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이육사의 광야 - 전문 분석과 감상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3. 24. 04:02

 

● 광야(曠野)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참아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 없는 광음(光陰)을

부즈런한 계절(季節)이 피여선 지고

큰 강(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작품개관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남성적, 예언적, 의지적, 대륙적

어조 : 지사적 남성의 예언자적 목소리

특징 ① 웅장하고 강건한 남성적 어조와 광활한 상상력이 잘 조화되어 있다.

② 시간적 순서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③ 각 연별로 행의 길이가 조금씩 길어지는 것이 반복됨으로써 유장한 리듬감을 획득 하고 있다.

 

구성 :

제1~3연 : 태초의 날에서 무수한 나날이 흘러 광야에 비로소 강물이 길을 열었다. 광야의 유구함과 광활함을 말함.

제4연 : 눈 내리고 매화 향기 아득한 광야에서 가난한 노래를 부른다.

제5연 : 먼 훗날 초인이 다시 이 곳에서 우렁찬 노래를 부를 것이다.

제재 : 광야의 나

주제 : 엄혹한 상황에서 펼치는 비장하고도 의연한 결의.

출전 : 《육사시집》(1946)

 

 

 

12783

 

 

● 작품해설

 

웅장한 어조와 흡사 신화와도 같은 상황 설정이 독자를 압도하기는 하지만, 몇몇 곳에서의 오해 가능성을 제외 한다면 그리 어려운 시는 아니다. 이해를 위해서 시적 정황을 그려 본다면, 시적 화자 ‘나’가 눈이 내리고 있는, 가없이 드넓게 펼쳐진 겨울 광야에 홀로 서 있는 상황을 설정해 볼 수 있겠다. 그 광야에서 ‘나’는 태초로부터의 광야의 역사를 웅혼한 상상으로써 조망하고(1~3연) 그 곳에 홀로 있는 자신의 존재와 행위를 성찰하며(4연), 나아가 다가올 앞날에의 예감을 펼치고(5연) 있는 것이다.

 

광야의 역사를 파노라마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제1~3연부터 차례차례 검토해보자.

 

제1연은 하늘이 열리는, 곧 세계가 시작되는 태초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데, ‘닭 우는 소리’로 인해 신비로운 감을 더한다. 여기서 제3행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를 어떻게 풀이할 것인지가 약간 문제가 된다. 즉 ‘어데’와 ‘들렸으랴’ 두 어구를 어찌 파악하느냐에 따라 해석을 조금씩 달리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우선 ‘어데’의 의미는 ? ‘어디에’의 축약형, ? 경상도 방언에서의 ‘어데’(표준어에서의 ‘어찌’ 정도에 상당) 두 가지가 가능하다. 또 ‘들렸으랴’ 역시 ? ‘들렸겠는가?’로 보고 수사적 의문으로 이해하여 ‘들리지 않았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는 쪽과 ? ‘들렸으리라’의 축약형으로 보는 쪽 두 가지가 있다. 이를 조합해보면 ? 어찌 들렸겠는가? ? 어디에 들렸겠는가? ? 어디에 들렸으리라 세 가지가 모두 가능한 해석으로 나오는데, 요컨댄 ‘닭 우는 소리’가 ‘안 들렸다’와 ‘들렸다’ 두 가지로 추릴 수 있다. 그리고 그때 ‘닭 우는 소리’는 그 함의하는 바가 각각 달라진다. 전자에서는 인간의 생활, 후자에서는 시작을 알리는 소리의 비유적인 표현이 된다. 그 어느 쪽이든 제1연에서는 역사와 광야의 태초가 유구하고 신비로웠다는 사실이 시사되고 있다.

