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백석, <산곡> 전문 해설과 어휘 공부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4. 17. 05:39

 

며칠 전에 백석의 <선우사>를 읽어 보았습니다. 백석의 시 한 편을 더 읽어볼까 합니다. <산곡(山谷)>입니다.

 

 

 

돌각담에 머루송이 깜하니 익고

자갈밭에 아즈까리알이 쏟아지는

잠풍하니 볕바른 골짝이다

나는 이 골짝에서 한겨을을 날려고 집을 한 채 구하였다

 

집이 멫 집 되지 않는 골안은

모두 터앝에 김장감이 퍼지고

뜨락에 잡곡낟가리가 쌓여서

어니 세월에 뷔일 듯한 집은 뵈이지 않었다

나는 자꼬 골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골이 다한 산대 밑에 자그마한 돌능와집이 한 채 있어서

이 집 남길동 단 안주인은 겨울이면 집을 내고

산을 돌아 거리로 나려간다는 말을 하는데

해바른 마당에는 꿀벌이 스무나문 통 있었다

 

낮 기울은 날을 햇볕 장글장글한 툇마루에 걸어 앉어서

지난 여름 도락구를 타고 장진(長津)땅에 가서 꿀을 치고 돌아왔다는 이 벌들을 바라보며나는

날이 어서 추워져서 쑥국화꽃도 시들고 이 바즈런한 백성들도 다 제 집으로 들은 뒤에 이 골안으로 올 것을 생각하였다

 

「산곡(山谷)」,『朝光』 3권 10호, 1937. 10.

 

 

방언이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내용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시적 비유가 사용된 것은 아니므로, 차근차근 해독해 가면 그리 어려운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면 따라 읽어 가 보도록 하죠.

 

돌각담에 머루송이가 까맣게 익었답니다. 돌각담은 돌로 쌓은 담을 이르는 북한말입니다. 자갈밭에 아주까리 알이 쏟아진답니다. 아주까리는 피마자(蓖麻子)의 다른 말입니다. “아주까리 대에 개똥참외 달라붙듯.”이라는 관용 표현도 있는데. 생활 능력이 없는 남자가 분에 넘치게 여자를 많이 데리고 사는 경우에 비꼬는 말, 또는 연약한 과부에게 장성한 자식이 여럿 있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잔풍하니, 즉 바람도 잔잔하고 볕바른 골짜기라고 합니다. 그 골짜기에서 한 겨울을 나려고 집을 한 채 구했다고 합니다. 당시 시인은 교사였으므로, 겨울 방학 동안 깊은 산골짜기에 와서 겨울을 날 계획을 세운 모양입니다.

 

 

집이 몇 되지 않은 골짜기 안은 모두 터앝에 김장감이 펼쳐져 있고, 또 뜰에는 잡곡 낟가리가 쌓여 있습니다. 여기서 어휘 두 개 공부하고 가는 것이 좋겠군요. 먼저 ‘터앝’입니다. ‘집의 울안에 있는 작은 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텃밭’이라는 말과 뜻하는 바가 거의 비슷합니다. ‘텃밭’은 ‘집터에 딸리거나 집 가까이 있는 밭’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단어의 미세한 차이를 이해해 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뜨락’입니다. 참 말 그대로 시적인 정취가 느껴지는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뜰’의 의미로 ‘뜨락’을 쓰는 경우가 있으나 ‘뜰’만 표준어로 삼고, ‘뜨락’은 버립니다. 비표준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뜨락’을 표준어로 인정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시로 돌아갑니다. 시적 화자는 빈 집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장 빌 집은 보이지 않을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깊은 골짜기 안으로 들어 갑니다.

 

골짜기가 끝날 무렵 산 언덕 밑에 작은 ‘돌능와집’ 즉 돌 너와집이 있습니다. ‘산대(山臺)’를 어떤 의미로 이해하느냐가 좀 문제입니다. ‘산꼭대기’라고 보는 분도 있고, ‘산언덕’이라고 보는 분도 있습니다. 우선 ‘산꼭대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골짜기 끝에 산꼭대기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꼭대기 밑’이라고 해도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산언덕’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 집에 남색 끝동을 단 안주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벌을 치는 집인데, 겨울에는 집을 내놓고 비워 둔다고 합니다. 양지바른 마당에는 벌통이 20여 통이나 있습니다. 시적 화자로서는 한 겨울 머물기에 좋은 집을 찾은 셈입니다.

