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황동규 달밤 전문 해석 및 감상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3. 23. 14:12

 

달밤

 

-황동규-

 

 

누가 와서 나를 부른다면

내 보여주리라

저 얼은 들판 위에 내리는 달빛을.

얼은 들판을 걸어가는 한 그림자를.

지금까지 내 생각해 온 것은 모두 무엇인가.

친구 몇몇 친구 몇몇 그들에게는

이제 내 것 가운데 그중 외로움이 아닌 길을

보여주게 되리.

오랫동안 네 여며온 고의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두 팔 들고 얼음을 밟으며

갑자기 구름 개인 들판을 걸어갈 때

헐벗은 옷 가득히 받는 달빛 달빛.

 

 

12781

 

 

황동규 시인은 <소나기>로 잘 알려진 소설가 황순원 선생의 맏이입니다. 1938년 평안남도 영유군 숙천에서 태어났지만, 1946년(8세)에 가족이 서울로 월남합니다. 한국전쟁 때 일시적으로 대구와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이 시절 이야기는 황순원의 <곡예사>를 통해 소상히 알 수 있음.), 그 이후는 대부분 서울에서 보냅니다.

  

 

 

부친 황순원이 고교 교사였던 까닭에 당시로 보면 조금 여유 있는 축에 속했지만, 1950년대라는 것이 시절이 시절인지라 시인의 10대는 역시 어려웠습니다. 전후(戰後) 한국 사회가 어딘들 어렵지 않은 곳이 있었겠습니까? 친일파 후손들이나 독재 권력에 참여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시인이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 온 것은 1953년(15세)입니다. 이후 서울고등학교에 다니는데, 이때부터 시작(詩作)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수능에도 출제된 적이 있는 <즐거운 편지>가 바로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창작한 것입니다. 교지에 실린 작품이지요. 나중에 대학 2학년 때 서정주 선생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게 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의 첫 시집은 <어떤 개인 날>(1961)입니다. <달밤>도 이 시기의 시인데, 그러니까 1950년 후반의 분위기를 반영한 작품(1959년 경) 이 아닐까 합니다. 공간적 배경은 서울일 것 같기는 하지만, 대전이나 온양 근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시인을 개인적으로 다시 뵙게 되면 한번 여쭈어 보겠습니다. 이 시기 시인이 보여준 작품 세계는 한마디로 ‘꽁꽁 얼어붙은 추운 겨울’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겨울노래>에 등장하는 “내 너를 부르거든/어두운 뒤꼍으로 나가/한겨울의 꽝꽝한 얼음장을 보여다오.”라는 구절이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시인 스스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나는 가혹하리만큼 ‘겨울’이라는 상황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요. 시마다 눈이 내렸고, 도처에 꽝꽝 언 얼음장들이 깔려있었고 얼다 얼다 드디어 얼어 죽은 어린 나무들이 있었고, 그 황량한 풍경에는 언제나 바람소리가 배음(背音)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시인이 겨울 풍경, 그 황량한 풍경에 집착한 것이 한국전쟁 이후의 참혹한 시대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불행을 말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시인은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 영문과에 입학했고, 국비장학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대학 시절 군산의 선유도(후일 이 경험은 <풍장> 연작에 반영됨)나 남해안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했다(그의 시는 여행을 모티브로 한 경우가 아주 많음)고 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요즘이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부자연스럽지만, 당시로 보면 그 정도만 해도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이에 대해 시인이 선뜻 동의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제 판단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참고-시인의 육성으로 듣는 당시 정황은 이렇습니다. : <겨울노래>에서 <달밤>, <기도>를 거쳐 <어떤 개인 날>에 이르는 일련의 ‘겨울시편’은 그 추위(*절대적인 추위만이 아니라, 헐벗은 전후(戰後)의 상황에서 오는 심리적 온도의 추위를 말합니다) 속에서 살며 추위가 암시하는 무기력과 싸운 정열의 소산이다.]

