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기형도, <식목제>에 대한 감상과 이해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4. 30. 01:25

 

식목제(植木祭)

 

 

기형도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 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소리

단단히 묻어 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 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生) 속에 섞여 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이었다

한때의 헛된 집착으로도 솟는 맑은 눈물을 다스리며

아, 어느 개인 날 낯선 동네에 작은 꽃들이 피면 축복하며 지나가고

어느 궂은 날은 죽은 꽃 위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으므로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 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 두었네

흘러간다, 모든 마지막 문들은 벌판을 향해 열리는데

아, 가랑잎 한 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보느냐, 마주 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식목제(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 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기형도, 제가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그에게는 좋은 시가 많습니다. 그러나 좋은 시인이라고 늘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저에게는 <식목제>가 흔히 말하는 잘 빚어진 항아리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초보 시인의 습작 냄새가 많이 납니다. 정리되지 않은 시상이 그렇고, 남용되고 있는 수사(修辭)가 그렇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를 해설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수험생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골치 아픈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존의 참고서와 문제집 해설을 몇 개 살펴보았습니다. 평론과 논문도 살펴보았습니다. 공감하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참으로 부실합니다. 무엇보다 전체적인 해설과 지엽적인 해설이 있을 뿐, 둘을 연결하는 고리에 해당하는 해설이 부재합니다. 이런 경우가 제일 딱한 경우입니다. 문학평론가들은 마치 세부적인 내용을 다 파악한 듯이 전체적인 주제와 성격을 논합니다. 그러나 그 독법은 신뢰하기 힘듭니다. 논리는 없고 직관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직관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하더라도 정치(精緻)한 논리적 분석이 결여된 것이라면, 큰 의미를 갖기 힘든 것입니다. 저는 이런 허무한 평론이 난무하는 현실에 절망했던 사람입니다. 김수영 시 관련 평론을 읽을 때 특히 그랬습니다. 시인론 한 편을 다 읽어도 한 편의 작품도 이해가 되지 않는 평론, 그것 일종의 사기(詐欺)입니다. 세부적인 설명만 있고, 전체적인 시상 전개에 대한 분석이 결여된 설명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품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직하게 말할 때, 이 작품은 습작 수준을 크게 못 벗어난 작품이기 때문에, 거품을 제거하는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합니다. 이 때 거품이란 정제되지 않은 수사적 표현을 말합니다. 거추장스럽게 반복 또는 변주되고 있는 수사적 표현을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작업을 거쳐야만, 시인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료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식목제>입니다. 당연히 식목일 혹은 그 즈음의 일을 소재로 한 것이며, 식목 관련 행사를 식목제라고 한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은 마지막 부분에 명시된 ‘식목제의 캄캄한 밤’입니다. 식목제가 밤에 행해졌다고 보기는 어렵고, 식목제가 있었던 날의 밤에 쓴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은 식목제가 있던 날 밤에 무엇을 떠올렸을까요? 마지막 행에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떠올린 것은 여러 가지겠지만, 그 중심을 이루는 것은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입니다. ‘떨리다’와 ‘짧다’는 수식어를 등장시켰지만 대체로 남용되고 있는 수사(修辭)에 가깝고, 핵심은 그냥 ‘유년의 넋’이라고 보면 족하다고 봅니다.

 

 

이렇게 보면 되는 것이지요. 식목제가 있었던 날, 시인은 그 날 심어진 나무를 떠올리고는, 시간을 거슬러서 자신의 유년 시절을 떠올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유년을 떠올렸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이 시는 대체로 서너 토막으로 나눠 파악할 수 있는데, 첫 번째 토막을 이루는 제1-13행에서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추장스러운 수사적 표현을 걷어내고 나면,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우선 시인은 식목 행사의 결과로 심어진 나무를 생각합니다. 시인 자신이 심은 나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소리’라는 구절이 그 증거입니다.