 

그런데 시적 화자가 당장 이 집에 머물게 되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툇마루에 걸어앉아서 하는 생각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휘 공부 하나 하고 넘어가도 좋을 것 같습니다. ‘걸어앉다’와 ‘걸터앉다’입니다. 우선 ‘걸어앉다’는 “높은 곳에 궁둥이를 붙이고 두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다.”라는 뜻입니다. 줄여서 ‘걸앉다’라고도 합니다. 다음 ‘걸터앉다’는 “ 어떤 물체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 걸치고 앉다.”라는 뜻입니다. 미묘한 의미 차이가 어휘 공부의 재미를 더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장글장글하다’는 “바람이 없는 날에 해가 살을 지질 듯이 조금 따갑게 끊임없이 내리쬐다.”라는 뜻의 북한어입니다. 다시 시로 돌아 갑니다. 그리고 시적 화자는 지난여름 트럭을 타고 장진(함경도 함흥 지명입니다) 땅에 가서 꿀을 치고 돌아왔다는 벌(에고, 이 시는 도서출판 좋은 책의 제8차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인데, 오타가 있네요. ‘벌’을 ‘별’로 해 놓았네요. 제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주식회사 좋은책의 자습서입니다. 교과서는 제대로 되어 있고, 자습서만 오타이기를 바랄 뿐입니다.)을 보며, 어서 겨울이 오기를 바라고 있네요. 그러면 자신이 이 골 안으로 올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벌을 ‘부지런한 백성’으로 비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를 두고 두 가지 평가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쑥국화꽃이 핀 이 골짜기는 산과 산 사이에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 움푹 파인 공간이다. 그만큼 골짜기는 아늑하고 햇볕이 따사로운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겨울의 골짜기 이미지는 여자의 자궁 이미지와도 통한다. 기가 응축된 곳이자 근원적인 삶의 자리인 자궁의 이미지는 신령스러운 힘의 저장처일 수 있다. 시인은 함경도의 매서운 겨울 추위를 날 방도를 찾아 이 자궁의 이미지를 지닌 골짜기까지 들어온 것이다. 자궁은 신령스러운 힘의 저장처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아기를 내 보내는 역할을 한다. 이런 자궁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골짜기는 시인에게 휴식을 주고 겨울잠(동면)을 자게 하며 힘든 노동으로부터 숨을 고르고 힘을 기르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 자궁으로의 귀환은 태아 시절로의 퇴행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골짜기로 와서 겨울나기를 꿈꾸는 시인의 모습에서도 현실 도피적인 흔적을 찾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시인은 긴 동면의 시간 속에서 다시 힘을 길러 달동물처럼, 초생달처럼 찾아올 봄의 재생과 부활을 꿈꿀 것이다.”

 

 

그러나 저는 좀 더 단순하게 해석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시가 발표된 것이 1937년입니다. 세상을 좀 피해서 글이나 좀 쓸까, 하는 생각에 산 골짜기 집을 찾아 본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거의 일기에 가까운 분위기로 가볍게 시 한편을 쓴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게 심각한 시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너와집-

 

* 제가 10년 정도 전에 쓴 글인데, 잊고 있었는데 백석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하니 이런 일도 있네요. 제가 쓰고 잃어버린 글을 인터넷에서 찾았네요. 여기 참고용으로 저장해 둡니다. 제 글의 마지막 부분 모더니즘 운운에 대해서는 생각이 바뀌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지금의 생각과 일치하네요. 아래 글은 사실 즉석에서 1시간도 안 되는 시간에 쓴 것입니다. 블랙박스 자습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즉석에서 써 달라는 요청에 따라 쓴 것이거든요. 사실 제 스타일이 자료 검토나 생각은 정말 느긋하게 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써 버립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머릿속에서 다 쓰고, 글을 쓸 때는 그것을 옮기는 수준이지요. 부분적으로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긴 한데, 일단 그냥 여기 옮겨다 놓습니다.

