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수다

체리 필터, <낭만 고양이>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5. 12. 05:10
 

체리 필터 낭만 고양이


내 두 눈 밤이면 별이 되지

나의 집은 뒷골목 달과 별이 뜨지요

두 번 다신 생선가게 털지 않아

서럽게 울던 날들

나는 외톨이라네

이젠 바다로 떠날 거예요

거미로 그물 쳐서 물고기 잡으러


나는 낭만 고양이

슬픈 도시를 비춰 춤추는 작은 별빛

나는 낭만 고양이

홀로 떠나가버린 깊고 슬픈 나의 바다여

깊은 바다 자유롭게 날던 내가

한 없이 밑으로만 가라앉고 있는데

이젠 바다로 떠날 거예요

거미로 그물 쳐서 물고기 잡으러


나는 낭만 고양이

슬픈 도시를 비춰 춤추는 작은 별빛

나는 낭만 고양이

홀로 떠나가 버린 깊고 슬픈 나의 바다여

나는 낭만 고양이

홀로 떠나가버린

나는 낭만 고양이

슬픈 도시를 비춰 춤추는 작은 별빛

나는 낭만 고양이

홀로 떠나가버린 깊고 슬픈 나의 바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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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결한 거리의 아름다움. 다소 엉뚱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유럽 영화의 매력 중 하나는 그것이다. 낮이라면 꽤나 번지르르 해 보였을 건물들. 어둠이 깔리고 눅눅한 느낌을 자아내는 거리. 남루한 옷차림과 우울한 표정. 그러나 말똥말똥한 눈빛이 인상적인 젊은이. 로마의 뒷골목 정도를 연상시키면서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그런 영화는 많은데, 하필이면 왜 유럽 영화인가? 사실 서울을 배경으로 해서는 그런 풍경을 연출하기는 쉽지 않다. 너무 휘황찬란해 버리거나. 너무 궁핍해 버려서 ‘불결한 거리의 아름다움’을 연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불결한 거리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풍요로운 도시라는 외면과 도시의 아이들이 갖는 우울함이라는 내면이 어우러지면서 빚어내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그것은 달리 말하면 앞선 세대와는 달리 전원적인 삶이라는 내면이 없는 세대들, 온전히 도시에서 나고 자란 세대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그들은 코스모스 피어있는 고향역(나훈아의 <고향역>)이나,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남진, <임과 함께>)을 그리워하거나 꿈꿀 수 없다. 더 나아가서 금모래가 뜰 아래로 빛나고, 뒷문 밖에서는 갈잎의 노래(김소월, <엄마야 누나야>)가 들리는 그런 낭만적인 꿈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밤이면 거리에 나와 쓰레기통을 뒤지는 길고양이. 도시의 밤 뒷골목을 배회하는 도시의 아이들. 이 둘의 이미지가 얼마나 용이하게 겹쳐지는가? 체리 필터의 <낭만 고양이>는 바로 이 도시의 아이들의 꿈을 노래하고 있다. 그들이 몸을 키운 곳은 다름 아닌 ‘도시의 뒷골목’이며, 마음을 키운 것은 다름 아닌 그 뒷골목을 비추던 ‘달과 별’이다. 그들에게도 앞선 세대에 못지않은 낭만이 있었던 것. 그렇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놀던 달은 호수로 술잔으로 떨어졌지만, 그들의 별은 도시의 뒷골목으로 길고양이의 ‘두 눈’으로 떨어진다.


도시의 아이들에게 기성세대는 합리적인 삶을 가르친다. 물고기를 잡으려면 그물을 준비해야함이 그것. 한술 더 떠서 남과 같은 그물로는 다른 사람보다 많은 또는 큰 고기(더 많은 주식 또는 더 넓은 땅)를 잡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잘 살고 못사는 것은 타고난 팔자(태진아, <동반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젊은 세대에게는 다 자기 하기 나름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몸에 배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면 어떤가? 자신의 궁핍한 처지를 제 탓이라고 여기고 수용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도시의 아이들에게도 꿈이 있고 자존심이 있다. 길고양이처럼 먹을 것을 찾아 생선가게를 터는 삶을 거부한다. 기성세대로서는 억울하겠지만,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임희숙,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쥐꼬리만한 월급에 얽매인 삶을 거부한다. 그것이 생선가게를 터는 길고양이의 삶과 무엇이 다른가? 물론 도시의 아이들도 안다. 자본주의적 합리성, 그 적자생존의 원리를 거부하면 낙오자가 되고,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거미로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우매한 일임도 잘 안다.


하지만 그들은 당당하게 바다로 떠난다. 거미그물을 들고 물고기를 잡으러 떠난다. 기성세대가 삼등 완행열차를 고래를 잡으러 동해 바다로 떠난 것처럼(송창식, <고래사냥>), 슬픈 도시를 떠나 바다로 떠난다. 그래! 우리도! 그 때,  그 때는 그랬지! 산으로 사냥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바다로 사냥을 떠나는 것을 꿈꾸었지. 그렇지만 알게 돼. 철이 들면 알게 돼. 호랑이를 잡으려면 산으로 가야하고, 힘 좋은 총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늙은이 냄새 풀풀 나는 충고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라. 그것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시시껄렁한 조언일 뿐이니 말이다.


낭만 고양이가 찾아 떠나는 곳은 바다가 아니다. 갈매기 나는 바닷가가 아니다. 그것은 비유일 뿐. 그들이 바다로 가서 찾으려는 것은 ‘깊고 슬픈 바다’이다. 그것은 내면의 바다이다. 그것은 내면적 성숙으로 철이 든 것이 아니라, 때 묻은 현실 논리로 무장한 것에 그친 기성  세대의 행태에 대한  저항, 그 슬픈 영혼에 대한 반항이다. 현실 논리가 기성 세대에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무기를 마련해 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준 것을 다 알면서 왜 애써 모른 척 하는가?

 

도시의 아이들은 그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뒷골목의 아이들이다. 그들에게 현실 논리로 무장하라는 충고는 너무 가혹하다. 낭만 고양이는 되찾고자 한다. 슬픈 영혼을 되찾고자 한다. 아니 현실 논리에 영혼을 파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외롭지 않은 삶을 살고자 한다. 죽는 날 외로운 혼을 건지기 위해서 영혼이 참으로 순수했던 시인이 갔던 길,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을 차고 선선히 갖던 그 길(김영랑, <독을 차고>)을 가고자 한다. 거미그물을 들고 물고기를 잡으러, ‘홀로 떠나 가버린 깊고 슬픈 바다’로. 물론 그들은  알고 있다. 창공을 높이 나는 새는 늘 외톨이지만, ‘깊은 바다를 자유롭게 나는’ 물고기라야 외롭지 않다는 것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마천루를 올리는 기성세대들에게, 그 빌딩 뒷골목에는 그늘이 진다는 것을 가르쳐주고도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충고하지 않는다. 스스로 도시의 바다에 물고기가 되어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희정 대중가요평론가 wizbook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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