 * 선단 : 홑두루마기의 앞섶이나 치마폭에 세로로 댄 단 * 뇨히 : 담요가 * 적무인(寂無人) : 적막하고 사람이 없음 * 곱송거려 : 몸을 잔뜩 움추려 * 우흐로 : 위로 * 일홈도 온돌이나 : 명색이 온돌방이지만 * 빙상(氷霜) : 얼음과 서리 * 한전(寒戰) : 오한이 심하여 몸이 떨림. 또는 그런 증상 * 송신(送神) : ① 제사가 끝난 뒤에 신을 보내는 일. ② 마마가 나은 지 12일 만에 짚으로 만든 말 모양의 두신(痘神)을 강남으로 보내는 일 * 솟대 : 마을 수호신 및 경계의 상징으로 마을 입구에 세운 장대. 장대 끝에는 나무로 만든 새를 붙인다 * 사풍세우(斜風細雨) : 비껴 부는 바람과 가늘게 내리는 비 * 칠보광(七寶光) : 칠보의 화려한 빛. 칠보는 금·은·청옥·수정·진주·마노·호박 * 금나빈가 : 금으로 된 나비인가 * 양생법(養生法) : 병에 걸리지 아니하도록 건강관리를 잘하여 오래 살기를 꾀하는 방법 * 고치(叩齒) : 윗니와 아랫니를 자주 마주침.

 

현대어 풀이

가난한 귀양객의 방에 불을 넣어 따뜻하게 하기가 쉽겠느냐. 거적을 뜯어서 펴니 선단같은 담요가 되었거늘 개가죽을 추켜 덮고 비단이불로 삼았구나. 적막하고 사람이 없는 빈 방에 게발을 물어 던지듯이 새우처럼 잔뜩 몸을 움츠리고 긴긴밤을 새울 때에 위로는 한기(寒氣)가 들고 아래로는 냉기(冷氣)가 올라와 명색은 온돌이지만 한데만도 못하구나. 육신(肉身)이 눈사람이 되어 오한에 몸이 저절로 떨리니 송신(送神)하는 솟대인가, 과녁 맞은 화살대인가, 사풍세우에 떠는 문풍지인가, 칠보의 광채가 나는 나비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끌어안고 몸을 떨거나, 겁이 난 끝에 놀라서 몸을 떨거나 간에 양생법도 모르는데 이를 덜덜 떨며 마주치는 것은 무슨 일인가.

 

 

눈물 흘려 베개 젖어 얼음조각 비석인가. 새벽닭 홰홰우니 반갑다 닭의 소리. 단봉문 대루원에 대개문 하던 때라. 새로이 눈물지고 장탄식(長嘆息) 하던 때에 동창이 이명하고 태양이 높았으니 게을리 일어 앉아 굽은 다리 펴올 적에 삭다리를 조기는 듯 마디마디 소리 난다. 돌담뱃대 잎난초를 쇠똥불에 부쳐 물고 양지를 따라 앉아 웃에 이 주어낼 제. 아니 빗은 헐은 머리 두 귀 밑을 덮어 있네. 내 형상 가련하다 그려내어 보내파저.

 

구절 풀이

* 단봉문(丹鳳門) : 서울 창덕궁의 돈화문 왼쪽에 있는 문. * 대루원(待漏院) : 조선 시대에, 이른 아침에 대궐 안으로 들어갈 사람이 대궐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곳. 물시계가 입조(入朝)의 시각을 가리키기를 기다리던 곳이라는 뜻이다. [비슷한 말] 대루청. * 대개문(待開門) : 대궐 문을 열기를 기다림 * 동창(東窓)이 이명(已明)하고 : 동쪽 창문이 이미 밝았고 * 삭다리 : 살아 있는 나무에 붙어 있는, 말라 죽은 가지. ‘삭정이’의 방언 * 조기다 : 마구 두들기거나 패다 * 웃에 이 주어낼 제 : 옷에 붙은 이(虱)를 잡아낼 때 * 아니 빗은 : 빗지 않은

 

현대어 풀이

눈물을 흘려 베개가 젖으니 얼음조각으로 된 비석인가. 새벽닭이 홰홰우니 반갑구나 닭 울음소리. 단봉문 대루원에서 대궐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로다. 새롭게 눈물이 떨어지고 장탄식 하는 차에 동쪽 창문이 밝아오고 태양이 높이 솟았으니 천천히 일어나 앉아 굽은 다리를 펼 적에 마치 삭정이를 두들겨 패는 듯 마디마디에서 소리가 난다. 돌담뱃대에 잎담배를 넣고 쇠똥을 태운 불에 부쳐 물고 햇볕 쬐는 곳을 따라가며 앉아 옷의 이를 잡아낼 때 빗지 않은 헝클어진 머리가 두 귀 밑을 덮었네. 내 형상 가련하다 그림으로 그려내어 보내고 싶구나.

 

 

이 정의 깊은 정을 만에 하나 옮기시면 오늘날 이 고생은 몽중사 되련마는 기러기 지난 후에 척서도 못 전하니 초수오산 천만 첩에 내 그림을 뉘 전하리. 사랑홉다 이 볕이야 얼었던 몸 녹는고나. 백년골 쪼이온들 싫다야 하랴마는 어이한 쪼각구름 이따금 그늘지니 찬바람 지나칠 제 볕을 가려 아처롭다.

 

구절 풀이

* 몽중사(夢中事) : 꿈속의 일 * 척서(尺書) : 예전에 편지를 뜻하는 말 * 초수오산(楚水吳山) : 초나라의 강물과 오나라의 산. 편지를 전하려면 거쳐야 하는 길이 험함을 나타냄. * 사랑옵다 : 사랑스럽다

 

현대어 풀이

이 정경 중에서 하나라도 옮긴다면 오늘날 이 고생은 꿈속의 일이 되련마는 기러기 지난 후에 편지도 전할 수 없으니 초수오산 천만첩이라더니 그 험한 길에 내 그림을 누가 전하리. 사랑스럽구나 이 햇볕이여, 얼었던 몸이 녹는구나. 백년을 계속 쪼인다한들 싫다고 하겠는가마는 어찌한 조각구름에 이따금씩 그늘이 지니 찬바람 지나칠 때 볕을 가려서 안타깝구나.

