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과 추억

탐스럽고 예쁜 저 예쁜 달.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3. 19. 01:30

 

김현철, <달의 몰락>


나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는 나에게 말했지.

탐스럽고 예쁜 저 예쁜 달.


나를 매일 만날 때에도

그녀는 나에게 말했어.

탐스럽고 예쁜 달이 좋아.


그녀가 좋아하던 저 달이

그녀가 사랑하던 저 달이

지네. 

달이 몰락하고 있네.


나를 무참히 차버릴 때도

그녀는 나에게 말했지

탐스럽고 예쁜 저 예쁜 달.

 

나랑 완전히 끝난 후에도

누군가에게 말하겠지

탐스럽고 예쁜 달이 좋아


그녀가 좋아하던 저 달이

그녀가 사랑하던 저 달이

지네 

달이 몰락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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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달이 여성의, 태양이 남성의 상징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자연스럽게 그것은 여성적인 기운과 남성적인 기운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태양이 만물을 꿰뚫어보는 이성의 상징이라면, 달은 이성의 암흑면으로서 어둠 속의 영적인 빛을 상징한다. 태양의 빛을 반사함으로써만 빛을 발하는 또는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빛을 발하면서 형체를 드러내는 달의 속성에 대한 유비 추리의 결과일 것이다.


태양과 달을 동물과 유추하여 보는 일은 참 흥미롭다. 독수리나 수탉 그리고 용(龍) 등은 흔히 태양에 속하는 동물로 분류된다. 고양이와 여우 그리고 곰 등은 흔히 달에 속하는 동물로 분류된다. 고양이와 여우가 달의 동물로 분류되는 것은 낮보다는 밤에 더 활동적인 속성 때문일 것이다. 또 곰은 동면(冬眠)을 하는 까닭에 달의 동물로 분류된다. 곰의 동면과 달의 사라짐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 것임은 물론이다.

 


<달의 몰락>에서 ‘달’이 여성 또는 여성적인 기운을 상징한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녀가 탐스럽고 예쁜 달을 좋아했다고, 사랑했다고 노래하고 있다. 하지만 탐스럽고 예쁜 것은 달뿐만이 아니며, 진실은 그녀가 그렇다는 것 아니겠는가?  결국 이 노래는 달을 보며 탐스럽고 예쁜 그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밤하늘의 달을 보며 임을 떠올리는 발상이야, 백제의 가요 <정읍사>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이 노래만의 독특한 발상이라고 할 것도 없고, 지극히 전통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저 전통적인 발상에 그치고 있지는 않다. 크게 두 가지가 그러한데, 이 점은 이 노래가 현대적이게 하는 이유가 된다. 하나는 그냥 달이 아니라, 달의 몰락(沒落)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추상화한 달을 노래하는 것과 ‘달이 몰락하고 있’음을 노래하는 것은 천지 차이이다. 추상화한 달이란 발상에서는 ‘달=임’이라는 흔한 공식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어서, 현실감이 현저히 떨어진다. 달 그 자체만으로는 별다른 감흥을 기대하기 힘들다. 하지만 움직이는 달 또는 변화하는 달은 임의 심리적인 변이를 담아낸다는 점에서 현실감이 강화된다. 이때의 임은 일반적인 임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절박한 그리움의 대상으로서의  임이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달로 비유되는 임이 매우 현대적이라는 점이다. 그저 탐스럽고 예쁜 ‘그녀’가 아니다. 잠시 생각해 보시라. 현대 여성치고 자신을 탐스러운 달에 비유하는 것을 두고 즐거워할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것은 실례이고, 크나큰 결례이다. 이 노래의 임은 보름달을 닮은 참한 전통적 여인이 아니다. 탐스럽고 자신을 무참히 차버릴 때에도 탐스럽고 예쁘던 그녀이고, 자신과 완전히 끝난 후에도 누군가에게 아주 태연히 달을 보며 탐스럽고 예쁜 달이 좋다고 말할 그녀이다. 그녀는 우직한 곰이 아니라 고양이이거나 여우임에 분명하다. 잘 해줄 때에는 주인에게 착 달라붙지만, 조금이라도 어긋나며 금세 새 주인에게 정을 붙여 버린다. 예전의 주인에게는 언제 네가 내 주인이었냐는 듯이 냉정하다. 그녀에게는 탄생과 소멸, 그리고 부활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달의 속성이 결여되어 있다. 당연히 그녀에게는 영원성이나 영속성이 없다.


이렇게 볼 때, 달의 몰락은 단순하게 달이 지는 것과는 큰 차이를 갖게 됨을 알게 된다. ‘달이 지네’에는 곧 ‘달이 뜨네’가 이어진다. 하지만 ‘달의 몰락’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달의 (재)탄생’이 이어지지 않는다. 이 노래에서 ‘달이 지네’라고 한 다음 다시 고쳐서 ‘달이 몰락하고 있다’고 노래한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닐까? 좀 거창하게 말한다면, 한번 이별하면 영영 이별이 되고 마는 현대인의 사랑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그렇게 드러낸 것이 아닐까? 밤거리의 고양이처럼 초라한 현대인의 초상과 그 음울한 내면을 노래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희정 wizbook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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