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기형도 <기억할 만한 지나침>에 대하여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3. 30. 06:58

 

 

 

기억할 만한 지나침

 

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안(未安), 우리가 흔히 쓰는 말입니다. 그 근처에 머무는 말은 무엇일까요? 불안(不安), 불편(不便) 정도는 어떤가요? 기형도의 시를 읽는 저의 처지가 딱 그렇습니다. 참으로 불편(不便)합니다. 무슨 까닭인지 마음이 편하지 아니하고 괴롭습니다. 1960년대 이전의 시를 읽을 때, 저는 시 창작 당시의 실감(實感)을 얻기 위해 참으로 많은 노력을 합니다. 시인의 시만이 아니라 수필도 모아 꼼꼼하게 읽고, 당시 신문 잡지도 통독합니다. 기형도의 시를 읽을 때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동시대(同時代)의 시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시 읽기가 편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슬픈 사연의 노래라도 노래는 흥겨움이 반절 가웃은 되는 법이며, 아무리 슬픈 사연의 시라도 아름다운 미소와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법인데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때로는 시인에 대해, 시인이 살다 간 시대에 대해 너무(?) 많이 아는 것이 시 작품 감상에 독(毒)이 되기도 하는 탓일까요? 하지만 제가 시인에 대해 알면 또 얼마나 알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그 이유만은 아닐 듯하고, 대략 두 가지 이유가 떠오릅니다. 하나는 경험의 포개짐. 가난과 불안의 유년 체험의 포개짐을 말합니다. 세월이 지나가면, 좋지 않은 기억은 잊힌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법. 잘 알려진 기형도의 <엄마걱정>을 봐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엄마걱정>이 제목이어서 어머니를 걱정하는 시로 읽히기 쉽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죠.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엄마걱정>

 

 

 

이 시에서 진정으로 아픈 부분은 어머니와 격리(隔離)되어 있는 아이의 불안이죠.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이라는 표현 속에 그 공포와 불안이 형상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죠. 제2연에서 시적 화자는 유년 시절을 회상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단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으로 볼 수 없죠. 다음 시에서 그 불안은 극대화하여 제시됩니다.

 

 

 

 

바람의 집

                                           - 겨울 판화(版畵) -

 

 

내 유년 시절 바람의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 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 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 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 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 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눈길이 가는 부분은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라는 부분입니다. 이때 어머니는 성인이 되어가는 유년의 시적 화자를 세계에 진입시키는 사제(司祭)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사제가 칼을 들고 유년의 화자를 춥고 거친 세상 속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문풍지의 바람, 시퍼런 무, 동지의 밤, 이 모든 것들이 실로 대단한 불안을 촉발시킵니다.

 

 

 

역시 이 시에서는 회상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후반부에 제시됩니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가 그 증거입니다. 결국 불편한 것은 단순히 유년 회상의 시가 아니라는 점에 있는 것입니다. 시적 화자가 진정으로 불안한 것은 성인이 된 화자를 둘러싼 환경이, 어둡고 춥고 눅눅했던 유년시절의 골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경험을 공유하는 까닭에 불편한 것입니다.

 

 

 

 

 

12788

 

 

다음은 단명구(短命句) 때문에 촉발되는 불편함입니다. 단명구란 주지하다시피 글쓴이의 목숨이 짧으리라는 징조가 드러나 보이는 글귀를 말합니다. 그의 약력 중의 일부입니다. “1960년 2월 16일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79년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정법계열에 입학하여 1985년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문화부·편집부에서 일하며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1989년 시집 출간을 위해 준비하던 중,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겨우 30이라는 짧은 생을 살고 떠났습니다. 아, 이를 어쩌나요. 그의 시에는 시인의 이른 죽음의 후각을 발산하는 부분이 참 많습니다.

 

 

 

우수수 떨어지는 노을에도 소스라쳐

멍든 가슴에서 주르르르

네 소리.

잎 진 빈 가지에

내가 매달려 울어볼까.

찬바람에 떨어지고

땅에 부딪혀 부서질지라도

내가 죽으면

내 이름을 위하여 빈 가지가 흔들리면

네 울음에 섞이어 긴 밤을 잠들 수 있을까.

-기형도, <가을에> 중에서

 

 

 

그래서 <기억할 만한 지나침>을 읽는 것이 참 마음 불편하게 합니다. 이 시는 무엇보다 <엄마 걱정>과 시상 전개의 구조가 아주 흡사합니다. 제1연이 과거의 풍경이라면, 제2연은 그 과거의 기억을 반추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입니다. <엄마 걱정>도 비슷하지요. 당연히 두 연 사이에는 얼마 정도의 시간의 경과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얼핏 보면 두 풍경 속의 인물이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제1연에서 시적 화자는 유리창 너머 한 사내를 보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제2연에서는 그 사내를 지켜보던 시적 화자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독해일 뿐입니다. 그 춥고 큰 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사내, 그는 바로 제2연에서 우연히 그를 떠올리고 있는 시적 화자의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다 큰 사내가 텅 빈 사무실에서 훌쩍입니다. 그 춥고 큰 방에서 훌쩍입니다. 열무 팔러 간 엄마는 밤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고, 불안 속에서 훌쩍이던 <엄마 걱정>의 소년과 거의 흡사합니다. 바로 이 지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람의 집>에 제시된 어머니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하고 있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사내는 왜 텅 빈 사무실에서 홀로 울었을까요? 오열(嗚咽)하였을까요? 그의 <물 속의 사막>은 그 사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기형도, <물 속의 사막> 중에서

 

 

헛것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저 안의 단단한 각오들을 다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공허한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시적 화자는 삶의 허무감 때문에 가슴 속으로 목메어 울고 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되뇝니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가난과 불안 속에서 자란 원초적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시인은 알아 버린 것입니다. 이 세계가 너무나 허무하다는 것을. 인간의 문명이 쌓아올린 것은 빌딩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들이고, 도시는 사막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 도시에는 인간적 가치와 존엄에 대한 경외(敬畏)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문명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폭력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은 그 거대한 조직의 일원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도 텅 빈 사무실에 갇혀 버린 것입니다. 그 영혼이 “그 춥고 큰 방에서”에서 “혼자 울고 있”습니다. 그저 퍼붓는 창밖의 눈을 바라보면서. 그 서글픈 영혼의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