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김광규 서울꿩, 정지용 오월소식 감상과 문제 분석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3. 18. 15:06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 교재와 강의 분석 세 번째 글입니다. 20쪽부터 25쪽까지 두 세트를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문제에서 다뤄진 모든 작품과 문제를 분석하려면 너무 길어질 것 같습니다. 김광규의 ‘서울꿩’과 정지용의 ‘오월소식’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김광규의 <서울꿩>
① 문명비판을 주제로 하는 작품입니다. 기법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흔히 알레고리(allegory)라고 하는 기법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나),(다)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출제자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적절한 세트 구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재와 강의는 그러한 의도를 잘 살리고 있지 못합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문제2번입니다. ②번  답지를 적절한 감상으로 처리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ㄱ은 생존의 유지가 가능한 공간이지만, ㄷ은 생존이 위협받는 공간이다.”라고 했습니다. (다)를 언급한 답지의 후반부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반부는 분명한 오독(誤讀)입니다.

(가)에서 문맥상 ‘홍제동 뒷산’은 ‘섬처럼 외롭게 남겨진 개발 제한 구역’입니다. 거기에 즉, ‘삭막한 돌산에’ 오도 가도 못하고 ‘갇혀 버린 뀡들’은 ‘꿩병아리를 데리고 언덕길 쓰레기터에 내려와 콩나물대가리나 멸치꽁다리를 주워 먹’고 삽니다. 물론 이 때 ‘꿩들’은 ‘갑갑하게 시내에서 사는 서울시민들’의 처지를 암시합니다. 알레고리로서 해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문제도 그런 틀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두고 출제자가 ‘도시 문명의 비정함’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온당한 관점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답지에서는 ‘ㄱ은 생존의 유지가 가능한 공간’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ㄷ’의 ‘생존이 위협받는 공간’과 대조적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도대체 이런 식의 대조가 어떻게 가능한지, 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식의 논리라면 꿩들은 앞으로도 죽 쓰레기를 먹고 살아야 하나요? 꿩들이 쓰레기를 뒤져 콩나물대가리나 멸치꽁다리를 먹고 살 수밖에 없는 상황, 그것이 바로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인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상식적인 해석이 아닐까요?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 구조를 생각할 때, 이러한 오독(誤讀)은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② 문장 표현 문제는 교재 전반에 걸친 문제라 언급하기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문제와 해설에서 전체적으로 문장의 오류가 너무 많아, 그것을 하나하나 지적하려면 <수능특강>보다 더 두툼한 책 한 권을 펴내야 할 지경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물론 저도 뭐 대단한 문장가가 아닌지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그래서 앞으로 아주 심각한 경우가 아니면, 정답 및 해설 부분의 문장 오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현 상황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교재를 전면 리콜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2번 <보기>의 문장(해설이 아니고 문제의 일부이므로 중요합니다.)은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를 감상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시 속에 설정된 공간의 의미를 견주어 이해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가)와 (다)의 공간을 다음과 같이 표시했을 때, 이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해 보도록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압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견주다’와 ‘표시’는 어휘 사용상의 오용(誤用)입니다. 그래서 문장이 전체적으로 꼬여 버렸습니다. 전자의 경우 서술어의 자릿수를 잘못 이해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고, 후자는 단어의 용법을 잘못 이해하는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수능에서 문장 표현상의 오류가 주요 평가 대상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앞으로 교재 집필자와 편집자는 교재의 문장 표현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정지용, <오월소식>


 

