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이별

양수경,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국어의 시작과 끝 2007. 4. 2. 16:02
 

양수경,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어떻게 돌아왔는지/아무 생각도 나질 않아/예감할 수 없었던 이별이였기에/그 무슨 말을 했는지/그저 눈물만 흐르네요/믿을수가 없었던 이별이였기에/무슨 이유로 떠나야 했나요/나보다 더 나를 사랑했던 그대가/왜 나를 떠나야 했는지/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었나요/내 모습이 정말 싫어요/또 다른 사랑을 찾아야 하나요/내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무슨 이유로 떠나야 했나요/나보다 더 나를 사랑했던 그대가/왜 나를 떠나야 했는지/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었나요/내 모습이 정말 싫어요/또 다른 사랑을 찾아야 하나요/내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사랑과 이별, 예나 지금이나 시가문학의 단골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아니 사랑하거나 그 연장선상에서 이별을 하게 될 때,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해도 될 듯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사랑보다는 이별이 더 빈번하게 등장하지 않나 싶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의 감정이 비교적 단선적이라면, 이별의 심리는 복합적이어서 이런 저런 사연이 많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즉 이별의 심리 속에는 여전히 남아있는 사랑의 감정과 믿음이 깨져버린 데서 오는 증오의 감정이 섞여있다. 또 이별의 원인을 누가 제공했는가를 두고 내 탓 같기도 하고 네 탓 같기도 한 감정이 섞여 있다.


이별의 감정을 노래한 예로 황진이의 시조를 빼놓을 수 없겠는데, 그녀의 시에서도 복합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어저 내일이야 그릴줄을 모르더냐/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제 구태여’이다. 먼저 제를 ‘가랴마는’의 주체 즉 ‘임’으로 볼 수 있으며, 이 경우에는 떠난 임을 원망하는 내용이 된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행갈이를 한 것으로 볼 경우, ‘제’는 ‘보내고’의 주체 즉 서정적 자아로 볼 수 있다. 이 경우는 꼭 붙잡았다면 안 떠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는 내용이 된다.


이 중 어느 쪽이 진실이냐를 따지는 일은 별 의미가 없다. 사실은 둘 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별을 하고나니 내 탓인 듯하기도 하고, 네 탓인 듯하기도 할 것인 아닌가? 아니 일방적으로 어느 하나가 원인을 제공하여 이별하는 경우가 있겠는가? 이별은 대체로 둘이 함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 이별이라면 솔직히 마음 속으로는 이별을 예감할 수 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믿을 수 없는 이별, 예기치 못한 이별이라면 대개는 쌍방이 원인을 제공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지만 위의 말도 반만 맞는 말이다. 이별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원인을 누구에게 돌리기 이전에,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보통이 아닐까? 이 노래에서처럼 ‘무슨 이유로 떠나야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보통이 아닐까? 분명한 이유가 없다면 떠날 수가 없는 사람인데 떠났고, 그렇다면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것은 알 수 없고, 그것이 이별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멍해질 수밖에.

 

양수경의 목소리는 투명한 유리를 연상시킨다. 어둡거나 느끼한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그래서 이렇게 애매한 심리를 노래하는 데에는 썩 잘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별 이후에 오는 일종의 심리적 공황 상태를 정말 잘 소화한다. 양수경의 노래가 일견 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으며, 그녀의 매력은 이 지점 어디일 것이다. 이 노래의 첫 구절이 바로 그렇다. “어떻게 돌아왔는지/아무 생각도 나질 않아” 이것은 집에 오긴 왔는데, 어떻게 운전해서 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던 기억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인가를 골똘하게 생각한다는 것과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 같은 뜻일 수 있다는 역설이 성립되는 것이 아닐까?

 

이 노래는 조관우가 리메이크하여 부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조관우 역시 청명한 목소리의 소유자이며, 양수경의 경우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반복해서 들어보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수경의 경우와 달리 복합감정의 무게, 달리 표현하자면 그 얽힘이 야기하는 갈등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를 두고 우리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꼭 옳은 지적은 아닌 듯싶다. 이렇게 말하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양수경이 노래하면서 행간에 감춰둔 부분을 조관우가 찾아내서 노래한 것으로 말이다. 조관우가 다시부르기를 하면서 양수경을 그대로 반복할 수는 없는 일이며, 그래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싶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그 부족한 부분 역시 양수경이 이미 노래한 것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은 물론이다. 음각과 양각의 차이일 뿐, 근본적으로 노래하고자 한 감정은 양자 모두 이별의 복합감정일 것이라는 말이다.

하희정, <문학평론가 wizbook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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