 

 

그런 까닭일까요? 아니면, 충격적인 경험으로 인해 직설적인 표현이 불가능했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그의 시가 1950년대의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는 해도, 세부적인 경험을 형상화한 경우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달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래도 현실의 충격 때문에, 현실성이 강한 시를 쓰지는 못하고,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초월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탐구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겠지요. 좋게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이 부분은 조금 불만입니다. 좀 더 현실성이 강한 작품이라면 더 좋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실주의적(흔히 리얼리즘이라고 하는)인 상상력이 초월적인 상상력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단순 논리는 수준이 떨어지는 관점이겠죠.

 

  

 

(구성의 측면에서 보면 제1행부터 제4행까지가 하나의 의미 단락을 이루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제5행부터 제8행까지가 두 번째 의미 단락을, 나머지가 세 번째 의미 단락을 이루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조금 더 시 텍스트에 밀착하여 살펴볼까요? 시의 시작은 호명(呼名) 행위를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누가 와서 나를 부른다면’이 그것입니다. 이는 달리 보면 “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답한다면”의 뜻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물론 형식적으로만 그런 것이고, 본질은 독백적 성격이 강한 내적 대화입니다. 서정시에서의 대화 형식은 이처럼 내적 독백을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인 경우가 많습니다. 김영랑의 <독을 차고>가 그렇고, 김지하의 <무화과>가 다 그렇지요. 결국 자기 스스로에게 묻는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뭐 그런 자문(自問)인 셈입니다. 현실의 자아가 이상적인 자아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성찰과 그 고백의 드라마가 서정시의 한 본질이 아닐까요?(이 부분에 대해 시인은 살짝 불만일 것입니다. 아마도 극적 아니 극시적인 장면으로 이해해 주길 바랄 것으로 보이네요.)

 

 

  

그 답은 감각적으로 주어집니다. ‘저 얼은 들판 위에 내리는 달빛’과 ‘얼은 들판을 걸어가는 한 그림자’가 그것입니다. 병치(竝置)된 두 시구의 함축적 의미는 거의 차이가 없으니, 동곡이음(同曲異音)이라 이해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꽁꽁 얼어붙은 추운 겨울’의 이미지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당시 황량했던 시대 분위기(←앞 구절이 특히 이에 해당하죠)와 그로 인한 시인의 내면 풍경(뒷 구절이 특히 이에 해당하죠)이라는 것도 두말할 것도 없겠지요. 다만, 이 두 구절의 이미지가 다분히 두보(杜甫)의 시(실제로 시인은 두시언해의 표현과 발상에서 많은 시적 소양을 얻습니다.)가 보여주는 비애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는 점은 좀 더 깊게 따져볼 일이 아닌가 합니다.

 

  

 

[참고-이 시기 황동규 시인에게 문학적으로 아니 인간적으로 선배 문인 역할을 한 사람은 피천득 선생과 서정주 시인입니다. 그런데 서정주 시인은 " 기러기 같이/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하늘의 얼음장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 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과 같이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서정주 시인이 풀리는 한강을 노래했다면, 황동규 시인은 언 땅을 노래했다고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이해가 아닌가 합니다. ]

 

  

 

 