 

*** 여승 (女僧)
                           -  백 석  -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사슴>(1936) -

- 해 설

  [개관정리]

◆ 성격 : 서사적, 애상적, 회상적, 감각적, 사실적
◆ 표현 : 소설의 플롯처럼 역순행적 구성을 취함.(시간 순서에 따른 재구성 : 2연→3연→4연→1연)
             적절한 비유와 압축으로 시에서의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보여줌.
             토속적 소재 및 감각적 어휘 구사
             차가운 청색의 색채 이미지 (파리한 여인, 가을밤같이 차게, 도라지꽃)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가지취 → 취나물(산나물)의 일종.
    *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 속세를 떠난 지가 오래 되었음을 나타냄.(후각적 심상)
    * 옛날같이 늙었다 → 지난날의 고생과 번민을 회상해보며, 지친 삶 속에 찌들린 처절한 모습을 현재의 늙음으로 유추해서 표현하고 있다.
    *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 불가에 귀의한 여인이건만, 아직도 번뇌와 고민으로 얼룩져 있는 모습을 보고 시적 자아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지 서럽게 여겨진다고 말함.
    * 금전판 → 금광
    * 여인은 ~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 여인의 한스러움을 상징
    *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 섶벌(재래종 일벌)같이 일터를 찾아나간 남편
    * 도라지 꽃이 좋아 → 도라지 꽃은 청색(청보라색)으로, 죽음의 차가운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한 것.
    *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 → 여인이 서럽게 운 슬픈 날.
                                                '산꿩'은 여인의 감정 이입의 대상임.
    *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같이 떨어진 날 → 삭발을 하며 서럽고 한많은 삶을 처절하게 느꼈을 날.
    * 산꿩의 울음, 머리오리가 떨어짐 → 여인의 울음과 눈물을 이와 같이 객관화시킴으로써, 한과 슬픔의 초월을 나타냄.
    * 머리오리 → 머리카락의 가늘고 긴 가락
◆ 주제 : 여승의 비극적인 삶의 사실적 표현
             (일제의 수탈과 가족 공동체의 붕괴)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여승과 자아의 재회
◆ 2연 : 여인과 자아의 첫 만남
◆ 3연 : 지아비의 가출과 어린 딸의 죽음(여인의 비극적인 삶)
◆ 4연 : 여인이 출가하던 날(머리를 삭발하던 날)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일제 강점기 어려운 삶을 살았던 한 여인의 일생을 축약하여 보여주고 있는 시이다. 특히 시이면서도 소설적 구성, 인물의 전형성,  상황의 전형성을 확보함으로써 시에서의 리얼리즘(사실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시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 시는 한 여자의 일생을 제시하는데 즉, 지아비와 지어미 그리고 딸아이로 구성된 한 가족이 있었다. 그들은 원래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농삿일로 생계를 꾸릴 수 없어서 지아비는 집을 나가 광부가 되고, 아내는 십년을 기다리다가 남편을 찾아 집을 떠나서는 금점판 등을 떠돌며 옥수수 행상을 하면서 남편을 찾았을 것이다. 이런 고생을 못이겨 딸은 투정을 부리고, 그 어미는 마음 속으로 울면서 어린 딸을 때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딸이 죽어 돌무덤에 묻히자, 그 여인은 삭발을 하고 가지취와 불경을 만지면서 여생을 보내는 여승이 된 것이다.

이렇게 재구성할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이 시는 농촌의 몰락을 중심으로 하는 일제 강점기의 민족 현실을 전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섶벌같이 훌쩍 떠나갈 수밖에 없는 민족의 현실', 그리고 그를 찾아 금점판을 헤맬 수밖에 없는 또다른 우리 민족의 삶, 배고파 투정하는 어린 아이를 때릴 수밖에 없는 어미의 모습, 끝내 도라지꽃을 좋아하여 돌무덤으로 간 딸의 죽음, 눈물방울같이 떨어지는 머리오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여인의 서러움, 이러한 형상화를 통해서  그 당시의 사회 현실을 사실적으로 반영하는 리얼리즘시의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가족 공동체마저 철저히 파괴해 버린 식민지 현실과 민중들의 고난은 백석의 시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유년의 체험과 공동체적 향수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으로, 가족 사이의 유대와 사람과 사물 사이의 친화 관계가 완전히 해체된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해체는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의 경과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힘, 즉 일제의 식민지 지배라는 파행적 역사 과정의 소산이다.

