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뉴스

한국 록의 역사(3)-들국화, 시나위, 백두산, 부활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9. 25. 04:23
 

○ 1980년대 중반 - 헤비메틀의 시대 (들국화,시나위,백두산,부활,작은하늘,록인코리아)


1985년 들국화의 데뷰는 한국록의 이정표와 같았다. 엽전들 이후 근 10년만에 나타난 슈퍼밴드였다. 전인권의 파워보컬은 청중을 압도했고, 조덕환과 최구희의 기타도 힘이 있었다. 최성원과 허성욱의 여성스러움은 들국화의 가치를 배가 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들국화의 성공은 단지 음악적인 면에 국한 시켜서는 안된다. 방송메체를 거의 무시하면서도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는 위력과 소위 80년대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기폭제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김민기롸 신중현으로 대표되는 포크와 록의 계보를 한데 모아 80년대 언더그라운드에 포크와 록이 공존하는 기틀을 마련해주었다고 할수도 있다. '그것만이 내세상'을 외치는 전인권의 목소리는 '물좀주소'의 한대수에 필적할만 하고 따로또같이의 맥을 잇는 '매일 그대와'에서의 최성원의 목소리도 좋았다. 조덕환과 최구희의 기타연주도 그렇게 눈에 띄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느낌이 좋았다. (최구희의 기타는 2집에서 좋은 연주를 많이 보여준다) 허성욱의 피아노와 최성원, 전인권의 언발란스한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는 '사랑일 뿐이야'는 베스트 트랙이다. 어떤날이 리메이크한 진보적인 성향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과 조덕환 작품인 '아침이 밝아 올때 까지' 그리고 히트한 '행진'과 '세계로 가는 기차'까지 수록곡 모두가 80년대를 대표할 만한 명곡들이다. 비록 전인권과 최성원의 보이지 않는 경쟁에 두장의 정규앨범을 끝으로 들국화의 역사는 막을 내리지만 80년대 그들의 위치는 80년대 그 자체라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있어 80년대 대중음악은 가능했다.


시나위 1집은 정말 한국 록 30년사에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본격적인 헤비메틀 1호 밴드라는 수식어가 늘 시나위에 따라붙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 물론 헤비메틀 사운드는 무당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작은거인 2집에서의 김수철의 기타연주도 거의 완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나위가 헤비메틀의 시조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앨범의 완성도에 있다. 시나위 1집을 들어보면 분명 무당이나 작은거인과 사운드에서 확연한 차이를 느낄수 있다. 신대철의 힘있는 기타연주에 어우러지는 임재범의 샤우팅 창법은 이미 LA메틀사운드를 섭렵하는 우수성이 있다. 더구나 1983년작인 무당 2집(시나위 이전에 가장 헤비메틀에 근접한 사운드였던)과 견주어보면 시나위의 사운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당시로선 분명 시나위의 음악은 혁명이었다. 누구나 동경하고 있었지만 이뤄내지 못한 록커의 꿈. 그것이 헤비메틀이었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완벽히 이뤄낸 것이 바로 시나위였다. '크게 라디오를 켜고'에서 영국의 뉴웨이브 헤비메틀 사운드를 재현했으며, '남사당패'의 독창적인 기타 리프는 신중현의 대를 잇는 멋진 작품이었다. 물론 '그대 앞에 난 촛불이어라'에서의 임재범의 보컬은 일품이었다. 그리고 '아틸란타의 꿈'에서는 블랙사바스의 웅장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멤버들이 모두 20대 초반이었다는 점이 더욱 놀라운 사실이었고 시나위는 이후 한국 록을 이끌어가는 주축밴드로 자리하며 8-90년대 한국록의 뿌리로서 굳건히 존재해오고 있다. (최근 이 기념비적인 작품이 CD로 재발매 되었다.)


