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김소월 <그를 꿈꾼 밤> -호리지차가 현격한 거리를 낳는다

국어의 시작과 끝 2011. 4. 20. 18:57

 

 

호리(豪釐)의 차이가 천 리의 현격한 거리를 낳는다.

 

<몽계필담>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구양수(歐陽修)가 한 떨기 모란꽃 아래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그림을 얻었다. 잘된 그림인지 어떤지를 알 수 없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그 사람은 그림을 가만히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꽃이 활짝 피고 색이 말라 있는 걸 보니 이것은 해가 중천에 있을 때의 모란이다. 고양이 눈의 검은 눈동자가 실낱같이 가느니 이 또한 정오의 고양이 눈이다.” 사이비(似而非)가 아니고 진짜였던 것이다. 예술의 진가는 이렇게 알아보는 안목 앞에서만 빛나는 법이다.

반대의 예도 있다. <어우야담>에 나오는 이야기다. 옛날 그림으로 묘필이라 일컫는 것이 있었다. 늙은이가 손자를 안고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이는 모습을 그렸는데, 신채가 살아 있는 듯하였다. 세종대왕께서 이를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그림이 비록 좋긴 하다만, 무릇 사람이란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일 때는 반드시 그 입이 절로 벌어지는 법인데, 이는 다물고 있으니 크게 실격이 된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마침내 버린 그림이 되었다.

 

요컨대, 호리(豪釐)의 차이가 천 리의 현격한 거리를 낳는다.

 

노량진 남부행정고시학원에서의 2011년 4월 7일 국가직 9급 시험을 이틀 앞 둔 수업 풍경이다. 물론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2012년 합격을 목표로 이제 막 수험 생활을 시작한 학생들이다.

 

‘일시 : 2011.4.1.’이 옳을까? / ‘일시 : 2011.4.1’이 옳을까?

 

점 하나 차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물론 전자가 옳다. 좀 치사하지만 바로 이 차이를 묻는 문제가 나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온점 하나가 있고 없고가 그리 중요할까? 물론 천양지차(天壤之差)다. 만약 어떤 계약서에서 ‘1’ 다음에 임의로 ‘0’ 하나를 추가해 버린다고 생각해 보라. 엄청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이 문제가 출제되었다. 내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은 100% 정답. 불문가지(不問可知)한 일이다. 이 문제 풀면서 내 얼굴이 떠올라서 속으로 웃었단다. 맹자의 군자삼락을 들먹일 것도 없이,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보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앞으로 1년간 내 강의만 듣겠다는 팬도 생겼다.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진다. 수험생 하나하나에게는 한 치의 과장도 없이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시쳇말로 목숨 걸고 강의 준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2011 국가직 9급 국어 문제>

 

문 16. 다음 글을 공문서 작성 관련 규정에 맞게 수정하고자 할 때 옳지 않은 것은?

 

수신자 ○○구청장

제목 자전거 행진 행사 개최

2011년 봄을 맞이하여 아래와 같이 자전거 행진 행사를 개최하고자 하오니, 주민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홍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래-

1. 행사 목적

(가) 주민의 건강 증진

(나) 에너지 절약 Campaign

 

2. 행사 일시 및 장소

(가) 일시: 2011. 4. 9.

(나) 장소: 세종로(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앞)

3. 행사 주요 내용

(가) 격려사

(나) 자전거 타기 선언문 낭독

붙임 행사 세부 계획서 1부. 끝.

 

① ‘Campaign’을 ‘홍보’로 표기한다.

② ‘(가)’, ‘(나)’를 둘째 항목 기호인 ‘가.’, ‘나.’로 표기한다.

③ ‘일시’에 ‘13:30~15:30’과 같은 표기 방식으로 시간을 추가한다.

④ 한글맞춤법 및 사무관리규정에 따라 ‘2011. 4. 9.’을 ‘2011. 4. 9’로 고친다.

