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봉, 변진섭, <비나리>
큐핏트 화살이 가슴을 뚫고 사랑이 시작된 날
또다시 운명의 페이지는 넘어가네
나 당신 사랑해도 될까요 말도 못하고
한없이 애타는 나의 눈짓들
세상이 온통 그대 하나로 변해 버렸어
우리 사랑은 연습도 없이 벌써 무대로 올려졌네
생각하면 덧없는 꿈일지도 몰라 꿈일지도 몰라
하늘이여 저 사람 언제 또 갈라 놓을꺼요
하늘이여 간절한 이소망 또 외면할꺼요
예기치 못했던 운명의 그 시간 당신을 만나던 날
드러난 내 상처 어느새 싸매졌네
나만을 사랑하면 안될까요 마음만 달아올라
오늘도 애타는 나의 몸짓들
따사로운 그대 눈빛 따라 도는 해바라기처럼
사랑이란 작은 배 하나 이미 바다로 띄워졌네
생각하면 허무한 꿈일지도 몰라 꿈일지도 몰라
하늘이여 이사랑 다시 또 눈물이면 안되요
하늘이여 저사람 영원히 사랑하게 해줘요
아 사랑하게 해줘요.
‘비나리’는 앞날의 행복을 비는 말을 하다는 뜻의 순우리말 ‘비나리하다’에서 온 노래 제목일 것이다. 심수봉의 노래인데, 나중에 변진섭이 리메이크하여 불렀다. 개인 취향이겠으나, 심수봉의 노래를 좋아하지만, <비나리>만큼은 변진섭의 것이 훨씬 마음에 와 닿았다. <너에게로 또 다시>, <숙녀에게> 등 변진섭의 발라드를 원래 좋아했다. 하지만 <희망사항> 히트 이후 변진섭은 그가 스스로 길을 내놓았던 한국적인 발라드의 전형으로부터 멀어져갔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서도 점차 잊히는 듯싶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듣게 된 변진섭의 <비나리>는 다시 그의 발라드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놓았다.
왜일까? 여성 가수에게 썩 잘 어울리는 노랫말의 노래인데, 왜 남성 가수가 부른 것에 애착을 갖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답을 찾지 못했다. 꽤나 긴 시간 동안 그랬다. 그러다가 맞아, 오르페우스는 남성이 아닌가? 제우스가 기억의 여신 므네모쉬네를 찾아가 9일 밤을 동침하고 낳은 무사이(Mousai) 여신 9자매의 막내인 칼리오페. 현악과 서사시를 맡았던 칼리오페와 음악의 신 아폴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천하제일의 명가수가 바로 오르페우스이다. 오르페우스가 수금 연주와 노래에 빼어난 솜씨를 지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비나리>는 바로 오르페우스의 노래를 연상시킨다. 그 애절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연상시킨다. 오르페우스는 나이가 들고 에우뤼디케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한 지 채 10일도 되지 않은 어느 날, 에우뤼디케는 꽃을 꺾으러 갔다가 독사에게 발뒤꿈치를 물려 죽고 만다. 오르페우스는 비탄에 빠지고,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림 여신에게 저승에 가서라도 에우뤼디케를 만날 것이라고 애원한다. 그리고 수금을 들고 저승으로 떠난다. 그리고 이승에서 저승에 이르는 관문에 다다를 때마다, 수금 연주로 통곡의 강, 불의 강, 망각의 강을 건너게 된다.
심금(心琴)을 울리는 오르페우스의 노래에 취하여 통곡의 강은 머리를 풀고 통곡했고, 불의 강은 불길을 헤쳐 주었으며, 망각의 강은 스스로 망각의 강임을 잊었다고 한다. <비나리>는 그 강을 앞에 두고 부르는 노래가 아닌가 싶다. 하늘이여. 저 사람 언제 또 갈라놓을 거요, 하늘이여, 간절한 이 소망 또 외면할거요, 하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애원의 노래이되, 사랑하는 연인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노래가 아니다. 자신과 사랑하는 임과의 운명을 주관하는, 하늘에 애원하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노래는 외견상 사별한 임과의 만남을 기원하는 내용이 아니다. 새롭게 만난 연인과의 앞날에 행복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비나리이다. 하지만, 그 전에 있었던 사랑과 이별이 운명의 장난으로 깨어졌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래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에도 불행한 운명이 개입될까 걱정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사랑도 ‘연습도 없이 벌써 무대로 올려 진 사랑’이어서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운명을 주관하는 신에게 애원한다. 하늘이여, 이 사랑 다시 또 눈물이면 안 된다고. 하늘이여 저사람 영원히 사랑하게 해 달라고.
큐핏트 화살이 가슴을 뚫고 사랑이 시작되는 것도 운명이고, 연습도 없이 무대에 올려 지는 것도 운명이고, 사랑이 깨지고 영영 이별하는 것도 운명이 아니겠는가? 사랑을 시작할 즈음 사람들은 ‘너는 내 운명’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또 정말 안타깝게 이별할 즈음 ‘너는 내 운명’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 운명 앞에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수레바퀴와 비슷한 운명이다. 스스로 굴러가는 것 같지만, 실은 큰 힘에 이끌려 굴려지는 것일 뿐이다. 사랑마저도 그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면,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하지만, 어쩌랴, 운명적인 사랑만큼 아름다운 사랑도 없는 것을. 오르페우스의 사랑이 서럽도록 아름다운 것처럼.
하희정, wizbook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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