‘달빛’과 ‘그림자’의 문제 : 월영(月影)입니다. 언 들판에 되비치는 달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빛은 빛이되, 빛이 가진 환한 이미지가 극소화된 형태로 제시된 것입니다. 우울한 시대의 풍경이라고 보면 크게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황량함을 드러낸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도대체 얼어버린 것은 무엇일까요? 제 생각으로는 바람이 아닐까 싶습니다.("그 황량한 풍경에는 언제나 바람소리가 배음(背音)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라는 시인의 언급을 떠올려 봅시다) 이상하게도 추위라 하면 바람이 언급되는 것이 상례인데, 이 시에는 바람이 등장하지 않질 않습니까? 바람은 대개 영혼의 상징이기도 하고요. ‘그림자’는 그 연장선상에서 영혼의 다른 모습이 아닐까요? 즉, 저로서는 이 첫 번째 의미 단락에서 암울한 시적 화자의 고독한 내면 풍경을 읽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시적 정황으로 보아 홀로 떠나온 겨울 여행에서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느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고 있는 부분이 두 번째 의미 단락입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친구들에게 외로움이 아닌 길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친구 몇몇 친구 몇몇’이라는 반복적인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시적 화자는 아마도 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는 그들을 생각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이 친구가 누굴까요? 제 생각으로는 문학과지성사 대표이시기도 했던 김병익 씨가 그 중 한 사람으로 가장 유력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추측입니다만, 아무런 근거없이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 너희가 있어 나는 위로를 받았고, 아주 고독한 것만은 아니었어. 나도 너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 줄게. 뭐 이런 생각을 했지 않을까요? 제가 너무 속되게 해석하는 것 같긴 합니다만. 다소 엉뚱해 보일지 모르지만,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내밀하게 황동규의 시가 김춘수의 시와 상통하는 면을, 징후를 탐지하게 됩니다. 물론 둘은 시적 경향이 많이 다르지만, 1950년대는 사상적으로 보면, 실존주의 철학의 시대이고, 그 점에서는 크게 볼 때 둘은 닮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것을 두고 황동규의 시와 김춘수의 시가 닮았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지만, 60년이 지난 지금에서 보면 1950년대 시인으로서 이 둘의 공통점이 주목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 의미 단락은 첫 번째 의미 단락과 두 번째 의미 단락의 내용을 종합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우선 시적 화자가 보여주는 행동은 분명히 두 번째 의미 단락의 연장선상에서 다소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의춤으로 웅크려들기만 했던 두 팔을 드는 행위가 그렇고, 구름이 갰다고 하고 있는 것이 그렇고, 가득한 달빛이라고 한 것이 그렇습니다. 절망만이 아니다. 인인(隣人)과의 유대 속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이 조금 든 것이겠지요. 그래서 시작 화자는 얼어버린 들판을 ‘걷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들판은 얼어 있는 겨울인 것이 분명하고, 헐벗은 상태인 것도 분명합니다. 자신이 처한 운명을 수용한 것이지, 운명을 극복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물론 정신적인 극복이라고 하면 말이 됩니다). 자신이 처한 운명을 수용하는 것, 현실의 허무함을 수용하는 것, 그리고 그 길을 의연히 가려는 내면적인 다짐, 그것이 이 시의 주제가 아닌가 합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기 자신의 시는 “결핍과 그 결핍에 대응하는 정열”을 노래한 것이라고. 제가 말하는 ‘내면적인 다짐’은 시인의 용어로는 ‘정열(情熱)’이 되겠네요.

 

  [참고 - 제가 '운명의 수용'이라고 한 것은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이 니체의 철학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운명애(運命愛)'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비전문적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는 글이라 더이상 깊이 들어가는 것은 좀 무리인 것 같습니다. 그냥 암울한 시대의 한 청년이 그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정신적으로나마 꺠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려는 열망을 노래한 작품, 이 정도로 평이하게 이해해도 좋을 듯합니다.]

 

결국 이 시는 달밤을 소재로 하여, 음울한 현실에 대한 인식과 그 절망 속에서 삶의 의욕(또는 정열)을 찾으려는 몸부림(물론 외적으로 드러나기보다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움직임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후자보다는 전자에 무게 중심이 놓여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의 수험생들이 공감하기는 참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시대 상황이 요즘과는 너무 다르기도 하고.

 

* 황동규 시의 이해를 위해서는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시가 태어난 자리>라는 책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참고-EBS의 황동규 달밤 관련 강의 녹취록입니다]

자, 그러면 같이 (가) 달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목이 달밤이죠. 달밤은 시적인 상황이 되는 거야. 이 상황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 상황의 특징은 무엇인지 한번 판단을 해보자. 이 시도 쉬운 건 아닙니다. 그렇죠?