 

 

오늘도 해가 지니 이 밤을 어찌 샐고. 이 밤을 지내온 후 오는 밤을 어찌하리. 잠이라 없거들랑 밤이나 짜르거나. 하고 한 밤이 오고 밤마다 잠 못 들어 그리온 이 생각하고 살뜰히 애석일 제 목숨이 부지하여 밥 먹고 살았으니 인간만물 생긴 중에 낱낱이 헤어 보니 모질고 단단한 이 날 밖에 또 있는가. 심산중 백악호가 모질기 날 같으며 독 깨치는 철몽둥이 단단하기 날 같으랴. 가슴이 터지오니 터지거든 굶을 뚫어 고모 창자 세살 창자 완자창을 갖초 내어 이같이 답답할 제 여닫혀나 보고지고. 어와 어찌하리 혈마한들 어찌하리. 세상귀향 나뿐이며 인간이별 나 혼자랴. 소무의 북해고생 돌아올 때 잊었으니

 

구절 풀이

* 짜르거나 : 짧거나 * 하고 한 : 많고도 많은 * 헤어 보니 : 헤아려 보니 * 날 밖에 : 나 외에 * 심산(深山)중 : 깊은 산중 * 백악호(白惡虎) : 흉악한 흰 호랑이 * 굶 : 굼기. 구멍 * 세살 창자 : 가는 살을 붙여 만든 창문 * 완자창(卍字窓) : 창살을 卍자형 또는 거꾸로 된 卍자 모양으로 만든 창문 * 혈마한들 : 설마한들 * 소무(蘇武) : 중국 전한 때의 명신. 선우에게 붙잡혀 복속할 것을 강요당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아 북해(바이칼호) 부근에 19년간 유폐되었으나 굴복하지 않고 절개를 지켜 귀국했다

 

현대어 풀이

오늘도 해가 지니 이 밤을 어찌 지새울까. 이 밤을 지낸 후에 다가오는 밤은 또 어찌할 것인가. 잠이 없거든 밤이나 짧거나, 많고도 많은 밤이 오고 밤마다 잠 못 들어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고 살뜰하게도 애석해 할 때 목숨을 부지하여 밥 먹고 살았으니 인간 만물 생긴 것 중에서 낱낱이 헤아려보니 모질고도 단단한 것이 나 밖에 또 있는가. 깊은 산중 흉악한 백호가 모질기가 나와 같을 것이며, 독을 깨는 철몽둥이가 단단하기가 나와 같으랴. 가슴이 터지니 터지거든 구멍을 뚫어 고모장지 세살장지 완자창을 갖추어 이처럼 답답할 때 여닫혀나 보고 싶다. 아아! 어찌하리, 설마한들 어찌하리. 세상에 귀양살이 하는 사람이 나 뿐이며, 인간세상 이별한 이가 나 혼자이랴. 소무도 19년간이나 북해에 갇혔으나 돌아올 때가 있었으니

 

 

내홀로 이 고생을 귀불귀 혈마하랴. 무삼 일로 마음 붙여 이 설움 잊자하리. 자른 낫 손에 쥐고 뒷동산 올라가서 풍상이 섞여친데 만목이 소슬하고 천고절 푸른 대는 봄빛이 혼자로다. 곧은 대 베어 내어 가리쳐 다듬오니 발 가옷 낚싯대라 좋은 품이 되리로다. 청올치 꼬은 줄이 낚시 메어 둘러메고 이웃집 아희들아 오늘이 날이 좋다. 새바람 아니 불고 물결이 고요하여 고기가 물 때로다. 낚시질 함께 가자 파립을 잣게 쓰고 망혜를 조여 쓰고 조대로 나가가니.

 

구절 풀이

* 귀불귀(歸不歸) : 돌아가지 못함 * 자른 낫 : 짧은 낫 * 만목이 소슬하고 : 온갖 나무가 으스스하고 쓸쓸하다 * 천고절(天高節) : 하늘이 높은 계절 * 봄빛이 혼자로다 : 홀로 봄날인 듯 푸르다 * 가리쳐 : 가지를 쳐서 다듬어 * 발 가옷 : 한 발 가옷이 되게, 한발 반이 되게. ‘발’은 어른 키 정도의 길이 * 청올치 : 칡의 속껍질로 꼰 노 * 새바람 : 샛바람. 뱃사람들의 은어로, ‘동풍’을 이르는 말 * 파립(破笠) : 헤어진 갓 * 잣게 : 뒤로 자빠지게 * 망혜(芒鞋) : 짚신 * 조대(釣臺) : 낚시터

 

현대어 풀이

나 홀로 이 고생을 하며 돌아가지 못하고 설마 그대로이랴. 무슨 일로 마음을 붙여 이 서러움을 잊자하리. 짧은 낫 손에 쥐고 뒷동산에 올라가서 바람과 서리가 섞여 친 곳에 모든 나무가 쓸쓸하고 하늘이 높은 계절인 이 가을에 푸른 대나무는 혼자서 봄빛이로다. 곧은 대를 베어내어 가지를 쳐서 다듬으니 한발 반이 넘는 낚싯대라. 좋은 품의 낚싯대가 되겠구나. 칡 속껍질로 노를 꼬아 낚싯줄을 만들어 둘러메고 이웃집 아이들아, 오늘 날씨 좋구나. 샛바람이 불지 않고 물결이 고요하여 고기가 물 때로다. 낚시질 함께 가자. 찢어진 갓을 뒤로 자빠지게 쓰고 짚신을 조여 신고 낚시터로 나아가니

 

 

내 놀이 한가롭다 원근산천이 홍일을 띄었으니 만경창파에 오로지 금빛이라. 낚시를 들이치고 무심히 앉았으니 은린옥척이 절로 와 무는구나. 구타야 취어하랴 자취를 취함이라. 낚시대를 떨떠리니 잠든 백구 다 놀란다. 백구야 나지마라 너 잡을 내 아닐다. 네 본대 영물이라 내 마음 모를소냐. 평생에 괴던 임을 천리에 이별하니 사랑함도 좋거니와 그리움을 못 이기니 수심이 첩첩하여 마음을 둘 데 없어 흥없은 일간죽을 실없이 던졌으니.