 

제2연은 광야의 광활함을 나타낸 연인데, 탁월한 시어 구사로 몇 가지 부수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선 산맥의 융기(隆起)를 마치 어떤 장대한 동물이 달리는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원시적 생명감에 충일한 건장하고도 힘찬 심상을 주어 제1연의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다. 아울러 역동적인 운동감을 주어 1연의 천지개벽에서 시작된 시간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제3연으로 이어지게끔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산맥들이 ‘차마’ 범하지 못하였다고 함으로써 광야에 신성성까지도 부여하고 있다.

 

제3연에서는 숱한 시간이 경과한 뒤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강물이 열렸다는 것은 교통(交通)으로 상징할 수 있는 인간의 문명이 움텄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제1연에서 3연까지 ‘내’가 광야의 유구함과 광활함을 투시하는 과정은, 바로 역사의 기나긴 행정(行程)과 광대한 세계 속에 위치한 자기 존재의 좌표를 구체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자기 존재의 역사적‧사회적 규정성을 인식함으로써, 스스로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나아가 실천적 행위로써 연속될 윤리적 결단을 예비하는 것이다. 광야에 대한 시공간적 조망이 바로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함을 드러내는 데 ‘어데’, ‘차마’, ‘비로소’ 등의 부사가 실로 적절히 이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비단 이 시에서뿐만 아니라 이육사는 부사어, 특히 선택이나 결단을 나타내는 부사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어쨌든 이제 시상은 ‘나’에게로 전이될 것이고, 제4~5연은 그 전개를 보여준다.

 

먼저 제4연에서 살피건대 ‘나’는 눈 내리는 광야에 있다. 눈이 내리는 정경은 실로 많은 심상을 구성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시절이 엄혹하고 고통스럽다, 전망이 잘 보이지 않는다, 홀로 있다는 느낌 등을 복합적으로 주고 있다. 곧 시적 화자 ‘내’가 거대하고 광포(狂暴)한 세계에 홀로 놓여 있는 형국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앞에서 위축되지도 않고 또 그로부터 회피하려 하지도 않는다.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다는, 이어지는 행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매화는 언제 피는가? 우리의 전통적인 상상력에 의하면, 매화는 ‘눈 내리는’ 겨울 온 누리의 만물이 죽거나 죽은 듯한 형세에 있을 때 ‘홀로’ 피어 그 그윽한 향을 전한다. 그래서 우리 선비들은 매화로써 고고한 정신과 강인한 기개를 말했던 것이고 육사 역시 매화를 들어 자신의 자세를 밝힌 것이다. 육사가 풍부한 한학(漢學) 소양을 바탕으로 하여 시의 수사(修辭)와 결구(結句)에서 한시적인 것을 즐겨 원용했음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덧붙이자면, 여기서 ‘아득하니’는 실제 거리상으로 아득하다는 뜻이 아니라 어딘지 모를(즉 아득한) 곳에 핀 매화의 향기가 풍기듯이 그 향이 은은함을 나타내는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아득하니’란 어구로써 ‘홀로’의 부사가 더욱 살아나고 ‘눈 내리’는 정경이 더욱더 실감나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런 강기에 찬 ‘내’가 겨울 들판에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고 있다. 이 구절은 어구 그대로 장차 활짝 피어날 노래의 씨를 뿌리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시인 자신인 ‘내’가 스스로의 노래 부르는 행위를 씨 뿌리는 것에 비유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을 성싶다. 구절 자체야 별스럽지 않지만 시적 정황과 연관지어 본다면 참으로 비장한 느낌을 준다. 생각해 보라. 만물이 얼어붙은 겨울 들판에 씨를 뿌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보통 씨뿌리기의 궁극 목적이 화려한 개화(開花)나 풍성한 결실을 겨누고 있는 만큼 다사로운 봄의 대지에 씨를 뿌리는 것이 온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겨울 들판에, 그것도 그냥 흩뿌리듯이 파종하는 것이 아니라 ‘뿌려라’라는 의지에 찬 표현을 구사할 만큼의 정신 자세로써 뿌리고 있다. 여간한 신념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행위인 것이다.

