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공정한 관찰자의 도덕 감정, 그리고 동감의 상상력

국어의 시작과 끝 2019. 9. 22. 17:59

공정한 관찰자의 도덕 감정, 그리고 동감의 상상력

 

 

 

 

 

 

 

신중(愼重)과 자혜(慈惠), 더덜이 없이 이 두 단어가 딱 들어맞을 듯한 덕성의 교육자 박정규 선생님이 이순(耳順)에 이르러 시집 <새로 여는 아침>을 상재(上梓)한다. 이렇듯 웅숭깊은 문학적 열정을 품고 있었다니! 펼쳐 들고 문학청년 못지아니한 탄력을 내장한 문장에 놀라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듯하다. <새로 여는 아침>을 접하고, 나는 가수 류기진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류 씨는 그 사람 찾으러 간다라는 폴카(polka) 풍의 노래로 알려져 있는데, 1956년 생으로 튼실한 중소기업의 대표이다. 그런 그가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나이에 뜬금없이 가수로 데뷔하고, 마침내 성인가요 1위의 자리에까지 오르기도 했고, 요즘도 왕성하게 무대에 오른다.

 

날마다 봄날인 줄 알았던 나, 언제나 청춘인 줄 알았던 나, 이제는 정리다 정리, 마음에 와닿는, 진실 하나 찾으러 갈 거다. (중략) 아직도 뜨거운 가슴이 있다. 눈물도 있고 정도 있다. 내 생의 마지막 정열, 그 사람 찾으러 간다.” 이제 인생의 봄날은 지난 나이이지만, 아직도 뜨거운 가슴이 있어 마음에 와닿는 진실 하나를 찾으러 가겠다는 내용이다. 가요방송에 나가 이 노랫말을 해설한 적이 있고, 결코 때늦은 원()풀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새 출발에 찬사를 보냈다. 그 찬사를 이제 <새로 여는 아침>에 온이로 옮겨 와야겠다. 적잖은 세월 동고동락했던 후배로서 선배의 강권에 못 이기는 척하며 평설을 쓰는 지금, 한낱 지식 도매상에 불과하지만 어쭙잖은 문장으로나마 이 아름다운 새 출발에 상찬(賞讚)을 아끼고 싶지 않다. 시인을 잘 아는 가족, 주변 지인들의 마음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느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신록과 녹음의 철이 지나면 가을이다. 그렇듯 이제 인생의 한 매듭을 지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봄꽃보다 화려하게 산천을 수놓은 단풍이 지기 전에, 늘 가슴속 한편에 품고 있던 바람을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아쉬워도 아쉬운 대로 용기를 내어 펼쳐 보아도 좋지 않겠는가? 아무튼 한 인간의 첫사랑에서나 찾을 수 있을 법한 순정(純情)’을 오롯이 담아낸 이 찰진 시집에 안성맞춤인 브랜드를 붙인다면 뭐가 가장 적절할까? 여러 날을 좌고우시하다가 떠올린 것이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서 접했던 개념인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이다. 본디 도덕철학의 개념이지만 교육자 박정규와 시집 <새로 여는 아침>에 걸쳐 대는 양각정(兩脚釘)으로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개념이 아닌가 싶다.

 

범박하게 말해서 시를 문학예술의 한 하위 분야로 간주하는 현대의 주류적 관점에 따를 때, 시는 도덕적, 철학적 담론의 영역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시는 정서적, 본능적 담론의 숲에 깃들여야 한다. 감정에 대한 이성의 우위가 도덕의 기본적 출발점이어야 한다는 관념과 짝을 이루면서, 이성에 대한 감정의 우위가 시문학의 기본적 출발점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전자에 따를 때 사회공동체가 도덕적으로 유지되고 그 결과로 정의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비도덕적인 결과를 야기하는 감정과 욕망은 이성에 의해 통제되어야 마땅하다. 이를 윤리적 합리주의(倫理的 合理主義)라 한다. 이 관점에서는 중용(中庸)과 절제(節制)의 덕목이 중요하다. 충동, 욕구, 정념에 동요하지 않고 그것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 인간들의 무분별한 쾌락추구와 통제되지 않는 이기심으로 인한 사회적 대립과 충돌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도덕의 세계와 문학예술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생각이 오늘날의 주된 조류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새로 여는 아침>이 보여주는 시 세계는 사뭇 다르다. ‘충동(衝動), 욕구(慾求), 정념(情念)’이 시적 사유와 상상의 무게중심을 이루지 않는다. 그 반대로 그런 것들에 내둘리지 않는 이성(理性), 원칙(原則), 양심(良心)’을 구심점으로 삼는 시적 사유와 상상이 일관성 있게 그리고 섬세하게 펼쳐진다. 즉 이 시집에서 보여주는 사유와 상상은 오늘날의 서정시가 흔히 보여주는 감정이입(感情移入)의 세계와는 다르다. 연민(憐愍)과 동정(同情)의 세계가 아니라 동감(sympathy)’이라는 보편적인 도덕 감정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때 동감이란 관찰 대상자의 어떤 행동에 대해 제삼자가 느끼는 동료감정(fellow-feeling)을 지칭하며, 관찰자가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행위자가 직면한 상황과 처지에서 느끼는 감정과 판단을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반추(反芻)하는 능력이다.