① 이것은 좀 심각합니다. 교재도 교재지만 강의가 더욱 그렇습니다. 강사는 이 작품에 대한 정확한 해설을 반쯤 포기한 것 같습니다. 작품이 어려우니, 시구 하나하나에 대한 정확한 감상은 포기하라고, 그게 현명하다고, 수험생들에게 참으로 친절한(?) 조언까지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아닙니다. 상황 설정이 매우 구체적인 작품이므로, 그렇게 어려운 작품도 아니고, 이미 시중에는 이 작품에 대한 친절한 해설이 나와 있습니다. 어려운 작품이라면, 차라리 제1강에서 다룬 김춘수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정도가 아닐까요? 강사의 준비 부족을 작품의 난해성으로 은폐하는 것은 양심적이지 않습니다. 좀 더 연구하고 재촬영하는 것을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매우 간결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것이 보통이고, 아주 작은 표현의 차이가 매우 큰 차이를 낳는 법입니다. 예를 들면 강사는 (가) 작품 김소월의 <그를 꿈꾼 밤>의 구조적 특징으로 수미상관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왜 놓쳤을까요? 제1연과 제4연의 표현이 원문과는 다르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야밤중 불빛이 발갛게/어렴풋이 보여라.”와 “야밤중, 불빛이 발갛게/어렴풋이 보여라.”라는 다른 것입니다. 작가는 분명히 반점을 넣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작품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말입니다. (저는 원문 확인에 <김소월>(지식산업사)의 것을 참고했습니다.) 이런 작은 차이도 교재가 오류를 범하고 있으면, 그 사정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눈에 거슬립니다. 그런데 <오월소식>을 해설하면서 강사는 시어의 상징적 의미 따위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합니다.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근거 없는 대담함(?) 때문에 작품 해석은 엉망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한 두 개만 살펴볼까요. 강사는 ‘알으키러’(원문은 ‘아르키러’)와 ‘오ㄹ간 소리’가 ‘시적 허용’이라고 했습니다. 이 작품은 교재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1927년쯤에 쓴 작품입니다.(이런! 작품 해설에서 “이 시는 리얼리즘의 사상에서 벗어난, 1930년대에 나타나 주류를 이루기 시작하는 모더니즘적 경향을 가지고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라고 하고 있네요.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한국현대시사에서 모더니즘은 20년대 중후반에 등장하는 것이고, 정지용은 그 대표 주자 중의 한 사람이며, 이 작품은 20년대 후반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이 중 후자는 이른바 외래어 표기법의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외래어표기법과 관련된 규범이 제시된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입니다. 이 경우는 소위 ‘시적 허용’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개념 적용을 과도하게 넓혔거나, 아니면 저간의 사정에 대해 오해한 것입니다. 덕분에 수험생들은 잘못된 지식을 하나 더 늘렸습니다. 바로 그 구절의 바로 앞부분 ‘머얼리’를 두고 시적 허용이라고 했다면 수긍할 수 있겠습니다만.

② 이런 문제들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좀 더 본질적인 문제를 하나만 더 지적할까요. 문제8번의 정답으로 제시된 답지 ③를 검토해 볼까요? 우선 이 답지와 관련하여 강사의 해설과 교재의 해설이 취지를 달리한다는 점이 문제입니다.(이런 것은 수험생들을 궁지로 내몰아버리는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교재의 해설은 분명히 “편지를 보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없다.”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강의는 다릅니다. “과장하여 표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둘 중 뭐가 옳을까요? 안타깝게도 둘 다 문제가 있습니다.