 

오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 블로그의 방명록에 올라온 경북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 중이신 선생님의 질문에 답변을 하기 위해서이다. 재직학교나 실명(實名)은 모르겠다. 그래도 반갑다. 질문은 며칠 전의 일인데, 답변이 늦어졌다. 서재에 해당 도서가 없고, 압구정동의 수능 학원에 책을 놓고 와 버렸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주중에는 노량진에서 공무원 국어 강의를 하고, 주말에는 압구정동의 국어논술전문학원에서 소수 정원의 학생을 상대로 수능 내신 강의를 한다. 법 규정 다 지키면서 비교적 저렴하게(?). 동시에 두 군데서 강의하는 것이 약간 힘들긴 하지만, 상호보완적인 면이 더 많다. 특히 교재 집필에는 최상의 조건이다. 작년까지 교과서를 집필했는데, 올해는 새 교과서를 전반적으로 검토할 수 있게 된 것도 다 이런 여건 때문이다. 당분간 이렇게 할 생각이다.

 

 

질문은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에 지문으로 제시된 김소월의 <그를 꿈꾼 밤>과 관련된 문제이다. 먼저 작품을 제시한다.

 

야밤중, 불빛이 발갛게

어렴풋이 보여라.

 

들리는 듯, 마는 듯

발자국 소리.

스러져 가는 발자국 소리.

 

아무리 혼자 누워 몸을 뒤채도

잃어버린 잠은 다시 안 와라.

 

야밤중, 불빛이 발갛게

어렴풋이 보여라.

-김소월, <그를 꿈꾼 밤>

 

소품(小品)에 해당한다. EBS 교재 비판하는 일은 그만 둘 생각이지만 또 다시 할 수밖에 없다. 제1연에서 원작품과 달리 ‘,’를 빼먹었다.

 

야밤중 불빛이 발갛게

어렴풋이 보여라.

 

수미상관의 구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작은 차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문제이다. 이를 내가 몇 주 전에 지적했는데도, EBS는 꿀 먹은 벙어리다. 사소한 문제라고 보는 것일까, 아니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무지한 것일까? 무식하면 열정이라도 있어야 하고, 열정이 없으면 고분고분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이도저도 아닌 것 같다. 무식한데 자존심만 세니, 뭔 말을 해줘도 소용이 없다. 애당초 내가 상대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겠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선생님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질문을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선생님..^^저는 고3교실에서 EBS언어영역 교재로 수업하고 있는 현직교사입니다. 교직 경력이 매우 짧답니다. 그런데 작년에도 그렇지만 올해도 역시 EBS교재나 강의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 혼자 답답해하던 차였답니다.

긴 이야기는 생략하고요. 올해 현대시 지문중에서요. 김소월의 '그를 꿈꾼 밤' 말입니다. 그것과 관련한 교재 25쪽 7번 문제 말입니다. 저는 그 문제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겁니다. 강사의 강의를 들어봤는데 역시 문제에 해설을 맞추더군요. 마치 문제를 보고 해석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비몽사몽' 몽롱하여..이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거든요. 역시 제가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아이들에게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일까요? 답답하여 경력 많으신 동료 선생님께도 여쭈었으나 명쾌한 대답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선생님께 긴 글로 여쭙니다. 죄송합니다. 메일 주소를 알 수 없어서요.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의 핵심은 ‘비몽사몽(非夢似夢)’이라는 말로 집약될 수 있다. 즉 이 시의 시적 화자의 상태를 비몽사몽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옳은가의 문제이다. 먼저 그럼 교육방송 교재가 이 시의 시적 화자가 처한 상황을 ‘비몽사몽’으로 규정한 것일까? 그러면 7번 문제의 답지를 보자.

 

①1연 : ‘어렴풋이’는 잠이 덜 깬 비몽사몽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로군.

②2연 : ‘들리는 듯, 마는 듯’이라는 표현은 몽롱하여 지각이 불분명함을 나타낸 것이군.

③3연 : ‘스러져 가는’이라는 표현은 ‘그’일 것이라는 기대가 사라짐을 표현한 것이로군.

④4연 : ‘혼자 누워 몸을 뒤채도’는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다시 잠들지 못하는 상황을 나타낸 것이로군.

⑤5연 : ‘야밤중’은 ‘그’가 화자를 찾아오기에 적절한 시간적 배경을 나타낸 것이로군.

-수능특강 언어영역 25쪽

 

맞는다. 분명히 교재에서는 시적 화자의 상태를 ‘비몽사몽’ 또는 ‘몽롱’으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비몽사몽’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일까?