 

 

자꾸자꾸 불러도 짜증낸 일 별로 없고/돌아보면 이일저일 숨 돌릴 틈 없어도/언제나 소리 없이 많은 일들 해치웠네.//이제 시간 되어 아기와 만나려니/이런 생각 저런 걱정 누가 아니 도울까/아기야 엄마 닮으니 무슨 근심 있으랴.

-‘새해 만날 날을 기다리며’-

 

 

예정일이 임박해서야 출산 휴가에 들어간 동료 교사를 떠올리고 있는 위의 시는 시인이 추구하는 동감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공정한 관찰자의 눈이다. 사회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행위 당사자의 본원적인 감정에 동감의 능력을 발휘하는 시적 화자에, 냉철한 이성과 자기 통제에 의거하여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하는 시적 화자에 주목해야 한다. 조금 비약하여 말하자면 바로 이 공정한 관찰자의 존재를 통해 개인적 도덕 원리가 사회적 도덕 원리로 고양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시인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축적될 양심의 진화, 도덕 감정의 진화에 대한 신뢰를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이 시가 보여주는 도덕 감정을 두고 개인적인 호불호(好不好)의 감정에 기반을 둔 쾌불쾌(快不快)의 감정일 뿐이라고 말할 수 없다. 크고 작은 사익(私益)을 우선시하는 이기심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역사와 관습을 통해 오랜 기간에 걸쳐 사회공동체에 착근한 도덕률이며, 각 개인이 가진 자기중심적 편향성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동력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위대한 재판관, 양심(良心)’이라는 사실을 공정한 관찰자의 눈으로 담담하게 성찰하고 있는 작품으로 읽히는 것이다. 이러한 공정한 관찰자의 눈은 잘난 이가 소외된 이웃에게/봉사활동을 판매한다./‘도움을 주었는데/왜 고마워할 줄 모르느냐고 노려본다./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훈계조차 하고 싶으니/가난한 이에게/빚 받으러 왔더냐?”(‘빚 받으러 왔더냐중에서)에서도 세상을 담아내는 훌륭한 렌즈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궁금해지는 것은 타인의 행위와 관찰자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동감의 원리가 자기 스스로의 감정과 행위를 판단할 때에도 여전한가 하는 점이다. 거개의 경우 친숙성의 원리가 작동하여 자신이나 가족 등에게는 동감의 경향이 강한 반면, 타인이나 주변인에게는 동감의 경향이 약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 동감에 일정한 편향성이 존재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이러한 편향성을 지양하고 공정한 관찰자로서의 관점을 유지하려는 마음의 작용을 우리는 양심(良心)’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스스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을 수밖에 없는 자질을 갖추고자 하는 숭고한 동기가 곧 양심이다. 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 받고 싶은 욕망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남을 부러운 눈으로 볼 줄은 알아도/내 이 못난 손발로 일할 줄은 몰라서/겉으론 태연한 척해도/가슴에는 늘 불길이 가득 타올랐다. (중략) 오늘에사 그 시간을 생각한다./불길처럼 타오르던 질투를 움직여/빳빳해진 관절을 왜 움직이게 하지 못했을까?/부러운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내 못난 손발을 위해서 타올랐더라면/꼭두각시는 면했을 텐데./세상이 뭐라 하든/나는 거기에 살아 있었을 텐데.

-‘후회중에서-

 

 

꼭두각시[郭禿]’가 무엇인가? 남아선호사상이 지배하는 유교 사회에서 조강지처(糟糠之妻)이지만 적자(嫡子)를 생산하지 못하고 출산력이 왕성한 첩()과 갈등하는 처량한 노파를 이르는 말이 아니던가? 시인 스스로의 청장년 시절을 회억하고 있는 이 시에서 하필이면 이런 늙수그레한 극중 인물을 떠올렸을까? 모르긴 모르겠으되 아마도 그것은 관악산 기슭에서 보낸 시절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남명학파(南冥學派)의 고고한 기운이 서린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나, 예로부터 의기(義氣)의 고장인 진주(晉州)에서 성장하고, 청운(靑雲)의 꿈을 펴려고 상경하여 청년시절 촉망받는 국어학도였던 시인, 그에게 관악산 기슭에서의 기억은 한마디로 뭐라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 더욱더 아련하게 기억되지 않았겠는가? 또 그런 회억이 자아내는 서글픔에 공감하지 않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 생()의 비애를 시인이 꼭두각시라는 극중 인물에 응축해 놓은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항용 시간적인 거리감은 보기에 따라서는 비루한 기억일 수도 있는 과거마저도 아름답게 변용하는 법이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것도 늘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장면에서도 시인은 공정한 관찰자로서의 엄정함을 잃지 않으며, 바로 이 점에 이 시의 옹골진 매력이 있다. 즉 독자의 입장에서 단지 방사(倣似)한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에, 그래서 감정이입이 용이하기 때문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시에 내재된 도덕의 일반율에 동감할 수 있어서 공감하는 것이며, 사사로운 감정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에 이 시의 힘이 있는 것이다. 인생에서 꼭두각시를 면()하려면 무엇보다 스스로의 빳빳해진 관절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양심적 인간이라는 가치 판단의 준거틀, 도덕의 일반율에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이 시의 힘이다. 물론 객관적인 관점에서 시인의 삶을 두고 꼭두각시였을 뿐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는데, 그것은 시인이 바로 이러한 양심의 소유자, 즉 숭고한 내면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 성패를 가름하는 잣대는 그가 어느 길을 갔느냐의 차원이 아니라, 그 길이 어느 길이었든 어떤 마음가짐으로 갔느냐에 달려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여기서 환기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일 것이고.

