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 위한 불교폐단 지적, 승려와 時로 소통
정몽주 문하서 성리학 공부
조선 전기 나라 기반 다져
〈척불소〉 상소 올렸지만
불교 교유는 계속 이어가
정몽주 문하서 성리학 공부
조선 전기 나라 기반 다져
〈척불소〉 상소 올렸지만
불교 교유는 계속 이어가
조선 전기의 문인 하연(河演, 1376~ 1453)은 조선이 건국된 후 성리학을 토대로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 데 공헌했다. 그의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 또는 신희옹(新稀翁)이다. 어린 시절부터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과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에게 뛰어난 필법과 재주를 인정받았으며 대학자 정몽주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고려의 은택을 입었는데 조선이 건국되자 부친 하자종(河自宗, ?~1433)은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들 하연이 식년문과에 급제, 봉상시 녹사에 중용되자 마음을 바꾸어 조정에 나아가 공조 참의를 제수 받았으니 이는 고려 왕실에 대한 변절이 아니라 진퇴를 고뇌했던 당대 문인들의 입장을 짐작하게 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 초기 신진사대부들은 혼탁한 세상을 개혁하여 태평성대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성리학은 새 왕조를 건설하는 정치적 이념으로서 가장 참신한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방책이었던 셈이다. 이를 주도했던 정도전, 하륜, 권근 등 신진사대부들은 사회적 개혁과 함께 성리학을 정치의 이념으로 정착시키고자 하여 집현전, 홍문관을 중심으로 수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대학연의〉나 〈성리대전〉이 집중적으로 강의되었던 것도 당시 조류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신(修身)과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는 선비의 궁극적 목표이다. 그 또한 벼슬에 나아가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실현하고자 하였을 것이니 이런 뜻이야 이미 스승인 정몽주에게서 그 실천적 덕목을 영향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초 정치적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정몽주의 죽음과 두문동으로 은둔한 조부·부친에게 닥친 정치 현실은 그에게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이 낸 나라의 동량에겐 어려움을 극복하게 할 조력자도 나타나는 법. 바로 권근의 문인(門人) 강회백(姜淮伯, 1357~1402)이 그런 인물이었다. 그가 하연에게 “공은 좋은 벼슬을 하여 나라에 큰 정승이 될 것이니 향곡에서 늙을 사람이 아니다”고 한 말은 이미 하연의 품재와 시절의 흐름을 간파하고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가 원칙과 소신을 지켰던 관료로서 영의정에 오른 것이나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에 찬시를 지은 경력은 강회백의 예견이 적중한 것이라 하겠다.
하연의 환로는 화려하였다. 1402년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고 1414년에는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2년 후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다. 또 1445년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가 1449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특히 그가 맡았던 사헌부는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관청이다. 그가 장령에서 집의에 승진된 것도 청렴과 원칙, 강직한 그의 품성을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특히 태종은 강직한 그의 성품을 익히 알았던 군주였다. 친히 그의 손을 잡고 “경이 사헌부에 있을 때 홀로 그 직분을 다했으니 그때부터 내가 알았다”고 한 것은 왕의 신임을 드러낸 말이다. 그가 승정원 동부대언에 제수될 재목임을 알았던 태종이나 지신사로 임명한 세종 또한 그의 신중한 처신을 깊이 신뢰했던 것이다.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1호 하연 경재문집 목판(河演 敬齋文集 木板). 이 책판은 하연의 5대손 하흔이 흩어진 원고를 모아서 광해군 1년(1609)에 합천 해인사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사진=문화재청