(나) 작품은 정지용이 휘문고보의 장학금 지원을 받아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에 다닐 때 쓴 작품입니다. 그가 교토로 유학을 떠난 것이 1923년(22세)이고, 귀국하여 휘문고보 교사로 근무하기 시작한 것이 1929년(28세)이니까요. 물론 교토에서 쓴 것인지, 아니면 교토에서의 경험을 살려 국내에서 쓴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시적 정황으로 보아 교토에서 쓴 것으로 보아 큰 무리가 없겠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너’는 그의 아내나 이복동생이 아닙니다. 열두 살 때 결혼한 아내가 아니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고, 한때 이복동생이 아닌가 하는 설이 제기되었지만, 이 역시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정지용에게 작은어머니(쉬운 말로 아버지의 첩)가 낳은 ‘정계용’이라는 매(妹)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1927년 당시 그녀는 10대 초반입니다. ‘일본말과 아라비아 글씨’(당시로 보면 국어와 산수를 가르치는 소학교 선생님 정도일 것입니다.)를 가르치러 섬(강화도로 추정됨)으로 떠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학 때 알게 된 비교적 어린 나이의 처자, 강화도로 소학교 선생님을 하러 간 처자가 이 시의 ‘너’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점에서 이 작품 <오월소식>(조선지광 68호, 1927.6)은 같은 연도에 발표된 동일 시인의 다른 작품인 <뻣나무 열매>(조선지광 67호, 1927.5)와 같이 엮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시의 주요 모티브 중의 하나인 ‘갈메기’에 주목한다면, <갈메기>(조선지광 80호, 1928)도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편지가 주요 모티브라는 점을 주목한다면, <엽서에 쓴 글>(조선지광 67호, 1927.5)도 도움이 됩니다. 특히 <뻣나무열매>를 주목해야겠지요. <뻣나무열매>는 <오월소식>보다 1달 전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그런데 전자는 그녀가 ‘떠날 림시’을 시적 정황으로 하는 작품이고, 후자는 그녀가 편지를 보내온 것을 시적 정황으로 하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쾌활한 오월넥타이가 내처 난데없는 순풍이 되어,/하늘과 딱닿은 푸른 물결우에 솟은,/외따른 섬 로만틱을 찾어 갈가나.”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내용입니다. 편지를 보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의 마음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월넥타이가 시적 화자를 비유한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고, 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편지를 보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의 심정’이 지극히 간절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재의 해설을 두고 문맥을 잘못 짚은 명백한 오독(誤讀)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시적 정황을 작품이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하늘과 딱 닿은’은 그리움의 대상이 있는 섬과 연결된 풍경일 뿐 편지를 보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명백한 오독(誤讀)입니까?
그런데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기는커녕 강의는 한 술 더 뜹니다. 그리움의 심정을 표현한 것은 맞지만, 과장은 아니기 때문에 틀리다는 식입니다. 더 자세히 지적하면 저 스스로 구차해질 것 같아 이 정도로 그칩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할 말인지는 의문입니다만, 아연실색(啞然失色)입니다.


이 글을 교육방송의 대표님이 보시는지 아니 보시는지는 저는 잘 모릅니다. 실무자(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아 누군지는 모르지만)는, 이런 글은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대표님이 보셔야 하는 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 지적이 다 옳은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더욱더 정치하게 따져 보겠습니다. 다만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교재와 강의를 검토하면서 제가 받은 느낌은 이렇습니다. 실례가 되는 말이겠습니다만, “한 편의 코미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입니다. 다 분석한 것도 아닙니다. 초반부만 해도 이렇습니다. 계속 분석해 가는 것이 제 스스로 두려울 지경입니다.

고생하시는 많은 분께는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이런 글이 교육방송에 폐가 된다고 말씀하시면, 여기에는 더 이상 올리지 않겠습니다.   

 

 

12780

 

[참고] 교육방송 대표와의 대화 게시판에 올린 글입니다.

 

[참고2] 정지용의 오월소식에 대해서는 제 나름대로 해설을 해 보았습니다.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월 소식>

정지용

 

오동나무 꽃으로 불 밝힌 이곳 첫여름이 그립지 아니한가?

어린 나그네 꿈이 시시로 파랑새가 되어 오리니.

나무 밑으로 가나 책상 턱에 이마를 고일 때나.

네가 남기고 간 기억만이 소곤소곤거리는구나.

 

모처럼만에 날아온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울렁거리어

가여운 글자마다 머언 황해가 남실거리나니.

 

……나는 갈매기 같은 종선을 한창 치달리고 있다 ……

 

쾌활한 오월 넥타이가 내처 난데없는 순풍이 되어,

하늘과 딱 닿은 푸른 물결 위에 솟은

외따른 섬 로맨틱를 찾아갈 가나.

 

일본말과 아리비아 글씨를 가르치러 간

조그만 이 페스탈로치야, 꾀꼬리 같은 선생님이야.

날마다 밤마다 섬 둘레가 근심스런 풍랑에 씹히는가 하노니,

은은히 밀려오는 듯 머얼리 우는 오르간 소리……‥‥

 

 

*본문은 <조선지광>과 <정지용시집>을 토대로 가능한 한 현대 국어 맞춤법에 맞게 고친 것입니다.