신대철의 기타는 분명 당대 최고 테크니션임는 틀림없지만 시나위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백두산의 김도균역시 독창적인 능력을 지닌 훌륭한 기타리스트였다. 신대철은 임재범,김종서,김성헌등 당대 일류 보컬리스트들과 호흡을 맞춰 최상의 주가를 올린 반면 김도균은 유현상과 함께 했다는 점이 불운했다. 어떤 이유에서 유현상과 김도균이 한배를 타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백두산 1집에서 유현상의 보컬은 전혀 헤비메틀과 거리가 멀었다. 시나위와 비슷하게 데뷰를 했지만 시나위 1집과 백두산 1집과의 비교는 어불성설이다. 비록 TV쇼무대에서 웃통을 벗어 재끼며, 연주를 해도 백두산과 시나위의 완성도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물론 시나위는 20대 초반의 멤버로 구성된 반면 백두산은 어느정도 세션 경험이 있는 중견연주자들로 구성되어 연주의 완성도가 있을지는 모르지만('뛰어'와 '어둠속에서' 등의 연주는 좋았다.) 분명 헤비메틀이란 장르에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두번째 앨범에서 백두산의 선택은 유현상의 가성과 영어가사이다. 유현상의 가성 창법은 효과가 있었다. 김도균은 브리티쉬 하드록에 정통한 연주인으로 백두산 2집에서 딥퍼플이나 레인보우의 음악에 뿌리를 둔 연주를 보여주고 있다. 유현상은 가성 보컬은 힘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높은 음역을 확보해 들을만 했다. 'up in the sky'와 '주연배우'등이 베스트 트랙이었다. 백두산 2집은 김도균의 화려한 기타테크닉을 선보인 작품으로 다소 평가절하되고 있지만 재음미해볼 필요는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김도균의 화려한 기타연주는 백두산의 틀속에 어울리지는 못했다. 또한 유현상 역시 헤비메틀 보컬리스트보다는 트롯 가수가 더 적합했다. 백두산은 2집이후 존재이유를 찾지 못하고 해체하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부활은 김태원과 이승철의 카리스마가 굉장히 강한 밴드였다. 김태원은 The end라는 밴드를 이끌면서 언더그라운드에서 인지도가 높은 기타리스트였다. 이후 김종서와 부활을 만들었는데 앨범 제작 당시에는 김종서가 탈퇴하고 이승철이 보컬을 맡았다. 부활 1집은 또다른 기타리스트인 이지웅(후에 임재범과 '외인부대'를 조직한다)과 트윈 기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보컬리스트 이승철의 영향으로 부활의 음악은 시나위가 보여준 헤비함이 많이 상쇄된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게다가 김태원 역시 멜로디 라인을 중시한 연주을 즐겨해서 반복적인 리프를 중시하는 헤비메틀 사운드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타리스트 김태원의 테크닉은 최상급이었다. 빅 히트곡 '희야'에서의 종소리나 '인형의 부활'에서 보여준 속주는 분명 절정의 기량이었다. 이승철의 보컬은 샤우팅보다는 R&B적인 테크닉이 뛰어났기 때문에 하드한 록커로서의 역량은 다소 처지는 느낌이었다. 부활은 1집의 대성공으로 '회상'을 컨셉으로 한 두번째 앨범을 발표하는데, 1집보다도 헤비함이 더 많이 사라졌지만 연주중심의 멋진 작품이었다. '천국에서'에서 신디사이져와 함께 한 김태원 솔로 연주는 압권이었다. 비록 상업적인 록이라는 비난도 함께 한 부활이지만 김태원의 기타 연주만큼은 그 어떤 밴드들보다도 훌륭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울 소재 고등학교에는 80년대 초반부터 스쿨밴드들이 많이 존재했다. 종로나 이태원 등지에서 소규모 콘서트등에서 활동을 하며 제각기 실력을 뽑내기도 했는데, 당시 기타연주에 있어 양대 라이벌은 신대철과 이근형이었다. 신대철이 아버지 신중현의 후광에 힘입어 시나위로 최초의 헤비메틀의 작위를 얻은 반면 이근형은 뛰어난 실력파였음에도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불운한 케이스였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이근형은 시나위,백두산,부활이 이미 휩쓸고 간 뒤에 '작은하늘'로 뒤늦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작은하늘은 당시 유행하던 LA메틀 사운드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시나위가 두번째 앨범에서 김종서의 목소리로 주가를 올리던 때에 이근형은 비슷한 사운드에 김성헌이라는 신예를 기용하여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과는 시나위의 KO승이었다. 그렇지만 작은하늘은 이근형의 화려한 테크닉에 김성헌의 파워보컬은 일품이었다. '떠나가야지'와 '깨어진 약속'등에서의 이근형의 필은 역시 최상급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헤비메틀 밴드가 군웅할거하던 당시 상황에서 독창적이지 못하고 LA메틀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은하늘은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당시 헤비메틀의 기준은 시나위였고 그보다 못하면 그냥 잊혀지는게 당시 상황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작은하늘은 백두산 2집과 함께 80년대 헤비메틀을 이야기할 때 한번쯤 재음미해볼 필요성이 있다. 신대철과 쌍벽을 이루던 이근형의 기타와 임재범,김종서와 함께 80년대 3대 보컬로 평가받는 김성헌이 함께 한 작은하늘은 완성도 높은 음반임에는 틀림없다. 이근형은 작은하늘의 실패이후 시나위 멤버였던 김종서,김민기와 박현준을 영입하여 카리스마를 조직하지만 역시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해체하고 만다. 또 90년대에는 신성우를 발굴하지만 그렇게 의미있는 작업은 아니었다.(반헬렌의 'jump'를 베낀 '내일을 향해'의 기타연주를 하는 이근형의 모습은 진지하지 못했다) 김성헌은 시나위 3집과 Rock in korea에 참여후 음악계를 떠났다.