그가 불교의 폐단을 지적, 개혁을 강조한 것은 1423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가 상소하여 불교의 폐단을 신랄하게 지적한 것은 첫째, 백성은 기아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도 놀고먹는 승려들이 있고, 어려운 백성을 꾀어 먹을 것을 빼앗는다는 점. 둘째, 사원의 토지는 넓은데 그 안에 살고 있는 승려들의 수가 지나치게 적으며, 좋은 토지가 버려져 있는 현실적 폐단을 지적한 셈이다. 따라서 그의 생각은 사원이 소유한 대규모 사전(寺田)으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며, 세금이나 부역이 면제된 승려들의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폐단을 시정하여 불교계의 방만한 폐단을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척불소(斥佛疏)〉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에 당 고조는 사문을 싫어하여 장안에 다만 2곳의 절과 각 주에 각각 한 곳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폐지하였습니다. (중국은)천하가 크고 사해가 넓은데도 오히려 또 이와 같이 하였거늘 하물며 우리나라의 땅은 작은데도 많은 절집을 남겨두고 이에 따른 사전(寺田)을 넘치게 두는 것이 어찌 마땅한 것입니까. 신은 엎드려 바라건대 선왕의 유지를 잘 이어서 이단의 무리를 배척하시고 한양에 있는 사찰은 다만 2곳만을 남기고 각도에는 각각 2~3곳을 넘지 않게 하시고 이어 시행했던 법을 파기하셔서 승직의 비답을 내리지 마십시오. 위에 올린 소를 아래에서 의논했더니 대신도 개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 의논한 것을 올립니다. 아울러 조계, 화엄 칠종은 선교양종으로 합하게 하시고 한양 이외에는 다만 36사만 남겨두시고 사전은 헤아려서 주시고 나머지는 모두 파기하십시오.(昔唐高祖惡沙門。京師只留寺二所。諸州各留一所。餘皆罷之。以天下之大。四海之廣。尙且如此。況我國壤地褊小。豈宜多置寺宇。濫屬土田乎。伏望殿下善繼先王之志。排斥異端之類。於京師只留二所。諸道各不過二三所。仍罷試選之法。勿下僧職之批。疏上。下其議。大臣亦以爲革之宜。上是其議。幷漕溪華嚴七宗。合爲禪敎兩宗。京外只留三十六寺。量給田土。餘悉罷之)
이 〈척불소〉는 그가 1423년 올린 상소문의 일부이다. 세종은 그의 상소를 받아들여 조계, 화엄 7개 종파를 선, 교 양종으로 통합하였고 36본산으로 통합하였으며 사원의 토지와 노비를 환수하는 조치를 내렸던 것이다. 이외에도 그는 1451년 문종이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여 벼슬을 반납하는 결단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개혁하는데 적극적이었지만 이는 그의 정치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상당수의 수행자들과 교유했던 흔적도 또렷이 남아 있다. 우선 〈중흥사의 감 스님의 시축에 차운하여(次重興鑑上人詩軸韻)〉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사람 뜻에 따라 승방에 묵었더니(昔人隨意宿僧房)
어찌 중흥사만 큰 언덕으로 막혔는가(胡乃重興隔大岡)
이 뒤에 만약 조정에서 휴가를 받으면(從此若乘朝暇日)
함께 양지 바른 창가에서 시축을 펴보리(共開黃卷面牕陽)
아마 감 스님은 중흥사의 원로 스님일 터이다. 그 또한 선배들처럼 승방을 찾아갔지만 중흥사의 감 스님은 만나지는 못했던 듯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후일을 기약했던 건 바로 양지 바른 승방의 창가에서 서로의 시를 화답하는 일이었다. 당시 관료문인이나 승려들의 소통 언어는 시였다. 각자의 속내를 담아낸 시구는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떠나 인간적인 따뜻한 배려와 이상을 담아냈을 것이다.
아무튼 중흥사는 그가 자주 출입했던 사찰이었던 듯, 다시 〈중흥사 주지 성유가 건포도를 보냈기에(重興寺住持省柔送乾葡萄)〉라는 시에서 건포도를 맛본 후의 감흥을 이렇게 노래했다.