 

 

 

 

 

 

<해설>

 

우선 제목 ‘오월 소식’은 지시적 의미로는 오월에 온 편지 정도의 뜻입니다. 함축적 의미로는 ‘오월’이 청춘 남녀가 연애하기 좋은 계절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꽃 피고 새 노래하는 아름다운 계절에 어울리는 사랑의 편지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적 화자가 받은 편지를 의미할 수도 있고, 그 편지를 받고 쓰는 답신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정황으로 보면 전자의 의미가 강해 보입니다.

 

 

제1연은 먼 곳으로부터 온 지인(知人)의 편지를 받고 설레는 마음을 노래한 것입니다. ‘파랑새’는 예로부터 ‘청조(靑鳥)’라 하여 반가운 편지를 이르는 말입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을 두고 ‘어린 나그네’라 했습니다. 이를 통해 편지의 발신자가 시적 화자보다 어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지금 고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객지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시로’라고 했으니,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종종 편지를 보낸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편지를 받고 시적 화자는 그녀와 보낸 기억을 떠올립니다. 시적 화자가 책상 턱에 이마를 고인다는 것으로 보아, 학생 신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실제로 시인 정지용이 교토의 도시샤대학 수학 시절에 쓴 작품입니다.) 그 기억은 다양한 사연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오동나무 꽃으로 불 밝힌 이곳 첫여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의 정지용 시비-

 

대부분 동의하리라 믿습니다만, 시에서는 제목과 첫 구절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른바 신감각파(新感覺派)라 불리는 이미지즘 시인 정지용의 경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우리나라 모더니즘 시는 1920년대 중반에 시작되는데, 그 대표 주자 중의 한 사람이 정지용입니다.)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정인(情人, 마음이 통하는 친한 친구)으로부터 온 오월의 편지, 그리고 떠올려지는 ‘오동나무 꽃으로 불 밝힌 첫여름’의 추억이 제1연의 핵심적 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음미해 볼 만한 사항은 두 가지입니다.

 

①  하나는 첫 구절의 성격에 관한 것입니다. 그녀가 보내온 편지의 일부분인지, 단지 시적 화자가 떠올리는 장면인지가 다소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대학 선배님이시자 제가 신뢰하는 문학평론가이신 서울여대의 이숭원 교수님은 후자에, 저의 대학원 은사님이시자 소설이 전공이시지만 시에도 밝으신 서울대의 권영민 교수님은 전자에 더 무게를 두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로서는 둘 다 맞지 않나 싶습니다. 즉, 시인은 그 구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차피 그것은 두 사람이 공유하는 아름다운 추억의 일부분이고, 그런 내용을 서신 교환을 통해 공유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다만 전자에 따를 경우 시의 흐름 이해가 좀 더 자연스럽다는 장점이 있고, 후자에 따를 경우 시의 구성이 좀 더 입체적이 된다는 장점이 있다고 봅니다. 자연스러운 시상 전개를 취할 것이냐, 입체적인 구성을 취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②  다른 하나는 ‘오동나무 꽃으로 불 밝힌’의 의미에 대한 것입니다. 오동나무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비교적 흔한 나무입니다. 밤의 정취[情趣, 비교적 강하게 단시간 동안 계속되는 감정은 정서(情緖)라고 함]와도 잘 어울리는 나무이고, 정원이나 고궁 등에 많이 심는 나무입니다. 첫여름이랄 수도 있는 5-6월에 꽃이 피고 그 향기는 참으로 향기롭지요. 수수꽃다리 이상으로 그 향기는 매혹적입니다. 모르긴 모르겠으되, 일본의 고도(古都)인 교토에는 오동나무가 많았을 것입니다. [*참고로 일본 동전 500엔짜리의 뒷면 문양이 오동잎입니다.] 아마 도시샤대학 교정에도 많았을 법하고, 인근 공원에도 많았을 법합니다. 둘은 아마도 오동나무 밑을 거닐며 일종의 연애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살짝 조심스럽습니다. 이미 시인 정지용에게는 고향에 12살에 결혼한 아내(<향수>에 등장하는 충북 옥천의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바로 이 아내입니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지용은 그 아내와 이혼을 하지도 않습니다.(참고로 당시에는 부인과 실질적인 의미에서 이혼 상태인 유학파 근대 문인이 많았습니다.) 아마 두 사람 사이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륜(不倫)까지 간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이 점에서 오동나무가 풍기는 은은한 정취와도 잘 어울립니다. 너무 깊지 않아 일정한 선을 넘지는 않는, 그러나 애틋한 정을 나누는 사이(둘은 조금 연배 차이도 있습니다), 이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저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오동나무 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그것으로 ‘불을 밝혔다’는 구절이 다소 의문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등(紙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보는 것입니다. 밤, 오동나무, 그리고 꽃 모양의 은은한 지등(紙燈). 분위기가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지등 공예가 워낙 발달한 일본일뿐더러, 교토는 불교문화가 유달리 융성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문화라 하면 역시 다양한 꽃 모양의 연등(燃燈)이 백미가 아닙니까? (앗! 불교신자분께는 죄송. 저의 종교 이해가 이 정도로 천박합니다)  정지용의 수필에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나 살펴보았으나, 구체적인 단서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찾을 수 있다면, 앞서 언급한 두 선생님의 해설에 주제넘게 한 마디 더 얹을 수 있을 듯한데, 어쩔 수 없이 지금으로서는 이 글이 두 분의 글에 크게 기댈 수밖에 없네요.