86년에서 87년까지는 헤비메틀의 전성시기였다. 수많은 아마추어 밴드들이 결성되었고 또 해체되었다. 고등학교의 스쿨밴드의 활동도 다양했다. 그러나 메이져 밴드인 시나위,부활,백두산이 멤버들의 이합집산에 의해 해체나 활동정지 상태에 빠지면서 록밴드의 활동은 크게 위축된다. 이때 새롭게 등장한 대표적인 밴드가 크라티아와 아랄란쉬이다. 최민수와 이태섭이 이끄는 이들은 LA메틀에서 시애틀 사운드인 쓰래쉬메틀을 받아들인 최초의 밴드들이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속에서 제대로 된 음반한 장 발매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크라티아, 아발란쉬 조인트 앨범이 있다.) 이 때 Friday afternoon이란 컴필리언 음반을 통해 헤비메틀의 새로운 사운드가 실험되었다. 이 컴필리언은 세번의 앨범작업을 하지만 크게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하나의 시도로서 기억된채 사장된다.(여기에 참여한 밴드들도 대부분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Friday afternoon 앨범에 기존 메이져밴드의 뮤지션들이 자극을 받아 대형 프로젝트를 구성하는데, 이른바 'Rock in Korea'였다. 록 인 코리아는 단순한 컴필리언 앨범이 아닌 여러 밴드들의 멤버들이 헤쳐 모여 형식으로 잼을 구성하여 연주한 독특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80년대 기타리스틀의 정신적 지주인 이중산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 80년대 중반 고교 스쿨밴드의 최고 기타리스트였던 손무현과 오태호의 참여도 눈에 띈다.(손무현,오태호,신윤철,이현석 등이 당시 고교 최고 연주자였다.) 물론 임재범과 김도균의 콤비는 이후 아시아나 탄생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80년대 헤비메틀 최고 명곡 'The same old story'를 완성하였다. 김종서,김성헌,임재범 등 3대 보컬리스트들의 목소리를 한꺼번에 비교할 수 있다는 점도 특색이 있다. 비록 신대철, 이근형의 기타가 빠졌지만 김도균,손무현,오태호와 이중산의 기타는 80년대를 대표한다 해도손색이 없다. 80년대의 끝자락에서 끝없이 불타던 헤비메틀 사운드를 마지막으로 정리한 록인코리아는 시나위,부활,백두산의 헤비메틀 1세대의 마지막과 80년대식의 록음악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