 

한편 오늘날 우리 서정시의 지형을 거칠게나마 조감해 보면 도덕 감정을 테마로 하는 시에 허여된 영역은 지극히 협소하다. 감정이입에 토대한 서정주의 경향, 부정정신에 토대한 모더니즘 경향, 공동체적 유대감에 토대한 진보주의 경향의 시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도덕 감정을 테마로 하는 서정시는 그 틈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이다. 아마도 그것은 계몽적인 근대 초기의 시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하고, 도덕 감정을 테마로 할 경우 어설픈 교훈주의 경향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도덕 감정을 테마로 하는 서정시의 가치를 폄하(貶下)할 수는 없다. 외려 희소(稀少)하다는 것은 귀()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긴 도덕 감정을 테마로 하면서 수준 높은 문학적 성취를 이룬 서정시를 아직 연륜이 짧은 젊은 시인이나 감상주의(感傷主義)의 달콤함에 침윤된 문학소녀 취향의 시인에게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어느 정도 원숙한 나이의 시인에게서, 그러면서도 섣불리 값싼 인생론을 설파하는 데로 빠지지 않는 긴장감을 가진 시인에게서 기대할 만한 것이다. 이 점에서 도덕 감정과 동감의 상상력에 기반을 둔 박정규 시인의 시는 주목할 만한 값어치가 충분하다. 이제 인생을 알 만한 나이이기도 하거니와, 예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꽤나 건강한 시적 긴장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어른스럽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교훈주의를 앞세우지 않는 시는 그리 흔하지 않으며, 우리 서정시의 다채로움을 위해서라도 시단(詩壇)의 한 영토를 넉넉히 내줘도 될 만한 충분한 매력이 있다, 그러니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무르익었으되 고리삭지 않은 건강한 도덕 감정의 시, 그 소중한 영토를 개척해 갈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뿌리가 없으면/기다리던 꽃도/바라던 열매도 없는 법./늘 세월의 호숫가 언저리로/잔물결에 떠밀리곤 했었지./그러다 아래를 보니/번듯한 뿌리 뿌듯한 열매는 없어도/떠도는 내 삶의 줄기에/수많은 수염뿌리가 늘 함께 있었어./이제는/호숫가 언저리로 떠밀려도/숨 막히지 않아.

-‘자화상중에서-

 

 

제목 그대로 시인이 자신의 삶을 통찰하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에서도 주옥(珠玉)같은 삶의 도덕률이 빛을 발하고 있다. 살짝 생뚱맞아 보이지만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우생마사(牛生馬死)’라는 고사를 떠올렸다. 물을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헤엄을 잘 치는 것은 말[]이지만 궁극적으로 살아남는 것은 둔해 보이는 소[]라는 교훈을 전하는 고사이다.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떠밀려 살아온 인생처럼만 보일 수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떠도는 내 삶의 줄기에 수많은 수염뿌리가 늘 함께 있었다고 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어차피 인생이란 부평초(浮萍草)처럼 떠밀려 다니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흔한 유행가의 노랫말이 설파하는 값싼 인생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지극히 당연한 진리라서 귀 기울일 가치가 없는 인생론에 불과하다. 이와 달리 시인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삶은 견딤이라는 것이다. 삶을 지탱하는 것은 갖은 유혹과 깊은 슬픔을 참고 견디는 것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수많은 수염뿌리라는 것이다. 이를 달리 프리드리히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아모르파티(amor fati),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저마다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 그것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너나없이 인생길은 화사한 꽃길이기보다는 조붓한 서덜길이고, 때로는 돌부리에 치여 상처입고 때로는 힘에 겨워 하며 인생이란 고갯길을 허위허위 올라야 하지만, 도덕 감정의 진화와 양심의 진화를 신뢰하는 긍정의 힘으로 절제의 힘으로 견디고 또 견디고 운명처럼 그것을 사랑해야 함을 시인은 말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 자의(自意) () 타의(他意) ()이라고 했던가? 운명처럼 시인으로서 데뷔하는 셈이다. 기왕 강단에서 내려와 이제 시단이라는 새로운 무대에 올랐으니 왕성한 시작(詩作)을 기대해도 좋을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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