 

구절 풀이

* 홍일(紅日) : 붉은 해 * 은린옥척(銀鱗玉尺) : 물고기를 아름답게 이르는 말 * 구타야 : 구태여 * 취어(取魚)하랴 : 물고기를 잡으랴 * 자취(自趣) : 스스로의 흥취. 스스로의 재미 * 떨떠리니 : 떨어뜨리니 * 괴던 : 사랑하던 * 수심(愁心) : 근심스러운 마음 * 일간죽(一竿竹) : 낚싯대 하나

 

현대어 풀이

나의 놀이가 한가롭다. 멀고 가까운 산천(山川)에 붉은 해를 띄웠으니 만경(萬頃)이나 되는 푸른 물결에 오로지 금빛이로다. 낚시를 던져놓고 무심히 앉았으니 크나큰 은빛 물고기가 저절로 와서 무는구나. 구태여 물고기를 잡아가랴. 오직 스스로 흥겨워함을 위한 낚시로다. 낚싯대를 떨어뜨리니 잠든 갈매기가 다 놀라는구나. 갈매기야 날지 마라. 너를 잡을 내가 아니로다. 네 본래 영물(靈物)이니 내 마음을 모르겠는가. 평생에 사랑하던 임을 천리 밖으로 이별하니 사랑함도 좋거니와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니 근심의 마음이 첩첩하게 쌓여 마음을 둘 데 없어 흥(興)이 없는 낚싯대 하나를 실없이 던졌나니.

 

 

고기도 물잖거든 하물며 너 잡으랴. 그려도 모르거든 네게 있는 긴 부리로 내 가슴 쪼아 헤쳐 붉은 마음 내어 놓고 자세히 살펴보면 하마 거의 알리로다. 공명도 다 던지고 성은을 갚으려니 성세에 한민되어 너 좇아 예 왔노라. 날보고 나지마라 네 벗이 되오리라. 백구와 수작하니 낙일은 창창하다. 낚대의 줄 거두어 낚은 고기 뀌어 들고 강촌으로 돌아들어 주인집 찾아오니 문 앞에 짖던 개는 날보고 꼬리친다.

 

구절 풀이

* 한민(閒民) : 한가로운 사람 * 낙일(落日) : 떨어지는 해, 지는 해 * 수작(酬酌) : ① 술잔을 서로 주고받음 ② 서로 말을 주고받음. 또는 그 말 ③ 남의 말이나 행동, 계획을 낮잡아 이르는 말. 여기서는 ②의 뜻임 * 낙일(落日) : 떨어지는 해 * 창창(倀倀)하다 : 갈 길을 잃어 갈팡질팡하고 마음이 아득하다

 

현대어 풀이

물고기도 물지 않는데 하물며 너를 잡으랴. 그래도 모르거든 너의 긴 부리로 내 가슴 쪼아 헤쳐 붉은 마음 내어 놓고 자세히 살펴보면 아마 거의 알 것이로다. 공명(功名)도 다 던지고 임금의 은혜를 갚으려하니 번창하고 태평한 이 시대에 한가로운 사람이 되어 너를 좇아 여기에 왔노라. 나를 보고 날지 마라. 너의 벗이 되리로다. 갈매기와 말을 주고받으니 떨어지는 해는 아득하구나. 낚싯대의 줄을 거두어 낚은 고기 꿰어 들고 강촌으로 돌아들어가 주인집을 찾아오니 문 앞에서 짖던 개는 나를 보고 꼬리친다.

 

 

난감한 내 고생이 오랜 줄 가지로다. 짖던 개 아니 짖고 임자도 되는고나. 반일을 잊은 시름 자연히 고쳐나니 아마도 이 내 시름 잊을 길 어려워라. 강천에 월락하고 은하수 기우도록 방등은 어데 가고 눈을 감고 앉았는고. 참선하는 노승인가 통경하는 맹인인가. 팔도강산 어느 절에 중 소경 누가 본가. 누은들 잠이 오며 기다린들 임이 오랴. 내 헴이 무삼 헴고 이다지 많삽더고. 남경장사 남경 가니 반전장사 밋졌는가.

 

구절 풀이

* 가지(可知)로다 : 가히 알 수 있다 * 강천(江天) : 강가의 하늘, 바닷가의 하늘 * 월락(月落) : 달이 짐 * 방등(房燈) : 방안의 등불 * 통경(通經) : 불경, 경서에 통달함 * 누가 본가 : 누가 보았는가 * 무삼 헴고 : 무슨 생각인가 * 많삽더고 : 많았더란 말인가 * 남경 : 중국의 도시 남경 * 반전(半錢) : 아주 적은 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밋졌는가 : 손해를 보았는가

 

현대어 풀이

처지가 어려운 내 고생이 오래 될 것임을 나는 아노라. 예전에 짖던 개도 이제는 짖지 않고 개주인도 되는구나. 반일(半日)동안 잊었던 시름이 저절로 다시 나니 아마도 이 내 시름 잊을 길이 어렵구나. 강 하늘에 달이 지고 은하수 기울도록 방안의 등불은 어디 두고 눈을 감고 앉았는가. 참선하는 노승인가, 불경 읽는 맹인(盲人)인가. 팔도강산 어느 절에 중이면서 소경인 사람을 누가 보았는가. 누웠다 한들 잠이 오며, 기다린다 한들 임이 오랴. 내 생각이 무슨 생각인지 이다지도 많았던가. 남경장사가 남경으로 장사를 가서 푼돈밖에 못 벌고 손해를 보았는가.