누가 와서 나를 부른다면 내 보여주리라. 라고 얘기 했어요. 뭘 보여줄건데? 그렇지, 도치법이야. 이런 애들을 보여줄 겁니다. 누가 와서 나를 불러. 그러면 나는 나를 불렀으면 내가 나타나야 되잖아요. 이런 것을 보여줄 겁니다.

저 얼은 들판 위에 이것도 마찬가지로 원래 표현은 언 들판이겠지, 그렇지? 얼은 들판 위에 내리는 달빛을 보여줄 겁니다. 얼은 들판을 걸어가는 한 그림자를 보여줄 겁니다. 자, 그러면 지금 구조가 유사해요.

내 보여주리라 이러한 것을. 내 보여주리라 이러한 것을 이라고 얘기 했거든요. 그러면 이 앞에 있는 이 두 내용은 어때? 성격이 유사해야 된다고 얘기 했죠.

 

 

 

비슷한 통사구조가 반복된다면 그 앞에 있는 내용은 유사한 성격 아니면 동일한 의미를 지닌 거거든. 나를 불러. 그러면 나를 보여주기 위해서 달빛과 그림자를 보여줄 거란 얘기야.

그러니까 이 달빛과 그림자는 나를 드러내기 위한 어떤 나 자신이 된다거나 나의 속성과 통하는 대상이 되는 거죠. 달빛이라는 것은 어때? 환한 빛이 되겠지. 왜냐하면 밤에 가장 빛나는 것은 달빛이거든.

그리고 거기를 걸어가는 그림자. 들판은 들판인데 언 들판입니다. 그러면 여기는 쉬운 곳은 아닐 것 같아요. 그렇지? 지금까지 내 생각해 온 것은 모두 무엇인가.

친구 몇몇 그들에게는 이제 내 것 가운데 그중 외로움이 아닌 길을 이라고 얘기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뭘 보여줄거야? 외로움이 아닌 길을 보여줄 거래요. 넘어가볼게요. 보여주게 되리라고 얘기 했어.

 

 

 

그러니까 나는 이제 외롭지 않은 길을 어떻게 가겠다? 살아나갈 것이다. 이제까지 내 삶을 보면서 외롭지 않은 길을 살아나갈거야. 오랫동안 네 여며온 고의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두 팔을 들고 얼음을 밟으면서 갑자기 구름 개인 들판을 걸어갈 때 헐벗은 옷. 누구의 옷일까? 나의 옷이야. 그런데 나의 옷이 어때? 헐벗었다는 것은 이제까지 나의 삶이 편안하고, 쉽지는 않았어. 그런 옷 가득히 밟는 무엇?

 

달빛 두 번이나 반복하네. 달빛 달빛이라고 얘기해요. 앞으로 내가 갈 길은 외롭지 않은 길이야. 이제까지는 언 들판을 밟으면서 왔는데, 그리고 나는 무엇을?

 

가득히 달빛을 그것도 가득히 받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의 길이 괜찮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거고요. 이 달빛이라는 것은 어때?

 

 

 

구체적인 의미까지는 모르더라도 아주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라는 생각은 여러분들이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자, 그러면 시를 감상했습니다. 그러면 문제 9번으로 한번 가봐야 되겠죠.

 

 

문제 9번이 뭐냐 하면, 그림자의 상징적인 의미를 조사하는 거야. 봐봐. 밑에 보면, 그림자가 가지는 일반적인 상징적인 의미들이 나열이 되어 있는데

 

어두움, 무명, 피난처 보호, 동반자, 불완전함, 희미함, 불명료함, 감춤, 숨음. 이런 의미들로 쓰인다고 쭉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러한 의미를 외우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라는 시어가 이 시속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찾아서 이 가운데서 골라낼 수 있어야 되는 거지. 그림자는 무조건 나쁘다.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1번 선지부터 보자. 어두운 무명으로 해석할 수 있대, 그림자를. 어두운 무명. 시 속에서 그림자 앞부분에 뭐라고 되어 있냐하면, 내 보여주리라. 얼은 들판을 걸어가는 한 그림자를 이렇게 얘기 했어.

