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증(物證)
오규원
아프리카 탕가니카 호(湖)에 산다는
폐어(肺魚)는 학명이 프로톱테루스 에티오피쿠스
그들은 폐를 몸에 지니고도
3억만 년 동안 양서류로 진화하지 않고
살고 있다 네 발 대신
가느다란 지느러미를 질질 끌며
물이 있으면 아가미로 숨쉬고
물이 마르면 폐로 숨을 쉬며
고생대(古生代) 말기부터 오늘까지 살아
어느 날 우리나라의 수족관에
그 모습을 불쑥 드러냈다
뻘 속에서 4년쯤 너끈히 살아 견딘다는
프로톱테루스 에티오피쿠스여 뻘 속에서
수십 년 견디는 우리는
그렇다면 30억만 년쯤 진화하지 않겠구나
깨끗하게 썩지도 못하겠구나
이게 폐어입니다.
이 시를 해설하게 된 것은 방명록 비밀글로 질문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질문에 답변하는 것보다는 시 해설을 해 주는 것이 더 유익할 것 같습니다. 지금 막 EBS 관계자들과 미팅을 했는데, 또 교육방송 지문을 해설하게 되네요.
먼저 이런 시를 보통 문명 비판 시로 분류합니다. 모더니즘 시의 한 경향인데요, 사상적으로 보면 T.W.아도르노, H.마르쿠제, W.벤야민, E.프롬, F.L.노이만 등 소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 이론을 바탕으로 한 경우가 많습니다. 오규원의 이 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학생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어려우면 이 정도로 이해해 두면 됩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현대인은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적 풍요만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문제 때문에 본질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삶은 황폐해졌습니다. 바로 이런 점을 형상화한 시를 문명 비판 시라고 한다고요.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면 이렇습니다. 경제 발전의 덕분으로 현대인은 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배추된장국이나 먹던 사람들이 햄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그렇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다른 기준으로 보면 우리가 먹는 햄은 쓰레기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온갖 화학조미료에다 방부제까지 안 좋은 첨가물 덩어리잖아요. 물론 달리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런 생각을 머리에 담아두고 ‘물증’을 감상해 봅시다.
제목이 ‘물증’입니다. 물증은 ‘심증’의 상대 개념입니다. ‘마음에 받는 인상’을 ‘심증’이라고 하고, ‘물적 증거’를 줄여 이르는 말이 ‘물증’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00의 물적 증거’로서의 ‘폐어’ 정도를 이야기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시인은 평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아마 그럴 수도 있겠어.” 정도의 생각을 한 것인데, ‘폐어’를 보고, “맞아! 내 생각이 맞았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의 전반부에 제시된 ‘폐어’의 처지를 간추려 보고, 그것을 현대인의 처지에 유추해 보는 방식으로 감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폐어의 속성 중,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바는 ‘진화하지 않음’입니다. 폐가 있음에도 양서류로 진화하지 않은 것이죠. 그 결과 뻘 속에서 4년쯤은 너끈히 견딘다고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주의할 점은 폐어에 대한 시적 형상화 방식이 반어적(=아이러니)이라는 점입니다. ‘아이러니’가 오규원 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점은 이미 여러 평자(評者)가 지적한 바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너끈히 살아 견딘다’를 표면적으로 보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화하지 못하는 ‘폐어’는, 아직도 뻘 속에서 살아가는 ‘폐어’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대상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현대인이 바로 그 폐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현대인은 좀 더 발달된 ‘폐어’라는 생각을 합니다. 폐어가 4년쯤을 견딘다면, 현대인은 수십 년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의 저변에는 뭐가 깔려 있을까요? ‘뻘’이라는 시어가 의문을 푸는 열쇠입니다. 쉽게 말하면 현대인이 삶을 영위하는 환경이 바로 ‘뻘’입니다. 온갖 공해로 가득한 삶의 환경 정도를 ‘뻘’이라고 본 것이겠지요.
쉽게 생각해 봅시다. 예전에 시골에서 살 때 정미소 굴뚝 연기도 피해야할 환경오염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서울’은 온통 매연입니다. 도시 전체가 굴뚝 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대인의 그 뻘과 같은 환경 속에서 참 잘 견디고 삽니다. 이 점에서 인간의 문명은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열심히 정말 피와 땀을 흘리면서 건설한 도시가 사실은 뻘과 같은 공간인 셈이니까요. 그리고 현대인의 거기에 참 적응하고 삽니다.(이런 진술은 역시 반어적입니다.) 도시 환경에 적응한 바퀴벌레처럼 말입니다. 어느 정도 잘 적응했냐 하면, 30억만 년 쯤은 진화하지 않고도 살 만큼 잘 적응했습니다. 그 뻘 속에서 썩지도 않을 만큼 잘 적응했습니다. 물론 잘 적응했다는 진술은 당연히 반어적인 것입니다.