 

 

이 헴 저 헴 아무 헴도 그만 헤면 다 헤려니. 헤다가 다 못 헤니 무한한 헴이로다. 갓없은 미친 설움 눌 찾아 한잔말고. 남초가 벗이 되니 내 설움 위로하니 먹고 떨고 담아 부쳐 한 무릎에 사오대라. 현기나고 두통하니 설움 잠간 잊히온들 오래기야 오랠손가. 홀연 다시 생각하니 이 일이 무삼 일고. 내 몸 어이 여기 온고. 번화고향 어데 두고 적막절도 들어온고 오량각 어데 두고 두옥반간 의지한고 안팎 장원 어데 가고 죽창문 달았으며

 

구절 풀이

* 갓없은 : 끝없는 * 눌 찾아 한잔말고 : 누구를 찾으려 한단 말인가 * 남초(南草) : 담배 * 먹고 떨고 담아 부쳐 : 담배를 붙여 무는 과정 * 한 무릎에 사오대라 : 연속적으로 4-5대의 담배를 핌 * 적막절도(寂寞絶島) : 적막한 외딴 섬 * 오량각(五樑閣) : 다섯 개의 도리로 짠 지붕틀로 지은 집. 즉 자기가 근무하던 대궐 * 두옥반간(斗屋半間) : 아주 작은 집과 방 * 장원(莊園) : 중국에서, 한(漢)나라 이후 근대까지 존속한 궁정·귀족·관료의 사유지 * 죽창문 : 대나무로 만든 초라한 창문

 

현대어 풀이

이 생각 저 생각 아무 생각이라도 그만 헤아리면 다 헤아려질 것인데 헤아리다가 다 못 헤아리니 무한(無限)한 헤아림이로다. 끝 업는 미친 설움 누구를 찾아가자는 것인가. 담배가 내 벗이 되니 나의 설움을 위로하고 피우고 재를 떨고 담뱃대에 담아 불을 붙여 한 번에 서너 대씩 피우는구나. 현기증이 나고 두통이 나니 설움은 잠깐 잊는다 한들 오랫동안이나 잊을 수 있을 것인가. 홀연히 다시 생각하니 이 일이 무슨 일인가. 내 몸이 어찌 여기에 온 것인가. 번화한 고향을 어디 두고 적막하고 외로운 섬에 들어왔는가. 내가 봉직(奉職)하던 대궐을 어디 두고 좁디 좁은 반 칸짜리 집에 의지하는가. 안팎 장원(莊園)은 어디로 가고 초라한 대나무 창문을 달았는가.

 

 

서화도벽 어찌하고 흙바람벽 되었으며 산수병풍 어데 가고 갈 밭 한 떼 둘렀으며 각장장판 어데 가고 갈자리를 깔았으며 경주탕건 어데 가고 봉두난발 되었으며 안팎보선 어데 가고 다목발이 별거하며 녹피당혜 어데 가고 육총짚신 신었으며 조반점심 어데 가고 일중하기 어려우며 사환노비 어데 가고 고공이가 되단말고. 아침이면 마당쓸기 저녁이면 불때히기 볕이 나면 쇠똥치기 비가 오면 도랑치기 들어가면 집지키기 보리멍석 새날리기 거처번화 의복사치 나도 전에 하였더니

 

구절 풀이

* 서화도벽(書畵塗壁) : 서화를 바른 훌륭한 벽 * 흙바람벽 : 흙벽 * 갈 밭 한 떼 둘렀으며 : 갈대로 엮어 벽에 둘러침 * 각장장판(角壯壯版) : 각장으로 바른 장판. 각장(角壯)이란 보통 것보다 폭이 넓고 두꺼운 장판지 * 갈자리 : 갈대로 엮은 돗자리 * 경주탕건 : 경주에서 만든 탕건 * 봉두난발(蓬頭亂髮) : 머리털이 쑥대강이같이 헙수룩하게 마구 흐트러짐 * 녹피당혜(鹿皮唐鞋) : 사슴가죽으로 만든 고급 가죽신 * 육총(六總)짚신 : 허술한 짚신, 주로 스님들이 땅에 기는 생물을 밟아도 죽지 않게 이렇게 만들어 신었다 * 일중 : 일중식 (日中食). 가난한 사람이 아침과 저녁은 굶고 낮에 한 번만 먹음 * 고공(雇工)이 : 머슴, 일꾼 * 새날리기 : 새를 쫒는 일 * 거처번화(居處繁華) : 거처하는 곳이 번화함 * 의복사치(衣服奢侈) : 사치스러운 의복을 입는 것

 

현대어 풀이

그림과 글씨로 치장한 벽은 어디로 가고 흙벽이 되었으며 산수를 그린 병풍은 어디로 가고 갈대로 엮은 삿자리를 둘렀으며 각장으로 바른 장판은 어디로 가고 갈대 자리를 깔았으며 경주에서 나는 질 좋은 탕건은 어디로 가고 쑥대머리 되었으며 안팎보선 어디로 가고 다목발이 따로 따로 놀며 사슴가죽으로 만든 당혜는 어디 가고 허술한 짚신을 신었으며 꼬박꼬박 먹던 아침, 점심밥은 어디로 가고 하루 한 끼 먹기도 어려우며 사환과 노비는 다 어디로 가고 내가 머슴이 되었단 말인가. 아침이면 마당 쓸기, 저녁이면 불 때기, 볕이 나면 쇠똥 치우기, 비가 오면 도랑치기, 집지키기, 모리 멍석에 내려앉는 새 날리기, 화려한 곳에 거처(居處)하고 의복 사치 부리기는 나도 전에 하였더니

 

 

좋은 음식 맛난 맛은 아마 거의 잊었세라. 설움에 쌓였으니 날 가는 줄 모르더니 헤엄없는 아해들은 묻지도 않은 말을 한 밤 자면 제덕 오니 떡국 먹고 노자네. 아해 말을 신청하랴 여풍다이 들었더니 남녁 이웃 북녁 집에 나병소래 들리거늘 손을 꼽아 헤어보니 오늘 밤이 게석일다. 타향의 봉가절이 이 뿐이 아니로다. 상빈명조에 또 한 해 되는고나. 송구영신이 이 한 밤뿐이로다. 어와 상품 그렇던가 저녁 밥상 그렇던가. 예 못 보던 네모반에 수저 갖춰 장 김치에 나락밥이 돈독하고 생선 토막 풍성하다.

