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최하림 아침 시 해설과 감상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3. 20. 05:24

참 세월 빠르네요. 최하림 시인의 시집에서 찾은 좋은 작품입니다. 제가 이 작품을 선정하여 해설하고 출판하기 전까지는 수능 등에서 전혀 언급이 없었습니다. 요즘은 화제가 되고 있네요. 당시 시인은 몸이 성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궂긴 소식을 들었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시인이시기도 하지만, 훌륭한 평론가이시기도 했죠. 저는 최하림 평론가를 통해 김수영 시와 황동규 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아침시

 

 

굴참나무는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해만 뜨면 솟아오르는 일을 한다

늘 새롭게 솟아오르므로 우리는

굴참나무가 새로운 줄 모른다

굴참나무는 아침 일찍 눈을 뜨고

일어나자마자 대문을 열고 안 보이는

나라로 간다 네거리 지나고 시장통과

철길을 건너 천관산 입구에 이르면

굴참나무의 마음은 벌써 달떠올라

해의 심장을 쫓는 예감에 싸인다

 

그때쯤이면 아이들도 산란한 꿈에서

깨어나 자전거의 폐달을 밟고 검은 숲 위로

오른다 볼이 붉은 막내까지도 큼큼큼

기침을 하며 이파리들이 쏟아지듯 빛을

토하는 잡목숲 옆구리를 빠져나가

공중으로 오른다 나무들이 일제히

손을 벌리고 아이들이 일제히

손을 벌리고 아이들은 용케도 피해간다

아이들의 길과 영토는 하늘에 있다.

그곳에서는 새들과 무리지어 비행할

수가 있다 그들은 종다리처럼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포르릉 포르릉 날며 흘러

내리는 햇빛을 굴참나무처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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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靜觀). 말 그대로 풀이하면 ‘고요히 봄’이나, 이것은 대상의 안에 있는 본질적인 것(사물의 변화)을 마음의 눈으로 관찰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노장사상과 같은 동양 사상의 큰 흐름과 통하고, 동양화의 바탕을 이루는 예술 철학과 통하고, 전통적인 동양적 시 사상의 바탕을 이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죽하면 ‘살아있는 생물은 모두 한 형제’라고 주창한 일본의 동화작가 미야자와 겐지가 “새로운 시대의 다윈이여/다시금 동양적인 정관(靜觀)의 챌린저호를 타고/은하계 공간 그 너머까지도 나아가서/더욱 투명하고 깊이 있는 올바른 지사(地史)와/증보 개정된 생물학을 우리들에게 보이라”(<학생들에게 전한다>)고 했겠는가?

 

 

 

 