 

 

‘낯선’이라는 시어에 주목하여 이 시행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소외감을 느끼는 대상’이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지나친 해석입니다. 그냥 쉽게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저녁에 시를 쓰고 있는 상황인데, 그 날 낮에 식목 행사가 있었고, 자신이 사는 곳 근처에 사람들이 몰려오더니 나무를 심고 갔다. 뭐 이런 정도면 족하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인근 야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시인의 거처가 그 곳이었으니까요. 실제로 그 곳에서 80년대 후반에 많은 식목 행사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물도 좀 뿌려 주고 갔겠지요. 그것을 시인은 ‘물 묻은 저녁’이라고 한 것으로 보이며, 당시 날씨도 축축하게 안개가 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소하동은 한강의 서남권 지천인 안양천 인근이기도 해서, 안개가 자주 끼는 곳입니다. 우울한 심리 상태를 보이기 딱 좋은 상황이네요. 실제로 이 시는 전반적으로 우울한 분위기입니다.

 

 

자, 그 상황에서 시인은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우선 나무를 ‘너’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나무를 두고 두 가지 상상을 합니다. 하나는 ‘너’는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초보적인 시적 수사(修辭)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둠이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올린다’는 것입니다. 역시 매우 서툰 표현입니다. 습작기 작가가 보여주는 어설픔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보이는 것은 줄기뿐이지만, 나무이니만큼 뿌리가 있는 것이고, 그 뿌리는 과거의 기억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흙속에 묻힌 과거의 기억들이 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즉, 심어진 나무는 흙속의 물기를 빨아 올려 이파리를 만드는 것인데, 마치 그것이 내가 나무를 보고 기억의 편린들을 떠올리는 것과 유사하다는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기억은 선명한 영상을 가진 것이라기보다는 형상적 측면에서 분명하지 않은 모호한 것인데, 그 점을 드러내기 위한 시적 표현 전략일까요? 시인은 우울한 분위기와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좋게 보면 그런 것이고, 아직 시적 표현을 가다듬지 못한 수준이어서 그렇다고 보는 것이 더 정직한 평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나무 바로 곁에 있는 것은 아닌 듯 보입니다.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입장인 듯합니다. 좀 길게 팔을 뻗으면 잡아 볼 수는 있는 정도의 거리에 있는 것이겠지요. 그 나무들 주변에 목책을 둘러 쳐 놓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시인에게 과거의 기억은 썩 유쾌한 것이 아니기도 하지만, 불가역적인 대상입니다. 즉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인은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흘러간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흘러간다’에서 이미 암시되었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시 시상 전개가 깔끔하지 않습니다. 두서도 없이 주절주절 그 자체입니다. 전하는 내용은 생각보다 단순한 것인데 말입니다. 당시 시인은 비교적 젊은 나이였으니, 삶의 연륜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젊은이의 정신적 방황과 고뇌를 정직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좋게 봐 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가 이 부분에서 보여주는 상념(想念)을 정리해 보면 대략 이런 것들입니다. 도대체 나는 지금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즉 어디 마음 한 자락 걸어 두는 법도 없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느냐. 절망하여 희망을 버리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죽음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 스스로 고독하게 방황했고, 그것을 온몸으로 껴안고 답을 찾아보았지만, 나는 큰 절망에 빠진 것도 아니다. 왜 그런가? 이렇게 아직 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나의 절망과 고독이 그만큼 처절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닌가? 나는 작은 결실에 기뻐하기도 하고, 또 절망적일 때는 죽음을 생각하지도 않았던가? 이런 모든 것들을 생각해 보니, 난 참 무기력하게 살아 온, 큰 결단도 못내리고 살아 온 것이 아닌가? 이런 상념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를 일종의 포즈일 뿐이라고 폄하(貶下)하는 것은 온당한 것이 아니지만,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려는 젊은이에게는 흔히 있는 정도의 상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시인은 세상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문이니 벌판이니 가랑잎이니 하는 수사적 표현은 세상은 그저 그렇게 흘러간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입니다. 좀 어설프긴 합니다만. 그리고 시인은 생각합니다. 희망도 절망도 결국은 같은 줄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그리고 생각합니다. 바람 부는 식목제의 밤, 불기둥처럼 싱싱하게 솟아오를 줄기를 생각합니다. 그것은 건강한 삶이고, 활기찬 삶이고, 밝은 삶일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저 유년 시절의 어두운 기억은 지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어두운 유년의 불안과 공포, 시적으로 표현하면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은 바로 그 때 지워질 것입니다. 그런 날이 왔으면 하고, 시인은 나무를 심은 밤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쉽게 올 것 같지는 않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