 

구절 풀이

* 제덕, 게석 : 제석(除夕), 제야(除夜)가 아닌가 함 * 신청(信聽)하랴 : 믿고 곧이듣겠느냐, 주의를 기울여서 신중히 듣겠는가 * 여풍(如風)다이 : 바람결같이, 즉 흘려들음 * 나병(糯餠) 소래 : 찰떡 치는 소리. ‘나병(糯餠)’은 찰떡 * 봉가절(逢佳節) : 명절을 맞이함 * 상빈명조(常貧明朝) : 항상 가난한 중의 내일 아침 * 나락밥 : 쌀밥 * 돈독하고 : 도탑고 성실하고. 수북하게 쌓여 있고

 

현대어 풀이

좋은 음식의 아름다운 미각은 아마 거의 잊었도다. 설움에 쌓였으니 날이 가는 줄을 모르더니 생각 없는 아이들은 묻지도 않은 말을 한다. 하룻밤만 지나면 섣달그믐이 되니 떡국 먹고 놀자고 하네. 아이들 말에 신경 쓰랴. 바람결에 들었더니 남북(南北)의 이웃집에서 찰떡 치는 소리가 나거늘 손을 꼽아 헤아리니 오늘 밤이 섣달 그믐날이로다. 타향에서 명절을 맞이함이 이 뿐이 아니로다. 가난한 중에 내일이면 또 한 해가 시작되는구나. 송구영신이 오늘 밤이로다. 아아! 항상 그렇던가, 오늘 저녁 밥상만 그렇던가. 예전에 못 보던 네모진 상에 수저까지 갖추고서 김치에 쌀밥이 수북하고 생선토막도 풍부하구나.

 

 

그려도 설이로다 배부르니 설이로다. 고향을 떠나온 지 어제로 알았더니 내 이별 내 고생이 격년사 되었구나. 어와 섭섭하다 정초문안 섭섭하다. 북당쌍친이 백발이 더 하시고 공규화조는 얼마나 늦었는고. 오세에 떠난 자식 육세아 되었고나. 내 아녀 임이라도 내 설움은 설다하리. 천리일별에 해 벌써 바뀌도록 일자가신을 꿈에나 들었을까. 운산이 막혔는 듯 하해가 가렸는 듯 의창전 한매소식 물어볼 길 전혀 없네.

 

구절 풀이

* 격년사(隔年事) : 지난해의 일 * 북당쌍친(北堂雙親) : 북당에 거처하시는 두 부모 * 공규화조(空閨花鳥) : 텅 빈 아녀자 방의 꽃과 새 * 천리일별(千里一別) : 한 번 이별하여 천리에 떨어져 있음 * 일자가신(一字家信) : 한 글자의 집안 소식 * 의창전 : 작자가 근무하던 관청이름 * 한매(寒梅)소식 : 겨울에 피는 매화 소식

 

현대어 풀이

아무리 그래도 설이로다. 배가 부르니 설이로다. 고향을 떠나온 지 어제인줄 알았더니 내 이별과 내 고생이 일 년 전의 일이 되었구나. 아아! 섭섭하다. 정초의 문안인사가 섭섭하다. 북당(北堂) 부모님의 백발이 얼마다 더 느셨고 아내의 텅 빈 방안의 화조(花鳥)는 얼마나 늦었는가. 다섯 살에 떠난 자식 여섯 살이 되었구나. 내가 아니고 임이라도 내 서러움을 보면 서럽다 할 것이다. 한번 천리 밖으로 이별하여 벌써 해가 바뀌도록 한 글자의 집안 소식을 듣지 못하여 행여 꿈에서나 들었을까. 구름과 산이 막힌 듯 강과 바다가 가린 듯 의창전의 매화(梅花)소식 물어볼 길이 전혀 없구나.

 

 

바닷길 일천리가 머다도 하려니와 약수 삼천리에 청조가 전신하고 은하수 구만리에 오작이 다리 놓고 북해상 기러기는 상림원에 날아나니 내 가신 어이 하여 이다지 막혔는고. 꿈에나 혼자 가서 고향을 보련마는 원수의 잠이 올 제 꿈인들 아니 꾸랴. 흐르나니 눈물이요 지으나니 한숨이라. 눈물인들 한이 있고 한숨인들 끝이 있지 내 눈물이 모였으면 추자섬이 생겼으며 이 한숨이 쌓였으면 한라산을 덮었으니

 

구절 풀이

* 청조(靑鳥)가 전신(傳信)하고 : 파랑새가 편지를 전하고. 푸른 새가 온 것을 보고 동방삭이 서왕모의 사자라고 한 한무(漢武)의 고사에서 유래 * 오작(烏鵲) : 까마귀와 까치 * 상림원(上林苑) : 중국 장안(長安)의 서쪽에 있었던 궁원(宮苑) * 가신(家信) : 집안 소식을 전하는 편지

 

현대어 풀이

바닷길 천리가 멀다고도 하겠지만 그 무엇도 다 가라앉힌다는 약수(弱水) 삼천리에 파랑새가 편지를 전하기도 하고, 구만리의 은하수가 막혔어도 까막까치가 다리를 놓아 견우와 직녀가 만나기도 하고, 소무(蘇武)가 갇혀 있던 북해(北海)의 기러기는 상림원에 날아오기도 하는데 나의 집안 소식은 어이하여 이다지도 막혔는가. 꿈에서나 혼자 가서 고향을 보련마는 원수 같은 잠이 올 때 꿈인들 꾸지 않을까. 흐르나니 눈물이요, 짓나니 한숨이라. 눈물인들 한도가 있고 한숨인들 끝이 있지 나의 눈물이 모였으면 추자섬이 생겼을 것이요, 이 한숨이 쌓였으면 한라산을 덮었으리라.