 

이 쯤에서 잠시 가람 이병기 선생님의 품위 있는 시조 한 수 감상하고 가도 좋을 듯 합니다.

 

 

담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

 

한두 개 소리 없이 나려지는 오동(梧桐)꽃을

  가랴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제2연의 내용은 쉽습니다. 모처럼만에 날아온 소식을 접하고 마음이 울렁거리고(기혼인 시인이긴 하지만, 아직 20대 중반의 청년입니다), 먼 황해를 향하는 마음이 물결처럼 밀려든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여기서 ‘머언 황해’는 ‘강화도’ 정도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이 시보다 한 달 전에 발표한 <뻣나무 열매>가 그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먼저 시인이 <오월 소식>를 쓴 것은 1927년 5월 교토에서입니다. <조선지광>(68호 1927.6)에 이 시가 처음 발표될 때, ‘1927년 5월 경도’라고 부기(附記)되어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뻣나무 열매>(<조선지광> 67호. 1927. 5)의 부제(副題)는 ‘To Sister P’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을 <시문학>(3호, 1931.10)에 다시 수록하는데, 그 부제가 ‘어떤 순종(脣腫)을 앓는 이를 전별하기 위한’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그 시 구절에는 ‘외로운 섬 강화도로 떠날 림시 해서’(조선지광), “외로운 섬 강화도로 비둘기 날아가 듯 떠날 임시해서”(시문학)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오월 소식>에 등장하는 ‘너’는 ‘P’라고 보는 것에 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참고-*정지용의 산문을 뒤져보았으나 더 이상 P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제가 과문한 탓일 수 있겠죠. 1927년 경의 강화도 소학교 교원 기록을 뒤져 도시샤대학 출신 여선생이나 아니면 교토 유학파 여선생을 찾아, 이니셜이 P-대체로 박 씨였을 듯-인 분을 찾아보면 그녀에 대해 알 수 있을 듯한데, 제게 그럴 만한 여유와 열의가 없음이 부끄럽습니다. 다 핑계인 줄 압니다만. 다음에 일본에 가면 한번 뒤져볼 생각입니다.]