 

이 구절의 비장함은 바로 이 신념에서 오는 것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왜 ‘나’는 자신의 노래 부르기에 씨뿌리기라는, 어찌 보자면 한껏 겸손한 표현을 붙이고 있고, 게다가 ‘가난’하다고까지 말하고 있을까? 그 사정은 다음 연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지금-천고의 뒤’, ‘나-백마 타고 오는 초인-노래의 씨를 뿌려라-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제5연은 제4연과 긴밀하게 대응하면서 제4연의 ‘나’의 행위가 어떤 지향점을 상정하고 있는지를 적실하게 보이고 있다. 먼 훗날에 어떤 강한 초인이, 내가 지금 뿌리는 씨앗을 거두어 풍요로운 결실을 얻듯이 자신의 노래를 이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리라는 것이다. 이는 단지 제4연에서의 ‘나’의 행위의 결과를 예시(豫示)하는 의미만은 아니다. 우선 이 제5연에 의해 제4연의 ‘나’의 행위가 백마 타고 오는 초인에 의해 이어지리란 것을 드러냄으로써 ‘나’의 행위는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다. 한편 그 시점이 ‘천고의 뒤’로 설정된 데서 그 씨 뿌리는 행위가, 조급한 낙관이 아니라 제1~3연에서 광야의 역사를 조망한 것에 맞먹는 만큼(제5연 첫 부분의 ‘다시’란 부사가 이를 드러낸다.)의 넉넉한, 그러면서도 확고한(‘부르리라’가 아니라 ‘부르게 하리라’로 되어 있다.) 역사적 전망에 기초하고 있음도 아울러 밝혀지고 있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내’가 제4연에서 왜 자신의 노래를 씨뿌리기에 빗대면서 그것을 ‘가난’하다고 했는지 확연히 알아차리게 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서릿발같이 냉철할 정도로 현실과 자신을 직시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나’의 노래는 천고 뒤 초인에게 이어져 그가 목 놓아 부른다는 것이니, 그 역사적 예견에서 스스로의 노래를, 자긍과 신념 그리고 겸양을 그 한 단어 속에 담은 ‘씨’에 빗댄 것이다. 그리고 눈밭에 뿌려지는 씨와도 같이 그 노래는 ‘가난’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대체로 노래란, 비록 비가(悲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본시 환희와 생명감의 충일에서 나오는 것인데, 지금 ‘나’의 노래는 그렇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그 ‘가난’이 진짜 가난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제4~5연에서 우리는 의기에 찬, 그러면서도 가없는 국량을 지닌 의연한 지사(志士)의 모습을 그리게 되는바, 여기서 문득 제1~3연의 광야의 웅자(雄姿)가 그의 기품과 멀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 보충 학습 - 시 작품의 작가론적 이해에서의 유의점

 

간혹 ‘매화 향기’를 조국 해방의 전망이나 예감으로, 그리고 다음 연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조국 해방의 실현이나 실현시키는 사람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런 해석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아득하다, 천고의 뒤’ 등의 거리‧시간 지시어로 말미암아 조국 해방은 머나먼 훗날에나, 더구나 궁극적으로는 타인의 힘에 의해 이루어지리란 식으로밖에 귀결될 수 없다. 퍽이나 비관적인 역사 전망이요, 또 시인의 모습이 돌연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로 돌아서는 것이랄 수밖에 없는데, 이는 기개에 찬 시인의 자세와도, 그리고 지금까지 웅장하게 전개되어 온 시의 의미 구조와도 걸맞지 않다. 또한 김흥규 교수도 지적했듯이 위와 같이 해석할 경우 ‘홀로’의 뜻을 제대로 풀 수 없다. 따라서 달리 이해해야 되는바, 앞서서 말했듯이 이 제2행은 시인의 자세를 암시하고 있는 구절로 보아야 한다.

 

* 현재 교정, 수정, 검토가 진행되고 있는 중인 글입니다. 이른 시일 안에 완료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