 

 

해안에 낙조하고 어촌에 연기 날 제 사공은 어데 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산상구적 소리는 소 모는 아해로다. 자는 새는 투림하여 옛집으로 날아드니 금수도 집이 있어 돌아갈 줄 알았는가. 사람은 무삼일로 돌아갈 줄 모르는고. 뵈는 것이 다 설으고 듣는 것이 다 슬프니 귀먹고 눈 어두워 듣고 보지 말고라지. 이 설음 오랠 줄을 분명히 알 양이면 할 일은 결단하여 만사를 잊으리니 나 죽은 무덤 위에 논을 갈지 밭을 갈지 일도혼백이야 있을런지 없을런지.

 

구절 풀이

* 산상구적(山上口笛) : 산 위에서 부는 휘파람 * 투림(投林) : 수풀 속으로 날아듦 * 설으고 : 서럽고 * 말고라지 : 말 것이다 * 일도혼백(一到魂魄) : 한번 가버린 혼백

 

현대어 풀이

바닷가에 해가 떨어지고 어촌에 연기가 날 때 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여 있는가. 산 위에서 부는 휘파람 소리는 소를 모는 아이들이 내는 소리로다. 새는 잠을 자려 숲속으로 뛰어들어 옛 보금자리로 날아드니 금수(禽獸)도 집이 있어 돌아갈 줄을 안단 말인가. 그런데 사람은 무슨 일로 돌아갈 줄을 모르는가. 보이는 것이 모두 서럽고 듣는 것이 모두 슬프니 귀먹고 눈 어두워 아예 듣도 보도 말고 싶구나. 이 서러움이 오랠 줄을 분명히 안다면 해야 할 일은 결단코 만사를 잊는 것뿐이라. 나 죽은 무덤 위에 논을 갈지 밭을 갈지, 한 번 가버린 혼백(魂魄)이야 있을지 없을지 내 어찌 알겠는가.

 

 

시비분별이야 없을런지 있을런지 비가 올지 눈이 올지 바람 불어 서리 칠지 의의천의를 알기가 어려워라. 촌촌간장이 구비구비 썩는구나. 간밤에 부던 바람 천산에 비 뿌리니 구심동군이 춘광을 자랑는 듯 미쁠손 천지마음 봄을 절로 알게 하니 나무나무 잎이 피고 가지가지 꽃이로다. 방초는 처처한 데 춘풍소리 들리거늘 눈 씻고 일어 앉아 객창을 열쳐 보니 창전에 수지화는 웃는 듯 하였고나. 반갑다 저 꽃이여 예 보던 꽃이로다.

 

구절 풀이

* 의의천의(疑義天意) : 의심스럽거나 불분명(不分明)한 하늘의 뜻 * 촌촌간장(寸寸肝腸) : 마디마디의 창자 * 춘광(春光) : 봄의 햇빛 * 미쁠손 : 믿음성이 있구나 * 천지(天地)마음 : 천지의 마음, 자연의 운행 * 처처한 데 : 곳곳에 있는데 * 창전(窓前) : 창문 앞 * 수지화(樹枝花) : 나뭇가지와 꽃

 

현대어 풀이

옳고 그름을 분별함도 있을지 없을지, 비가 올지 눈이 올지, 바람 불어 서리가 칠지 모호한 자연의 뜻을 알기가 어렵구나. 마디마디의 간장(肝腸)이 굽이굽이 썩는구나. 간밤에 불던 바람 천산에 비를 뿌리니 구심동군이 봄빛을 자랑하는 듯. 믿음직하구나! 천지의 마음. 봄을 절로 알게 하니 나무마다 잎이 피고 가지마다 꽃이로다. 꽃처럼 아름다운 풀은 곳곳에 자라고 봄바람소리가 들리거늘 눈을 씻고 일어나 앉아 객창(客窓)을 열고 보니 창문 앞의 나뭇가지와 꽃은 웃는 듯하구나. 반갑다 저 꽃이여 예전에 보던 꽃이로다.

 

 

낙양성중에 저 봄빛 한 가지요 고향원상에 이 꽃이 피었는가. 간 해 오늘날에 웃음웃어 보던 꽃은 청준의 술을 부어 꽃꺽어 헴을 놓고 장진주 노래하여 무진무진 먹자할 제 네 번화 질김으로 저 꽃을 보았더니 올해 이 날에 눈물 뿌려 보는 꽃은 아침에 나쁜 밥이 낮 못되어 시장하니 박잔에 흐린 술이 값없이 쉬울손가. 내 고생 슬픔으로 저 꽃을 다시 보니 전년 꽃 올해 꽃은 꽃빛은 한가지나 전년 사람 올해 사람 인사는 다르도다.

 

구절 풀이

* 고향원상(故鄕園上) : 고향의 동산 * 장진주(將進酒) : 정철(鄭澈)의 사설시조 장진주사를 얹어 부르는, 여창 가곡의 한 변형곡 * 네 번화 질김으로 : 예전 번화한 상태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 낮 못되어 : 점심때가 되기도 전에 * 박잔 : 보잘 것 없는 싸구려 술잔 * 값없이 : 술값이 없이 * 쉬울손가 : (마시기가) 쉬운가. 즉, 술값이 없어 술을 마시지도 못한다.