 

즉, 제2연은 편지를 받고 마음이 울렁거리고, 그녀가 있는 황해의 강화도가 떠올려진다는 내용입니다. ‘가여운’이라고 한 것은 비교적 어린 나이이고, 사회 초년생이다 보니 아마도 그녀가 편지에 그 어려운 사연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를 아끼는 남자의 입장에서 가엽게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제3연에 이르러 시상이 다소 전환됩니다. 시적 화자의 현재 상황으로 시상이 전환된다는 말입니다. 이 시기 정지용의 시에서 가장 끈덕지게 반복·변주되면서 등장하는 소재가 바다입니다. 이 시에서도 역시 바다군요. 그리고 자신의 심리 상태를 시 한 구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감각파의 면모에 어울리게 역시 감각적입니다. 나의 마음은 어딘가를 향해 치달리고 있습니다. 마치 갈매기 같은 종선처럼. 이 때 갈매기와 종선은 하늘을 바다를 가르고 시원하게 나아간다는 점에 착안하여, 자신의 마음 상태를 감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시의 소재입니다.

 

 

자신의 마음 상태를 좀 더 감각적이고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 제4연입니다. 넥타이가 오월 순풍에 휘날립니다. 그 먼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자신의 마음을 닮았다는 것임은 두 말할 것도 없겠지요.

 

 

제5연은 더욱 쉽습니다. 크게 어려운 구절은 없지만, 이 시의 구체적 정황을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녀는 일본어와 아리비아 숫자(소학교 산수 과목 정도였겠지요)를 가르치러 간 비교적 어린 나이의 처자인 것입니다. 그녀가 겪을 것으로 생각되는 고생을 떠올리고 있네요. 그리고 그것을 섬 둘레에 부딪치는 풍랑을 통해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은은히 들려오는 듯한 오르간 소리를 상상하는군요.

 

 

젊은 소학교 처녀 여선생님, 그리고 오르간 소리. 이것! 지금은 좀 다를지 모르지만, 시쳇말로 예전에 젊은 남자들의 로망이었습니다. 시인의 표현대로 ‘로맨틱’ 그 자체였습니다. 외로운 섬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면, 더욱 그렇지 않았을까요. 1920년대, 더군다나 소위 외국물을 먹은 세련된 유학파 젊은 여선생님, 섬마을 여선생님. 그리고 오르간 연주. 더 말 안 해도 다 이해하실 줄 압니다. 아참, ‘낭만(浪漫)’하면 떠오르는 노래.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좋은 노래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죠. 그래서 배경음악을 윤도현의 노래로 했습니다. 유니의 피아노 연주가 압권이네요. '나는 가수다'가 아니라 '나는 피아니스트다'가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하희정(2011. 3.21) 

 

[참고] 졸고입니다만,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 참, 원문에는 ‘오ㄹ간 소리’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시적 허용이 아니고, 당시 표기가 그랬습니다. 외래어 표기와 관련된 어문 규범이 제정 발표된 것은 1980년대입니다. 시적 허용에 대해 오해하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강사분들이 많습니다. ‘멀리’를 시인이 의도적으로 ‘머얼리’라고 표현하는 것, 이런 것은 시적 허용입니다. 하지만 그런 의도적인 어문 규범 찌그러뜨리기(distortion )가 아니라, 당시 표기대로 표기하는 것, 그것은 시적 허용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유치환의 <귀고>에 ‘낯설은 신작로’라는 표기가 나옵니다. 물론 현대국어 어문규정에 따르면 ‘낯선 신작로’가 맞습니다. 그러나 이를 두고 시적 허용이니 뭐니 운운하는 것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딱한 발언입니다. 시인은 당시 표기 관습에 따라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관습을 뒤트는 것이 시적 허용인데, 관습에 따른 것을 두고 시적 허용이라고 하니, 망발인 것입니다.  

 

[참고]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 녹취록

 

자, (가)는 김광규 시인의 서울꿩이야. 그러면 얘가 뭐가 되는 거니? 대상. 그러면 대답해봐, 애들아. 제목이 대상이야. 그러면 선생님이 뭐 생각해보라 그랬어요? 대답 막 해야 돼.

 

 

나중에 너희들이 모의고사 볼 때 이것 딱 보면 '선생님이 이것 보라고 했지.' 다 생각이 날거야. 자, 대상이 나오면 이 녀석이 처한 상황을 보거나 아니면 이 녀석의 특성을 찾거나, 그렇지?

