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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록의 역사(1)-신중현, 한대수, 산울림, 사랑과 평화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9. 25. 04:20
 

한국 Rock History



1960 ∼ 70년대 - 한국록의 태동기 (신중현, 한대수, 산울림, 사랑과 평화)


한국 록의 태동은 1964년 에드 훠(add 4)의 데뷰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견해이다. '빗속의 여인'이라는 블루스 스케일의 곡이 첫번째 한국록의 히트곡이다. ('빗속의 여인'은 아직도 리바이벌되는데, 신중현 트리뷰트에서 김목경이 멋지게 부르기도 했다.) 그 후 신중현은 많은 김추자, 펄시스터즈, 박인수 등을 데뷰시키고 또 성공시켜 대중음악의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는데, 하드록과 소울을 오가는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통해 대중음악의 질적 향상을 도모했다.


특히 신중현의 수많은 작품들중 가장 독보적인 작품은 역시 '아름다운 강산'이다. 서양의 록음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대곡풍의 이곡은 클래식의 소나타 형식을 빌어 작곡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강산'은 수많은 버전으로 녹음되었는데, 신중현 본인은 The Men과 함께 한 녹음에 가장 애착이 간다고 한다. The men은 킹 크림슨을 연상시키는 대형 밴드인데, 키보드와 오보에 등의 세션이 눈의 띄고 여성 코러스도 무척 인상적인 밴드였다. 다분히 프로젝트 성격이 강한 밴드로 '아름다운 강산'을 Mbc 쇼프로그램에서 사이키딜하게 연주를 해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한다. The men의 '아름다운 강산'은 극히 사이키딜릭의 냄새가 풍기고 연주중심의 대곡이다. 신중현의 기타 솔로도 인상적이지만 '도어즈'를 연상시키는 키보드연주와 여성코러스도 일품이다. 이 땅의 록을 이야기 할 때 젊은 시절 신중현의 창작열이 최정점에 있던 시절의 명곡 '아름다운 강산'을 빼 놓아서는 안된다.


물론 신중현을 이야기 할 때 '엽전들'을 빼놓을 수는 없다. 엽전들은 신중현이 조직한 각종 밴드들 중에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케이스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 '미인'(오죽하면 영화로 제작되어 신중현이 주연까지 했겠는가!)의 기타리프는 지금까지 가장 독특한 구조였다. 그리고 '생각해',와 '할말도 없지만'의 하드록 성향도 매우 훌륭했다. 그러나 '나는 너를 사랑해'의 독특한 구조는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상여 떠나는 종소리에 중얼대는 '해랑사를 너는 나'라고 가사를 뒤집어 읊조리는 이남이의 목소리는 간단한 구조임에도 대단한 아이디어임에 틀림없다.(신중현은 분명 사이키딜릭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다.) 엽전들은 1집의 큰 성공에 힘입어 3집까지 발표되지만 2,3집은 신통치 못했고 신중현은 정부의 문화정책에 희생되어 70년대 음악생활을 마감하고 만다. 신중현에 대한 규제가 풀린 80년대에는 The men과 비슷한 구조의 뮤직파워를 결성하여 신중현은 재기하지만 제2의 엽전들인 세나그네의 실패와 함께 대중음악의 1선에서 물러난다. (90년대의 무위자연과 김삿갓도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신중현이 자생적인 록문화를 탄생시켰다면 한대수는 김민기로 대표되는 모던포크에 미국적인 록을 유입시킨 케이스였다. 한대수는 미국에서 사진과 음악활동을 하던 중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충격적인 공연문화를 이땅에 선보인 최초의 언더그라운드였다. '물좀 주소'에서의 한대수의 외침은 혁명이었다. 이미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의 문화로써 자리를 잡아가던 포크에 새로운 경향을 선사한 것이다. 한대수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물좀 주소'나 '행복의 나라'의 노랫말은 암울한 70년대의 청년문화에서 대단한 상징성으로 자리했고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당시는 70년대였고 군부독재의 문화정책이 있던 시기였다. 심의는 한대수 노래의 상징성에 칼을 댔고 그렇게 이 땅의 록음악사에 길이 남을 걸작 '멀고먼 길'은 대중에게서 사라진다. 한대수는 1집이후 '고무신' 앨범을 발표하지만 솔직히 1집만 못했다. 그리고 한대수는 이 땅과 이별을 고하고 70년대에서 사라진다. 비록 80년대에 '무한대' 앨범으로 다시 컴백을 하고 90년대 다시 그가 주목받고는 있지만 '멀고먼 길'에서 보여준 한대수의 카리스마는 역시 찾아보기는 어렵다. 80년대 이후 작품들이 음악적으로는 완성도가 높아졌을지는 모르지만 포크의 진정한 '자유'에 대한 정신은 찾기 어려운게 사실이다. 한대수의 1집은 '물좀주소', '바람과 나','행복의 나라','옥의 슬픔'등 이땅의 포크록에 대한 완벽한 교본이다. (최근 김도균, 이상은등과 함께 한 '후쿠오까 라이브' 음반은 좋았다. 그러나 이제 한대수는 더이상 '저항'을 노래하는 포크뮤지션은 아닌듯 싶다. 점차 하드록과 재즈 쪽으로 성향이 변하는 듯 싶다.)


