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최승호 앙상함 - 오독의 즐거움(?)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3. 15. 05:33

 

요즘 교육방송의 영향력을 실감한다. 교육방송 교재에서 다룬 작품은 곧바로 인터넷 검색어가 된다. 최승호의 <앙상함>도 마찬가지다. 좋은 작품이다. 그런데 그 작품 해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시쳇말로 오독(誤讀)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오독의 출발점에 교육 방송 교재가 있다. 그래서 해설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강의도 들어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오독(誤讀)이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넘어가기에는 그 부정적 파장이 너무 크다. 그래서 짧게 몇 자 적는다.
겨울나무들이 동안거(冬安居)한다.
열매들을 다 놓아버린
알몸에 서리 내린다.
앙상한 사람들 중에서도
참하게 앙상한 사람은
암자가 불타버린
스님
재 한 점,
재 한 점으로 지평선에 서 있는 사람,
자코메티 씨에게 인사시키고 싶은데
자코메티 씨는 앙상한 조각들을 남기고
벌써 입적했다.
앙상함도 존재의 한 방식이다.
군더더기가 없는
보석,
알몸,
앙상함의 극치에서 태어나는
보석
알몸
성자.
- 최승호, <앙상함>
이  작품의 제재는 ‘겨울나무들’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겨울나무들로부터 떠올린 ‘앙삼함’이다. 시상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이렇다. 시적 화자는 겨울나무들을 보면서 스님들의 동안거를 상상한다. 그 나무들 중에서 특히 불타 죽어버린 채 서 있는 나무를 주목한다. 그리고 그것을 암자가 불타버린 스님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재 한 점으로 지평선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그 나무로부터 시적 화자가 상상한 내용의 집약이다. 
그리고 시적 화자는 문득 자코메티를 떠올리게 된다. 물론 ‘앙상한 나무’와 ‘앙상한 조각’의 공통적인 이미지 때문이다. 시적 화자는 이쯤에서 ‘앙상한 조각’에서 느꼈던 감흥을 ‘앙상한 나무’로부터 느꼈음에 분명하다. 그 감흥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허무와 고독’ 정도가 아닐까 싶다. ‘앙상한 사람(=앙상한 나무)’를 자코메티 씨에게 인사시키고 싶다는 것은 그 감흥과 그 감흥으로부터 유발된 욕구라는 점도 분명하다.
그리고 시적 화자는 자신의 깨달음을 비교적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암상함도 존재의 한 방식’이라고. 이 지점에서 ‘앙상함’은 철학적 가치를 갖게 된다. 그것이 ‘인간의 고독한 실존’과 등가(等價)이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가 그 앙상한 나무를 보고 ‘성자’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요컨대, 이 작품은 ‘군더더기’로 표현된 현대 문명의 타락한 가치(이것은 전쟁으로 폭력으로 구현된다)에 저항하는 방식으로서의 ‘실존적 고독’의 가치를 옹호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의 궁극에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단독자(單獨者)로서의 신(神)을 탐구하는 종교적 실존의 존재방식’을 탐구한 키에르케고르적인 사유가 놓여 있거나. 그와 유사한 불교적 사유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 교육방송 교재와 강의는 어떻게 이 작품을 오독하고 있는가?
(1) 시상의 흐름을 잘못 파악했다. 이 시의 짜임을 ‘앙상한 겨울 나무-앙상한 모습의 스님-앙상한 조각을 남기고 입적한 자코메티-앙상함의 의미’로 정리했다. 이 시가 일종의 기승전결 구조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제1연과 제2연이 일종의 병치라는 점을 간과했다. 즉, 제2연의 내용은 제1연의 내용을 변주하여 심화하고 있는 내용인 것이다. 제3연은 시상의 전환에 해당한다. 자코메티를 떠올린 것이 그렇다. 제4연은 시상의 집약으로 결에 해당한다. 따라서 제2연과 제3연의 시상 파악이 방향을 잘못 잡았다고 말할 수 있다.  강의에서는 이 부분을 얼버무리고 넘어가 버린다.
(2) 시구의 의미를 잘못 파악했다. “재 한 점,/재 한 점으로 지평선에 서 있는 사람”은 ‘스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겨울나무’ 더 정확히 말하면 ‘불타버린 나무’를 말한다. 스님은 매체(흔히 보조관념이라고 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재 한 점”은 겨울나무이고, “재 한 점으로 지평선에 서 있는 사람”은 스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물론이다. 그러나 이 시적 진술은 ‘앙상한 겨울, 암자가 불타버린 스님을 연상시키는 나무’라는 것이지, ‘앙상한 나무+앙상한 모습의 스님’이라는 뜻이 아니다.  강의에서도 같은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3) 답지의 전제가 잘못되었거나, 해설이 부실하다. “재 한 점,/재 한 점으로 지평선에 서 있는 사람”을 두고, ‘이질적인 두 이미지를 조합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 부분에서 집필자는 충분한 설명을 주지 않는다. 다만 “답이 아니까 답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해설하는데 그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러면 ‘동질적인 두 이미지를 조합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물론 동질적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조합이 아니라 중첩이다. ‘조합’은 ‘여럿을 한데 모아 한 덩어리로 짬.’이라는 뜻이고, ‘중첩’은 ‘거듭 겹치거나 포개어짐.’이라는 뜻이다. 이 경우는 비슷한 이미지를 겹쳐 놓은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에, 조합보다는 중첩에 가까운 것이다. 둘 사이는 반점[,]으로 연결되고 있다. 반점은 통상 같은 자격의 어구를 열거할 때 쓰는 문장 부호라는 점에서도 더욱 그렇다.
(4) 자코메티 관련 평론과의 연결에도 문제가 있다. 4번 문제에서 제시한 ‘앙상함을 통해 상황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킨 존재’라는 설명은 맞다. 그런데 ‘<보기>와 달리’라는 답지의 설명은 거칠다. 집필자는 자코메티의 경우는 ‘극한 상황에 놓인 인간의 고독한 실존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기>를 부연하여 설명했다. 맞다. 그런데 이로부터 ‘그래서 (다)와 <보기>는 다르다’라고 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차라리 시적 화자는 불타 버린 나무로부터 ‘고독한 인간의 모습’(평론의 내용처럼)을 보았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자코메티는 안 그렇고, 이 시에서만 그렇다고 설명하는 것이 옳을까? 자코메티의 인체미학 역시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고 봐야 옳지 않겠는가?(평론의 행간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다.) 종교적 승화는 긍정적인 것이고, 예술적인 승화는 긍정적이지 않다는 설명이 도대체 어떤 논리로 가능할까? 오히려 시적 화자가 자코메티의 조각에 공감하는 것은 ‘초췌한 인체’를 통해 예술적으로 승화된 경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야 옳지 않겠는가? 강의는 이러한 문제를 좀 더 심화시키는 쪽으로 몰고 있다.
기타 김춘수의 시 해석, 바슐라르의 이론 적용에서도 문제가 많은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논의를 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