 

 

서울꿩. 애들아, 보세요. 꿩은 어디서 사니? 산속에 살아야 돼. 그런데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꿩이 살아. 얘 되게 힘들게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뭐 먹고 사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볼게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대문구 사는 친구들도 있을거야. 한 모퉁이에 섬처럼 외롭게 남겨진 개발 제한 구역 홍제도 뒷산에는 . 그러니까 이 공간 아까 보기에 있었지. 여기가 뭐가 되는 거야?

 

 

섬처럼 외롭게 남겨진 개발제한 구역입니다. 그린벨트 이렇게 말하죠. 거기에는 꿩들이 산다. 그러니까 이 꿩들은, 꿩들의 상황 나오게 되는 거지. 자, 계속해서 볼까? 가을날 아침이면 장끼가 우짖고, 아빠꿩.

 

까투리는 엄마꿩. 꿩 병아리, 아기꿩 데리고 언덕기 쓰레기터에 내려와서 콩나물대가리 멸치꽁다리를 주워 먹는다. 꿩다워요? 꿩답지 않은 삶이야.

 

 

도시 속에서, 서울 속에서 정말 쓰레기장에서 이런 것 주워 먹고 꿩들이 사는 겁니다. 지하철 공사로 혼잡한 아스팔트길을 건너 바로 맞은쪽 인왕산이나 안산으로 보기에 나왔던 공간이에요. 그렇지?

 

 

여기로 날아갈 수 없어. 이렇게 말합니다. 자, 날아가기 싫은 게 아니라 날아갈 수 없는 거야. 그러면 여기 가고 싶은거야, 안 가고 싶은거야? 가고 싶은데 뭐 때문에? 이런 공사 때문에 갈 수가 없는거죠, 그렇지?

 

꿩 입장에서는 인왕산이나 안산으로 가고 싶은거지. 꿩 입장에서는 얘네가 뭐가 되는 거겠어? 이상 세계 뭐 이런거겠지. 이 삭막한 돌산에, 이 삭막한 돌산은 뭐가 되는 거니? 이런 수식어가 중요해요. 삭막한 돌산이야.

 

 

앞에서 나왔던 뭐? 홍제동 뒷산이 되는 거예요. 갇혀 버린 꿩들은 서울 시민들처럼 갑갑하게 시내에서 산다. 애들아, 중요한 게 뭐야? 꿩이라는 자연물이 나오면 거기서 꿩들 불쌍해. 끝나는 게 아니라 꿩의 삶을 어디에?

 

 

인간한테 적용해봐야 되잖아. 서울 시민들처럼 이라고 그랬어. 그러면 ~처럼은 직유법이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렇게 갇혀버린 꿩들이 누구 같다? 서울 시민들 같다.

 

반대로 말하면 서울 시민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인간, 현대인들 이들도 어떻게 산가? 꿩처럼 갑갑하게 닫혀서 산다. 갇혀서 산다. 이런 의미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거죠. 됐어요?

 

자, 그러면 우리 한번 문제 1번을 바로 가보도록 하자. 자, 이번에는 뭘 가지고 봅니까? 방금 전에 우리가 봤었던 (가)를 가지고 보는 거예요. 자, 물론 아까 전에 우리가 (나)시만 가지고 봤어도 이 문제 정답은 1번이야.

 

 

그런데 여러분들도 궁금하잖아. (가)는 또 어떻게 적용되는지 한번 보도록 하자. 1번. 현실 상황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내죠. 그렇지? 꿩도 그렇고, 서울 시민들도 그렇고 갇혀서 사는 거니까. 이건 당연히 맞고요.

 

자연을 인간과 대비하여. 자, 지금 그럴듯하지만 꿩 얘기만 나왔어요. 인간에 대비하는 것은 우리가 한번 해보는 거지, 그렇지? 그 가치를 강조한다. 아니고요. 과거의 상황을 환기하여, 과거 상황 환기한 것도 없고요.

 

그 다음 4번 보자. 관조적인 자세로 대상이 꿩이 지닌 의미를 새롭게 발견한 것도 아니고요. 말을 건네는 수법도 나와 있지 않죠. 그러니까 정답은 역시 1번이 맞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