결국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문명 비판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문명을 건설한 인간에 대한 비판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참된 삶이란 무엇인지, 그 방향성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 없이 진화해 온 인간에 대한 비판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많은 진화를 해왔지만, 진화의 방향과 의미에 대한 깊은 고민이 결여된 현대인과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 물증이 바로 ‘폐어’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폐어는 진화하지 않아 문제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진화했습니다. 그러나 그 진화는 진화를 하지 않은 ‘폐어’나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의 변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결여 때문이 아닐까요? 마치 좋은 음식 만든다면서, 썩은 음식 만들고, 온갖 화학조미료 넣은 음식을 만드는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처럼.
이게 뻘 속에서 사는 폐어의 모습 상상도입니다.
<학생의 질문>
ebs 교재에 오류가 있는 건지 제가 잘못 이해를 한 건지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어요. ebs 게시판에도 문의를 드렸고, 여러 블로그를 찾아다니며 해석에 대해 공부했지만 아직도 좀 석연찮은 구석이 있네요.
선생님 블로그에서는 못찾은 작품인데요. 오규원 작가의 '물증'이란 작품입니다. ebs 수능특강 교재 21쪽에 수록되어있고, 제가 궁금한건 3번 문제에 오류가 있는지에 대한 건데요.
3번문제 선택문항 4번에서는 작가가 '우리의 나태한 삶에 대한 반성이 필요함을 지적했다.'가 틀렸다고 나옵니다.
다른 선생님들 블로그를 20곳도 더 찾아다녔습니다. 시 지문을 어디까지 생각하고 어디쯤에서 끊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이 시의 마지막 부분 '수십 년 견디는 우리는 그렇다면 30억만 년쯤 진화하지 않겠구나. 깨끗하게 썩지도 못하겠구나.'를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순응적 삶에 대한 비판'이라고요.
뻘속에서의 즉 혼탁한 세상에서의 삶을 견디지 못해야 진화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뻘에 적응하고 순응함으로써 변화하지 않는 인간에 대한 비판 혹은 반성이라고 저도 이해를 했는데요.
그렇다면 변화하지 않고 순응하며 뻘 속에서 사는 것을 인간이 나태해서라고 볼 수는 없을까요?.
언어가 이래서 어려운것 같아요. a는 b다 라고 확실히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그 차원을 지나 다음 차원 혹은 다음단계에서는 또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 같아서요... ㅠㅠ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태함이라고 보면 틀리는 건가요.
포스트 읽고 글 올립니다.
먼저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깊이 있는 해설로 답변해주실 줄 예상 못했습니다. 감동했습니다.
'현대인은 진화를 거듭했다', '30억만년 진화하지 않아도 될만큼 적응했다.'는 부분에서 제가 정말 무릎을 탁 쳤네요!
현대인은 문명적으로 발전을 거듭했고,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서 진화를 계속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수많은 강사들 블로그들, ebs 해설 그 어디에서도 현대인이 '진화를 했다'고 언급한 해설은 없었습니다.
폐어는 진화하지 않고, 인간도 진화하지 않을거라는 그 둘의 유사성에만 초점을 맞추고,
문명과 진화,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엮지를 않으니
주제는 현대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삶에 대한 반성이다 라고 하면서도
도대체 현대문명이라는 뉘앙스는 어디서 풍기는 건지 설명해주지를 못하더라고요.
'깨끗하게 살지도 못하겠구나'는 영탄법이다 라고 시를 조각조각 칼질해서 나누는 해설을 듣다가
선생님 해설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이게 진짜 이해지 싶었어요.
중요한건 영탄법이 아니라 아이러니 였어요.
그래서 나태함과는 거리가 멀었군요. 문제는 방향성이나 의미는 고민하지 않은 뻘에 맞는 진화였어요.
제가 오랜시간 찾아다닌 보람이 있네요. 이제 그만 헤매고 다녀도 될 것 같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오규원님의 물증 마무리하고 다음 작품으로 마음놓고 넘어갑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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