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신경림의 <불> 에 대한 단상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4. 16. 23:17

 

 

신경림, <불>

 

 

백중날이면 앞장을 서서 버꾸를 치고 상모를 돌리던 양조장 배달부며, 평소에는 굼뜨다가도 운동회 날 장거리달리기에서는 매번 맨 먼저 운동장으로 달려들어오던 수리 조합 급사며, 그들의 작은 토막집들을 막은 판자를 타고 오르던 보랏빛 나팔꽃이며,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물을 긷는 그 아내들의 검은 발을 적시던 아침 이슬이며……

 

나는 물이 있다고 믿었다. 땅 속을 흐르다가 문득 지각을 뚫고 솟아올라 사라진 것이나 죽은 것들을 싱그럽게 적셔 되살리는. 그러나 어떠랴.

 

뻔질나게 미장원엘 드나들어 파마라는 별명이 붙었던 양조장집 딸이며, 결혼 날짜를 받아놓고는 한밤에 동료 교사와 줄행랑을 놓던 교장의 딸이며, 꾸 꾸 꾸 안개 속에서 구렁이 소리로 울던 비둘기며, 비둘기 울음을 좇아 강물 속으로 들어간 그 에미며, 햇살을 따라 언덕으로 꿈틀 기어오르던 강 안개며……

 

이 모든 것들이 하얀 잿가루로 펄 펄 펄 공중에 날린들. 물 대신 불이 있어서, 그리운 것이며 따뜻한 것들을 깡그리 태워 없애는 불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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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최근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농무>가 보여주었던 몇 가지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있다. 첫째, 근대화의 과정에서 가장 굼뜨게 변화했던 곳의 일상 생활을 이루는 세목(細目)들이 제시되고 있다. 버꾸를 치고 상모를 돌리는 양조장 배달부나, 굼뜬 폼으로 운동회 날 장거리달리기에 달려드는 수리 조합 급사는 후미진 소읍의 삶을 대표한다. 또한 이들의 삶에는 궁기(窮氣)가 흐른다. 보랏빛 나팔꽃이 판자를 타고 기어오르는 작은 토막집과 물을 긷는 아내들의 검은 발에는 가난함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궁핍하기로 따지면 물질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파마라는 별명을 가졌던 양조장집 딸, 혼삿날을 받아놓고 동료 교사와 줄행랑을 놓은 교장의 딸로 대표되는 이들의 삶 역시, 상대적인 의미에서 물질적인 어려움은 덜 하였다손 치더라도, 커다란 서글픔을 안고 살아야 했던 점에서는 동궤에 놓이는 것이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도회지로 나갔을 것이고, 먼 곳으로부터 입소문으로 들려오는 그들의 삶 역시 "꾸 꾸 꾸 안개 속에서 구렁이 소리로 울던" 비둘기 소리만큼이나 서글픈 것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음으로 풍경을 이루는 내적 계기(契機)로서의 눈물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신경림의 시에서 울음이 중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음은 문학평론가 김현이 오래 전에 지적한 바 있다. 김현에 따르면, 신경림 시인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다. 내면화적 정적(靜的)인 울음이란 내면적인 자아 성찰의 결과로 도출된 존재론적인 자아 인식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일 것인데, 인간은 운명론적으로 슬픈 족속(族屬)이라는 인식, 바로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 있어서도 제시되고 있는 풍경에는 슬픈 이미지의 빛과 배음(背音)이 깔려 있다. 비둘기 울음 소리와 강안개의 이미지가 그 시적 표정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존재론적 성찰로부터 한 발쯤 더 나아가는 징후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물과 불이 이 시의 가장 중요한 화두(話頭)가 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선 물과 불은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대립적인 속성을 지니는 것이며,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거리를 지닌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상(想像)은 다분히 일상적인 차원에서 그럴 뿐이다. 시적인 몽상(夢想)의 차원에 이르면 때로 물은 불이 되고, 때로 물은 불이 되어 꽃으로 피어난다.

