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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록의 역사(2)-마그마, 무당, 작은 거인, 동서남북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9. 25. 04:21
 

○ 1980년대 초반 - 한국록의 중흥기 (마그마,무당, 작은거인,동서남북)


1978년 개최된 대학가요제는 샌드페버스의 '나어떻게'(산울림의 김창훈이 만든 곡이다)가 대상을 차지하면서 대중음악계의 신선한 뮤지션의 공급처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역할을 80년대 초반까지 충실히 이행하여 라이너스, 옥슨80, 활주로, 블랙 테트라 등 대학가의 록밴드들을 주류음악계로 이끌어내는 효과를 주었다. 물론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방송가의 스타메이커로 전락하면서 이제는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했지만 80년 대학가요제에서 배출한 '마그마'는 80년대 초반 록씬에 가장 주목받을만한 밴드였다.


'해야'로 대학가요제에서 금상을 받은 마그마는 당시 수많았던 캠퍼스밴드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조하문을 중심으로 멤버들은 영국의 하드록을 정통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이 분명했다. '해야'에서의 변박에 이은 기타연주는 비록 이펙터의 부재로 다양한 테크닉을 선보이지는 못하지만 힘있는 조하문의 보컬에 어우러져 멋진 조화를 이룬다. 다만 스쿨밴드로서의 위치. 즉 전문 연주인이 아닌 아마추어로서의 어설픔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산울림이나 사랑과 평화등 동시대 최고 밴드와 견주어 볼 때 기타,드럼,베이스로 이어지는 하드록의 직선적인 멜로디라인면에서는 우수할지는 몰라도 전체적인 사운드에서는 처지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당시 연세대 재학중인 학생의 신분적 제약으로 말미암아 마그마의 녹음작업은 단 한장의 음반으로 그치고(그 한장의 음반조차 지금은 희귀음반이다.) 멤버 모두 사회속으로 흡수된 점이 아쉽다. 조하문이 몇해뒤, 솔로 가수로 재기하여 마그마 시절의 몇곡을 다시 부르기는 했지만, 발라드 가수로의 모습은 정말 아쉬울 뿐이었다.


무당의 경우는 신중현의 정통적인 영향을 받은 뮤지션들이 만든 밴드였다. 당시로서는 가장 헤비한 사운드를 보여주는 밴드중 하나였다. 전설의 기타리스트로 제대로된 녹음도 없이 80년대 기타리스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중산이 한때 재적했던 밴드이기도 하다. 특히 83년작인 무당 2집은 사실상 헤비메틀 사운드를 최초로 선보인 음반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헤비메틀의 시조는 85년의 시나위 1집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무당2집에서 최우섭의 기타연주는 헤비메틀의 기타리프와 연주스타일이 무척 흡사하다. 물론 가요적으로 부른 보컬은 아쉬울 뿐이다. 기타연주만 본다면 무당2집에서 연주는 충분히 헤비메틀 사운드의 시조라 해도 손색이 없지만 샤우팅없이 얌전하게 부르는 보컬은 힘이 전혀 없었다. 다만 '그 여름을'과 '그길을 따라' 등에서의 사운드는 매우 훌륭했고 레드제플린의 '모비딕'을 연상시키듯 헤비 드러밍이 일품인 '무당'도 좋았다. TV쇼에도 자주 얼굴을 비추면서 열심히 활동을 했지만 무당은 2집의 상업적 성과가 그다지 좋지 못하자 해산되고 만다. 80년대 중반 시나위의 불타는 사운드로 헤비메틀이 전성기를 이룰때 무당이 함께 하지 못한 것은 80년대 록씬의 최고 아쉬움이다. 물론 그들이 있었기에 신대철, 이근형의 헤비기타사운드가 가능했었음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지만 헤비메틀 사운드에 그 누구보다도 먼저 눈을 떳던 무당이였기에 짧은 활동만으로 사라진 무당의 존재가 무척 아쉽다.


김수철의 화려한 기타로 기억되는 작은 거인은 두번째 앨범에서 한국적 헤비사운드에 기틀을 다진다. 기타 연주만으로 볼 때 김수철은 분명 당대 최고의 기타리스트이며 작곡자이다. 김수철 역시 스쿨밴드 출신으로 이미 작은 거인 1집에서 그 가능성을 선보였으며 두번째 앨범에서는 일본인 엔지니어를 초빙하여 조금더 나은 음질의 음악을 생산해내었다. 대중적인 '별리'를 머릿곡으로 한 이 앨범의 '새야'에서 하드록 감각은 출중했다. 그리고 1집의 곡을 재녹음한 '일곱빛깔 무지개'와 '어둠속에서'도 베스트 트랙이다. 김수철은 기타리스트로서 신중현에 필적할 만한 훌륭한 기량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작은거인 2집이후 록커로서 김수철은 솔로로 전향하면서 슈퍼스타의 반열에 올라선다. 80년대 최고 발라드 가수로 위치했고 작은거인 2집의 사운드는 거의 접어두고 오히려 국악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전자음악을 이용한 대작 '팔만대장경'을 생산해낸 김수철은 이제 장르를 초월한 거장의 위치에 다다렀음에도 불구하고 못내 아쉬운 것은 작은거인 2집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넘치는 기타 연주이다. 다시 그 사운드를 들려줄 수는 없는 것인가?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이 버클리 유학을 떠나기전 재적했던 밴드로 알려진 동서남북은 98년 시완에서 재발매 되기전까지 전설속에 묻힌 밴드였다. 입에서 입으로 명곡 '나비'의 소문으로 인해 80년대 잠시 발매되었다가 사장되어버린 음반이 재발매된 것이다. 그러나 '나비'의 위력에 비해 나머지 곡들은 너무나 평범한 가요 스타일이라는데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어쨌든 '나비' 단 한곡으로 동서남북은 80년대 록을 이야기할때 거론될 가치가 있다. 이탈리안 아트록이 뉴트롤스의 재해석에 힘입어 90년대 다시 주목을 받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우리의 연주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특히 현란한 키보드 연주는 재즈로 전향하기 이전 김광민의 훌륭한 록 테크닉을 엿볼수 있다. 이렇게 화려한 키보드 연주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주류 음악속으로 흡수하기엔 다소 난해한 연주였지만 '나비'의 사운드는 끊임없이 실험하는 록의 가능성을 엿볼수 있는 80년대의 걸작이다.


80년대 초반은 이 땅의 록음악에 있어서는 중흥기였다. 비록 이렇다할만한 정형된 사운드는 없었지만 수많은 캠퍼스 밴드가 존재했고 나름대로 완성도 있는 음악을 계속 공급해주었기 때문이다. 철저히 통제되는 신군부의 문화정책에 록은 외면 받아왔지만 점차 FM방송이 전국으로 전파를 타고 부틀랙 음반(소위 '빽판)이 유통되면서 '록 마니아'층이 두터워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80년대 초반의 상황이 있었기에 85년이후 들국화와 시나위라는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