 

현대어 풀이

낙양 성중의 봄빛도 저것과 한 가지일 것이요, 고향 동산에도 이 꽃이 피었는가. 작년 이맘때 활짝 웃던 꽃은 맑은 잔에 술을 부어 꽃가지 꺾어 헤아리며 장진주(將進酒) 노래하며 한없이 먹자고 할 때 예전 번화한 상태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저 꽃을 보았더니 올해의 이 날에 눈물 뿌리며 보는 꽃은 아침에 먹은 허술한 밥이 낮이 되기도 전에 시장하니 싸구려 술잔의 탁한 술이라도 술값이 없으니 마시기가 쉬울쏜가. 내가 고생하니 슬픈 마음으로 저 꽃을 다시 보니 작년의 꽃과 올해의 꽃은 색깔은 같으나 작년의 사람과 올해의 사람은 다르구나.

 

 

인생고락이 수유잠의 꿈이로다. 이렁저렁 허튼 근심 다 후리쳐 던져 두고 의복 그려 하는 설움 목전 설움 난감하다. 한 벌 의복 입은 후에 춘하추동 다 진하니 아마도 이런 옷은 내 옷밖에 또 없으리. 여름에 하 더울 제 겨울을 바랐더니 겨울이 하 치우니 도로 여름 생각하네. 쓰오신 망건인가 입으신 철갑인가 사시에 하동없이 춘추만 되었고저. 발굼치 드러나니 그는 족히 견디어도 바지 밑 터졌으니 이 아니 민망한가. 내 손수 깁자하니 기울 것 바이 없네.

 

구절 풀이

* 수유(須臾)잠 : 잠시 동안 자는 잠 * 하동(夏冬)없이 : 여름이고 겨울이고 없이 * 의복 그려 : 제 철에 맞는 의복이 아쉬워 * 목전(目前) : 바로 앞의 * 진(盡)하니 : 하염없이 입으니 * 하동(夏冬)없이 : 여름과 겨울이 없이 * 바이 없네 : 전혀 없네

 

현대어 풀이

인생의 괴로움과 즐거움이 모두 잠시 동안의 꿈이로다. 이런저런 허튼 근심 모두 다 던져두고 제철에 맞는 의복을 그리워하는 눈앞의 설움이 난감하구나. 한 벌 의복 입은 후에 사계절을 내내 입으니 아마도 이런 옷은 내 옷밖에 또 있겠는가. 여름에 너무 더울 때 겨울이 빨리 오기를 기다렸더니, 겨울이 하도 추우니 도로 여름 생각이 나네. 쓴 것이 망건인가, 입은 것이 철갑옷인가. 사계절에 여름겨울이 없이 봄가을만 있기를. 발꿈치 들어나니 그것은 능히 견딜지라도 바지 밑이 터졌으니 그 아니 민망한가. 내 손수 깁자 해도 기울 것이 전혀 없네.

 

 

애궂은 실이로다 이리 얽고 저리 얽고 고기 그물 걸어맨 듯 꿩의 눈 찍어낸 듯 침재도 그지없고 수품도 사치롭다. 좀전에 적던 식량 크기는 어쩐 일고 한 그릇 담은 밥은 주린 범의 가재로다. 조반석죽이면 부가옹 부러하랴. 아침은 죽이더니 저녁은 그도 없네. 못먹어 배고프니 허리띠 탓이런가. 허기져 눈 깊으니 뒤꼭도 거의로다. 정신이 아득하니 운무에 쌓였는가. 한 되 밥 쾌히 지어 슬카지 먹고파져 이러한들 어찌하며 저러한들 어찌하리 천고만상을 아모련들 어찌하리. 의복이 족한 후에 예절을 알 것이고 기한이 작심하면 염치를 모르나니 궁무소불위함은 옛사람의 이른 바라.

 

구절 풀이

* 침재(針才) : 바느질 솜씨 * 수품(手品) : 솜씨 * 식량 : 음식을 먹는 양 * 조반석죽(朝飯夕粥) : 아침에 밥을 먹고 저녁에 죽을 먹음 * 부가옹(富家翁) : 부잣집 늙은이 * 그도 없네 : 그것도 없네 * 뒤꼭도 거의로다 : 눈이 들어가 거의 뒤통수로 나올 듯함 * 천고만상(千古萬象) : 오래 전부터의 온갖 것들 * 기한(飢寒)이 작심(作甚) : 춥고 굶주림이 심하게 됨 * 궁무소불위(窮無所不爲) : 궁하면 하지 못하는 바가 없음, 배 고르면 무슨 짓이든지 함

 

현대어 풀이

애꿎은 실이로다. 이리 얽고 저리 얽어 고기 잡는 그물을 걸어 맨 듯, 꿩의 눈을 찍어 낸 듯 바느질도 한심하고 솜씨도 사치스럽다. 좀 전에 적었던 밥 먹는 양이 크게 되기는 어쩐 일인가. 한 그릇 담은 밥은 굶주린 범이 가재를 먹는 것처럼 되었구나. 아침 밥 저녁 죽(粥)이라도 먹을 수 있다면 부잣집 늙은이를 부러워하랴. 아침은 죽(粥)이더니 저녁에는 그것도 없네. 못 먹어서 배가 고프니 허리띠의 탓이던가. 허기져서 눈이 들어갔으니 거의 뒤통수에 닿을 듯하더라. 정신이 아득하니 구름과 안개에 쌓여 있어서인가. 한 되의 밥을 얼른 지어 실컷 먹고 싶구나. 이러한들 어찌하며 저러한들 어찌하리. 오래 전부터의 온갖 것들이 아무런들 어떠하리. 의복이 풍족한 후에라야 예절을 알 것이고 추위와 배고픔이 극심하면 염치를 모르게 되느니, 궁하게 되면 못하게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옛 사람들이 이르던 말이라.

 

 

사불관면은 군자의 예절이요 기불탁속은 장부의 염치로다. 질풍이 분 연후에 경초를 아옵나니 궁차익견하여는 청운에 뜻이 없어 삼순구식을 먹으나 못 먹으나 십년일관을 쓰거나 못 쓰거나 염치를 모를 것가 예절을 바랄 것가. 내 생애 내 벌어서 구차를 면차하니 처음에 못 하던 일 나종은 다 배혼다. 자리치기 먼저 하자 틀을 꽂아 나려놓고 바늘대를 뽐내면서 바디를 드놓을 제 두 어깨 문어지고 팔과 목이 부러진다. 멍석 한 잎 들었으니 돈 오분이 값이로다.