 

비몽사몽(非夢似夢) : 완전히 잠이 들지도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어렴풋한 상태.

 

문제는 ‘혼자 누워 몸을 뒤채’는 상황, 즉 전전반측(輾轉反側)하는 상황을 ‘비몽사몽’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쉽게 판별하기 어려운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호리(毫釐)의 차이가 문제인 상황이다. 49:51로 판별될 것 같다. 나로서는 질문하신 선생님 편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지는 시구에서 ‘잃어버린 잠은 다시 안 와라’라고 하기 있기 때문이다. 잠을 깼고, 다시 잠이 안 온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렴풋이’는 시적 화자의 내적 상태보다는 객관적 상황이 그렇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야밤중 불빛’이 흐릿했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차이가 중요할까? 물론 중요하다.

 

자,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고, 제목처럼 꿈에 그를 봤다. 그리고 잠을 깼는데, 다시 잠이 안 온다. 정신이 몽롱해서 문제일까, 자꾸만 맨 정신이 들면서 잠이 안 오는 것이 문제일까?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후자여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내 불만은 다른 것에 있다. 먼저 답지의  ‘2연’은 ‘제2연’으로 고쳐야 한다. 양의 문제가 아니라 순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문적으로 말하면 서수사를 써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문제는 사소한 것이라고 치고, ‘스러져 가는’의 해석 문제는 좀 다르다. 교재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 ‘스러져 가는’이라는 표현은 사라져 없어지는 상태를 의미하므로-”

 

그런데 ‘스러지다’와 ‘사라지다’는 다른 말이다.

 

스러지다 : 형체나 현상 따위가 차차 희미해지면서 없어지다.

사라지다 : 현상이나 물체의 자취 따위가 없어지다.

 

집필자는 이 둘의 차이를 알고 썼을까? 의문이다.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다.

 

그리고 교재의 작품 해설도 불만이다. 이렇게 되어 있다.

 

“한밤중에 잠에서 깬 화자가 비몽사몽간에 겪는 상황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집필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깬’ 화자가 ‘비몽사몽’이라고 해 버리면 개념이 부딪친다. 이 경우라면 “한밤중에 잠에서 설깬 화자가 비몽사몽간에 겪는 상황을 형상화하고 있다.”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우리말에는 ‘깨다’라는 말이 있고, 또 ‘설깨다’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어설픈 개념 사용의 문제는 다음 문장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윽고 다시 잠을 깬 상황을 반복하여 제시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어렴풋한 그리움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런 이상한 설명이 도출된 것은 집필자의 감상 능력 문제 때문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문장력 부족 때문이다. 문장력이 부족하여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는 문장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결과만 놓고 보면 오독(誤讀)이 되고 말았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이 작품은 ‘다시 잠을 깬 상황을 반복하여 제시’한 것이 아니다. ‘잠을 깬 상황’을 제시한 것이지 ‘다시 잠을 깬’ 상황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당연히 반복적으로 제시한 것도 아니다. 또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는 주장은 수긍할 수 있더라도, ‘어렴풋한 그리움’이라는 말은 수긍할 수가 없다. 혹시 집필자가 이 글을 본다면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초등학생 수준의 작문에서 보이는 어설픔이 느껴진다. 안타까운 일이다. 좀 심한 말이겠지만, 수능특강 언어영역이 보여주는 문장력의 수준으로는 대입 논술에서 다 낙방한다. 비문이 발에 치일 정도로 많다.

 

여기 한 가지 더 첨언한다.

전에 이재무 시인의 <위대한 식사>라는 시와 관련된 글을 올렸다. 그 시의 주제로 교육방송 교재가 제시한 것은 다음과 같다.

 

주제 : 자연과 음식(인간)이 통합되었던 시절에 대한 향수

 

 

도무지 너무 심오(深奧)하여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솔직히 말하면 3류 문학평론집에서 자주 봤던 것 같은 문장이다. 모르겠다. 내가 학식이 깊지 못한 것이라고 해 두고 말겠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위의 문장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해당 시인에게 보여줬더니 하시는 말씀, 저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란다. 그러니 학식이 깊지 못한 내가 모르는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가 아닐까?