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날빛이 겁나게 청명하게 느껴지는 날, 정지아 작가의 단편 ‘존재의 증명’을 읽었다. 기억 상실자 이야기이다. 읽기 전에는 제목이 하이데거를 연상하게 하는데, 읽고 난 후에는 발상이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하게 한다. 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의 심지인 기억을 상실했다는 것은 한 인간이 해충으로 변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 반쯤 정도는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본질적으로 반편이 이야기이고 반(半)알레고리이다. 범박하게 말해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과 유사하게 모더니즘 소설의 계보에 서게 될 단편이고, 풍자의 일종으로 보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애호의 정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즉 아이러니로 현실을 풍자한 점이 이채롭다면 이채롭다.
그런데 알레고리와 풍자의 전제가 무엇인가? 대상의 본질을 깊이 꿰뚫고 있음이 아닐까? 대상을 자신 있게 비꼰다는 것은 대상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존재의 증명’이라는 소설의 제목으로는 과격한 제목을 붙인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 통찰은 상당히 명확하다. ‘기억’ 곧 ‘나’를 상실한 자가 ‘나’를 찾아서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은 그 통찰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데,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언급한 근대 소설의 내적 형식과 흡사하다. 궁극적으로는 알고 보니 ‘나’는 이미지, 곧 허울(교환 가치의 세계)뿐이더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폼생폼사의 대표적인 소비재인 커피에 대한 장황한 묘사도 그런 의도를 반영한 것일 터이고. 탐색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이 점에서 이 작품의 주제는 장정일의 시 ‘하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작가는 물론 단순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달리 말하면 섣불리 껍데기(이미지)와 알맹이(영혼)의 이분법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조금 멋을 부려 이야기하면 ‘모방(사실성)’, ‘관념(추상성)’, ‘표현(영혼성)’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건 아마도 적잖은 기간 동안 내적으로 축적한 작가적 역량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노련하다. 의욕만 앞서는 초짜가 아니다. 묘사는 구체적이고, 관념은 자제되어 있으며, 영혼의 목소리는 잠재된 형태로 서사를 전개하고 있다. 그래서 작품은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다. 물론 독자에 따라서는 극적인 서사가 빈약하다며, 매력적인 반전이나 불꽃을 튀기는 갈등이 부재하다며, 좀 읽기 불편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적어도 전통적인 소설 문법에 익숙한 독자라면 말이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셋 중 ‘영혼성’에 관한 것이다. 여러 유명 작가들은 아주 오랫동안 ‘영혼성’을 드러내는 여러 방식을 시도해 왔다. ‘권태(파스칼)’와 ‘우울(보들레르)’ 그리고 ‘부조리(까뮈)’가 가장 대표적이지 않나 싶다. 나는 그것을 절망적인 심리 상태에서 실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이라고 이해한다. 자아와 세계 사이에 놓인 화해하기 어려운 간극, 그것을 온몸으로 견뎌내면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 방식 말이다. 그것은 비유하건대 대상의 질료성이 감춰지고 텅 빈 형태만이 살아남은 저물녘의 풍경을 두고 아름답다고 말할 때의 그것과 비슷하다. ‘영혼’은 그렇게 그 실체를 드러내는 법이다. 그것을 두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지긋한 나이에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런 식의 세상 읽기는 꽤나 매력적이지만 일용할 양식은 되지 못한다. 나는 이런저런 돼지 내장 푸지게 넣고 끓인 순댓국을 좋아한다. 역겹다고들 하는 특유의 노린 냄새마저도 좋아한다. 촌놈인 내게는 추억의 내음이기 때문이다. 지난날 대사라도 치르는 날이면 쇠죽 쑤던 거무튀튀한 가마솥에 끓여내던 돼지 수육의 노린내만 생각하면 지금도 입에 침이 절로 괸다. 하지만 가까이에 그런 메뉴로 유명한 식당이 있음에도 일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가 일용하는 양식은 소금물에 삼삼하게 담근 무김치나, 고춧가루를 거의 쓰지 않고 담근 백김치이다. 세상을 흐릿한 조도로 볼 수 있게 하는 선글라스를 쓰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때도 철도 안 가리고 선글라스를 쓰고 생활할 수는 없는 일과 비슷하지 않을까. 즐거움은 너무 진하거나 무거운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 묽고 가벼운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벌써 지천명을 넘긴 정지아 작가에게 내가 바라는 것도 그것이다. 이를 테면 맑고 투명한 눈으로 세상보기이다. 소설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다. 되레 세상이 소설을 바꿀 수는 있지만 말이다. 부디 마음을 풀쳐 먹고 이 막돼먹은 세상과 화해하기를, 그리하여 진정한 행복을 되찾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면 작가가 펼쳐 보이는 풍경도 좀 더 경쾌해지지 않을까 싶다. 소설이 한 사람을, 이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엄하고 무거운 담론으로서가 결코 아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가벼운 성찰, 알 듯 모를 듯한 미소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효석의 소설을, 김유정의 소설을, 이태준의 소설을, 피천득의 수필을, 김병종의 에세이를 좋아한다.
이런 맥락에서 실상 우리에게 힘든 것은 편견 없이 맑은 영혼의 눈으로 세상보기가 아닌가? 세상의 온갖 것들을, 시쳇말로 ‘자세히 보거나’, ‘오래 보아야’만 예쁜 것은 아니다. 자세히 보면 오히려 추한 것이 거지반이고, 오래 보면 식상한 것이 거지반이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저 있는 그대로 보아 줄 때, 크게 의식하지 않는 듯 가볍게 보아 줄 때 예쁜 것이 아닌가? 좀 싱겁게 나날을 소비해 버리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느 시대냐를 막론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마다 형언하기 어려운 서러운 사연을, 진저리나는 사연을 두어 개 쯤은 안고 산다. 그러니 자기만의 사연이 유별나다고 티 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오히려 담담하게 그 운명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운명이라는 인생의 길은 다 제각각이지만, 결국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하지 않는가.
고백하건대 이번 가을 휴가에 나는 ‘존재의 증명’을 읽으면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하이데거와 횔덜린을 떠올리게 되었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많이 느꼈고 많이 깨달았고, 또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명한 날빛이 노란 은행잎 사이로 비추는 보라매공원을 거닐면서 생각했다. 목덜미에 내리쬐는 따뜻한 가을 햇볕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나는 언제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생각하면 한량없이 부조리한 이 세상과, 다시 생각하면 한량없이 가여운 내 운명과 화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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