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일들

배운 게 없다 힘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

국어의 시작과 끝 2015. 5. 24. 15:24

 아름다운 풍광과 문필가가 많은
 지역에서 시심 크게 일깨워

 좋은 이름과 시심 가다듬어 준 아버지
 생전 누나가 적어보낸
‘별을 헤는 밤’을 읊으며 눈물 훔쳐

시(詩)는 사람의 가슴을 파고드는 여러 감성과 눈에 드는 아름다운 풍광을 그림처럼 섬세하게 그려내는 글귀로 뭇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살아오는 길목마다 주옥같은 시를 정선(精選)해 삶의 좌표로 삼아 성숙된 삶을 가꾸어온 정현태 씨를 만났다. 그는 시 해설 강연분야를 개척해 명강사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가 들려주는 ‘시가 있는 힐링이야기’란 주제의 강연을 간추렸다.

  
 

아름다운 풍광으로 시적 감성 크게 키워
“저는 아름다운 경관과 바다가 있는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이땅엔 저의 시적 감성을 키워준 아름다운 풍광이 숱하게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전 이땅에서 살고 간 이름이 없던 민초들이 돌을 켜켜이 쌓아올려 108계단의 아름다운 다랭이논을 일궈낸 고장이 고향이란 점에 형언할 수 없는 애향심과 자부를 갖습니다.

송곳을 꽂을 정도의 땅이면 어느 곳이든 씨앗을 뿌려야 했기에 민초의 땀이 서린 아름다운 다랭이논이 주는 감동은 저의 문학적 소양을 키운 값진 소재가 되었지요. 특히 남해엔 200여 유배객(流配客)이 살았습니다. 유배객 중 뛰어난 문필가가 많았습니다. 그중 남해엔 소설 <사씨남정기>와 어머니를 그리워 하며 <사친기(思親記)> 시를 쓴 서포 김만중 선생의 영향으로 문필을 즐기는 지역정서가 크게 형성된 고장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시를 중심으로 많은 글을 읽었다고 했다. 그 덕분인지 일찍부터 글쓰기 대회에서 늘 상을 탔다고 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지금껏 한국산문회 회원으로 시와 수필을 쓰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들려준 클레멘타인 노래 시심 일깨워
그는 또 말을 이었다.
“전 이런 지역의 정서 못지 않게 아버지, 어머니, 누나로부터 맑고 깨끗한 시심(詩心)을 듬뿍 받고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주말마다 어머니와 함께 저를 바닷가에 데려가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채’로 시작하는 ‘클레멘타인’이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부른 게 저의 시정(詩情)과 시혼(詩魂)을 더욱 크게 일깨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의 아명(兒名)은 ‘행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초교 입학당시 저의 이름을 ‘맑을 현’, ‘별 태’로 쓰는 정현태로 호적에 올렸습니다. 작명가는 저의 이름을 ‘현태’로 쓰면 참 좋은데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뜬다고 했답니다. 아버지는 이 말에 개의(介意)치 않았지요. 이름을 고친 게 3월. 그해 8월 작명가의 말대로 아버지는 바닷가에 나갔다가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는 물질적 유산보다 좋은 이름과 시심을 가다듬어 준 부정(父情)을 저버릴 수 없어 늘 반듯하게 살려고 애썼다고 했다.

관직의 길을 내준 어머니의 시
아버지가 돌아가신 때가 월남파병 당시라 그는 마을친구들과 얼굴에 숯가루를 바르며 전쟁놀이를 했다고 한다. 때론 선배와도 싸우기도 했는데 이 광경을 본 어머니가 그를 저녁에 불러 앉혀놓고 “아버지가 없다고 ‘호로자식’이라는 소리를 절대 들어선 안된다”는 엄한 당부의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곤 ‘백두산의 돌을 칼로 갈아 다 닳고 두만강의 물은 말이 마셔 마르니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 못한다면 누가 대장부라 칭하냐’ 라는, 조선 이조 세조 때 17세에 무과에 급제 19세에 병조판서가 된 남이장군의 시와 궁예 등 여러 사람의 기개가 담긴 시 얘기를 거듭 들려주며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사명을 일깨워 주었다고 했다.
이에 그는 관직에 뜻을 둬 청와대 국가안전보장(NSC)행정관과 도로공사 이사를 거쳐 42·43대 남해군수가 되었다.

청빈·청렴의 시로 깨끗한 군정 펴
정 군수는 군정(郡政)에 임하면서 ‘군자는 배고 백성은 물인데, 물은 능히 배를 띄우고 또 배를 거꾸로 뒤집을 수 있다’는 당태종의 언행록인 <정관정요>를 치정의 덕목으로 삼았다. 또 청빈·청렴의 뜻을 펴기 위해 연양 정종순이 지은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한칸 단한칸에 청풍에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때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라는 시를 청렴의 좌표로 새겼다고 했다.

“저의 누나는 2년 연상이었지만 학교에 같이 들어가 중학교를 같이 졸업했습니다. 누나는 어머니가 혼자 3남매를 키우기가 너무나 벅차 부득이 한일합섬에 취업을 종용, 회사가 운영하는 한일실업여고 야간부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누나는 8시간 근무에 8시간 공부하며 힘들었지요.
전 고교 2년 때 누나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엔, 누나는 공부를 하고 싶은데 책을 볼 시간이 없다며 나중에 돈을 벌면 서점을 개업해 맘껏 책을 보겠노라며 윤동주가 쓴 ‘별을 헤는 밤’이란 시를 적어 보냈습니다. 그러나 누나는 유방암으로 서점을 못낸 채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정 군수는 ‘별을 헤는 밤’을 젖어드는 목소리로 끝까지 읊으며 눈물을 훔쳤다.
그리곤 ‘저 세상에 간 누난 서점을 내서 맘껏 책을 읽고 있는지 궁금하다’며 혼자만의 독백을 토해냈다.

칭기즈칸, 극기의 시로 국민계도해 세계 제패
정 군수는 몽골 어린이는 10살이면 성인식을 치른다고 했다. 영하 40℃의 혹한에서 10살 어린이 40명씩 조를 짜 말에 태워 왕복 80km를 달리는 혹독한 승마체련을 시킨다고 했다. 돌아온 말은 내뿜는 숨으로 고드름이 달린다. 말 등은 땀으로 얼음 가죽이 된다.

말줄을 거머쥔 어린 손은 동상이 걸린다. 언 손을 눈 속에 파묻고 비비면 손이 덮혀져 피가 돈단다. 어린이가 이 힘든 수련을 마친 뒤에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며 치열한 삶의 의지와 활력을 얻는다.
정 군수는 또 칭기즈칸이 지은 극기의 시(詩)인 ‘칭기즈칸의 꿈’이란 시를 무겁고 근엄한 목소리로 끝까지 읊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중략) 배운 게 없다 힘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내 이름자를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중략)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하겠다고 말하지 마라(중략) 적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를 극복하는 순간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이 시를 듣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결기와 의욕을 느꼈다. 칭기즈칸은 이 싯귀를 가지고 몽고인의 힘을 모아 나라를 평정했다. 그리고는 세계를 제패하는 무서운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추신] 사적으로 인연이 결코 가볍지 않은 형님과 관련한 기사입니다. 수험생 여러분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