[더 읽을거리] : 하희정, <여승>의 주제에 대하여

이 시는 1936년 발표된 시집 『사슴』에 수록된 작품이다. 발표 당시에도 여러 평자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 작품에 대한 관심이 집중된 시기는 아무래도 1980년대 중반 이후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백석은 해방 이후 고향인 북한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른바 재북시인인 셈이다. 한국 전쟁 이후 이런 사정 때문에 백석의 시는 이른바 월북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 이전까지는 이념적 억압에 따른 금기의 대상이었다. 그러다가 이용악, 오장환 등의 작품과 함께 해금조치를 받게 되는 1980년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교적 자유롭게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면 <여승>의 주제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몇 가지 입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일제의 수탈과 이로 인한 가족 공동체의 파괴를 보여 준 민중적 리얼리즘 시의 전형으로 평가하는 관점이 있다. 그럴 듯한 해석으로 보이지만, 실은 별 근거가 없다. 이런 주제 파악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을 민중(억압받는 계급)의 삶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인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인이 여인을 통해 당시 민중의 삶을 보여 주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여인이 고달픈 삶을 산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인의 의식이 민중적 정서로 발전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이르면 부정적인 견해가 제출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여인은 끝내 머리를 깎고 출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삶의 고뇌를 사회적 문제 해결 방식에 따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속세를 저버리는 방식으로 해결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여인의 의식과 민중 의식을 연결시키는 것은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또 이 작품에 일제의 지배를 암시하는 구절이 등장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발표 시기를 감안할 때 이 작품이 일제하의 현실을 암시하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 여인에게 직접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른바 황금광과 관련된 것일 뿐이다. 여인의 남편은 당시의 유행에 혹하여 금점판으로 떠난 것이고, 그로 인해 여인의 삶은 우여곡절을 겪는 것일 뿐이다.

요컨대 시인은 한 여인의 비애 그 자체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지, 그 비애를 야기한 사회적 현실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일제하라고 하더라도 민족의 삶을 사회적 관점에서 조명한 작품만이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는 좁은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예술이 포괄하는 영역은 그보다 훨씬 더 넓고 깊다.

다음으로 이 작품을 두고 종교적 승화 운운하는 입장이 있다. 작품 속의 여인이 불가에 귀의하는 것을 두고, 삶의 비애를 종교적으로 승화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역시 이 작품에 대한 오해의 하나일 뿐이다. 이 작품의 주제를 종교적 승화 쪽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라면, 종교에 귀의하는 과정에서 번민하는 여인의 내면이 시의 중심 내용을 이루거나, 종교에 입문한 결과로 심적인 평정심을 얻게 되었다는 정도의 내용이 시의 중심 내용이어야 한다. 그러나 시적 화자의 눈에 비친 여인의 모습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여승이 된 이후에도 그녀의 낯빛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쓸쓸함이 흐르고 있다. 시적 화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스님으로서의 여인이 아니라 여인의 고독한 내면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진정한 주제는 무엇인가? 생산적인 시 감상이란 소재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을 사회적 구조로 귀결시키는 환원적인 해석의 과정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면서 작품을 감상해야만 한다. 시인이 시적 대상으로부터 느낀 감정이 무엇인가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서정 문학 양식의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올바른 길이다. 시적 대상으로부터 받은 시인의 정서는 첫연에 집약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우선 제1행은 시적 감정을 유발하는 시적 대상의 제시에 해당한다. 합장을 하고 절을 하는 한 여인을 만난 것이다. 그 여인으로부터 어떤 감정이 유발되고 있는가? '가지취 내음새'가 시적인 답이다(참고로 백석의 시 세계에서 후각적 심상은 시적 대상을 형상화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이다). 그 이후에 서술되는 내용들은 이 지배적 인상에 대한 구체화 과정이면서 동시에 변주에 해당한다. 즉 제1∼2행의 내용을 변주하여 다시 제시한 것이 제3∼4행이다. 쓸쓸한 낯빛의늙은 여승을 만났는데, 시적 화자 역시 마음이 동하는 것을 체험했다는 것이다. 한 여인의 비애를 머금은 듯한 모습에서 느끼는 감정의 미묘한 파문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주제는 여기에서 찾아져야 마땅하다.

물론 이어지는 시의 내용들은 쓸쓸한 내면을 갖게 된 내력을 이야기 형식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시적 정서의 핵심은 일관성 있게 유지된다. 제2연에서는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로, 제4연에서도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로 이어지면서, 여인의 서러운 삶과 비애 어린 내면이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인 백석은 한 여인의 운명과 그로 인한 삶의 비애를 보여주고자 한 것인데, 이러한 시적 경향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매우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의 시의 주된 대상이 되는 여인상은 늘 내력이 있는 비애의 여인상이었고, 이 작품 역시 그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저런 사회적 원인에 의한 고독이 아니라, 인간의 본원적인 고독을 노래하고자 한 것인데, 큰 틀에서 볼 때 이러한 시적 경향은 리얼리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모더니즘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