 

어두운 땅 속에 흐르는 '갇힌 물'은 죽은 물이다. 그것은 불유쾌한 죽음의 냄새와 어둠 즉 빛의 결여를 연상시킨다. 이 시에서도 물은 일차적으로 '우울하게 하는 원소'이다. 그것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도회지로부터 날아든 우울한 소식 그리고 비둘기의 구슬픈 울음을 좇아 그 에미는 강물로 뛰어든다. 그리고 그 혼(魂)은 강안개가 되어 비둘기의 몸짓으로 꿈틀꿈틀 기어오른다. 그러나 '갇힌 물'이 지각(地殼)을 뚫고 문득 솟아오르는 순간, 지상에 아니 햇살 아래 촉수를 내미는 바로 그 순간, 땅바닥에 누운 것들을 적시게 된다. 사라진 것과 죽은 것들을 싱그럽게 적셔 되살리게 된다. 그리고 물은 지상으로부터 천상으로의 비상(飛上)을 꿈꾸게 된다. 물이 지상으로부터 천상에 이르는 계단은 식물이다. 작은 토막집들의 판자를 타고 오르는 보랏빛 나팔꽃은 물이 지상에서 천상에 이르는 가느다란 통로이자 계단이다. 이를 통해 비로소 어두운 땅 속을 흐르던 물은 문득 지각(地殼)을 뚫고 비상을 이루게 된다. 물의 비상을 이루는 계단이 나팔꽃이라면, 그것은 햇살을 따라 오르는 것이 된다. 보랏빛 나팔꽃은 토막집들을 판자를 따라, 아니 햇살을 따라 언덕으로 꿈틀꿈틀 기어올라 강안개가 된다.

 

시인에게 강안개는 물이 피워낸 꽃이자, 물과 햇살(투명한 불)이 어우러진 꽃이다.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존재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후미진 곳에 피는 보랏빛 나팔꽃과 같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허술한 인생들도 알고 보면 때로 꽃을 피운다. 상모를 돌리는 양조장 배달부의 밝은 표정, 장거리달리기에 뛰어드는 수리 조합 급사의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유쾌한 몸짓, 그리고 물을 긷는 아내들이 쏟아내는 웃음은 궁핍한 삶의 틈으로 내비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큰 슬픔만큼이나 처연하게 아름답다. 담장 너머로 햇살을 찾아 얼굴을 내미는 나팔꽃처럼 그렇게 싱그럽게 되살려진 것들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들이 이룩한 꿈이란 너무나 보잘것없고 허망한 것이다. 겨우 그것은 뻔질나게 미장원을 드나들며 구워낸 파마머리에 그치는 것이고, 결혼 날짜를 받아놓고 동료교사와 줄행랑을 놓는 어설픈 낭만적 사랑 놀음 그것일 뿐이다. 그러한 허망한 꿈들은 '하얀 잿가루'와 같이 공중에 펄펄 날려 깡그리 사라져 버린다. 향일성(向日性)의 나팔꽃이 빛의 소멸과 함께 쉽게 풀이 죽어 버리는 것처럼.

 

그러나 시인의 성찰은 '삶과 죽음' 혹은 '있음과 없음'에 걸쳐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존재론적이다. 비록 인간의 모든 꿈들이, 그리운 모든 것들이, 따뜻한 모든 추억들이 깡그리 태워 없애져 버린다 해도, 아니 내 형해(形骸)조차 남기지 않고 모두 불타 없어진다 해도, 삶이 그리 허무(虛無)한 것만은 아니다. 삶이란 그 근원을 이루는 물이 아니고, 또 그것이 피워낸 꽃이 아니고, 물이 공중에 흩어지며 피워내는 꽃, 불 그 자체인 까닭이다. 이 지상에 그립고 따뜻한 모든 것들이 공중의 재가되어 사라진다해도, 그리 세상이 허무한 것만은 아니다. 인간 존재의 숙명은 그리워한다는 것이며, 그리우니까 인간인 까닭이다. 시인에 입장에서 볼 때 이 지상에 남는 것은 불, 그리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