자색 빛 둥근 건포도, 극치의 향기와 단맛이라(味盡香甘色紫球)
(건포도)씹자 가슴이 맑아지고 머리도 맑아지네(嚼來淸膈更淸頭)
유연하게 갑자기 시가의 흥이 일어나니(悠然忽有詩家興)
바로 산 중엔 팔월 가을이라(政是山中八月秋)
(건포도)씹자 가슴이 맑아지고 머리도 맑아지네(嚼來淸膈更淸頭)
유연하게 갑자기 시가의 흥이 일어나니(悠然忽有詩家興)
바로 산 중엔 팔월 가을이라(政是山中八月秋)
우리나라에 포도가 들어온 것은 고려, 혹은 조선 초기라고 한다. 당시 포도는 귀한 물품이었을 법한데 건포도를 보낸 것이다. 그런데 건포도의 일미(一味)는 향기와 단맛이었는지 “(건포도)씹자 가슴이 맑아지고 머리도 맑아지며/ 유연하게 갑자기 시가의 흥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더구나 가장 달이 밝은 8월의 산중에서 보낸 선물임에랴!
중흥사 주지 성유 스님이 보낸 건포도는 그의 시흥을 북돋게 한 쾌거의 선물이었던 셈이다. 이뿐 아니라 그의 성정(性情)을 일깨운 건 산승(山僧)이 보낸 해차였을 것이다. 싱그러운 해차의 향기, 산승과 깊은 우정의 일단을 보여준 시는 〈지리산
산승이 해차를 보내와서(智異山僧送新茶)〉이다.
진주의 풍미는 납일 전의 봄이라(晉池風味臘前春)
지리산 아래 초목들도 새싹이 돋겠지(智異山邊草樹新)
곱고 푸른 차 다리니 더욱 좋아서(金屑玉糜煎更好)
맑은 색과 뛰어난 향기, 맛은 더욱 진기하네(色淸香絶味尤珍)
지리산 아래 초목들도 새싹이 돋겠지(智異山邊草樹新)
곱고 푸른 차 다리니 더욱 좋아서(金屑玉糜煎更好)
맑은 색과 뛰어난 향기, 맛은 더욱 진기하네(色淸香絶味尤珍)
진주는 차의 산지이다. 더구나 납일 전에 딴 해차였으니 납일은 음력 12월 말 즈음이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1월 말이나 2월 초 즈음이다. 지리산은 겨울에도 칡꽃이 피는 곳이다. 따라서 지리산 산승이 사는 곳은 쌍계사나 화계사, 아니면 지리산 깊은 산중에 위치한 암자일 터이다. 그가 보낸 차는 맑고 그윽하여 진기함을 더한 차였으니 차를 맛본 그의 시흥은 도도해졌을 것이다. 그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흰 수염을 보고 혹시 불로장생을 꿈꿨던 것은 아닐까. 그의 〈차노두황사탑전절구(次老杜黃師塔前絶句)〉는 다음과 같다.
일월은 서쪽으로 날아갔다가 다시 동쪽으로 돌아오니(日月西飛更復東)
푸른 버들 풍요로운 풀, 그리고 따뜻한 바람이라(綠楊豐草又薰風)
맑은 거울에 비친 흰 수염, 놀라지 마라(莫將淸鏡驚鬚白)
다만 술로 젊은 얼굴이 붉어지길 바라네(只要蒼顔得酒紅)
푸른 버들 풍요로운 풀, 그리고 따뜻한 바람이라(綠楊豐草又薰風)
맑은 거울에 비친 흰 수염, 놀라지 마라(莫將淸鏡驚鬚白)
다만 술로 젊은 얼굴이 붉어지길 바라네(只要蒼顔得酒紅)
해와 달이 오고감은 엄연한 원리이며 사시(四時)의 운행 또한 그렇다. 사람의 생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봄날 같은 청년기가 지나가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건 늙어간다는 사실이다. 그 또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미 서리 내린 듯한 흰 수염에서 느끼는 허무감을 담담하게 드러냈다. 그런 모습에 놀라지 말라는 그의 의연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황 스님의 탑전에서 무상(無常)의 소식을 들었던 것일까. 술을 빌미로 창백한 얼굴이 붉어지기를 바라는 해맑은 그의 심사를 곁에서 듣는 듯하다.
그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편찬한 〈경상도지리지〉는 후일 〈세종실록지리지〉를 편찬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진양연고(晉陽聯藁)〉를 편찬했다. 그의 문집 〈경재집(敬齋集)〉은 그의 후손 하곤이 〈진양연고(晉陽聯藁)〉에 편입하여 1609년 간행했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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