 

그러니까 그림자는 누가 되는 거야? 내가 되는 거거든. 그렇지? 그러면 보자. 화자가 처한 부정적 상황이 심화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1번 어때요? 틀렸습니다.

 

부정적인 상황이 심화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림자 얘기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보면 뭐라고 얘기해요? 시의 의미는 전체적인 상황, 맥락으로 파악해야 된다 그랬지.

 

마지막에는 갑자기 구름 개인 들판을 걸어갈 때 달빛을 온몸으로 받는다 그랬어. 그러니까 부정적 상황이 심화되고 있다. 얘는 틀려. 자, 두 번째 피난처. 보호의 의미로 해석을 하쟤요. 읽어볼까?

 

화자가 타인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주는 희생적인 존재임을 나타낸다. 이 시의 어느 구절을 봐도 화자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한다. 이런 의미 찾을 수가 없는 거거든요. 지워. 3번. 동반자.

 

달빛을 동반자 삼아서 걷고 있는 화자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렇죠, 뭐라 그랬냐하면 내가 보여줄거야, 내 모습을. 달빛을 보여주고, 그림자를 보여줄거야.

 

그러니까 달빛과 그림자는 내 모습을 드러내는 동시에 드러내는 존재가 되는 거거든요. 그리고 그림자라는 녀석은 빛이 있는 곳에 생기는 거잖아.

 

그러니까 여기에서 달빛을 동반자 삼아서 걷고 있는 화자의 모습을 그림자로 표현한 것은 괜찮을 것 같아. 달빛을 받고 있으니까 어떤 긍정적인 그런 상황도 포함이 되면서, 그래서 3번 어때? 정답 체크하고요.

 

4번. 불완전하다. 희미하다. 불명료하다. 불완전, 불명료. 이렇게 얘기 했는데, 미래에 대해 확실한 전망을 가질 수 없는 화자의 불안감을 의미한다.

 

화자의 불안감은 드러나지 않죠. 마지막에 달빛 나오잖아, 지우고. 마지막 5번. 감춤, 숨음. 세속적인 삶을 거부하고 자연에 은둔한다. 이 작품에서 자연에 운둔한다. 이런 얘기 안 나와요, 그렇지?

 

자, 5번도 지우고 정답 몇 번이다? 3번이라고 여러분들이 체크를 해내셔야 됩니다. 사실 이 그림자의 의미를 우리가 이렇게 바로 주관식으로 찾아내기는 어렵죠.

 

그런데 객관식 문제에서 여러 가지 정보들을 여러분들이 도움을 받아서 푸는 것은 가능할거라고 생각해요. 자, 이번에는 문제 6번으로 갑니다. 공통점 문제 첫 번째 (가)로 한번 보도록 하자.

 

달밤이라는 시를 가지고 보는 거죠.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시상을 전개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경과라 그랬으니까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전개 방식을 말하는 건데 아니죠. 그렇지?

 

명사로 시상을 종결하여, 명사로 시상을 종결하면 여운을 자아내는 겁니다. 명사로 시상을 종결한다. 다른 표현으로는 서술어의 생략이라고도 해요. 그런데 이 시에서는 어떤 부분이 있었지?

 

달빛 달빛으로 끝났으니까 얘는 맞는 설명이 되는 거고. 자, 세 번째. 화자의 행위를 열거해서 심적 상태. 화자가 하는 행위를 열거 나열해 놓은 것이 없어. 화자가 긍정적으로 여기는 삶의 자세가 나타난다.

 

그렇죠, 외로움이 아닌 길을 갈 겁니다. 달빛을 받으면서 외로움이 아닌 길을 가는 삶의 자세 드러납니다. 과거의 상황을 환기하며 화자의 정서를 드러낸다. 과거의 상황을 떠올리는 부분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