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에 대한 단상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4. 21. 22:49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숱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 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 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딛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작품 감상>

 

 

시(詩)하면 ‘난해(難解)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난해한 것이 시의 운명일 수는 없는 법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시의 난해성과 예술성이 비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시 속에 담긴 인간애(人間愛)의 농도와 시의 예술성의 비례 관계라면 사정이 좀 다르다. 물론 시 작품 속에 담긴 인간애의 농도가 곧바로 시의 예술적 가치를 담보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좋은 작품에는 항상 뜨거운 인간애가 들어 있기 마련이다. 이 작품은 인간애와 예술성의 행복한 만남을 확인케 한다. 가난과 어머니라는 어떻게 보면 상투적인 소재로 보일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시는

무엇보다도 뜨거운 인간애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뜨거운 인간애의 중심에 ‘어머니’가 놓여 있다.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를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의 내용은 이렇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어머니와 아들은 똑같이 가난하다. 아들과 터미널 앞 설렁탕집에 들어간 가난한 노모는 아들에게 고깃국을 좀 더 먹이고 싶다. 더운 여름날 제대로 먹지도 못하여 힘들어하는 아들 걱정 때문이다. 노모는 설렁탕 집 주인에게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 설렁탕이 짜다며, 고기국물을 좀 더 줄 수 있냐고 묻는다.

 

주인이 흔쾌히 더 가져다준 설렁탕 국물을 늙으신 어머니는 주인이 안 보는 틈을 타 얼른 아들의 뚝배기에 부어준다. 애초부터 설렁탕 국물이 짰던 것이 아니다. 아들에게 고깃국을 좀 더 먹이고 싶은 가난한 노모가 그렇게 이야기했을 뿐이다. 식당 주인 역시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알기에 그대로 응했을 뿐이다. 이로 인해 아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고, 어머니 몰래 흘린 눈물을 닦는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눈물은 왜 짠가?"라고.

 

이 작품의 내용이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정이 어떻든지 간에 이 시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어머니의 진한 자식 사랑의 농도를 일깨우기에 썩 잘 어울리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무엇보다도 ‘설렁탕’이 그렇다. 소의 여러 부위를 함께 넣고 푹 끓인 국인 설렁탕이 한때는 가난한 서민들에겐 영양 많은 식사의 대명사였다. 마치 지난날 자장면이 서민들에게 제법 호사스러운 요리였던 것처럼. 설렁탕은 무엇보다도 진한 어머니의 사랑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꽤나 오랜 시간 푹 끓여야 제 맛이 나고, 진한 국물 맛이 없이는 제 맛을 내기 어렵다. 노모가 아들에게 품고 있는 사랑의 농도가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시인이 늙은 어머니에게서 느끼는 사랑의 농도는 그렇게 짙고 깊은 것이다.

 

설렁탕 국물에 넣는 소금 역시 시인이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무늬를 형상화하기에 잘 어울리는 소재이다. 시인이 노모에게서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맛에 비유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짠맛’일 것이다. 그 짠맛은 일차적으로 가난한 생활 형편 때문에 어렵게 살았을 노모의 신산한 삶의 역정을 연상시킨다. 가난한 형편에 놓인 어머니의 사랑이 부유한 형편의 어머니가 갖는 사랑보다 유별나게 더하다고 할 수는 없다. 자식 사랑은 처지와 형편에 관계없이 한결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로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가난은 어머니의 사랑을 맨얼굴의 형태로 확인케 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시인은 왜 가난한가를 묻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왜 가난한가 라는 질문은 흔히 세상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기 쉽다. 시인은 가난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다만 시인은 가난이 자신의 삶에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가난이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혈친의 사랑을 다시 확인케 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시는 현실에 대한 긍정적인 시인의 시선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시를 읽고 중년이라면 “앞산 노을 질 때까지 호미자루 벗을 삼아/화전밭 일구시고 흙에 살던 어머니/땀에 찌든 삼베적삼 기워 입고 살으시다/소쩍새 울음 따라 하늘가신 어머니/그 모습 그리워서 이 한밤을 지샙니다.”(태진아, <사모곡>)를, 신세대라면 “우연히 서랍속에 숨겨둔 당신의 일기를 봤어요./나이가 먹을수록 사는 게 자꾸 힘에 겨워지신다고/술에 취한 아버지와 다투시던 날 잠드신 줄 알았었는데/불이 꺼진 부엌에서 나는 봤어요. 혼자 울고 계신 당신을/알아요. 내 앞에선 뭐든지 할 수 있는 강한 분인걸/느껴요 하지만 당신도 마음 약한 여자라는걸.”(왁스, <어머니의 편지>)을 떠올릴 것이다.

 

이처럼 요즘 신세대가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는 어머니가 시인이 가슴 속에 담아 두고 있는 가난한 어머니와 같은 것일 수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시대가 바뀌어도 한량없는 사랑으로 자신을 감싸는 어머니가 있는 한, 결코 세상은 차갑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한 인간이 이 거친 세상에 태어나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인간으로 자랄 수 있는 데에는 어머니의 힘이 그렇게 크게 작용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아름답고 따뜻한 것은 우리 모두가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배운 인간애가 저마다의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세상살이가 힘들고 외로운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경제적인 헐벗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한없이 따뜻한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인간애가 결여된 사회라면, 그 어떤 경제적 여유도 인간의 외로움과 소외감을 달래 줄 수 없는 것이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소박하지만 소중한 깨달음을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