 

구절 풀이

* 사불관면(辭不觀面) : 사양하여 체면을 돌보는 일 * 기불탁속(飢不啄粟) : 봉(鳳)은 아무리 굶주려도 좁쌀은 먹지 아니 한다 * 경초(勁草) : 억센 풀이라는 뜻으로, 지조(志操)가 꿋꿋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窮且益堅(궁차익견) : 가난할수록 더욱 굳세어진다 * 삼순구식(三旬九食) : 삼순(三旬), 곧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다는 말 * 십년일관(十年一冠) : 십년 동안에 관(冠) 하나로 지냄, 구차한 생활을 이름 * 구차를 면차하니 : 구차함을 면함 * 배혼다 : 배운다 * 바디 : 베틀, 가마니틀, 방직기 따위에 딸린 기구의 하나 * 드놓을 제 : 들거나 놓을 때 * 문어지고 : 허물어져 내려앉고 * 돈 오분 : 다섯 푼의 돈

 

현대어 풀이

사양하여 체면을 돌보는 일은 군자들의 예절이요, 봉황은 아무리 굶주려도 좁쌀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대장부의 염치로다. 질풍이 분 후에 억센 풀인지를 알게 되니 가난할수록 더욱 굳세어져 출세에는 뜻이 없이 삼순구식(三旬九食)으로 먹거나 못 먹거나 십년 내내 갓 하나로 지내거나 간에 염치를 모르겠는가, 예절을 바라겠는가. 내 생애 내 스스로 벌어서 구차함을 면하고자하니 처음에는 못하던 일도 나중에는 다 배우는구나. 먼저 돗자리치기를 하여보자. 틀을 꽂아 내려놓고 바늘대를 뽐내면서 바디를 들고 놓을 때 두 어깨가 무너져 내려앉고 팔과 목이 부러지는 것처럼 아프구나. 멍석 값으로 한 잎을 들여 다섯 푼을 받고 팔았구나.

 

 

약한 근력 강작하여 부지런을 내자하니 손뿌리에 피가 나서 조희 골모 얼리로다. 실 같은 이 잔명을 끊음즉도 하다마는 아마도 모진 목숨 내 목숨뿐이로다. 인명이 지중함을 이제와 알리로다. 누구서 이르기를 세월이 약이라도 내 설움 오랠사록 화약이나 아니 될가. 날이 지나 달이 가고 해가 지나 돌이로다. 상년에 비던 보리 올해 고쳐 비어 먹고 지난 여름 낚던 고기 이 여름에 또 낚으니 새 보리밥 담아 놓고 가삼 맥혀 못 먹으니

 

구절 풀이

* 강작(强作) : 억지로 기운을 냄 * 조희 골모 : 종이로 된 골무 * 얼리로다 : (피가) 물들게 하다 * 잔명(殘命) : 남은 목숨 * 오랠사록 : 오래될수록 * 상년(上年) : 지난해

 

현대어 풀이

힘도 약한데 억지로 힘을 내어 부지런을 떨려고 하니 손가락에 피가 나서 종이 골무에 피가 어리게 하도다. 실 같은 남은 목숨 끊음직도 하다마는 아마도 모진 목숨 내 목숨뿐이로다. 사람의 목숨이 지극히 중함을 이제야 알겠도다. 누가 이르기를 세월이 약이라 하나 내 설움은 오래될수록 화약(火藥)처럼 되지나 않을까. 날이 지나고 달이 가고 해가 지나고 돌이로다. 작년에 베던 보리 올해에 다시 베고, 작년 여름에 낚던 고기 올 여름에 또 낚으니 새 보리밥을 담아 놓고 가슴이 막혀 못 먹으니

 

 

뛰든 고기 회를 친들 목이 메어 들어가랴. 설워함도 남에 없고 못견딤도 별로하니 내 고생 한 해 함은 남의 고생 십년이라. 흉즉길함 되올는가 고진감래 언제 할고. 하나님께 비나이다 설은 원정 비나이다. 책력도 해 묵으면 고쳐 쓰지 아니하고 노호염도 밤이 자면 풀어져서 버리나니 세사도 묵어지고 인사도 묵었으니 천사만사 탕척하고 그만 저만 서용하사 끊쳐진 옛 인연을 고쳐 잇게 하옵소서.

 

구절 풀이

* 뛰든 고기 : 뛰던 고기, 싱싱한 물고기 * 별로하니 : 남과 다르니 * 흉즉길함 : 흉(凶)한 것이 곧 길(吉)한 것으로 변함 * 원정(怨情) : 원망하는 심정 * 책력(冊曆) : 달력 * 노호염 : 노여움 * 세사(歲事) : 그 해에 일어났던 일 * 인사(人事) : 사람의 일 * 탕척(蕩滌) : 죄를 씻어 줌 * 서용(恕容) : 용서

 

현대어 풀이

펄펄 뛰던 물고기 회를 친다한들 목이 메어 들어가겠는가. 설움도 남에게는 없는 것이고 못 견딤도 남과 다르니 나가 일 년 고생 하는 것이 남의 고생 십년 하는 것과 같도다. 흉(凶)한 것이 길(吉)하게 되려 하는지, 고진감래 언제 할까. 하나님께 비나이다. 서러운 원정(冤情)을 비나이다. 달력도 해가 지나면 다시 쓰지 아니하고 노여움도 밤이 지나면 풀어져버리나니 세사(歲事)도 세월이 흘러 묵은 일이 되고 사람의 일도 묵은 일이 되었으니 죄를 모두 씻어 주어 이제 그만 용서하사 끊어진 옛 인연을 다시 잇게 하옵소서.

 

 

추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