신중현도 한대수도 우리에겐 안타까운 천재들이다. 우리의 70년대가 그들을 껴안을 수 없었다는 것은 큰 불행이었다. 그들이 끊임없는 창작활동을 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물음에 답변은 영원한 아쉬움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좌절한 것이 음악 외적인 정치적 현실 때문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겐 크나큰 불행일 뿐이다. 아직도 이들의 작품들 중 대부분이 복각되지도 못하는 현실속에 이들의 불타는 창작열에 경외감 마저 느껴진다.


산울림 등장은 신중현과 한대수가 사라진 이후 등장한 '몹시 새롭고 흥분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산울림 형제들은 음악과는 상관없는 모두 제도권의 최고 교육과정을 이수한 수재들이었다. 그래서 산울림의 등장은 새로운 사건이다. 대개 대중음악은 계보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70년대를 주름잡던 음악인들이 대부분 신중현과 한번쯤은 관련이(키보이스,히식스 혹은 윤수일도 그랬다) 있었다. 그런데 산울림은 정말 하늘에서 떨어진 집단임에 틀림없다. 대학가요제에서 '나 어떡해'를 제공한 것이 산울림의 김창훈이었다는 사실도 산울림의 두번째 앨범에서 '나 어떡해'를 부름으로써 확인된 사실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산울림의 데뷰음반은 한번도 이 땅에서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사운드였던 것이다. 물론 신중현 스타일의 사이키딜릭의 경향이 짙기는 했지만 김창완의 샤우팅과 난해한 건반연주는 정말로 압권이다. 산울림 1집의 '아니 벌써'는 독특한 김창완의 보컬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건반연주도 매우 일품이었고 '문좀 열어줘'와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꺼야' 등 앨범 전체적인 완성도가 매우 높았다. 1집의 큰 성공으로 연속적으로 3집까지 1년사이에 발매되는데, 이 모든 창작이 이미 완성된 것들이기에 단기간에 연속적인 명반작업이 가능했다. 2집의 '내맘에 주단을 깔고'는 산울림 최고의 걸작으로 전주의 기타연주는 정말이지 최고수준이었다. 김창훈의 보컬이 죽여주는 '내마음은 황무지'는 펑크록의 스타일을 지니고 있고 B면을 모두 채우는 대곡 '그는 이미 나'도 매우 좋았다. 산울림은 이 후 많은 음반작업을 했지만 사실상 산울림의 최고작은 3집까지로 봐야 한다. 이후 김창훈과 김창익은 사회생활로 빠지고 김창완 솔로 프로젝트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80년대 한때 삼형제가 다시 모여 작업을 했지만 예전만 못했다. (98년 열화와 같은 팬들의 기대속에 13집을 완성한다. 70년대 그 시절의 창작열은 여전했다.)


산울림과 함께 늘 거론되는 밴드는 사랑과 평화이다. 산울림이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밴드라면 사랑과 평화는 신중현으로부터 이어져온 계보를 충실히 이행하는 밴드였다. 이미 70년대 최고 테크니션으로 명성을 날리던 최이철,송홍섭,김명곤등의 라인업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멤버였다. 특히 사랑과 평화 1집은 독특한 리듬감에 최이철의 마우스 튜브 연주가 좋은 '한동한 뜸했었지'가 크게 히트했고 블루스 풍의 '어머님의 자장가'(나중에 허준호가 레게풍으로 부르기도 했다)도 인기를 얻었다. 1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곡은 '저바람'이란 곡으로 독특한 베이스 연주는 너무 훌륭했다. 김명곤의 편곡으로 베토벤의 운명이나 아베마리아등의 클래식곡이 연주곡으로 실려있는데, 어떤 의도로 녹음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매우 독특한 구성임에는 틀림없다. 사랑과 평화만의 특유의 리듬감으로 새롭게 구성한 클래식 소품들에 대한 느낌은 매우 좋았다. 그러나 앨범의 전체적인 완성도를 고려해 본다면 창작곡으로 앨범을 채우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한다. 건반으로 연주되는 '베토벤의 운명'은 그다지 신선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앨범 전번적으로 흐르는 펑크적인 리듬감에 마이너스 요소로 판단된다. 사랑과 평화는 1집이 큰 성공을 해서 두번째 앨범작업까지 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해체되었고 80년대에 이남이의 '울고싶어라'가 수록된 3집으로 컴백해서 지금까지 명맥이 이져오고 있다.


산울림과 사랑과 평화는 정권의 문화정책으로 소멸된 작가정신을 되살린 70년대의 마지막 한국 록의 자존심이었다. 산울림의 음악성은 90년대에 들어 재평가받고 있는 것은 무척 다행스런일이다. 그리고 사랑과 평화도 최이철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면서 여전히 최고의 세션밴드로 위치하고 있는 것도 다행스럽다. 이들이 존재하여 80년대 초반 한국 록의 중흥이 가능했고 헤비메틀의 탄생도 가능했다. 신중현과 한대수가 무기력하게 정권의 투항하고 사라진 공허감속애 산울림과 사랑과 평화가 존재했다는 것은 이 땅의 록음악사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