시인 최하림은 <산문시대> 동인으로 70연대 사회 참여시의 중심에 서서, 군사 정권에 의해 억압받는 민중의 분노와 한(恨) 그리고 희망을 노래했다. 그러나 이산문학상(1999) 수상 시집 <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에 수록된 이 작품에서는 놀랍게도 그러한 면모가 싹 가시고, 전혀 다른 동양적 정관주의(靜觀主義)의 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시인의 건강일 것이다. 이 작품은 시인이 1990년대 초반 고혈압으로 크게 건강을 해친 다음 산골(충북 영동군)로 내려가 자연을 벗삼아 지낼 때의 작품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 때문이라고 하고 말 것은 아니다. 시대 상황의 탓으로 사회 참여적인 시를 썼지만, 내면에는 동양적 정관주의가 잠재해 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가 문학과 미술에 심취한 같은 연배의 예술인들과 어울려 목포 오거리를 배회할 때, 그 후견인으로 남농(南農) 허건 등의 선배 예술인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에게는 한국 남화의 전통이 잠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를 동양적 정관주의의 전형적인 예로 보기는 어렵다. 통상 동양적 정관주의는 많은 산수화가 그러한 것처럼 크게 펼쳐진 자연 속에 미세한 흔들림(예컨대 바람에 살짝 나부끼는 나뭇잎)을 배치함으로써 우주의 큰 움직임을 보여주는 방식을 취한다. 이 시 역시 정관(靜觀)하지 않고는 발견하기 힘든 자연의 미세한 떨림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기는 하다. 제1연에서 노래하고 있는 바, 굴참나무의 솟아오름은 범상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굴참나무를 보지만, 하루하루 새롭게 솟아오르는 것을 보지는 못한다. 그러나 아픈 몸을 추스르며 넓은 창 밖으로 숲을 내다보고 있었을 시인의 눈에는 굴참나무가 거대한 분수처럼 공중으로 매일 매일 솟아오른다. 자연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정관(→‘고요히 봄’)의 자세가 없다면, 거대한 자연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사물의 본질적 변화’)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오늘 아침에도 버드나무가 몸 비비는 소리 들으며/눈을 뜨고”(<밤에는 고요히 어둠을 본다>)와 같은 차원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동양적 정관주의로 보기 어렵다고 하는 이유는, 이 시에 등장하는 자연물이 ‘떼를 이뤄’ 보이지 않는 움직임의 자세를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동양화의 배경으로 흔히 등장하는 바위나 하늘과 같은 비생명적인 것은 없거나 한참 뒤로 물러나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굴참나무가 군무(群舞)를 하듯, 맹렬히 해의 심장을 쫓고 있는 풍경이다. 자연의 ‘작은 떨림’이 아니라, 저 깊은 곳으로부터 지각을 뚫고 올라오는 듯한 ‘거대한 대지의 떨림’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떨림은 참으로 활력이 넘친다. 어쩌면 시인은 지친 몸을 이끌고 이른 아침 창 밖을 내다보면서, 그렇게 내면적인 힘을 한껏 뿜어내는 역동적인 자연을 부러워하며, 미래의 건강한 삶을 꿈꾸었을 지도 모른다. 굴참나무가 외워 싼 생명의 성채(城砦)를 지키는 살아가는 건강한 미래를 꿈꾸었을지 모른다.

 

 

제2연은 자연의 역동성이 인간에게 전이(轉移)되어 삶의 활력으로 흡수되는 풍경을 형상화하고 있다. 자연의 활력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름 아닌 자전거 페달을 밟아 숲 위로, 아니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산골의 아이들이다. 자전거를 탄 아이들이 공중으로 솟아오를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은 물론 굴참나무의 이파리들이 반짝이며 토해내는 햇빛이다. 그 활력 넘치는 빛의 힘으로 아이들은 굴참나무가 아침이면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비상하여, 하늘에 길을 열고, 하늘을 자신의 영토로 만든다. (이것은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새들과 한 무리가 되어 ‘포르릉 포르릉’ 비행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육안(肉眼)에 비친 풍경이 아니라, 심안(心眼)에 비친 풍경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시각만이 아니라 전(全)감각을 동원하여 자연을 체험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을 때라야 비로소 가슴에 떠오르는 풍경이다. 그래서 그 풍경에서는 자연의 평화로움, 살아있는 영혼의 울림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다. 이처럼 시인은 아침의 고요 속에서 영혼의 평화를 본다. 마치 소파 방정환이 잠자는 아이의 모습에서 세상의 평화를 읽어내는 것처럼.

 

 

어린이가 잠을 잔다. 내 무릎 앞에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달게 자고 있다. 볕 좋은 첫여름 조용한 오후이다.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중략)

우리가 종래에 생각해오던 하느님의 얼굴을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어느 구석에 먼지만큼이나 더러운 티가 있느냐. 어느 곳에 우리가 싫어할 한 가지 반 가지나 있느냐. 죄 많은 세상에 나서 죄를 모르고 부처보다도 야소보다도 하늘 뜻 그대로의 산 하느님이 아니고 무엇이랴. - 방정환, <어린이 예찬>

 

 

[참고] 졸고입니다만, 이 글은 제가 쓴 책인 <현대시 참신한 아이템>(디딤돌)에 수록한 글의 일부분입니다. 무단 복사할 경우 출판사에서 저작권을 문제 삼을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